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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20:13l최종 업데이트 21.12.11 20:13l
백령, 하얀(白) 날개(翎)라는 뜻이다. 서해최북단의 섬 이름이다. 섬의 모습이 마치 두루미 날개와 비슷해 붙여졌다고 한다. 인천광역시사(2002)에 따르면 섬의 서북쪽인 두무진은 머리와 주둥이를, 가을리와 북포리 등은 바른쪽 날개를, 남쪽의 연화리, 남포리는 왼쪽 날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늘을 날 도리가 없어 그 진위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배가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섬의 자태는 과연 신비하고 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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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의 기암괴석 백령도의 해안선을 둘러싸고 있는 기암괴석들. 돌맹이 하나에도 사연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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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툭 하면 해무나 풍랑이 길을 막는다. 요행히 날이 좋아 바다가 열려도 뱃길만 4시간 넘게 걸린다. 자동차까지 실어나르는 큰 배지만 높은 파도를 만나면 속수무책이다. 비위 약한 사람은 곧잘 속을 내보인다. 섬은 우리나라에서 15번째로 크다. 민간인 인구는 5천여 명. 그 수를 정확히 모르는 군인들도 함께 그 섬에 산다. 공산품을 제외하면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전엔 도축시설도 있었는데, 지하수 오염 문제로 몇 년 전 폐쇄됐다.
이야기가 가득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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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삭의 어미 아이를 밴 어미가 하염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지아비를 기다리다 돌이 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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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곳곳에 곡절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효녀 심청의 전설은 대표적이다. 아비를 위해 몸을 던진 바다는 백령과 황해도 사이에 있는 물살 거세기로 유명한 인당수다. 연꽃을 타고 떠올랐다는 연봉바위도 그 근처에 있다. 사람들은 그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심청각을 세웠다. 제 손으로 치마를 들추고 있는 심청이 상(像)은 약간 조악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표정은 자못 비장하다. 그 너머로 달래섬과 장산곶의 실루엣이 아련하다.
용기포 해안선에 외로이 서 있는 '만삭 어미'의 사연도 구슬프다. 아이가 들어 볼록하게 부른 배를 내밀고 먼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아내의 형상이다. 바다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태중의 아이와 함께 돌이 되고 말았다. 두무진의 기암괴석들은 이 섬의 지킴이들이다. 장군(장군봉)을 중심으로 도열한 바위들은 촛대(촛대바위)로 길을 밝히고, 코끼리(코끼리바위)가 문을 막아선다. 누구라도 이 신령한 섬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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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곶해안 언덕에서 내려다 본 사곶해안. 곱디 고운 모래로 이루어져 있지만 비행기도 뜨고 내릴 만큼 단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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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엔 유명한 해변이 두 곳이다. 사곶과 콩돌해변이다. 둘은 고개마루로 이어져 등을 마주대고 있다. 그만큼 가깝지만 서로는 완전히 다르다. 사곶은 모래해변이다. 모래는 모래되 그냥 모래가 아니다. 밀가루보다 고운 모래다. 그 작고 고운 입자들이 바닷물을 머금고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다. 걸어도 발이 빠지지 않는다. 자동차도 다니고 심지어 비행기도 뜬다. 세계적으로도 여기 말고는 한 곳밖에 더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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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도 콩돌해변 거대한 규암이 파도에 깎여 콩알만한 돌맹이가 됐다. 그 돌 하나하나가 천연기념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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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돌해변은 말 그대로 콩알만한 돌맹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규암이 수 억 년 바닷물에 깎여 고만해졌다. 맨발로 해변을 걸으면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자연지압이다. 두어 번만 오가면 스르르 피로가 풀린다. 여긴 천연기념물(392호)로 지정돼 있다. 돌 하나도 마음대로 갖고 나오지 못한다. 감시체계가 삼엄하다. 그렇게 철저한 관리체계 덕에 해안은 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아, 사곶도 그렇다. 거긴 천연기념물 391호다.
신비한 물범과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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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 물범 이 맘때 쯤이면 중국으로 번식하려 갔을 텐데 아직 일부가 남아 우릴 맞아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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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엔 육지에서 쉬 보지 못하는 생명체가 여럿인데 그중 가장 신비로운 것은 물범이다. 이 또한 천연기념물(331호)로 보호받는 멸종위기종이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백령바다의 바위섬 몇 곳에 집단으로 서식한다. 특히 하늬바다의 물범바위는 개체 수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 인공섬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만큼 식구가 늘었지만 녀석들을 직접 보는 영광은 아무나 누리지 못한다. 워낙 낯을 가리고 경계심이 많아 그렇다고 했다.
기왕 왔으니 물범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맘때쯤 녀석들은 중국 랴오뚱만으로 올라가 번식한다고 한다. 이미 다 떠났는지도 모른다고 안내를 부탁한 선장이 지레 걱정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바다구경이라도 하자는 심경으로 작은 배에 올랐다. 거친 파도를 넘어 바위 가까이에 다다르자 물범 몇 마리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우리 일행을 환영하듯 맞아 주었다. 얼굴이며 몸뚱이에 까맣고 둥근 점이 선명했다. 난생처음 보는 진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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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물범 암컷 물범의 위용. 수컷과 달리 하얀색이고 덩치가 서너 배는 된다. 섬 사람들도 쉬 보지 못하는 영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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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뒤로 뭔가 커다랗고 허연 게 어른거렸다. 처음엔 바위인 줄 알았는데 조금씩 움직이는 게 생물이 분명했다.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니, 물범이었다. 그런데 여느 녀석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단 덩치가 산만 했다. 몸뚱이는 하얗게 윤이 흘렀다. 선장은 백령사람들도 좀처럼 보지 못한, 조상이 세 번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암 물범이라고 했다. 그 영물이 빤히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거였다. 그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분단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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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의 현실 백령의 해안선을 다라 높은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바닷가엔 용치가 솟아 있다. 지뢰매설지를 알리는 표지판엔 긴장감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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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귀한 광경이 선사한 감동과 설렘은 쉬 가시지 않았다. 싱싱한 해물이 가득한 점심상을 앞에 놓고도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그 환상에서 퍼뜩 깨어나게 한 건 분단의 현실이었다. 백령의 해안 곳곳엔 2m 높이의 철조망이 둘러쳐 있고, 바닷가엔 날카로운 용치가 서슬퍼런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뢰를 조심하라는 섬뜩한 경고판도 흔하게 보였다. 철조망 사이로 북한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가장 가까이는 기껏 18km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섬의 서남쪽에는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에 있었다. 지난 2010년 백령 앞바다에서 마흔여섯 장병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비극적인 사건을 추념하는 탑이다. 산화한 용사들이 내려다보는 바다는 그 날따라 조용했다. 바람도 숨을 죽인 듯 주변은 적막했다. 그 고요와 정적이 오히려 불안했다. 국화꽃 한송이를 바치는데도 한껏 긴장감이 돌았다. 저 고귀한 젊은 생명들을 삼켜버린 분단의 역사는 과연 우리 대에서 막을 내릴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오늘 하루 감정의 파도가 널을 뛰었다. 백령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환희와 경이, 슬픔과 분노까지 온갖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밀려들었다 쓸려나갔다.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마지막 여정이 남아 있었다. 특별한 만찬이다. 섬에 오면서 숙소 주인장께 간청했다. 돈은 따로 드릴 테니 사장님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어 달라고. 당신은 선뜻 그러자고 하셨다. 진정한 로컬(Local) 밥상을 만날 기회를 잡은 거였다.
백령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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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령 밥상 백령도 주민들의 흔한 밥상. 가장 백미는 김치다. 까나리 액젓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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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밥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반찬은 5가지로 얼핏 소박해 보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특별했다. 소청도 앞바다에서 잡아 올렸다는 학꽁치구이는 달짝지근 고소했다. 그냥 무친 게 아니라 무쳐서 삭힌 양념게장은 매콤 시큼했다. 작은 알들이 톡톡 터져 씹히는 삼식이 매운탕은 그 비슷한 비주얼의 도루묵과는 차원이 달랐다. 달래김치는 푸릇하고 알싸한 향이 일품이었다. 소라무침은 두 말이 필요 없었다. 며칠 지난 건데도 식감이 살아있었다.
그 중 백미는 김치였다. 이 섬에서 난 배추와 고춧가루를 썼다고 했다. 아직 푸른 기가 남은 배추는 아삭하고 그 자체로 감칠맛이 났다. 고춧가루는 그저 매운맛이 아니었다. 배추와 어우러지면서 단맛을 남겼다. 칼칼하고 시원했다. 여주인장은 까나리 액젓에 공을 돌렸다. TV에서 연예인들 골려 먹던 그 젓갈이다. 그 짓궂은 액젓이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그 모든 양념과 배추를 하나로 어우리지게 했다. 진심 세상 그런 김치 처음이었다.
그 덕에 오랜만에 과식을 했다. 배가 부르면서도 숟가락을 내려놓기 아쉬웠다. 마당에 나서니 밤 하늘에 별이 지천이었다. 장관이었다. 섬 안쪽이라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기는 아직 섬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섬은 정말 외따로 떨어진 고독한 존재일까. '윌(영화 <어바웃 보이>, 휴 그랜트 분)'의 말마따나 그건 아닌 듯싶다. 섬들은 바다 밑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 절대 외롭지 않다. 섬은 지구표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 떠다니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 섬에는 사람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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