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미루랑 자다가...

미루는 침대에서 잡니다.

그 옆에서는 제가 잡니다.

 

주선생님은 옆에서 몇 번 자다가

피곤해서 안되겠다면서

침대 옆 바닥에서 잡니다.

 

옆에서 조그만 애가 자는 게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봅니다.

 

미루는 사실 요즘

그냥 얌전히 안 자고

하여튼 징그럽게 많이 움직입니다.

 

팔을 위 아래로 막 움직였다가

다리를 굴러서 침대를 퍽퍽 칩니다.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획획 돌립니다.

 

대체 사람이 어째

저러고 자는지 신기합니다.

 

이러니 착한 주선생님이

신경이 안 쓰일리 없습니다.

 

자다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미루를 때리기라도 하면 안됩니다. 더 신경이 쓰일 겁니다.

예전엔 깔아뭉개는 게 걱정이었는데 좀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냥 미루 옆에서 잡니다.

주선생님 보다 훨씬 예민해서

미루 움직이는 소리를 밤새 다 듣지만

그래도 잡니다.

 

원래 제가 잠버릇이 얌전해서 하나도 안 움직이니까

괜찮다는 생각을 했고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옆에서 바로 깰 수 있으니까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알람을 맞춰놓고 자면 "따르릉~"의

"따"자가 울리고 "르"자가 시작되기 전에 벌떡 일어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번번이 놀랍니다.

 

근데 사실 미루 잠버릇 때문에

옆에서 자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일단 자러 들어가면

미리 자고 있는 미루가 꼭 침대 한 가운데에 와 있습니다.

 

전 왼쪽 옆으로 밀려서

침대에 거의 걸터 누워 잡니다.

이것부터가 벌써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분명히 나란히 누워잤는데

자다 보면 저와 미루가 90도, 직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다가 미루한테

몇 대 맞기도 했습니다.

 

"퍽~"

"퍽~"

 

아픕니다.

 

'이건 내가 벌떡 일어날 상황이 아니지...'

혼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이러다가 잠이 확 깨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참 자는 데

제가 팔을 '휙' 하고 휘두르는 걸 감지하고

순간 멈칫했습니다.

 

'역시 난 대단해...팔 휘두르는 걸 알고 순간적으로 멈추다니...'

 

다행히 미루는 새근새근 잘 잡니다.

 

그런데 이후에도

몇 번이나 제가 팔을 휘둘렀습니다.

 

매번 멈칫하면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마음은 더 편해졌고,

 

별 일 없이 푹 잤습니다.

 

아침이 됐습니다.

일어났는데 간밤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 빙빙 돕니다.

 

팔꿈치에 뭔가가 '푹' 찍혔던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자다가

'말이 돼? 내가 미루를 팔꿈치로 찍을리가 없잖아..'라고

생각한 게 기억이 납니다.

 

좀 더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제가 미루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옆에 있는 미루를 쳐다봤습니다.

 

잠을 자는 건지

기절해 있는 건지

소리도 없이 누워 있습니다.

 

진짜 아팠을 것 같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육아휴직에 대한 오해

"육아 휴직 내고 뭐 할려고?"

 

이 말은 제가 처음 육아 휴직 낸다고 했을 때

사무실 사람들이 저한테 했던 주옥같은 말 중 하나 입니다.

 

자기들은 꽤 평등한 척 하던 그 많은 사람들이

남자가 육아휴직 낸다고 하니까

 

갑자기 저를 과녘에 세워놓고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첫 화살은 심장에서 멀찍이 꽂혔습니다.

뭐 그 정도 쯤이야 가볍게 넘길 수 있습니다.

 

평소 저의 넓고 깊은 아량을 생각할 때

웬만한 화살은 10점 만점을 맞추기 힘든 터였습니다.

 

다음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1년 동안 뭐 할려고?"

 

역시 한참 먼 곳에 날아가 박힙니다.

 

같은 선수가 두 번째 화살을 꺼내듭니다.

 

"뭐 다른 계획이 있나 보네..생각하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냐...!"

 

저는 꿈쩍도 안고

오직 애 키울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이야~좋겠다. 나도 좀 1년 푹 쉬었으면 좋~겠다.."

 

세번째 선수의 화살은

살짝 과녘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봐야 1점 짜리입니다.

 

다음 선수는 좀 더 강한 화살을 날렸습니다.

 

"육아휴직이자, 안식년이네...좋겠어요~"

 

하나 같이 저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말합니다.

그게 더 밉습니다.

 

육아휴직 날짜가 가까워오자

여러 명이 동시에 발사대에 섰습니다.

 

"애 키우는 게 그렇게 힘든가? 육아휴직까지 하게..?"

"남자가 옆에 있어 봐야 전혀 도움이 안될걸~?"

"처음 1년은 남자가 할 게 없어...육아휴직 할려면 1년 지나고 나서 하지 그래.."

 

여러 발이 한꺼번에 날라오니까

제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맞춰

국가대표들이 나섭니다.

이 선수들 강력한 집중력으로 심장을 정확히 겨눴습니다.

 

"나도 애 키워봤거든? 하여튼 유난을 떨어요~"

 

활에서 발사된 화살이 "쉬~익" 소리를 내며

느닷없이 가슴에 콰악 꽂혔습니다.

 

"윽.."

 

두번째 화살이 날라옵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육아휴직 쓰면 어쩌라고?"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과연 내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을것인가...'

 

"헉"

 

어느새 세번째 화살이 와서 박혔습니다.

 

"정 그러면, 오전에는 출근하고

오후에는 재택 근무하면 되겠네..중요한 회의는 나오고.."

 

거의 쓰러지기 직전

여기 저기서 화살이 날라와

온몸에 박힙니다.

 

"몰라서 그렇지..애가 얼마나 이쁜데..육아 그거 하나도 안 힘들어~~"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일해야지, 무슨 육아휴직.."

"무슨 시간이 안 날거라고 그래...애 자는 시간에 일 하면 되지..."

 

저는 거의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정말 내가 육아휴직을 쓰려고 했던 게 잘못된 건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잘못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저 한테 화살을 날린 사람들이 모두 틀렸습니다.

 

저는 제 몸에 박힌 화살을

두 손으로 잡아서 다 뽑아버리고

힘차게 육아휴직을 신청했습니다.

 

 

...

 

 

미루랑 한참 결전을 벌이고 있는 어느 날

친한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나야!!"

반가웠습니다.

 

이야, 내가 고생하는 거 알고

이렇게 친히 위로전화까지 하다니

정말 훌륭한 후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배는 언제나 그렇듯이

힘찬 말투로 말했습니다.

 

"잘 쉬고 있남~?"

 

불의의 일격을 당했습니다.

다리가 휘청거립니다.

 

전 눈이 획 돌아갔습니다.

"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진짜 죽여버린다~~~!!!!!!!!!!"

 

그 후 소문이 좀 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전화 온 두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생이 많지?"

"요즘 니가 모든 남자들의 공적이 되고 있다며?

그러면 안 돼 임마~헤헤 농담이고, 정말 잘 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젖병으로 젖 먹이기

미루가 깨더니 웁니다.

 

생각 보다 좀 일찍 깼습니다.

 

밥 먹을 시간이 거의 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잘 것 같기도 합니다.

 

안아줬다가 내려 놓으면 울고

달래줘도 내려 놓으면 다시 웁니다.

 

인제는 무조건 빨리 젖을 먹여야 합니다.

 

주선생님은 사무실에 갔고

미리 짜서 냉동실에 넣어놨다가

간 밤에 냉장실로 옮겨 놓은 젖이 있습니다.

 

미루를 안은 상태에서

젖병을 꺼낼려고 싱크대 위쪽 문을 엽니다.

 

문 아래쪽 연결 부위가 팍 떨어져 나갑니다.

제기랄, 별 일이 다 생깁니다.

 

문과 싱크대 본체를 연결한 나사가 풀어졌나 봅니다.

 

젖병을 꺼내는데

하여튼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바닥에 떨어뜨립니다.

 

미루는 무거워 죽겠는데

젖병을 소독해야 하고,

젖은 따뜻하게 해서 먹기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앞이 캄캄해집니다.

 

다시 재워볼까 생각도 하지만

안 될 짓은 안 해야 합니다.

 

일단 미루를 다시 바닥에 내려 놓습니다.

 

"으아아앙~~"

 

미루는 눈두덩이 빨개지면서

다시 울기 시작합니다.

 

혹시 안 울까 하고 공갈 젖꼭지를 물려보지만

확 뱉어버립니다. 성격이 저런 건 아니겠지..생각합니다.

 

애벌레 인형을 던져 줍니다.

다행히 안 웁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부엌으로 막 뛰어가서

가스렌지 불 중 제일 센 쪽에 

물을 올려 놓습니다.

 

"끓어라, 끓어라~~"

 

안절 부절, 왔다 갔다..

미루와 부엌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합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

물 정말 더럽게 안 끓습니다.

 

미루는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미루야~~미루야~~아빠 여기 있어~~"

멀리서 말로만 안심시킵니다. 효과가 없습니다.

 

얼레! 딸꾹질을 합니다.

기뻤습니다.

미루는 원래 딸꾹질을 하면 안 웁니다.

 

어제까진 그랬습니다.

 

오늘은

딸꾹질을 하면서도

울음을 안 멈춥니다. 이런 모습 처음입니다.

 

매우 많이 배가 고픈 게 확실합니다.

 

하지만 물은 계속 안 끓습니다.

'왜 수돗물에서는 끓는 물이 안 나오는 거야..'

 

다시 미루한테 달려가서

애벌레 인형 대신

주사위 인형을 던져주고

 

부엌으로 갔습니다.

물이 조금씩 끓기 시작합니다.

 

살면서 끓는 물에

이렇게 정을 느껴보긴 처음입니다.

 

미루쪽을 한 번 쳐다봤습니다.

옆으로 치웠던 애벌레 인형을 끌어다가

입으로 빨려고 합니다.

 

"빨면 안돼~~~~! 드러워~~"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고

 

손으로는 집게로 젖병을 집습니다.

 

끓는 물에

넣었다 뺐습니다.

 

"윽..."

뜨거운 젖병을 그냥 손으로 콱 잡고

젖 보관 팩에 담긴 젖을 부었습니다.

 

이 놈의 팩은 또 왜 이렇게 안 열리는지

5초쯤 혼자 난리를 치다가

그냥 가위로 입구를 잘라 버렸습니다.

 

자, 이제

미루 한테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젖병에 담긴 젖을 뎁혀야 합니다.

 

어휴, 정말..

땀이 삐질 삐질 납니다.

 

미루는 엄청 울어댑니다.

 

할 수 없이 따뜻한 물을 틀어서

젖병을 담그고

미루한테 달려가서 안아줍니다.

 

안고, 뎁히고...왔다 갔다..

 

전화까지 옵니다.

 

"나중에 전화 드릴께요~~"

 

겨우 젖이 적당한 온도가 됐습니다.

 

"미루야, 인제 됐다~ 젖 먹자..

미안해..내가 좀 빨리 준비 했어야 하는데.."

 

미루를 왼손으로 받쳐들고

오른손으로 젖병을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인제 안심이 되었습니다.

미루가 꿀꺽꿀꺽 젖을 잘 받아넘기기만 하면 됩니다.

 

어제 밤에 미리 연습했었는데

아주 잘 먹었었습니다.

 

오늘은

끝까지 젖병을 안 물었습니다.

 

한 시간 내내 실랑이 하다가

결국은 주선생님이 사무실에서 돌아와서

젖을 물렸습니다.

 

심장 떨리는 하루였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7-사위와 며느리

결혼식장에서

우리가 발표한 평등부부 서약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같이 일하고 같이 쉰다'입니다.

 

그거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진짜 고민 많이 해서 썼었습니다.

 

지금은 그 서약서가 어디 있는지

심혈을 기울여서

집안을 뒤져봐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정신만은 생활 속에서 지킬려고 노력 많이 합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두 사람만 놓고 보면

그럭저럭 평등합니다.

 

그런데

각자의 가족이 끼어들면

불평등이 생깁니다.

 

대표적인 불평등이

저는 '사위'이고 주선생님은 '며느리'라는 점입니다.

 

저는 사위로서

양쪽 집 어딜 가도 편하게 있고

 

주선생님은 며느리로서

두 군데 모두에서 큰 의무를 부여 받습니다.

 

장인 어른은

주선생님만 보면

시댁한테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한 번은

아르바이트 해서 돈 벌었다니까

"시어머니한테 전화 드려서, 돈을 벌었는데

옷 한벌 사드릴까요?라고 말하고 옷 사서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어디서 돈이 났다면

어머니는 "어이구, 너도 돈 벌 때가 있냐~?"라고 하시지

장모 옷 한 벌 사드리라고는 안 하실 겁니다. 

 

한 번은 어찌어찌 해서

어머니께서 정색을 하고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너, 설마 처가집 가서 설거지 하는 거 아니지?

절대 하면 안된다..절대..!!"

 

36년 동안

이 날 어머니 표정이

제일 무서웠었습니다.

 

이미 처가집에서

설거지를 몇 번 한 뒤였습니다.

 

주선생님은 저희 어머니가 살아 오신 얘기를 듣고

같은 여성끼리 연민의 정이 생겨서

결혼 초기에 자주 전화를 드렸었습니다.

 

그러다 전화가 뜸해 지니까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야...요새는 현숙이가 시어머니한테 전화도 안 하더라..?"

 

며느리가 전화하는 걸

일종의 의무로 생각하고 계신 듯 했습니다.

주선생님은 당연히 상처 받았습니다.

 

물론 처가집에서는

제가 전화 자주 해야 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추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박 2일로 들른

처가집에서

 

저는 이틀 내내 책만 봤습니다.

매일 제가 밥 하다가

장모님이 밥 해주시니까

아~정말 좋았습니다.

 

게다가 미루도 어른들이 봐주시니까

전 그냥 이 방바닥 저 방바닥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주선생님 차례입니다.

 

주선생님은 시댁에 가서

방바닥에 등을 붙일 새가 없었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강행군입니다.

 

여기 저기 인사다닐 곳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는 편한 편입니다.

미루 보느라고 예년만 못했지만

그래도 주선생님만큼 힘들진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불편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6-어머니 이야기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

무릎 수술을 하신 할아버지

 

두 분 저녁 식사를 위해서

예순이 다 돼신 어머니께서 매일 저녁 마다

큰 집에 가십니다.

 

할머니는 젊으셨을 때

어머니한테 참 시집 살이를 많이 시키셨는데

 

지금은 그 커다란 집에 두 분만 계시니까

어머니가 기다려지시나 봅니다.

 

올해 초 쯤의 이야기입니다.

 

퍼붓는 눈을 뚫고

어머니가 겨우 큰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께서 "아이고, 왔냐~~" 하시면서 반갑게 맞으셨답니다.

 

그 뒤에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추워~문 닫어~!!"

 

어머니는 이런 분위기에서

한 끼에 30인분씩 밥을 하시면서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어머니 몸에 익은 건

'끝까지 참고, 다 해내기'입니다.

 

이런 성격이 일은 잘 하지만

자기는 몸도 상하고 마음은 더 상합니다.

 

그 짓이 십년 넘어가면

인생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금도 이러고 계십니다.

 

이번 추석에는 어머니와 함께 항상 손발을 맞추던

작은 어머니 한 분이 암 수술을 받으셔서 못 오시게 됐습니다.

 

작은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이번에 작은 어머니가 못 오시게 될 것 같은데 큰 일이라고 이야기하니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답니다.

 

"그럼, 혼자 장만하면 되지 뭐.."

 

여기서 혼자 하시는 분은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가 30몇 년 전부터

속에 차곡차곡 키워 놓은 숯덩어리가

이번 추석에도 역시 조금 더 커졌습니다.

 

인제 몸 안에는 더 쌓아 놓을 데가 없어서

요새는 자꾸 몸 밖으로 나옵니다.

 

추석날 저녁에 우리는 집에 모여서

어머니가 할아버지 험담하시는 걸

열심히 들어줬습니다.

 

이럴 때 하는 험담을

속세에서는 물론 뒷다마라고 합니다.

 

뒷다마는 영혼을 맑게 해주는 기능을 하지만

현재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기능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날 어머니의 뒷다마를 신나게 들었습니다.

 

"내가 진짜 스트라이크를 하고 싶어.."

 

느닷없이 영어를 쓰십니다.

그냥 파업이라고 하지.

 

스트라이크로부터 시작된 어머니 이야기는

이번 추석을 둘러싸고 진행됐던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과 투쟁으로 번지면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펼쳐졌습니다.

 

저는 맞장구를 쳤습니다.

 

"파업 한 번 하세요..정말 한 번 해야 돼..."

 

주선생님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게 왜 이 집안에 시집 오셨어요..."

"그땐 결혼하면 그렇게 되는 지 몰랐지..."

 

결혼하면 그렇게 되는 지 몰랐다는 건

몇 달 전에 결혼한 제 바로 아래 동생의 부인

그러니까 제수씨가 추석날 주선생님한테 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에 추석 때는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다니고 그랬었는데...

결혼하면 이렇게 달라질 지 몰랐어요...진짜 힘드네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진 게 없습니다.

 

1시간 넘게 진행됐던

어머니의 뒷다마는

예전에도 몇 번 그랬던 것처럼

행동으로 이어지는 어떤 계획을 세우진 못하고

그냥 끝났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차가 광명역을 지나는 데

갑자기 저녁밥 어떡하나 걱정이 됐습니다.

 

"안 그래도 어머니가 저녁 때 먹으라고 묵 싸주셨어.."

"어..그래? 히히.."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묵 주시면서?"

"뭐라고 하셨는데?"

"밖에 나갔다 오면 여자들은 저녁 걱정이 제일 먼저 든대...그러면서 묵 가져가라고 하시더라.."

 

주선생님이 산모인 동안에는

제가 식사 당번이니까

그런 얘기는 저한테 했어야 했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절대 안 그러셨을 겁니다.

 

오랫동안 며느리의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밥하는 꼴은 못 보십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어머니 얘기를 좀 더 듣고

제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제대로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주선생님은 벌써 시작한 게 있습니다.

 

명절때 마다 주선생님은

양말이나 덧신 같은 걸 사가지고 가서

숙모, 외할머니, 어머니 등등 여자들끼리 모인데서 풀어놓습니다.

 

주선생님 특유의 '여성끼리 연대하기' 작전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5-노력 그리고 고생

"상구,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응...그래.."

 

집에 내려가기 전 날 밤

주선생님이 저한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어머니한테 괜히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걸 설명하지 말고

혹은 강변하지도 말고

 

대신 어머니한테

"어머니도 같이 식사하세요~"라고 말하고

 

자연스럽게 남자와 여자가 같이 식사하는 분위기부터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싫다고 할 걸?"

"그러면..인제 어머니도 그럴 위치 되셨으니까

같이 식사하시자고 하자..응?"

 

전 주선생님 말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상구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친절하게 잘 하면서

부모님한테는 꼭 설명하고, 설득할려고 하고 그러더라..

그래 가지고 맨날 싸우고, 분위기 안 좋아지고 그러잖아.

이번에는 그냥 편하고 자연스럽게 ..알았지?"

 

사실 지난 설에는

시골에 내려갔다가 외가에 들렀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가 부엌으로 당당하게 진격을 했었습니다.

설거지라도 할 참이었습니다.

 

"남자도 부엌일 같이 해야죠..언제까지 숙모들만 일하시게요..."

 

잠시 파문이 일었습니다.

거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외숙모들 중 한 분은 좋아서 박수치시고

또 한분은 저를 말렸습니다.

 

외삼촌 중 한 분은 "야...니가 그러면 우리는 어쩌라고.."라고 하셨고

두 분은 그냥 황당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외가에서도 저는 큰 외손자입니다.

제가 뭘 하면 사람들이 아예 무시하진 않습니다.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하나 몰라할 때

어머니께서 한마디로 정리하셨습니다.

 

"상구 너 저리 안 가~~?!!!"

 

이번 추석에는 확실히

좀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계획이 다 틀어졌습니다.

차례상 준비는 몇 달 전에 결혼한 제 남동생이랑 제수씨가

이미 다 끝내놓은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미루한테 매달려 있느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추석날 아침,

제사가 끝나고 식사 시간이 됐습니다.

 

항상 그런 것처럼

남자들은 다 모여서 밥을 먹고

어머니는 남자들 밥 다 먹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선생님, 제수씨 등은 배가 고파서 울상입니다.

 

전,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약속했던 대로 해야지...'

 

"상구 넌 왜 밥 안 먹고 부엌에서 얼쩡 거려..?"

"네? 아..저기 저 숟가락이 없어가지고..

근데, 어머니.."

"왜?"

 

그 말 한번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습니다.

그리고 힘을 잔뜩 줘서 얘기했습니다.

 

"어머니도 밥 같이 먹어요.."

 

어머니는 더 힘을 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 빨리 가서 밥 먹어.."

"네..."

 

결국 이번 추석에는 부엌일도 따로 못하고

어머니를 남자들 밥 먹을 때 상으로 오시게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제가 미루를 하도 열심히 보니까

뭔가 감을 잡은 듯 주선생님한테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우리 아들 그만 좀 부려먹어라..."

 

주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런 일 다 같이 할 줄 알고 결혼한거예요.."

역시 씩씩한 주선생님입니다.

 

추석날 밤

하루 내내 시달린데다

오랜만에 4시간쯤 걸려서 외할아버지 산소에 갔다 오느라고

완전히 녹초가 됐습니다.

 

햇볕이 비쳐서 후끈해진 차안에서

미루를 안고 왔다갔다 하는데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쑤셨고

주선생님은 거의 절망적인 편두통이 왔습니다.

 

추석이 끝나고 인터넷에 보니까

'성균관 유림도 명절엔 남자가 부엌일을 도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그 기사를 출력해서 다음 설에 가져갈까 생각 중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4-미루, 인기 끌다

주선생님의 시댁에 내려갔더니

어머니께서 미루 전용 요와, 이불 그리고 베개를 사 놓으셨습니다.

 

이불과 요가 참 이쁩니다.

 

제가 태어나고 12750일 동안

덮고 잔 모든 이불 보다 이쁩니다.

 

미루가 태어난 지 140여일만의 쾌거입니다.

완전 호강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큰 집'으로 갔습니다.

부모님 집과, 큰 집은 200미터쯤 떨어져 있습니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십니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시고,

할아버지는 최근에 무릎 수술 후 회복 중이십니다.

 

두 분 입장에서 최초의 증손주이자

6대 장손인 미루가 안 이쁠 수 없습니다.

 

"어이구, 우리 애기...이리와..한번 안아보자..."

 

저는 순간 멈칫했지만

할머니께 미루를 건네줬습니다.

 

매우 과감한 행동입니다.

 

할머니는 치매에다가

몸에 힘까지 없으셔서 평소에

무거운 걸 잘 안 드십니다.

 

그래도 마음은 따뜻해졌습니다.

몸은, 팽팽히 긴장됐습니다.

 

"근데, 애기 몇 달 됐냐?"

"네달이요, 할머니.."

 

"아이고, 이 놈의 자식~!! 또렷또렷한 거봐..

애는 이래야 명이 길어..."

 

보통 어른들은 애가 총명하게 생겨서

공부를 잘 하게 생겼다든가

엄마 말 잘 듣게 생겼네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미루가 만수무강하기를 비십니다.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

 

"애기 몇 달 됐냐?"

"네달이요.."

 

옆에 계신 할아버지가

토를 다십니다.

 

"하이고..물어본 거 또 물어보기 시작하네..

방금 두번째 물어봤으니까 앞으로 10번은 더 물어볼 거다.."

 

미루는 처음 뵙는 분들 앞에서

좀 잘 보이려는 지 얌전히 있습니다.

 

"애기가 차~암 순하네..즈그 아빠 닮아서 순한가 보네..

근데, 애기가 몇 달 됐냐?"

"네달됐어요. 할머니..."

"인제 9번 더 물어볼 것이다.."

 

"할아버지 무릎은 좀 어떠세요.."

"무릎.? 전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멀리는 못 다녀.."

"네..운동은 계속 하시죠?"

"상구야, 애기 몇 달 됐냐?"

"앞으로 8번 남았다..."

 

다음날이 됐습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미루한테

집에서 제일 이쁜 옷을 입혔습니다.

 

미루와 그 일행이 큰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바글바글 모여 있는 친척들이

환호와 함성을 지르며 우리를 맞이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서 그렸습니다.

 

아,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광경입니다.

 

그 중에는 틀림없이

상구가 인제 사람 구실했다고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미루를 데리고 큰 집으로 갔습니다.

바람도 상쾌한 아침입니다.

드디어 큰 집 대문을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왔습니다.

 

생각보다 날씨가 덥고 미루가 싫어해서

이쁜 옷을 다 벗기고, 그냥 집에서 입던 걸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러고도 한참 있다가

친척들이 하나둘씩 모이긴 했었는데

올해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별로 안 왔습니다.

 

꿈에 그리던 환호는 전혀 없었습니다.

소리지르는 건 미루 뿐이었고

할머니만 부지런히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즈그 아빠는 용해 빠졌는디...이 놈은 울락불락허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미루가 계속 떠듭니다.

 

"즈그 아빠는 용해 빠졌는디...이 놈은 펄렁펄렁허네...

상구야, 애기 몇 달 됐냐..?"

 

저는 순한데

미루는 안 순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 모인 몇 안된 친척들은

그래도 오며 가며 미루를 이뻐해주셨습니다.

 

전엔 안 그랬는데

갑작스레 용돈을 주시는 분이 계셨고

주선생님은 어머니한테서 옷을 얻어 입었습니다.

 

아마도 미루가 한몫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쁜 짓은 미루가 하고

이익은 우리가 챙겼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3-'시댁'가는 길

처가집에서 이틀을 보내고

'시댁'으로 출발했습니다.

 

천만 명 사이에 끼어서

셋이 잘 왔다갔다 할려면

 

무엇보다도

각오가 단단해야 했습니다.

 

결혼 하기 전 추석엔

서울에서 전북 김제까지

온갖 별스러운 방법으로 내려가곤 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외버스 10대 갈아타고 내려가기는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중심으로

시외버스를 계속 갈아타고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동네가 나왔었습니다.

 

여행하는 셈 치고

슬슬 내려가면 됐었습니다.

 

근데 미루를 이렇게 데려가는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기차타고 내려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몇 달 전에 새벽부터 부지런 떨어서

기차표를 구했었습니다.

 

미루는 태어난지 150일도 안돼서

그 매우 빠른 기차, KTX를 타게 되었습니다.

 

아기띠로 미루를 메고

한 손엔 2박 3일 생활용품이 가득한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다른 한 손엔 이것 저것 넣은 빨간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엔 그러고도 넣을 게 더 있어서 가방을 하나 더 들고

마지막 한 손엔 선물 보따리를 들고

 

용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상구, 내가 먹을 거 사올께..여기서 기다려..."

"응"

"이 짐들은 일단 다 들고 있을래?"

"알았어...후딱 갔다와.."

 

손 네개에 들었던 짐이

저한테 다 모였습니다.

 

주선생님은

가게를 찾아서, 군중 사이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미루가 울까봐

몸에 미세하게 바이브레이션을 주고

 

두 개 밖에 없는 손을

어떻게 잘 써서

짐 네개를 다 들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한 젊은 남자가

껌을 씹고 서 있었습니다.

인상이 참 안 좋은 남자였습니다.

 

부러웠습니다.

그 남자는 짐이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앞에서

제 옆에서, 혹은 저를 스치면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합니다.

 

갑자기 슬퍼집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어디로든 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니 맘대로 가봐라"라고 해도

짐도 많고 애까지 딸려 있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상구~도너츠 사왔어..어서 가자.."

"어? 왔네...그래..가자"

 

KTX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고맙게도 고통이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루가 보채서

두 사람이 한 시간씩 안고 있었습니다.

 

꼭 이럴 때 똥을 있는대로 싸서

냄새에 둘러싸인 미루를 안고

3번 칸에서 8번 칸까지 뛰다시피 갔습니다.

8번칸은 기저귀 교환대가 있는 칸입니다.

 

명절엔 KTX에도 입석이 있어서

8번칸 까지 사람들을 헤치고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배도 고파했는데

모유수유실은 그 긴 KTX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싸는 건 되도 먹는 건 안된다는 건지

아니면 아무데서나 내놓고 먹이라는 건지

어쨌든 모유수유실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탄 칸에만 해도

젖먹을 만한 아이가 셋이 있었습니다.

 

"야...젖 안 멕였냐? 오자 마자 젖부터 멕이네.."

"네.."

"젖 먹이는 데 없대?"

"그런 게 있으면 복지국가게요..."

 

하여튼, 젖먹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식사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엄마들이 주고객인 백화점 말고,

아무데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엄마들은 서점에 가서 책을 볼 수도 없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수도 없습니다.

 

천 몇백만이 본 영화를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그 중 상당수는 '산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댁'으로 내려가는 길은

처음부터 험난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2-어른들의 구박

하여튼 어른들 많은 데 가면

참 구박을 많이 받습니다.

 

"이거 봐, 이거 봐~애를 맨날 누워만 키우니까

다리에 힘이 없지..얘가 이럴 애가 아니야..어이구, 어이구~그래, 그래~"

 

처가집에서 이틀째날 어른 세 분이서

미루를 세워서 들었나 놨다 합니다.

 

"자기들 힘들다고 계속 눕혀서 키우면 되나,

인제 보행기도 좀 태우고 그래야지..."

 

우리가 공부하기로

보행기를 태운다고 애가 특별히 빨리 걷는 건 아니랍니다.

 

"하여튼 8달 되면 걷기 시작해야 하는데

계속 이러면 안돼..."

 

주선생님은 어릴 때 8달 돼서 걸었답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 마자 걷고

사람은 좀 늦게 걷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주선생님은 좀 일찍 걸었습니다.

주선생님 집안이 다 그렇습니다.

 

대개가 8달, 9달째에 걸어서

자기 돌잔치 날에는 떡들고 날랐답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같은 말을 세번 들으니까

슬슬 속이 타들어갑니다.

 

미루는 아빠 닮아서

남부럽지 않은 허벅지를 자랑합니다.

 

이쁘다고 얼르다가

다리에 얼굴 한방 맞아 보면

다리 힘 없다는 소리 안 할텐데

아쉬웠습니다.

 

저는 맞아봤습니다.

 

그렇게 어른들과 한참 놀던 미루가

두 눈두덩이 빨개졌습니다.

 

저녁 때 실컷 잤지만

아침 나절에 실컷 놀고 또 잘 시간이 됐습니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합니다.

 

"아~밤새 재워놓고, 뭘 또 재울라고 그래?"

 

주선생님,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피곤해 해서 재워야 돼요..."

 

겨우 재웠습니다.

밖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에 10분만에 깼습니다.

 

"거 봐라~! 안 잘려는 애를 재우니까, 금방 깨잖아.."

"아니야, 할머니~재워야 돼요..."

 

우는 미루를 장모님이

안고 나가셔서 왔다갔다 하십니다.

 

"저게 무슨 졸린 애 표정이야..안 잘려는 구만..."

 

주선생님의 외할머니

재차 주장하십니다.

 

"저 눈 초롱초롱한 거봐..근데 뭘 재운다고..."

 

장인어른이 가세하셨습니다.

 

주선생님 더욱 완강하게 반응합니다.

"재워야 한다니까~~~!!!"

 

저도 입술을 굳게 다물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

 

TV를 켜고, 미루한테 보여줍니다.

 

"TV도 잘 보네...잘만 노는구만.."

"아빠~!! 안 그렇다니까...재워야돼요..."

 

저는 더욱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선생님을 응원했습니다.

 

"............"

 

 

5분이 지났습니다.

 

미루는 피시방에서

이틀밤샌 청소년 얼굴이 됐습니다.

 

모두가 TV에 집중하고 있는데

장인어른이 가볍게 한 마디 하십니다.

 

"저렇게 잘 노는 애를..뭘 재운다고..."

"........................"

 

"이리와 봐~할아버지가 안아줄께..어이차...

어이구..울지도 않고, 이런 애를 왜 재워..."

 

저는 입술을 굳게 다물어서

주선생님을 응원하는 거 말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심호흡을 깊게 한 다음에

같은 소리를 몇 번 들었는지 세어봤습니다.

5번째인가 6번째입니다.

 

이제 미루는 울기 시작합니다.

"흐으..흐으..으..흐응..흥..으아..으아.."

 

"야~미루 오줌 쌌나보다..기저귀 좀 봐주라.."

 

장인어른,

결정적인 순간에 미루를

우리한테 떠넘깁니다.

 

"아이구, 인제 나가봐야겄다.."

 

미루를 못 재우게 하는데 선봉에 섰던

할머니께서 인제 나가신답니다.

 

"나도 요 앞에 좀 나갔다 와야 돼.."

 

장인어른도 일어서십니다.

 

두 분이 나가시고 나서도 한참 동안

미루는 계속 울었습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마음 속으로 울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석 이야기 1

추석을 맞이해서

처가집에 1박 2일로 갔다 오기로 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는 평소대로 멍하게 있고

주선생님은 이리 저리 움직이며 부지런을 떱니다.

 

"일단 청소를 해야 해.....갔다 왔는데 집 지저분하면 짜증나잖아...."

 

주선생님,

진짜 열심히 청소를 합니다.

 

저는 천천히 설거지하고

가습기 물 빼놓으면서 대충 시간을 때우는데

 

그러다 잠깐씩 눈을 돌려서 보면

주선생님은 공부방을 쓸고 있고

 

또 몇 분 있다 눈을 돌려 보면

거실을 닦고 있고

 

또 얼마 있다 보면

그새 짐을 싸고 있습니다.

 

 

"이 반팔은 가져갈까? 집에 있을 때 입히게..?"

"그러자~!!"

 

"동생이 사 준 긴팔 옷도 가져가자.."

"그래~~"

"거기서 출발할 때가 밤이라 좀 두꺼워도 괜찮을거야, 그치?"

"응..."

 

원래부터 어딜 가면

짐 싸는 건 항상 주선생님이 합니다.

 

가끔 제가 싸기도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면 

안 가져와도 될 물건들이 산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서

주선생님 스스로도 자기가 짐 싸는 게 편하답니다.

 

저는 그냥 옆에서

추임새만 넣어주면 됩니다.

 

주선생님은 이미 전날 밤부터

미루 옷 중에 어떤 걸 가져가야 할 지

다 생각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버둥거리는 미루를 붙잡고

억지로 이 옷 저 옷 입혀서

뭐가 잘 어울리는 지 미리 다 봐뒀습니다.

 

저는 미루가 좀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상구~먼저 씻을래~?"

"응...사실, 내가 있어 봐야 별로 할 일이 없어.."

"..." 주선생님은 그냥 열심히 짐을 쌉니다.

 

"내가 같이 짐 싸면, 짐이 산으로 갈껄?"

 

먼저 씻기가 미안해져서,

옆에서 괜히 몇 마디 더 하면서 미적거렸습니다.

 

짐을 싸다 보니

한참 동안 두 사람이 자기랑 안 놀아준 걸 깨달은 미루가

보채기 시작합니다.

 

주선생님의 손은 더욱 빨라지고

저는, 제가 빨리 씻고 나오는 게

주선생님 도와주는 일일 것 같아서 얼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출발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맘 먹은 후

1시간 쯤 있다가 겨우 출발했습니다.

 

미루 젖 주고,

안 먹어서 실랑이하고

미루가 달래지길 좀 기다리고

집 마저 치우고

옷 입히고

뭐하고, 뭐하고, 또 뭐하고..

 

그러고 집을 나섰습니다.

 

처가집 1박 2일, '시댁' 2박 3일

대장정이 시작됐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