[2022 더 왼쪽으로] 직접민주주의로 가자
① 주권자가 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상한 민주주의가 있다
② 정치는 꼭 누가 대신해줘야만 하는 걸까?
지난 5월 더불어민주당 내에선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하려는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총대를 멨다. 대선 모드가 본격화되기 전에 처리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고무적이었다. 그런데 법안에 함께 이름을 올릴 동료 의원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의원실 관계자들이 열심히 움직였지만, 동의자 열댓 명을 모으는 데 그쳤고 폐지안 발의는 미뤄졌다. 같은 달 국민 10만 명의 동의로 국민동의청원이 성사됐고, 민 의원은 이 청원을 등에 업어 지난 10월 폐지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국민 10만 명이 동의했음에도 발의에 참여한 의원은 고작 21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임위 논의는커녕 당내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고, 연내 처리는 사실상 무산된 상태다.
“국보법 폐지 필요성에는 민주당 의원들 대부분이 동의해요. 그런데 서명해달라고 하면 ‘죄송하다’, ‘우리는 빼달라’고 해요. 재선하고 3선도 해야 되는데, 법안에 동의하면 선거 때 표 떨어진다는 거죠.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는 보수 쪽에서 안보 위협 세력이라고 낙인찍고 공격하는 게 두려운 거예요.”
국보법 폐지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 민주당 관계자의 말이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더라도 과대대표된 일부 극우 세력들의 공격과 이로 인해 표심을 잃을까 걱정하는 국회의원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입법을 가로막고 있다.
국보법 폐지안에 이어 지난 6월 10만 국민동의청원 성립으로 국회에 올라간 차별금지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달 9일 국가보안법 폐지안과 차별금지법 심사 기한을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했다. 심사 연기 안건이 올라온 지 43초 만에 아무런 이견 없이 처리됐다. 73년 동안 민주주의를 압살해온 악법과 14년 동안 주권자들이 염원해온 법안이 대리인에 의해 내팽개쳐지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43초에 불과했다.
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국민동의청원으로 올라간 법안 심사 기한 마지막 날인 11월 10일에 맞춰 부산에서 출발해 국회에 도착하는 계획으로, 30일 동안 500km 강행군을 했다. 돌아온 국회의 대답은 ‘아직 안된다’였다.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지 걱정을 하다가 막상 되니 너무 놀랐고 기뻤어요. ‘이제 정말 14년 기다린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10만 국민들이 동의했는데 설마 국회의원들이 무시할까?’, ‘어떤 답변이라도 내놓겠지’ 하는 기대감이 컸는데, 활동가들의 도보행진 마지막 날 국회가 심사를 연기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14년 동안 미뤘는데 또 미루겠다고?’ 하는 허탈한 감정이 들었어요.”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 중인 한국여성민우회 나래 활동가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울분을 삼켰다. 함께 농성하는 장애여성공감 여름 활동가는 “국민의 힘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영역임을 확인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은 법안 심사 연기 소식이 전해진 직후 성명을 내 “국민의 엄중한 의사를 가볍게 능멸하는 행태이자, 국회의 심각한 직무유기다. 이럴 것이라면 애당초 ‘10만 국민동의청원’이라는 제도가 왜 있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지적했다.
일하다 죽는 사람이 많으니 사람 살리는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해도 국회는 귓등으로 듣는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의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도록 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이야기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야간에 혼자 작업을 하다가 석탄 이송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청원한 중대재해법은 작년 9월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에 회부되긴 했다. 국회는 여론에 떠밀려 법안을 논의했으나, 수정된 법안이 발의되고 수차례 심사를 거치면서 누더기가 됐다. 결국 산업재해로부터 가장 취약한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고,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 수위도 낮아졌다. 법안에 반대하는 재계의 강한 입김 때문이었다. 반면 입법청원 당사자이자 산재 사망 노동자의 유족인 김미숙 씨는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다.
국민을 대신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정작 국민의 생존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담고 여론을 압도하는 법안마저 휴지통에 구겨 넣음으로써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형해화하는 형국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대다수가 스스로 기득권임과 동시에 기득권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 입법 권한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맥과 혈맥, 학맥을 이용해 입법 권력에 접근해 입법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손쉽게 쟁취할 수 있는 재계 등 기득권층과 달리, 일반 국민들로선 사회적 열망을 담아 10만 청원을 성사시키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다.
통계가 잘 보여준다. 20대 국회에서 입법청원(국민동의청원+의원소개)이 이뤄진 법안은 207건인데, 이 중 채택된 건 고작 4건이다. 166건이 임기만료 등으로 폐기됐고, 37건은 상임위에서 부결됐다. 21대 국회(2020년 4월부터 현재까지)에서는 입법청원이 이뤄진 69건 중 단 한 건도 채택되지 않은 상태다. 60건이 상임위에 계류돼 있으며, 9건은 상임위에서 부결됐다. 이들 법안 중 거대 양당의 당론으로 채택된 법안은 단 한 건도 없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실 보좌관은 “입법청원 형식으로 올라온 법안들은 대개 논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보면 된다. 의원소개를 통한 청원은 소개한 의원 정도가 관심이 있고 국민동의청원은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며 “우리 의원만 하더라도 청원으로 뭐가 올라왔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동의청원 제도의 무용성을 실감한 나래 활동가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가 허락한 영역 안에서 기회를 주겠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허탈해했다.
주인이 대리인의 허락을 받는 주객전도다.
타협과 절충의 함정
위에서 열거한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국민이 투표로 대리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의 정치 제도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국회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입법 권한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국민이 직접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다.
그래서 필요한 게 국민발안권과 국민거부권이다. 선출된 대리인이 머뭇거릴 때 페달을 밟도록 하는 것이 국민발안권이고, 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할 때 국민들이 멈출 수 있도록 하는 게 국민거부권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활발한 스위스에서는 국민거부권을 자동차의 제동장치에, 국민발안권을 가속장치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선거제도를 개혁해 국회의원의 비례성을 높이고 계급·계층별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정치권에서 기득권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거대 양당이 변화된 선거제도마저 기존의 양당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여지는 충분하다. 이는 지난 총선에서의 위성정당 사태에서도 확인됐다. 거대 양당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제도 개혁으로 소수정당이 과거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더라도, 의석을 과점하는 거대 양당이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고, 소수정당은 타협을 강요받는 일이 다반사일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소수정당 역시 기성정치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선거제도 개혁으로 의회 구성을 다양화하는 것으로만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한다고 했을 때, 안고 가야 할 위험도 상당하다.
민주노동당 의원과 통합진보당 대표를 지냈던 이정희 국민입법센터 대표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이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과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작년 5월 국민입법센터를 만들면서 낸 책 ‘국민입법제를 도입하자’에서 “직접민주주의 제도에서 정당이 시민사회 및 관련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국민발안권과 국민거부권을 활용하면, 주권자의 정당 참여도 활발해진다”며 “특히 대의기관 안에서 높은 장벽에 부딪히는 소수정당에게 직접민주주의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정당이 강화될 중요한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정당은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적 의견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모여 활동하며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조직이어야 한다”며 “정당정치의 가장 중요한 측면도 정당이 주권자의 정치적 의사 형성과 조직적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직접민주주의가 타협과 절충이라는 정당정치의 원칙을 훼손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는 곧 ‘인민 독재’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 이 대표는 “국민발안을 제기한 발안자들은 국회의 단일 대안을 내기 위한 정당 간 타협과 절충을 받아들일 수 있고, 실제로 이런 경우도 많다”며 “정당 간 타협의 결과 국회가 원안에 크게 부족한 대안을 의결할 때 발안자들은 그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원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국민 모두와 더 토론할 기회를 갖고, 공감 정도에 따라 나오는 결론을 받아들이면 된다. 국민을 대신하겠다는 정당 간 타협과 절충이 국민을 실망시킬 때 국민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해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타협과 절충이 아니라, ‘인민의 자기 지배’”라는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4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돼야 한다’는 이유보다 ‘누가 돼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유독 넘쳐나는 요즘이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 등으로 평가절하 된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민중의소리는 이번 대선이 한국 사회가 더 진보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2022 더 왼쪽으로’는 대선에서 주목할 만한 진보적 대안을 조명해보는 기획이다. 연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독자들에게 전할 의제와 주장에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린다.
두번째 기획으로 ‘직접민주주의로 가자’ 시리즈를 2개의 기사로 보도한다.
① 주권자가 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상한 민주주의가 있다
② 정치는 꼭 누가 대신해줘야만 하는 걸까?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