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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21
    <엘리펀트>
    미갱
  2. 2004/09/21
    N-Gage(1)
    미갱
  3. 2004/09/20
    User Interface개념(4)
    미갱
  4. 2004/09/20
    내마음의 디에고_frida kahlo
    미갱
  5. 2004/09/19
    Wheatfield with crow(2)
    미갱
  6. 2004/09/12
    <매트릭스3 : 레볼루션>매트릭스단상
    미갱
  7. 2004/09/12
    [디지털말]웃자고 만든 아시아의 '몬스터 쇼'(2)
    미갱
  8. 2004/09/11
    HG. Giger 작품세계(1)
    미갱
  9. 2004/09/11
    Beksinski 작품세계(5)
    미갱
  10. 2004/09/11
    <무제(마를린)> 신디 셔먼 작
    미갱

<엘리펀트>

* 이 글은 헤헤님의 [주말의 3가지 공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엘리펀트>

 

제목이 걸작이다.
우리는 코끼리 한마리를 거실에 둔 채로 살아간다.
밖으로 내보낼 방도가 없으니 그냥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샌가 코끼리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거실의 코끼리'

내부의 커다란 문제를 의미하는 서양우화란다.


 

“폭력은 이해될 수 없다. 거부될 수 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전찬일씨와 <엘리펀트>를 두고 논쟁을 벌이면서 한말이다.
<엘리펀트>를 보고 난 후 계속 되내이는 질문이 왜 그 애들은 살인이라는 것을
택했을까였다.

왜?

마이클무어는 정치적, 사회적 접근방법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총기구매시스템때문이라고
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미국정치인들 때문이라고 한다.
언론에서는 문화라고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하드롹밴드의 hard한 표현방식이
문제라고 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 마이클무어의 생각이었고 일정정도는
한 분야에만 문제의 원인이 있을꺼라고 생각하는데 동의한다.
왕따문제. 이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모든 왕따학생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기는 하지만 살인을 직접 실행에 옮길 만큼 잔인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또 아니다.
그러면 폭력게임? 대리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무감각,
폭력의 일상화 또는 습관화가 되면 것도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게임인구가 어디 한두명인가? 것도 아닌듯…
미국의 범죄심리학자인가가 미국범죄자들을 상대로 유전자검사를 해보았더니
정상인들과는 남다른 인자가 하나 더 있다고 했었는데…태어날 때부터
폭력적인 인간은 타고 나는 건가?

모르지모르지..몰겠따….

폭력을 거부하고자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살상이 무감각해질 수 있는
심리상태가 된다는 건 한순간도 아니고 치밀하게 계획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가상의 게임처럼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쓰러지기만 하는 가상인형이 아니라
붉디붉은 선혈을 뚝뚝흘리면서 공포스러운 표정의 절규하는 듯한 소리들이

보이고, 들리고, 맛볼 수 있었을 터인데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고 냉정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면…?

감독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읽히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폭력이 감행되어지고 폭력에 노출이 된 이들의 반응은 공포와 소란이 아니었다.
조용히 받아들이는 듯했고, 그 무언가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건 구스반 산트가 콜롬바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인 듯하기도 했다.
차갑고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라는…
하늘은 처절하게 푸르렀고 베토벤교향곡14번<월광소나타>의 아름다운 선율은 
절제된 전율이었다.
끊임없이 폭력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도록 국가이데올로기는
기제해야될테지..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어내고 군인을 양성하고
전쟁을 조장하지 않는가?

왜?

 

자신의 소신을 위해 폭력적 집단(군대)을 거부할 권리가 한국남성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됴로 다시 함 봐야겠다는 생각에 젖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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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age

 

Nokia에서 2003년도 야심차게 내 놓았던 툼레이더 게임이 탑재된 모바일폰 N-Gage이다.

제품디자인은 소프트웨어의 컨셉에 맞게 게임스틱의 Shape을 가져왔다.

2003년 독일하노버 CeBIT에서 첫선을 보였던 이 폰은 노키아에서 부스에 상당한

마케팅비용을 써가며 홍보에 열을 올렸던 컨셉폰이었으나 시장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소리없이 묻히는 듯하다.

최근 소프트웨어는 3D엔진 탑재가능한 기술까지 와있고 여러개의 3D게임을 다운받아

폰에서 게임가능하다.

모바일폰은 멀티미디어뿐 아니라 게임시장에까지 영역확장과 더불어 진화 중이다.

 

사실 난 이폰을 2003년 독일에서 직접 접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었고

제품디자인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그때의 소감은 바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가로로 폰을 사용한다는 것.

요즘 삼성에서 적극적으로 TVCF를 구가하는 가로LCD(SCH-V500)폰은

그닥 새롭게 와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로폰의 사용성이 얼마나 사용자에게 유용한지 편리한지는 시장반응이

반증하는지도 몰겠지만...

 

2003년 유럽에서의 노키아 시장 장악력은 독일하노버CeBIT전시장 규모와

전시관람자들의 인기로 절감할 수 있었지만 삼성의 기술력은 2004년 독일하노버CeBIT

전시장에서만큼은 노키아를 앞선 승리였다는 것이 관람자들의 대체적인 평이었다.

현재 삼성은 벤츠폰(SCH-E470)으로 유럽을 거의 삼켜버린 듯하다.

 

국내사용자들의 반응이 어땠을까가 약간 궁금한 폰이다.

하나의 코드로 고정된 듯한 매니아 그룹들은 제품개발에 영향을 미칠만큼 전문가적이고

열성적이다.

생산자들은 매니아 그룹을 적극적Tester로서의 활용과 제품출시이후 시장반응이전

그들의 반응에 더 신경쓴다고 한다.

그들로 인해 리콜을 당한 제품이 한두개가 아니라고 하니 매출실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그들을 어찌 소홀히 응대하겠는가 말다.

 

여튼 이런 저런이유로 CDMA방식을 사용하는 국내사용자들이 직접 폰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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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Interface개념

http://www.uidesign.co.kr/에서 퍼왔어요~

 

이 공간은 앞으로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공부하는 곳으로 꾸며볼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공부하고있는 분야의 전문성을 쌓는 의미에서,

이 공간을 들르는 분들에게는 HCI와 GUI라는 개념정의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만들어보았답니다^^
열심히 해봐얄텐데....워낙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은 가져도 깊이있게 한 우물을 판 경우가
별로 없어서 한계극복을 위한 다짐의 공간이 될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여하간 잼나게 공부해보자~

 

사전적 의미로 살펴보면 User Interface(사용자 인터페이스)란 사람과 시스템간의 접점,

또는 사용자와 각각의 시스템사이의 정보채널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User Interface Design은 보다 사용하기 편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사용자와

시스템 사이의 상호 정보 교환의 문제점을 지각적, 인지적 측면에서 밝혀내고

이를 체계화하여 설계, 디자인하고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가 개발되고 상용화되면서 인간과 컴퓨터라는 독립된 두 객체 사이에 효과적이고

원할한 커뮤니케이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두 객체를 통합한 하나의 단일화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중간 매개체로써
Interface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User Interface(사용자 인터페이스)란

용어가 파생되었다. 
  

흔히 Interface는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의 공유영역 혹은 커뮤니케이션 통로로써

우주와 우주인과의 관계에서의 우주복, 인간과 문의 관계에서의 손잡이,

또한 운전자와 자동차사이의 인터페이스는 차의 계기판과 변속기 등으
로 비유될 수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의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수많은 관계와의 좋은 인터페이스를

여러 각도로 요구하며 살고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컴퓨터가 직.간접적으로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환경에서 컴퓨터와 인간사이의 인터페이스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관계에 대한 개선은 필수적인
과제가 되어 여러 산업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한 연구의 한 영역으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HCI는 컴퓨터공학, 통신공학, 인간공학,
신호처리 패턴인식, 인공지능, 음향공학, 영상, 가상현실, 잡음처리, 감성공학 등

다양한 학문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컴퓨터 상호작용(Interaction)이 디자인 분야로 그 영역을 확대한 것은 모글리지

(Bill Morgridge)가 “인터랙션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사용성에 대한 연구’라는 새로운 디자인 영역을 낳으면서 부터이다.

이는 시간과 조작의 흐름을 고려한 사용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알기 쉽고, 보기 쉽고,

생각하기 쉬운 소프트웨어 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이후부터 사용성에 대한 연구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Client/Server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개발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메시지의 전달 방법이

단순한 Text Base의 방식에서 상징적인 Graphic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예전에는 개발자가 시스템 개발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였으나, 현대의 개발자는

날마다 쏟아지는 신기술의 출현으로 더 이상 UI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UI의 접근방식 또한 개발자인 시각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

평가하게 될 사용자의 입장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Web의 확장에 의해 시스템이 오픈 되면서 고객 수준이 향상되어 각 시스템별

차별화 방안이 필수적인 사항으로 대두 되었으며, 사용자가 쉽게 배우고 빨리 인식 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전문 영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PC의 가격대비 성능의 향상으로 컴퓨터의 보급율이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개발 툴(4GL)의

Graphic Interface 기능지원이 확대되었다.

또한 인터넷 확산에 의해 기업의 그룹웨어가 고객의 요구사항에 따라 인트라넷, 익스트라넷
으로 변화해가는 실정이며, 더 높은 품질 향상을 요구하고 있다. 시스템의 거의 대부분이

더 이상 폐쇄적인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웹의 특성에 따라 정보가 오픈 되고 공유되면서

고객의 요구사항은 더욱 복잡 다양해지고 있다.

 

개발 방법론이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향상은 그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하다. 또한 개발 방법론이분업화 및 전문화 되어 화면 표준화 작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End-user인 현업과 개발팀간의 업무 협의에서의 논리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분야가 사용자 요구사항과 개발 효율성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또한 개발 일정 단축과 System Interface의 일관성을 유지 시키고 타 System과의 제품차별화

및 고부가가치 창출의 필요가 절실한 실정이다.

 

시스템 개발에 있어서 전체 개발 비용 중에 유지보수에 관계된 비용은 80%가 UI와 관련이

있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제이콥 닐슨은 만약 더 나은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고 더 엄격한 내부 디자인 표준이 강요되지 않는다면 전세계적으로 나쁜 인트라넷

사용성으로 인한 비용이 2010년까지 약 1000억불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오늘날과 같이 웹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게 되면서는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Zona Research는 이 커머스 회사들이 웹 페이지 때문에 좌절한 고객들로부터 한달에

5천 8백만불 이상을 잃고 있다고 산정했다.

시스템 개발의 처음부터 UI프로세스가 적용되어야 하며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사용자의

요구사항과 사용성을 높이는 시스템이 더 큰 기업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시스템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HCI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 되었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요소를 이용하여 이를 표현하고 사용자를 직접 참여 시켜 여러 번의 사용성 테스트를

거쳐 사용성 향상의 문제 해결과 그에 따른 인간 공학 및 심리학에 바탕을 둔 감성공학적

연구와 시스템과의 상호관계를 해결하는 유저 인터페이스 디자인적인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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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디에고_frida kahlo


 

Yahoo.co.kr "프리다칼로" 지식검색 결과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화가. 코요아칸 출생. 1925년 버스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고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9년 벽화가인 D. 리베라와 결혼했다. 그와 함께 멕시코의 전통을 이어 강렬하고 화려한 색조의 그림을 그렸다. 43년 교육부 부설 미술학교인 라 에스메랄다에 회화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A. 브르통의 찬사를 받는 등 종종 초현실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코요아칸에 있는 그녀의 집은 현재 프리다 칼로 미술관이 되었다.

 

어찌나 간단명료에 건조한 설명인지...^^지식검색 이래도 되나요?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 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 중에서-

 

멕시코의 민중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 더 유명했던 그녀.

디에고에 대한 사랑이 깊은 만큼 상처 또한 컸을 꺼라는 짐작을 그림속 그녀의눈이

말한다....

대학시절 접했던 그녀의 그림은 끔찍했다.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었지만 손가락만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내는 작가의 그림은 그래서 더더욱 보는 이를
전율케한다.

최근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작가로 더 유명하다.

대학때 과커플이 있었지만 나중에 작가로 남는 이는
남성들이었다. 그 뒤에는 말없는 그녀들이...
로뎅과 카미유클로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남성들이 여성보다 작가적 능력이 특출나거나 뛰어나기
때문에...?

그녀들의 작품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녀의 작품이 많이 실린 갤러리로 가세요~http://windshoes.new21.org/hall-frida.htm

그녀의 작품들이 오래볼수록 더 좋다....흐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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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atfield with crow


 

그의 붓놀림은 에너지 그 자체이다.

꿈틀거리는 저 밑바닥 심연을 지나 분출하듯 뿜어내는
저 붓놀림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희열이 보인다....

그 붓놀림의 질감을 맛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어찌 눈을 감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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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3 : 레볼루션>매트릭스단상

싸이월드에 2004년4월 올린 글이다.

ㅎㅎ....트랙백을 아직 잘 몰겠따...퍼날라올수밖에...

 

<매트릭스3 : 레볼루션>매트릭스단상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물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 보다는 그것들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많은 성취감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을 <매트릭스>를 보면서 느낀다.

 

<매트릭스>를 처음 접했을 때, “아!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감탄을 연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1세기 SF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한 여러 가지 형식적 새로움과

스토리의 철학적 깊이는 산업이라는 이름아래 예술이라는 감투 또한 씌울 수 있겠다는

가능성에 놀라고 놀랐던 것이다.

 

<매트릭스>가 신화가 되어가고, 드디어 2편의 영화가 뚜껑을 모두 열었지만

여전히 비판적이든, 찬사의 연발이든 사회적 논란의 핵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국내 철학자들은 <매트릭스>를 철학적 시각으로 풀이하고, 영화잡지에서는

감독, 비평가, 사회학자 등을 이용해 새로운 해석을 풀어내느라

지면이 모자랄 정도처럼 보인다.

 

워쇼스키 형제가 부럽다!
사회적 논란의 핵심이 될만한 작품을 쏟아내는 작가나 예술가는 별로 많지 않고,

세상은 공평하게도 그런 능력을 많은 이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듯하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이 <매트릭스>이 주던 감동을 주리라고 기대했던

자신이 순진했다라는 생각을 영화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단지, 시각적 표현은 <매트릭스>나 <매트릭스, 리로디드> 이상의 발전,

또는 차별화가 있었다.
특히 시온에서 APU군단과 센트럴의 전쟁은 컴퓨터그래픽의 예술적 발전을

한단계 올려놓은 사례라고 본다.
영화관의 커다란 Screen은 컴퓨터그래픽의 실수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찾아보았지만 어느 한군데 어설픈 구석이 없는

환상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기갑로봇에 타고 전투하는 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입의 오버였는지

아니면 너무나 실감나는 시각적 표현력 때문이었는지 나 스스로 전투에 지쳐

떨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 많은 센트럴을 어떻게 다 죽일란지... 난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참고로 AB형은 환상과 현실을 가끔 구분하지 못한다는 혈액형별 성격분석은

얼추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지^^;;

 

가상과 현실을 뛰어넘는 제3세계를 권터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고 하고,

실재가 아닌 실재인 파생실재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 (simulation)”이라고 했다.


“진실, 도덕, 권력, 신, 역사, 상상, 이데올로기, 삶과 죽음등에 의해 형상화되던

실재는 그의 기호, 이미지, 모형인 시뮬라크르에 의해 대체되어 파생실제로 변환한다.

이처럼 실재가 실재 아닌 실재인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이 바로 시뮬라크르이다.”


무쟈게 어려워서 책을 그래도 옮겼다. 휴~
이 책 읽다가 머리에 쥐났었다. 물론 반은 이해도 못하고

그냥 넘기다 끝내는 다 읽지도 못했다.ㅎㅎ

 

여튼 각설하고, 현실과 꿈을 가끔 혼동하기도 하고,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해

환상 속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나약한 인간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실재하는 자신은 누추하나 환상 속의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어느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난 가끔 공간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꾸미는 버릇이 있다.
물론 결국엔 내가 그리는 환상을 현실화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취감의 짜릿함이란 꿈꾸는 자만이 알 것이다.

 

행복하다고 믿으면 그곳이 유토피아 이듯이, 가상세계를 지배하는 A.I(인공지능컴퓨터)는

인간이 혁명을 일으킬 것도, The one인 인간의 유일한 희망 “Neo”의 출현도 미리 예견하고

인간의 역사를 통제해 나간다.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어지지 않는 상태를 씨네21에서 진중권은 미리 예견될것을

알고 있다는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고 설명하더군.
내가 살아가는 주변환경도 그다지 나의 자유의지로 형성되지 않는 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 사회과학서적을 몇 권 읽고, 구조적 사고를 하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다.


"자유의지는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스미스는 어디에도 존재한다.


국가일수도 있고, 선생님의 모습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사회적 관습으로 변용되기도 하며,

학구적이고 부드러우나 바람둥이의 남친얼굴이기도...인심좋은 상사의 얼굴을 하기도 한다.
옘병할…..
대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세상살기 참 힘들다!

마지막으로, <애니매트릭스>가 주는 신선한 충격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매체가

주는 차별화가 감동의 변화 또한 가능하구나 였다.
인간의 상상력을 컴퓨터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데 기술의 한계가 있거나,

매체의 특성이 작용한다.
애니메이션처럼 수동적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건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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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말]웃자고 만든 아시아의 '몬스터 쇼'

하루에 하나씩 꼬박꼬박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에너지 소비인지...허걱...

할수 엄씨 오늘은 내가 젤루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글을

디지털말에서 퍼다 올려본다.

 

한류열풍을 바라보는 정성일씨의 시각은 독특하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좌파적으로 영화판읽기 또는 문화산업읽기라 넘 좋다.

아시아시장을 선점하려는 각국 자본가들의 Keyword는 스타 또는 장르등으로 표출되는데

<몬스터>는 3개국영화자본가들의 시장탐색을 위한 실험적 성격으로

영화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또다른 영화보기의 잔재미인 듯하다.

무국적, 비역사성, 탈민족성....더 이상 영화는 각 문화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건

씁쓸하다 못해 몸서리쳐지게 공포스럽다...

그건 곧 영화가 역사적 토대를 배경으로 우러나는 문화적 변별점에서,

화려하게 포장되고 세련된 철저하게 상업화된 자본가의 문화로만 재편된다는 얘기.

관객은 더이상 다양한 영화를 제공받고 유기적 힘을 발휘하기보다는

커다란 파도에 의해 한가지 칼라만 색칠된 컨텐츠만 일방적으로 제공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므로...비약이 심한건가? 몰겠다...어쩄든 요즘 국내에서 뜨는 영화들을 보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유치하고 가벼운 유머를 스타라는 멋진 껍데기로 화려하게

포장하여 전국 상영관에 전진배치해버리면 100만은 거뜬히 넘기는듯...

 

언제나 제기되어졌던 대안이라면...국내 독립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지원이라는 것...자본의 흐름을 거역하고 바꾸는 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견되겠지만..조금씩 조금씩....

 

스릴러, 공포물등의 장르는 별로 내키지 않은 영화였으나 정성일씨의 날카롭고 독특한

비평으로 인해 호기심 만빵. 함 보고싶다!

이번주에는 <연인>부터...벌써부터 장쯔이의 무용같은 무술장면을 보고싶어

좀이 쑤신다. ㅎㅎㅎ

 

 

웃자고 만든 아시아의 '몬스터 쇼'. 
정성일의 영화세상_「쓰리, 몬스터」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정성일 영화평론가

 

세 명의 감독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담당하여 만든 <쓰리, 몬스터 >를 보았다. 세 명의 감독은 서로의 나라에서 모두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스타의 자리에 선 이름들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컷! >을 연출한 사람은 <올드 보이 >로 올해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박찬욱이다.

'착한' 영화감독(이병헌)의 집에 어느 날 찾아온 엑스트라(임원희)가 감독의 피아니스트 아내를 인질로 자기 아이를 죽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자기 아내의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는 걸 감상하든지, 아니면 그의 요구대로 그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 선택의 딜레마! 두 번째 에피소드 <박스 >를 연출한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는 일본의 '엽기' 감독이다. 그는 시종일관 거의 기절할 만한 아이디어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에게는 그의 가장 얌전한 영화 <착신아리 >만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54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사람이다. 미이케 다카시는 서커스단의 어두운 기억을 안고 쌍둥이 동생을 죽인 다음 샴 쌍둥이가 되어 살아가는 한 여류 소설가의 이야기를 처연하게 이끌고 간다. 세 번째 에피소드 <만두 >는 우리에게 <메이드 인 홍콩 >으로 유명한 프루트 챈이 만들었다. 젊은 시절의 미모를 되찾아 남편의 사랑을 돌이키려는 여배우는 아직 임신 상태의 태아를 꺼내 고기로 다져 만두를 만든다는 여인을 찾아간다. 그녀는 점점 만두의 맛에 매혹되고, 만두 만드는 여인이 중국으로 돌아가자 가까스로 임신한, 자기의 아이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한다. 


아시아의 '몬스터'들이 진정 원하는 것.

그냥 영화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세 편 모두 웃자고 만든 영화들이다. 가장 엽기적인 것은 프루트 챈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미이케 다카시이고, 가장 소란스러운 것은 박찬욱이다. 세 사람은 서로 지켜야 한다는 최소의 원칙만을 지켰다. 그건 "귀신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는다"이다. 그 다음에는 '몬스터'라는 부제가 달리기는 했지만, 그들 세 사람은 '괴물'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가갔다. 서로 연결해서 볼 필요도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프루트 챈은 장편 길이의 편집본을 별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그들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박찬욱은 마치 스트레스를 풀 듯이 만들었고(시종일관 '영화감독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 줄 알어?' 라며 징징거린다), 미이케 다카시는 자신도 예술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무언가 보여주려고 힘을 잔뜩 지고 만든다. 프루트 챈은 크리스토퍼 도일을 데리고 마치 <화양연화 >의 공포 버전처럼 영화를 끌고 간다.

 여기에 무슨 대단한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차이에 대한 논쟁을 벌일 생각은 세 사람 모두에게 없다. 그냥 웃자고 만든 영화를 시침 뚝 떼고 심각하게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아마도 이런 영화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걸 프로듀서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여기에 돈을 댄 투자자도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일까? 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만 눈을 더 크게 뜨고 쳐다보자. 영화의 끊임없는 관심은 시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토대가 결국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건 말을 아무리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화는 자기의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아시아 영화의 연대라는 말은 허울 좋은 명분이다. 혹은 시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화학자들의 따분한 평화 공존론이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지켜질 수 없는 희망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역사에서 자본의 평화로운 공존을 목격한 적이 없다. 만일 서로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더구나 연대를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스크린 쿼터 논쟁의 약한 고리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서는 우리를 방어하면서, 우리들은 하여튼(!) 아시아로 나가고 싶어한다. (남이 하면 제국주의, 우리가 하면 문화교류?) 중국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만과 홍콩에서 열리기 시작한 시장을 놓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일본 영화시장에 한국영화 직배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류의 핵심은 사실상 (내 생각에) 유행이며, 무국적성이며, 탈(지역화-민족화-국적화-)역사화의 신기루 위에 선 상상적 공동체의 환상론(의 돌림병)이다. (여기서 한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순간 문화 제국주의의 그림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는 물론 자본이다.

서론이 너무 긴 것일까? 하지만 우리도 이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한편의 영화 제작비가 마침내 1백억 원을 넘을 때 시장의 '규모'는 무엇보다도 핵심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술적인 계산. 1백억 원을 쓰면 전국에서 3백80만 명이 볼 때 제로섬이 된다. 고민은 여기에 있다. 제작자들의 말에 의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치는 한국 시장에서 3백만 명이라고 한다. 그 이상의 성공은 사실상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적에 사업을 내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싸움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더 많은 극장을 지어서 더 많은 관객을 영화관으로 끌어내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

'스타'보다는 고상하게 '장르'로

그냥 말을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자.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영화 '자본'의 공통 관심사는 무엇일까? 이미 전지현을 내세운 (트랜스-자본-)아시아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홍콩의 영화제작자 빌 콩은 아시아를 묶는 수단으로 '스타'를 생각했다. (그에게 배용준과 최지우, 이병헌, 김희선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는 실제로 열렬한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좀더 신중하게 기획된 <쓰리, 몬스터 >는 그 고리를 '장르'라고 생각한다.

 이미 2년 전에 처음 시도된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는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 (홍콩의) 진가신, (한국의) 김지운이 모인 옴니버스 영화 <쓰리>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홍콩과 타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한국에서는 실패하였다. 실패의 이유는 많을 것이며, 그것을 일방적으로 한국 쪽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같은 것이다. 결국 시장에서 실패했다.

여기에는 좀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영화사 '봄'의 대표인 오정완씨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한류(韓流)를 준비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강제규의 <은행나무 침대 >를 기획해서 충무로에 자기 이름을 등극 시켰으며, 그 이후 영화사 '봄'을 만들어 독립한 다음에 김지운의 <반칙왕 >과 이재용(과 '욘사마' 배용준)의 <스캔들 >을 기획하고 제작하였다. 물론 실패한 영화들도 있다. 임상수의 <눈물 >은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전편 디지털 영화를 시도하여 저예산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였지만 좌초하였다.

아주 사적인 자리에서 오정완씨는 내게 "나는 즐겁자고 영화를 해요, 만일 같이 일할 사람이 괴롭게 느껴지면 1천만 명의 관객을 약속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함께 일할 수 없어요. 사실 돈을 벌자면 영화를 하는 건 미친 짓이거든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이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오정완씨는 사이더스의 차승재(<살인의 추억 >, <지구를 지켜라 > <무사 > <화산고 >, 그리고 올 여름의 <늑대의 유혹 >), 명필름의 심재명과 이은(<공동경비구역 JSA > <와이키키 브라더즈 > <섬 >)과 함께 자기 색깔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름 중의 하나이다. 오정완씨가 한계에 부딪친 것은 시장 전체가 배급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이다. (충무로에서는 '드디어' 한국 영화가 블랙 마켓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1라운드를 겪기 시작한 것이 올해라고 말한다.) 이제 한국 영화는 더 이상 제작자의 결정이 아니다.

제작자는 자본을 끌어대기 위하여 투자자를 찾아야 하고 투자자는 배급을 장악한 멀티 플렉스 소유주 (제일제당 산하의) CJ 엔터테인먼트와 (동양그룹 산하의) 쇼 박스이다. 그 둘은 당신 동네에 CGV와 메가박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아마도 내년에는 더 많은 양쪽 소유의 영화관을 보게 될 것이다. 영화관이 요구하는 영화는 단 하나이다. 더 많은 관객, 더 많은 수입. 그 소비의 속도 안에서 영화관은 최대 관객, 최소 빈 좌석의 원칙을 세우고 밀어붙인다. 당신이 영화를 보기 위해 멀티플렉스에 갔을 때 마주치는 두 가지 기이한 체험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관 수는 열댓 개에 이르는데 상영 중인 영화는 대여섯 편이고, 잠시 미루면 이미 어느 영화관에서도 그 영화를 볼 수 없다. 영화사는 한 편의 영화에 최소 이 년 이상을 매달리는데 영화관의 수명은 이주를 전후로 한다.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떤 영화는 금요일에 개봉해서 월요일 오후에 이미 '잘리'는 경우도 있다) 일시에 더 많은 성공을 위해서 마케팅비용은 점점 커지고, 입 소문이라는 전통의 방법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비용은 온전히 영화사의 부담이다. 충무로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네마 서비스(로 상징되는 강우석)의 방법이다. 배급 주식의 일부를 소유하고, 그 유통구조에 개입하려는 것이다.

물론 여기 선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주식에 뛰어들 때 여기에 휴머니즘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 물신과 물신 사이의 자본주의적 약육강식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가진 자의 쟁탈전이다. (그리고 최근 시네마 서비스는 이 싸움에서 CJ로부터 완패했다. 이제 더 이상 강우석은 충무로 파워 맨 1위가 아니다.) 오정완씨는 여기서 뛰어들 수 없는 영화사의 탈출구에 대한 프로젝트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쓰리 >는 시장의 개념을 크게 잡아서 다시 설정해 보려는 시도이다. 결국 영화 시장은 국경이 없다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다시 한번 영화의 주도권을 제작자가 가져보려는 안타까운 노력의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장은 서로 다른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 시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제작자의 연대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쓰리, 몬스터 >는 박찬욱(한국)-미이케 다카시(일본)-프루트 챈(홍콩)의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그들을 내세운 오정완(한국)-가도가와 쇼탱(角川書館)(일본)-진가신(홍콩)의 서로가 서로의 시장을 탐색하는 일종의 연습게임이다. 누가 누구를 먹을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찔러보고, 그 반응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영화가 아니라, 더 많은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를 가지려는 그들 자신의 자본에 대한 복종이다.

 

    
국적 팔아 살집 키우는 공포의 '몬스터'

박찬욱은 시사회에서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저는 등장인물에게는 고통을, 투자자에게는 기쁨을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라고 말했다. 좀 역겹기는 하지만 그 말이 핵심이다. 이 영화는 투자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원칙인 영화이다. 그러나 그 투자자의 다국적성은 아시아 자본의 연대를 보여주는 21세기 아시아 영화 시장의 청사진이 될 것이다. <쓰리, 몬스터 >는 사실상 그 자본의 성격이 '괴물'같은 영화이다. 지금은 이 영화를 보면서 놀라는 척 하면서 비명을 지르거나 낄낄대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훗날 점점 더 자본이 종횡으로 엮어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시장이 개편될 때는 아무도 웃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박찬욱에게 반문을 해야 한다. 알겠다, 당신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런데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이 한국 영화관객이 아니라 아시아의 관객이 될 때, 그것은 아시아적 정체성의 획득이 아니다. 그때 우리가 얻는 것은 무국적성-비역사성-탈민족성의 삼위일체일 것이다. 그 말은 그저 영화를 보면서 웃고, 울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면서, 황홀경에 빠져든 채, 오락의 무아지경에 뛰어든 채, 우리가 누구인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쓰리, 몬스터 >는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부분적으로 재미있고, 비교적 흥행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만들어낸 자유자재의 상상도 있다. 실패하면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 프로젝트의 숨은 목표이다. 시장의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 먹이사슬은 동시에 좀 더 많은 이익을 전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영화는 아시아와 잡종교배 되어간다. 한국영화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시장 속의 우리들의 존재가 점점 한국 영화 관객으로부터 국적을 알 수 없는 아시아의 바보가 되어간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국적도 알지 못하고, 역사도 모르며, 민족을 잊어버린 채, 혹은 알 필요 없는, 또는 질문할 필요 없는 바보가 되어갈 것이다. 그것이 <쓰리, 몬스터 >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2004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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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 Giger 작품세계


 


 



 

<에이리언>의 배경과 캐릭터로 쓰인 미술....

HG. Giger는 에이리언의 캐릭터 창조자로 유명한 작가이다.

벡신스키의 그림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경향이 작품 곳곳에서 풍겨난다.

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단연 1순위 사람들이 바로 벡신스키와 Giger이다.

 

인간 상상력의 끝은 무한하다.

 

<에어리언>의 음울하고 기괴한 미래세계를 환상적으로 창조해낸 Giger는

자신의 그림안에서 행복할까?

 

정신없이 바빴던 회사생활로 인해 일상생활에만 빠져있던 내가

오랜만에 벡신스키와 Giger의 화집을 뒤적이며

새로운 창작에 대한 열정을 끄집어내 본다. 

 

>>사족

가이거작품 중 Seputula라는 하드롹밴드의 앨범디자인도 하나 소개한다.

한때 아침에 일어나면 강한 음악을 들어야 정신이 번쩍 뜨이곤 했다.

푸른영상에 있는 조감독한테 음악추천(당시는 다큐미술을 사이드로 하고있었을 때다~)을

부탁해서 선물로 받아들어보았던 음악이 바로 "Seputula"라는 밴드의 음악이었다.

기회되면 음악 함 들어보라~ 흐흠..정신이 번쩍@__@ 들꺼다! 룰루~

 

그런데 앨범 그림 치고는 넘 무섭당....

나의 감성이 마니 바뀐게 확실하다...익숙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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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ksinski 작품세계


 

그의 그림속 배경은 SF영화 배경을 보는 듯하다.
전쟁을 연상시키는 황폐한 풍경그림은 암울하고 퇴폐적 최첨단의 미래(스타워즈시리즈, 매트릭스, 2019 블레이드런너 등..)와 맛닿아 있는 듯하다.
참고로 에어리언의 캐릭터디자인을 담당했던 세계적인 아티스트

"가이거(H.R. Giger )"에게도 벡신스키의 작품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벡신스키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난 말이야..내 그림을 나도 잘몰라..굳이 이해 하려 들지마..
그림에 대한 의미는 무의미 한거야.
내가 그리는 그림은 무슨 상징따위를 갖고 그리진 않아.
이미지에 대한 명백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않은 그런 이미지들에 난 끌려..
만일 그 이미지가 하나의 상징으로 귀결된다면...
그건 더이상 예술이 아니야.. 단지 일러스트일뿐이라고..."

인간의 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4차원적인 신비함을 지녔다.

폴란드 작가로 2차세계대전중 유년시절을 보내온 이력때문인지 그의 작품세계는

움울과 피폐 그 자체이다.
지금보면 무섭고 괴기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학시절 난 이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적 감성을 키워온 듯하다.
아마 그 시절의 난 혼란과 방황으로 몸서리 쳤기에 비슷한 류의 정신세계를

보이지 않은 모든 창작물은 쓰레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H모대 교수들과 그들의 추상화는 그 대표적 쓰레기라고 말이지 - -;;;
지금 생각해보면 편협의 최첨단이었다고 본다.

인생의 깊이와 넓이가 나름대로 폭넓어지고 깊어진? 지금 그때와는 많은 차이를 지닌체

작품을 대한다.
특히나 선회한 미술형식중의 한 분야가 추상화이다.

붓 한 획에도 인생의 방향이 바뀐다.
그게 비록 감상자의 주관적 세계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리더라도

한가지 인정해야 할 부분은 있다.
그림으로 인간적 감흥을 일으키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낼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형식이냐가 아니라는 것.

벗! 출신대학교수들의 상업성과 무식함은 아직도 미술계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한국미술계의 보수성과 그 끈질긴 매너리즘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이다! 흐흠...


예술은 벡신스키의 말대로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하고

정답이 없는 무한의 세계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것이 있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다.
여러 형태로 고민되어 질수 있고 끊임없이 유지 발전되기를 바란다.
그건 예술가에게 있어 최대의 권리이자 행복이므로...

 

그의 세계로 빠져드려면~ http://www.poowa.com/here/beksinski_tex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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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마를린)> 신디 셔먼 작


 

무제(마를린)/1982 신디 셔먼

 

대학다니던 시절 한창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운 시기,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painting이 아닌 인위적으로 "꾸며진" 사진작업으로 유명한 작가가 바로 미국현대

여성작가인 신디셔먼이다.

자기자신을 마릴린몬로처럼 꾸미기도 하고, B급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분장하여 영화의 한컷을 차용하는 것을 즐겨했던 작가는 미디어에 의해 관념화된 여성개념을 새롭게 해석하는 듯 보인다.

<무제-마를린>에서 비꼬고 앉은 포즈는 미국대중문화의 대표아이콘으로 자리잡는 마릴린 몬로를 통해 여성의 성상품화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의식을 엿볼 수 있는 듯하다.

 

인간의 심리는 누구나 영화속 주인공으로 자신을 대체하여 감정이입에 몰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영화속 인물이 되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최근 연인들의 대사 중 가장 많은 것이 "애기야! 가자!"라고 하니..ㅍㅍㅍ

 

영화속 한 장면을 차용하여 연출한 사진을 즐겨 찍었던 그녀 또한 대체 모델을 쓰지

않고 자신을 화면속에 이입하는 방법을 창조해낸 것은 재미난 현상인듯....

현실속 자아투영을 조작된 현실을 통해 바라보다...멋진 발상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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