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즉흥, 당위의 삼박자

2008/09/01 21:33

 

(심심하고 답답하고 정신없어서 엉터리로 쓴 글이다. 읽게되는 사람이 염두에 두어주시길...)

 

 

공정한 인간이 되려고 애쓰고, 또한 나에게만 치우쳐서 사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 하지만

 

나 역시도 독선적이고 나 좋은대로 생각하는 면이 있는것만은 분명하다.

 

 

최근에는 내가 얼마나 나의 인성의 한계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타고난, 그리고 길러진 인성들은 그리 훌륭하지 않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그리고 절실하다고 느끼는 가치들이 매우 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상황속에서 나 역시도 그것들에 무뎌지고 또한 그보다 더 나를 현혹시키고 빛나보이고 편안하게

 

하게끔하는 가치들에 눈알을 번쩍이며 달려드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그래도 결국 그것들 만으로

 

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앞에 말한 절실한 가치들에대해서 민감하게 고민하며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코 행복할수 없으며 딱히 배울것도 없다는 것을

 

26년만 살았음에도 분명히 알게 됬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요즘은 나의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충실해야 할까.

 

즉흥과 당위라는 것이 결국은 서로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위는 의무, 즉흥은 향유

 

라고 생각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즉흥과 당위 둘다를 가져가고 싶다. 나에게는 당위속에서 찾아내어지는

 

과정속의 기쁨이 있고, 즉흥이라는 단어에서 ' 흥' 이라고 붙일수 있는 즐거움이라면 사실 그건

 

내가 아주 넓은 범위에서라도 허용하였고, 시도해보고 싶고 간절함이 조금이라도 있는 ' 진실의

 

당위' 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나야말고 사실 즉흥이건 당위건 그저 부지런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 아래 있지만,

 

요즈음에 깊이 깨닫는 것은 내가 이제껏 다소 당위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나의 깊은 즉흥

 

에 의거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지나친 당위라고 생각하여 왔던 것들은 서서히 가지를 쳐내었고,

 

엑기스라고 생각되는 당위만을 남기며 살아가게 됬을때 그건 아마 즉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좀 추상적이고 정신없지만,  과연 나는 어디까지 내 즉흥을 살려내고

 

그 감정에 충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는 걸까? 내 마음속의 깊은 에너지를 불러

 

올릴수 있는 감정의 촉수를 민감하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나는 사실 즉흥적인 감정들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편한대로,

 

감정대로  행동하면서 그것들이

 

솔직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당히 낮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가치 중립적이며 그 무엇에도 걸러지지 않은 천연의 감정이며 그것을 억제하는 것들은 진실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여기는 경향이 크지만,   사실은 그들의 감정은 여러가지 상황과 이데올로기에 이미 한번 걸려져서 나온 것으로, 결코 완전한 감정 그 자체는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위하여 제도권의 학교, 종교, 가족 등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부정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관습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위하여 더 큰

 

자본이라는 것과 쉽게 결탁하는데에서 자유를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 물질이

 

주는 한도내에서 사람과 인습에게서 자유롭기 위하여 열심히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러나

 

그 방향성을 자신의 욕구와 동일시하면서, '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왜 비판하나?' 라고

 

반문한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 있어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고 본다.  나는 무언가에 대한

 

배움과 충돌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있을수 없다고 보고, 솔직한 정신이란 나오지 않는다고 본다.

 

가장 쉽게 편해지는 길을 자유라고 본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편해지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에 솔직

 

해지는 만큼, 타인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행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행하는 폭력에 대해서 비판할

 

자격이 없게되는 것이다. 그 자신조차도 자신의 자유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면,  그 자신 스스로가

 

오류의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것이 낫다. 

 

물론 요즘의 세상은, 오류에 대해서 아주 관대하다.

 

오류를 지적하기에는 악다구니 치면서 생존해야 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상사나 교수님에게는 솔직한 감정의 표출이 드러나는 경우가 없으면서, 권력관계의 하위에 처해

 

있는 부하직원이나 후배에게는 자주 ' 천연의 ' 감정을  드러내면서 나 자신은 ' 솔직한 사람,

 

거짓을 모르고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 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을 움직이는 로직에

 

대해서 우스울정도로 무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자기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진정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오류와 손쉽게 타협하면서 그렇게 한번

 

타협할때마다 편하게 배에 붙어가는 뱃살에 대해서 냉혹해져야 한다.  나는 과연, 남들이

 

알아차리는, 대중이 지적하는, 나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때에만 나의 오류를

 

점검하는 사람이 아닌지.  아무도 밝혀낸 바 없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관행이라 여겨지는 행동들

 

에 대해서는 오류라기보다는 귀여운 실수 내지는 허술함으로 여기며 그 자체를 자신의 자연스러

 

움으로 타협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말이다.

 

나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만 정의롭고 순수한 사람이 아닌지 말이다.

 

 

요즘 나는 나를 굉장히 칭찬하고 긍정해주려고 애쓰면서 살고 있다.

 

이제껏 별로 그렇게 살아온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내면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사실상 내가 내 배의 뱃살을 늘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거침없이 살아가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어떤 원칙도 없이 그저 편하게 살면서, 그걸 나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합리화 하면서 사는것이 아닌지.

 

 

그러다보면 결국 나에게 하나 남는것없을텐데 말이다.

 

정의롭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명제가 닭살돋기 때문에 내던져버리면서, 그 당위가 주는 무게를

 

피해버리려고 하는건 별로다.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겸손한척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비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거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움직이는 비겁한 로직에 대해서 민감하게

 

꿰뚫고 비판하는 사람이 결국은 형편없음을 벗어나서 조금은 순수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정말 나자신의 생활태도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비겁한 로직을 합리화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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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하루 2008/09/03 04:59

    요즘 생각하기를, 저의 최대 단점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건 아닌가....하는 점이예요. 큰애가 학교에 간 지난 시간 동안 주변 사람들하고 이런 저런 불화를 일으켰는데.... 그러면서 알았어요.그동안 나는 항상 삭이고만 살아왔구나...오직 좋은 사람이라는 허명을 위해서...

    그래서 최근엔 싸움도 많이하고 좀 변하려는 중인데...그런 변화가 딱히 나쁘지만은 않은 것같기도 하고...그래요.^^

    perm. |  mod/del. |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