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985년, 막 초딩 딱지를 떼고 중딩이 되면서부터 내게 새로운 친구가 하나 생겼는데, 바로 FM라디오였다. 당시 잠들 때까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팝송과 뮤지션들을 섭렵한 후 다음 날 친구들한테 아는 척하는 게 취미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노래 한 곡이 줄기차게 전파를 타길래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볼 정도가 되었다. 바로 그 노래가 그 유명한 ‘우리는 세계’, 아니, ‘위 아 더 월드’였다.
‘위 아 더 월드~ 위 아 더 칠드런~’ 이 후렴구는 아직 알파벳도 모르던 초딩들도 누구나 따라부를 정도로 그 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TV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그 노래를 배경으로 에티오피아의 기아 난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방영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영국 런던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동시에 장장 16시간짜리 초대형 라이브공연까지 열리게 되었는데, 이름하여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이었다. 비비 킹, 스팅, U2, 퀸, 산타나, 레드 제플린, 밥 딜런 등 당대와 역대를 통틀어 내노라 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140개국의 약 20억 명이 TV로 지켜봤다고 한다. 그 20억 명 중 한 명이었던 나는 공연실황 중계를 보면서 콧등이 아려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프리카의 기아 난민들을 위해 이렇게 전 세계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합창을 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아프리카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 일요일인 지난 2일,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린 듯 20년 전 광경이 다시 눈 앞에 펼쳐졌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기획했던 아일랜드 가수 밥 겔도프가 2005년도에도 역시 공연의 기획자로 나섰고, 취지에 공감하는 유명 뮤지션들이 대거 동참한 것도 똑같았다. 달라진 점은 도쿄, 요하네스버그, 모스크바 등 10개 도시로 늘어났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TV 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공연을 지켜봤다는 정도겠다. 아,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있다. 밥 겔도프는 “20년 전에는 돈만 모아주면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들이 정치적인 정의에 기반해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즉, 아프리카 민중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부자 나라들이 그들의 등에 멍에처럼 지워진 부채를 완전 탕감해주고 보건, 교육,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원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앞으로 또 다른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리카 민중들은 뿌리깊은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서구 선진국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위 아 더 월드’만 되풀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밥 겔도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 명칭도 이번엔 ‘라이브 8’이었다. 이번 주 6일부터 8일까지 영국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스에서 개최되는 선진 8개국 정상회담 G8을 앞두고 선진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아프리카 빈곤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대책을 내놓으라는 압력을 넣기 위한 ‘시위 차원의’ 공연인 것이다.
현재 아프리카연맹 53개 회원국들이 지고 있는 외채는 약 3천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달 G8 재무장관들은 아프리카 15개국을 포함한 18개 세계 최빈국의 부채 400억 달러를 100% 탕감해주기로 합의했다. 또, 앞으로 카메룬, 차드 등 9개국도 포함시켜 총 550억 달러까지 탕감액이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은 빚의 이자만 해도 하루 3천만 달러, 대부분의 국가의 교육, 의료 예산을 능가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나라마다 예산의 상당부분을 이자 물고 빚 갚는 데 쓰다보니 국민들의 빈곤 퇴치, 의료, 교육에 쓸 돈이 없다. 빈곤이 빈곤을 불러오는 악순환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이 짊어진 부채를 완전 탕감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딱한 사정은 알겠지만, 부모 자식 간에도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게 빚이라는데 그걸 어떻게 탕감해주냐고? 아니다. 1970년대 이후 자본의 이익률 감소와 냉전시기 체제경쟁, 무기 판매 등을 위해 서구선진국들은 아프리카에 돈을 끌어다 쓰도록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들여온 돈은 서구 선진국들의 묵인 하에 부패한 독재자들이 호의호식하며 정권을 유지하고, 내전을 치르는데 탕진되었다. 그걸 지금의 아프리카 민중들이 고스란히 떠안은 채 빚에 짓눌려 허덕이고 있다. 즉, 지금의 아프리카의 부채는 서구 선진국들이 만들어놓은 덫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 책임자인 콜롬비아대 제프리 삭스 교수 같은 사람도 “이제 사기극은 그만 두라”며 아프리카 국가들은 부채를 갚을 필요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들의 국민총생산 총액은 연 30조 달러, 미국 한 나라가 이라크를 침공하고 무기를 개발하느라 쓰는 국방비만 한 해 5천억 달러다. 지금 세계는 ‘빈곤을 역사 속으로 (Make Poverty History)' 보내버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돈과 자국의 이익보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더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과 의지가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최재훈 국제민주연대 상임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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