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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할머니의 풍물패


어렸을적 외할머니는 풍물패의 일원이셨습니다. 징이며 꽹가리며 갖가지 민속악기를 꽃모자 쓰고 흥겹게 두들기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벌써 어언 10년하고도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손에 잡힐듯 그 영상이 파노라마 같이 펼쳐지곤 합니다. 할머니, 그리운 우리 할머니. 젊었을적부터 여장부라는 소리를 들으실 정도로 당차시던 우리 할머니. 바로 그 할머니의 소리를 오늘 듣게된 것 입니다. 그때 진해 바닥이 떠나갈새라 신명나게 울려 퍼지던 그 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듯한 소리의 울려 퍼짐에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응원꾼 노릇을 톡톡히 하던 그 시절 기억이 떠올라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잠시 그들과 함께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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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에게 심판을 서민에게 관용을...

* 민중언론 참세상[“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에 관련된 글.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그럴듯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다수의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위정자들의 포플리즘적 발상으로 늘상 떠들어댄게 바로 그거 아닌가요? 그러나 막상 그들이 집권하고 나면......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던가요?? 사실 이 말 만큼 사기성이 농후한 구호가 또 어디 있을까요? 솔직히 얘기해서 말이 좋아 세금이고 복지지 중요한건 부자들에게 돌아갈 몫은 전혀 줄지 않은채 변함이 없다는겁니다.. 물론 서민복지 역시 제자리 걸음이고요!! 그렇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요??

이젠 그런 선동적 구호 다 때려 치읍시다..

대신 서민에게 칼 같이 들이대는 추상 같은 법을 그들에게도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이대라는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은 과연 정당한지 한번 까발려보자는겁니다. 국세청-검찰-경찰, 그 막강한 조직을 거느린 권력기관은 괜히 존재합니까? 바로 이럴때 써 먹으라고 주권자인 백성이 그들에게 권력을 내준겁니다. 도리어 백성들을 '짓밟으라고, 수탈하라고 그들에게 쥐어준건 아니다' 이겁니다. 부는 어디 하늘에서 뚝 하고 거저 떨어집디까? 그게 다 소비자 쥐어 짜고  노동자 몫 착취하고 환경 유린할 뿐만아니라 그런 짓을 국가권력의 비호 속에 아무런 꺼리낌 조차 없이 외려 당당하게 해서 축적하는 자본. 그게 과연 정당한걸까요? 다른건 아무것도 바라는거 없습니다. 단지 이런 싸가지 없는 짓만큼은 제발 하지마라 이겁니다..

그러니 이런 판에 뭔 놈의 복지가 필요합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난하게 살라고요?  아~서세요... 제발 그 짓 만큼은 절대 사양하겠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바라야 하는 세상은 그게 아니라 돈 없이도 행복한 세상 입니다... 어디서 감히 돈이 주인 노릇을 할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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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모르고 이어지는 줄줄이 비엔나?


[원본 메시지]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심은 참 소름 돋도록 끔찍함 그 자체다. 도대체 이 많은 차들은 도대체 어디서 다 온 것일까 특히 오늘같이 눈이나 비가 내리는 날에는 정말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 난장판을 만들기 일쑤인데 이런 날에는 진짜 화가 나다 못해 아예 분노가 치밀어 괜히 그들을 적으로 삼아 전쟁이라도 한판 벌리고 싶을 정도다. 왜 대테러작전의 일환으로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부터 지구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악의 근원을 뿌리째 섬멸함으로서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는 선제적 공격 말이다. 이러면 괜히 오버하다고 시비거는 이도 있을듯 싶지만 글쎄... 일단 자전거를 타고 그들의 행렬에 동참해 보시라 피해자가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한지 가해자인 범죄자가 피해자로의 입장을 바꾸어봄으로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듯 마찮가지로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도 지금 당장 핸들을 놓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전거를 타 보기 전에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결코 알지 못하리라...검은 악마의 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엔진으로 대지를 마구 휘젓고 다니는 이들에겐 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사소한 생채기에도 올곧게 지나지 못하고 오들! 오들 흔들리고 여기저기 튕기짐을 당하는 한 없이 약한 존재지만 그래도 그들처럼 힘으로 맞서지 않고 길에 자신을 맞춘 채 갓 걸음마를 뗀 아이가 한 걸음씩 아장아장 내딛는 발자욱처럼 사뿐히 키스를 하듯 부드러운 감촉으로 대지와 하나되는 동그란 바퀴. 네가 아프거나 다치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조심에 조심을 다하여 정성과 사랑으로 대할때라야 우정을 나누며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진정한 벗이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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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형'사립고가 왜 문제가 되지?

이명박 서울시장이 또 다시 정국을 들쑤셔놓았나 싶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찬찬히 되짚어 보니 자립형사립고를 가지고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티격태격하는데 소위 진보개혁진염 주장처럼 그것이 귀족학교가 되어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건 도대체 뭔 소리인가? 기실 자립, 자존, 자활, 자생과 같은 `스스로 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인간의 존엄을 극대화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것으로서 도리어 진보진영이 쌍수들고 환영해야할 것 아니었나? 그런데 어인일인지 서로 입장이 뒤바뀌는 주장만을 일삼으니 당췌 혼란스러워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학교는 자립형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통해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교육행정 체계에서 벗어나 각급 학교단위의 각 구성원(교직원,학생,학부모 아니 더 나아가 지역사회)이주체가되어 책임있는 교육을 함으로서 학교가지금과 같은 교육파탄 상태에 놓여져 선생은 우주에서 제일 좋은 직장을, 학생에겐 밤에 학원을 이용하고 피곤한 몸을 풀어줄 수 있는 여관이나 여가시설쯤으로 여기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만은 어떻게해서든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재정을 지원하면 관의 통제가 불가피하다고들 하는데 그거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어차피 학교 구성원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성한게 예산일진데 왜 관료들이 마치 제 주머니에서 꺼내 인심을썼기라도 한듯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려 드나? 관료는 행정사무를 대리해서 관장하는 대리인일뿐이다.그런데 주객전도,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군림하려들 수가 있단 말인가...물론 공공의 재정을 사용하는만큼 어느정도 감시와 견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근에 개정된 사학법이나 기업의 사외이사 제도처럼 시민사회내에서 덕망있는 유능한인물중 학교를 구성하는 제 주체의 동의하에 선임할일이지 정부당국이 개입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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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도시의 암세포다"

▲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
박용남 지음. 시울 펴냄. 1마6000원
‘엘도라도의 땅’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거리엔 초록빛 활기가 넘친다.

안데스 산맥의 해발 2640m 고원 위에 있는 이 도시의 도로는 일요일마다 7시간 동안 자동차 아닌 사람 천국이 된다. 간선도로의 자동차 통행은 금지되고 온통 걷고 달리는 사람들, 자전거 이용자와 롤러스케이트·인라인스케이트 이용자들이 그곳에 넘쳐난다. 이때마다 150만명의 시민이 몰려나와 ‘속도’가 사라진 텅빈 공간을 느릿한 산책과 달리기로 채운다고 한다. 이름하여 1982년부터 내려온 ‘사이클로비아’란 도시 전통이다.

보고타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도시’

‘사람이 1순위, 자동차는 2순위’를 꾀하려는 교통정책들은 보고타에서 자주 눈에 띈다. 가장 붐비는 평일 출퇴근 시간대엔 시 전체 자동차의 40% 가량이 달릴 수 없다. ‘피코 이 플라카’라는 강력한 부제운행 체제가 모든 개인 자동차 소유자에게 월~금요일 중 이틀씩 차를 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차 없는 날’ 풍경은 또 얼마나 색다른 감동을 세계인들에게 전해주었던가. 2000년부터 보고타에선 한해 중에 하루를 잡아 ‘차 없는 날’을 선포하고 거의 모든 시민이 이날 자동차를 집에 두고 걷거나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또는 시가 공식 허가한 일부 버스와 택시를 타고 직장과 학교를 오가거나 쇼핑을 하러 다닌다. 2000년 2월24일 첫 행사의 참여율은 무려 98%였다. 이날은 ‘교통사고 사망자 없는 날’이기도 했다.

박용남(52)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이 최근 낸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시울 펴냄)는 자동차 우선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쉽게 상상하기도 힘든 색다른 세계 도시들의 풍경을 보여준다. 보고타 외에, 지난 2000년 <꿈의 도시 꾸리찌바>(녹색평론사)에 소개된 브라질의 녹색도시 꾸리찌바와 핀란드 헬싱키, 일본 오이타현 등이 이 책에서 다뤄진 녹색교통의 도시들이다. 신행정수도와 여러 도시 개발계획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는 요즘의 이 땅에서도 한번쯤 제대로 보고싶은 녹색 사례들이기도 하다.


지은이의 관심은 도시 개발과 계획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교통정책에 쏠려 있다. 그리고 자동차를 우선하는 지금의 우리 문화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같은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대전환’이라 함은 낡은 생각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확 바꾸라는 건데, 낡은 것이란 도로만 더 많이 더 넓게 건설하면 교통혼잡이 해결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고(허리띠를 늘린다고 비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것이란 인간 존엄성이 살아 있는 녹색도시가 지속가능한 살 길이라는 얘기로 요약될 만하다.

자동차 문화는 도시 자체를 퇴행시키고 빈부에 따른 삶의 양극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도시의 자동차들이 계속 늘어나면 길을 넓히고 주차장을 세우느라 대규모 공공투자를 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다수 시민들의 통행은 더 어려워지고 교통혼잡과 대기오염은 가중한다. 다시 더 많은 도로와 시설이 필요하다. 간선도로, 주차장, 고속도로, 육교, 지하도…. 불법주차는 불가피해지고 쾌적하게 걷기는 힘들어진다.

▲ 세계 여러 도시들은 지금 자동차나 건물들보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인본주의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과 환경, 생태, 공간의 조화를 이루려는 녹색도시 실험들은 미래 도시의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사진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일요일마다 ‘자동차 없는 도로’에 쏟아져나와 걷고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 사진 <작은 실험들이 도시를 바꾼다> 중에서.
이건 ‘자동차와 인간 사이의 모순 관계’ 때문이다. “거기에는 분명 자동차와 인간 사이의 모순적인 이해가 존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 도시가 자동차에 더 편의를 제공하면 할수록 인간의 존엄성은 덜 존중받게 되고, 상류와 하류계급 사이의 삶의 질 차이 또한 더욱 격심하게 된다. 게다가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자동차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22쪽)

자동차 소유 않고 빌려쓰기 제안

자동차 문화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은 매우 강하다. 그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동차를 일러 “자동차는 도시의 암세포다”(136쪽)라고 비판하며, “자동차에 중독된 사회”(160쪽)에서 벗어나고 “자동차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다.

그가 오랜 동안 살펴온 세계의 여러 녹색도시 사례들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이 책의 또다른 중심인 제2부에서 ‘작은 행성을 위한 교통모델 찾기’에 나선다. 무엇보다 차량 통행과 도로를 줄여나가는 도시개발, 대중교통을 우선하고 걷기를 장려하는 도시개발, 걷기나 자전거 타기만으로 웬만한 도시 생활을 다 할 수 있게 주요 공간을 모으는 고밀도의 도시개발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 개인별로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협회(협동조합)에서 자동차를 빌려 쓰는 ‘자동차 공동이용’(카 셰어링)의 작은 실천들도 제안한다. 1987년 처음 시작된 자동차 공동이용은 현재 유럽과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도 자세히 다뤄

지은이는 준공영제를 포함한 버스체계 개편사업을 펼친 서울시 정책과 관련해선 “서울시의 간선급행버스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 대중교통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아주 의미있는 사례”라고 평가하면서도 “아직 국제사회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을 결코 아니다”라며 지속적인 개선을 촉구했다.

이 책은 거창한 세계 차원에서 일어나야 할 녹색 프로젝트를 주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에서 이뤄지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꾸리찌바 전 시장 레르네르가 했다는 말은 지은이에게 큰 울림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우주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마을을 노래하십시오. 이것은 문학에서 진리이고, 음악에서도 진리입니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역시 진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을을 알아야만 하고 사랑해야만 합니다.”(73쪽) 세계 각지에 흩어져 이뤄지는 작은 실천들이 거대 도시, 그리고 우리 지구호의 운명을 조금씩, 그리고 끝내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

자동차 의존형 도시문화에 대한 경고와 대안 찾기를 시도하는 이 책은, 일그러진 우리 공동체의 삶을 회복할 만한 또다른 작은 실천들의 사례로서, 시민 기금을 모아 자연과 역사유물을 보존하자는 운동인 ‘내셔널트러스트’와 공동체가 통화의 통제권을 갖게 하자는 ‘지역화폐’ 운동에 관해서도 자세히 다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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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조 VS 패배조

고이즈미의 발언이 이 땅의 보수세력을 기쁘게 했나 보다.

 

"성공한 사람을 시샘한다거나 능력있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풍조를 없애지 않으면 사회는 발전하지 않는다"고?

 

그래 우리가 흔히들 강조하다시피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성공에 대해 시샘하는 사람
에 대해 놀부심보를 가졌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무지 경멸하는게 우리네 정서이긴
하지~~ 그러나 그가 부연한바와 같이 `괜히 싸우지조차 않으려는 사람'이 그 자신의 게으
름의 소산이 아니라 그 사회가 싸우나마나할 정도로 젊은이로 하여금 `성공은 노력만으
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게 해서 그런거라면 도리어 괜한 정력을
낭비하는 것 보다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그대가 그토록 강조하는 `효율' 말이다. 그
렇지 않은가? 일본의 고이즈미를 비롯해 이 땅의 수 많은 기득권을 가진 제 세력들아!

당신들에게도 양심이란게 있고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의향이 있다
면 아니 안다면 권력(국가&자본)을 등에 업고서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끝끝내 지키겠
다고 악다구니를 무는 그런 추한 짓은 이제 그만두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리고 정상에
있는 자로서의 아량으로서 통 크게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함으로서
당신들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이 존경받고 더 나아가 활력으로서 추동하는 성장동력의
불씨를 다시 지필 의향은 없으신가요? 보수 진보를 넘어서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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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쓰는 인생이란..

빌려 쓰는 인생이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정말 내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잠시빌려 쓸 뿐입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나라고 하는 이 몸도 내 몸이 아닙니다.
이승을 하직할 때는 버리고 떠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영혼과 업보뿐입니다.
영원히 가지고 가는 유일한 나의 재산입니다.
부귀와 권세와 명예도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합니다.

빌려 쓰는 것이니 언젠가는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빌려 쓰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가지려고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많이 가지려고 욕심 부리다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모두가 내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베풀면 오히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던 것들을 모두 놓아버립시다.
나 자신마저도 놓아버립시다.

모두 놓아버리고 나면 마음은 비워질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고 나면 이 세상 모두가

나의 빈 마음속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제 모두 내 것입니다.

-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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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이 글은 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대학에서 국제노동학 교수로 재직 중인 어슐러 휴스(Ursula Huws)가 미국의 평론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최근호에 기고한 글의 전문 번역이다.
  
  이 글에서 휴스는 이른바 '지식기반 경제'의 세계적인 확산과 그에 따라 초래되는 '직업 정체성'의 붕괴가 인간의 노동과 노동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성찰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에서 사회적 현안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나 '일자리의 해외이전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휴스는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사이버타리아트〉의 저자다. 이 번역의 원문은
www.monthlyreview.org/0106huws.htm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얼른 알아보기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게 된다.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소규모 부족사회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사람의 직업일 것이다. 유럽의 여러 문화권에서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이 가족의 성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슈미트, 에레로, 르페브르 등의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선조는 대장장이이고, 웨인라이트, 바그너 등의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마차 제조공의 후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뮐러는 방아꾼의 후손, 불랑제는 제빵공의 후손, 게레로는 군인의 후손이다. 북미의 전화번호부를 들여다보면 포터(짐꾼), 부처(백정), 카터(마부), 쿠퍼(통 제조공), 카펜터(목수), 피셔(어부), 셰퍼드(양치기), 쿡(요리사) 등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서 발원한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아시아에서도 노동의 분업이 진전되면서 여러 사회구조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됨에 따라 누구나 직업적 정체성을 부여받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수드히어 비로드카르(Sudheer Birodkar)는 이렇게 설명했다. "직업의 전문화는 4대 바르나(카스트) 중 하위 2개의 바르나인 바이샤와 수드라가 다양한 자티(각 카스트 안에서의 직업상 구분)로 나뉘는 데 핵심 요소였다. (…) 직업에 대한 카스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추방당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자티가 차마르(신발 만드는 사람)인 사람은 평생 차마르로 살아야 했다. 차마르인 사람이 쿠마르(항아리 만드는 사람)나 다르지(옷 만드는 사람)가 되려고 한다면 차마르 집단에서 추방당할 수 있었고, 설사 그가 신발 만드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카스트에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수공 기술에 기반을 둔 직업 정체성 구분은 자동화의 영향과 공장 시스템의 도입에 따라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에는 노동자들을 서로 간에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무차별적인 대중으로, 다시 말해 노동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로 전락시키는 일반적인 경향이 내재돼 있다.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능과 그런 기능을 갖춘 노동자가 얼마나 희소한가는 그런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이 사용자들(그런 기능을 갖춘 노동자가 자영업자라면 고객들)을 상대로 더 높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능력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따라서 여러 용도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는 범용의 기능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최대한의 대체가능성이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는 노동계급의 존재는 자본에 이익이 된다. 범용의 기능만을 지닌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데는 비용이 적게 들고,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노동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사용자들은 그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다.
  
  특정한 기능, 지식, 경험의 소유를 중심으로 형성된 직업 정체성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다. 이런 직업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노동자 조직화의 기본단위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넓은 계급의식의 발달에 장애물이 된다. 노동자 조직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특정한 직업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 속에서 자라나왔다. 이때 직업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은 강력한 내적 연대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내포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집단의 효력이 강력한 경계와 진입장벽에 근거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도제제도를 비롯해 특정 직업으로의 진입을 제약하는 메커니즘 중 일부는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하던 길드와 같은 제도적 형식들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공식적인 입회식에서 동업자들끼리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고, 조합원들 간의 유대관계는 강화하지만 외부자들은 배제하는 여러 관행적 행사나 행동에 참여해야 했다. 길드 이후에 나타난 다른 많은 직업 기반 집단들 중에서는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판정하는 기준에 성별과 인종을 제한하는 요소를 포함시킴으로써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사회적 동질성을 보이게 된 경우도 많았다. 이로 인해 직업 기반의 집단이 보다 넓은 범위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성격도 갖게 됐다.
  
  그러나 직업 기반 집단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되고 사용자들에 휘둘리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전체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가 더 높은 임금이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얻어내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더 폭 넓게 보면, 직업 기반 집단들은 인구 전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생활보호 입법이나 복지제도의 도입을 촉진하는 운동을 주도할 수 있다. 직업 기반 집단의 이런 역할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직종별 노사교섭보다는 산업별 노사교섭이 발달하도록 유도해 온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 자본주의에서 발달한 복지국가들은 그 형태가 다양하고 서로 다른 특색을 보였지만 공통점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런 복지국가들이 이루어낸 성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대량생산의 생산성 이득 중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도록 사용자들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노동자 조직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였다는 점이다. 그런 결과 중 하나로 사용자들과 국가가 일종의 타협, 즉 공장 등 작업장이 언제라도 노동자들에 의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데 대한 불안감을 갖지 않고도 작업장을 운영해나갈 수 있도록 노동자들이 배려해주는 대신 사용자들과 국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완화한다는 타협을 하는 데 동의했다. 노동자 조직의 형태는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직종별 노조와 같은 직업 기반의 노동자 조직도 있었고, 강한 직업 정체성을 가진 노조 지도자들이 이끌고 보다 포괄범위가 넓은 노조에 기반을 둔 노동자 조직도 있었다. 이와 동시에 노동시장이 성별과 인종별로 뚜렷하게 나뉘기도 하고, 그 밖의 여러 다른 요인들에 의해 노동시장이 더욱 세분되기도 했다.
  
  노동 기능은 노동자들 스스로에게만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게 아니다. 노동 기능은 자본에게도 역시 그 의미가 모호하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필수적인 변화의 원동력이 되는 혁신의 과정은 노동자의 기능을 필요로 하는 데서 매우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어떤 작업이 자동화되기 전에는 그 작업의 모든 과정을 자동화하고 표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과정의 각 단계를 반복해 수행하는 기계장치의 프로그래밍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누군가의 전문성과 경험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단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지식과 경험, 기능이 일단 활용되고 나면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그 대신 더 저렴하고 기능이 떨어지는 노동자들을 새로 도입된 기계장치를 돌리는 일에 투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넓게 보면 노동자의 기능에 대한 수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고, 그 생산의 과정을 설계하고, 새로운 목적에 맞춰 제품과 생산과정을 다시 조정하고, 자본주의의 수레바퀴가 계속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해주는 많은 제품과 서비스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콘텐트를 서로 주고받거나 제공해주고, 사람들을 돌보고 교육하고 정보제공을 하고 기분전환을 하게 해주는 제품과 그 제품의 생산과정을 창출하고 설계하는 데 인간의 지식, 손재주, 창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노동기능도 그 일부는 좀 더 적은 수의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그리고 기능의 수준이 보다 낮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 있도록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을 컴퓨터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에 집어넣는 과정에 말려든다. 예를 들어 기술지원 부서에서 일하는 전문 도우미 노동자들은 고객으로부터 자주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데이터베이스에 집어넣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사측의 요구는 보다 하위의 일선 직원들도 그런 대답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강의를 전자학습(e-learning) 방식으로 전환시키라는 요구를 받는 대학교수의 지식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는 일이 정형화되어 특별한 기능 없이도 누구나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상품화 과정 중에서 그 다음 단계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노동자' 집단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점점 더 기술적으로 복잡한 자본주의의 발달이 노동자들에게 '기능박탈(deskilling)'을 초래하는가, 아니면 '기능재습득(reskilling)'을 초래하는가 하는 논란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혁신의 과정이 지닌 특징이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 발달하는 과정의 각 단계에서 '머리'와 '손'의 분리가 거듭 새로이 이루어진다. 어느 한 집단의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를 정형화하기 위해서는 그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대한 종합적 지식을 갖춘, 흔히 그 수가 보다 적은 노동자 집단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변화에 저항하거나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화함에 따라 부단히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나고, 기존의 직업들은 형태가 바뀐다. 직업 정체성은 배타적인 동시에 내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지속적인 구축과 해체의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용자들은 한편으로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잘 교육되고 창조적인 노동자의 공급이 계속 이뤄지도록 보장받아야 할 필요성,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의 가치를 저렴하게 만드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동시에 충족하는 균형 잡기를 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사용자가 다른 기업들에 비해 우월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노동자의 기능과 지식에 대해 재산권에 입각한 통제력을 보유할 수 있기를 원하기도 한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노동시장이 작동하는 형태가 결정되는 데 노동 기능이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의 사회는 고전적인 계급적 양극화로 그려진 사회의 모습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변해왔다.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재화와 자본의 순환과정을 통제하며 국가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지령하는 부르주아와 점점 더 동질화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 사이의 양극화로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더 낮은 임금만 받고도 고분고분한 태도로 동일한 노동을 해줄 수 있는 실업자 산업예비군 중 누군가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의해 단속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실 사회는 이런 그림보다 훨씬 복잡하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 점점 더 복잡하게 전개됨에 따라 이런 그림과는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즉 매우 다양한 노동 기능들에 대한, 부단히 변화하는 수요가 창출되며, 그런 노동기능들 가운데 다수는 산업발전 과정의 특정 국면이나 특정 부문, 특정 경영과정, 특정 제품, 심지어는 특정 기업에서만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필요한 노동 기능이 다양화하고 고용계약상의 의무나 지리적 위치의 측면에서 더욱 더 다양하게 노동분업이 이뤄지더라도, 산업예비군은 노동자, 사용자, 국가 사이의 타협(이는 흔히 '포드주의 타협'이라고 불린다)이 붕괴했거나 심각하게 긴장된 최근의 노동시장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절한 개념이다. 노동시장에 대한 이런 이해를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노동시장의 작동에서 직업 정체성과 노동 기능이 하는 역할에 대한, 좀 더 다양하게 차별화된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점점 더 복잡해지고 격동하는 경제에 생겨나는 틈새를 메우는 데 필요한 범용의 기능을 노동인구가 갖추도록 하는 데에서 국가가 하는 역할과, 직업 간 경계선을 흐리게 하고 조직화된 노동의 힘을 잠식하는 데에서 그런 범용의 기능이 하는 역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분석을 하기 위한 출발점 중 하나는 노동이 거래되는 시장, 즉 노동시장 그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노동시장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다. 노동의 특성과 자본의 특성에는 극도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며, 이런 점은 노동의 거래를 재화나 서비스의 거래와 매우 달라지게 만든다. 노동시장에 제공되는 기본단위인 인간의 육체는 힘과 인내력, 민첩성에서는 물론이고 몇 시간이나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있어서도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점은 자본과 원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한 얼마든지 계속 더 많이 이용될 수 있는 기업의 다른 자원들과 다른 것이다. 노동은 자본처럼 물리적 이동성을 갖고 있지 않다. 자본이 제멋대로 얼마든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자유무역의 시대에도 노동은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기회를 이용할 능력이 크게 제약돼 있다. 당신이 산 채로 다른 나라로 가서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얻는 것보다는 아마도 당신이 죽은 뒤에 시체가 국경을 넘는 것이 오히려 쉬운 경우가 많다.
  
  노동시장은 독점이나 수요독점(노동력의 구매자가 하나만 있는 경우), 카르텔, 기업끼리나 노동자끼리의 다양한 연대, 국가의 개입, 노동인구의 성별, 인종별 구분을 심화시키는 가용 노동시간이나 이동 상의 제약(예를 들어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도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한 많은 요인들에 의해 왜곡된다. 남성에게만, 백인에게만, 또는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특정한 직업들의 문호가 열려 있는 노동시장은 결코 자유시장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직업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노동시장에서 순수한 경쟁이 발달되는 것을 가로막는 요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도로 복잡하고 갈수록 글로벌화하는 기술적 노동분업 속에서 사용자들이 특정한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노동시장 이론화의 시도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내부 노동시장과 개인의 노동력 분석(Internal Labor Markets and Manpower Analysis)〉(1971)이라는 획기적인 저서에서 저자인 피터 되린저와 마이클 피오레는 이중 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모델에서는 직업이 대체로 두 개의 카테고리, 즉 '1차 노동시장' 또는 '내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직업과 '2차 노동시장' 또는 '외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직업으로 나뉜다. 두 저자에 따르면 내부 노동시장은 내부 규칙의 체계에 의해 외부 시장의 힘과 격리된다. 사용자들이 특정한 작업관행에 맞춰진 특정한 노동 기능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 사용자들은 충성도 높은 노동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더 높은 임금, 연금, 휴일, 기타 일련의 부가혜택을 포함한 유인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 아울러 두 저자는 내부 노동시장은 특정 기업에 국한된 지식에 크게 의존하는 내부 승진경로를 갖고 있으며, 고도로 구조화되고 위계적인 형태를 띠는 게 보통이라고 말한다. 이런 내부 노동시장에서는 사용자들이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 내부의 자체 교육훈련에 기꺼이 많은 투자를 한다. 달리 말해 내부 노동시장의 임금 및 노동조건의 수준은 순수한 형태의 외부 노동시장에서 실현되는 임금 및 노동조건의 수준과 다르다. 내부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지점들은 통과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통과해 내부 노동시장에 진입한 노동자들은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다. 외부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암묵적 타협은 이런 내부 노동시장의 상황과 매우 다르다. 외부 노동시장에서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장기간의 약속을 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고도의 헌신성과 생산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되린저와 피오레가 위의 책을 쓰던 1960년대 말에는 전형적으로 내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노동자는 공무원 또는 IBM이나 제너럴모터스와 같은 대기업의 노동자였고, 전형적으로 외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노동자는 수위, 작가, 그리고 자신의 노동 기능을 다양한 고객에게 제공하는 자영업 형태의 노동자였을 것이다.
  
  이런 이중 노동시장 모형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경제사회들 사이의 복잡한 임금차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는 점이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되린저와 피오레의 통찰은 다른 분석가들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다중 노동시장' 또는 '분절 노동시장' 모델로 발전했다. 분절 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은 국가적인 교육 시스템, 노동보호 입법, 노동자들의 조직화 방식을 포함한 여러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임금과 노동조건이 서로 다르게 형성된 다수의 노동시장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돌이켜보면 되린저와 피오레, 그리고 두 사람을 따른 사람들에 의해 묘사된 내부 노동시장은 현실의 경제 속에서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의 한 특정한 국면, 즉 2차대전 이후 타협의 시기에 특히 잘 들어맞은 이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타협의 시기가 종식됐다는 선언이 자주 들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 시기를 구성한 요소들이 미래의 자본주의에도 계속 유용하거나 필요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타협의 시기가 전성기를 이미 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그 시기가 어떻게, 왜 붕괴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의 타협이 황금기의 실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대규모 조직들 내부에서 그 필수적 '핵심'과 자본 사이에 이뤄진 특수한 타협이 유효하게 기능했던 것은 그런 타협이 모든 노동자들에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귀족들이 자신들의 힘을 발휘해 노동계급 중 많은 부분에 폭넓은 이익을 가져다준 역사적 순간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보다는 내부 노동시장에 소속된 행운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스스로 알고 있었고, 2차 노동시장에서의 삶은 어려울 수 있다는 인식에서 질서를 수용하고 지켰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런 식의 포섭과 배제의 패턴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의해 강화되기도 했다.
  
  둘째, 2차대전 이후의 모델은 보편적이었던 게 아니라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포섭과 배제의 나라별 형태는 노동자 조직이 발달돼 온 각국의 특수한 방식과 더불어 각국의 특수한 산업구조와 역사에 의해 형성됐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개별 산업부문 차원의 단체협약을 촉진했고, 이는 곧 '내부 노동시장 타협(insider deal)'이 특정 산업부문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예컨대 영국처럼 직종별 조합이 강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타협의 형태, 즉 특정 직업집단에만 타협이 적용되는 경우와 다른 것이었다. 이는 또한 기업 차원의 단체교섭이 지배적인 곳에서 특정 기업에만 타협이 적용되는 형태와도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타협의 형태는 복지체계의 유형, 투자의 형태, 정부 개입의 정도와 방식, 교육훈련 및 취업자격 체제 등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가 직업들이 규정되는 방식에 다시 반영된다. 데이빗 코츠(David Coates)는 이런 차이들이 경제 전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포괄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내부 노동시장 타협'은 '외부 노동시장 타협'의 여러 유형들에 의해 보완됐다는 것이다. 이는 곧 2차대전 이후 타협의 붕괴도 나라별로 각기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나라별 차이를 부분적으로나마 모델화하기 위해 로즈메리 크롬프턴(Rosemary Crompton)의 도표를 일부 수정한 아래 도표를 이용해서 이중 노동시장 이론을 성 및 계급의 이론과 통합시켜 설명을 시도해 보겠다.
  

  이 도표는 나라마다 노동시장이 다른 형태를 보인다는 점을 분석하는 데, 특히 지금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겪고 있는 급속한 구조적, 기술적 변화의 시기에 노동시장이 나라별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고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이 도표는 내부 노동시장과 외부 노동시장을 양 극단의 노동시장으로 보고 그것을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표시하며, 그 사이에 중간적인 유형의 부문별 노동시장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어 이 도표에는 또 하나의 측면, 즉 노동 기능이라는 변수가 추가된다. 이 변수는 위, 아래로 표시된다. 이처럼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진 도표를 이용하면 임금이 지급되는 노동이라면 그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어딘가에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높은 임금을 받는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무원은 오른쪽 위의 코너 B 근처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다양한 고객을 위해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프리랜스 회계사의 노동 기능 수준도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무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높겠지만, 도표에서 그의 위치는 코너 A쪽으로 달라질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코너 D 근처에는 대규모의 안정된 기업조직에 새로 취직한 신입직원이나 견습직원을 비롯해 견습 우편물 분류사처럼 직업 사다리의 맨 밑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이 위치할 것이다. 그리고 왼쪽 아래의 코너 C 근처에는 과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과 같은 계절적으로만 고용되는 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일시적으로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 하는 노동자 등이 위치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물론 그 중간 곳곳에 중간적인 노동 기능의 노동자들이 위치하게 된다.
  
  조합주의 정치, 역사적으로 강력하게 유지돼 온 내부 노동시장, 교육훈련에 대한 사용자들의 상당한 투자, 엄밀하게 정의된 직업구분, 사용자 기반의 플랜과 연계된 복지제도가 존재하는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노동인구의 상당한 부분이 도표의 오른쪽에 편중돼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형적인 직업경력의 궤적은 코너 D에서 출발해 사용자가 제공하는 교육훈련을 거치고 기업 내부의 규칙을 따르면서 점차 코너 B로 상승해가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보다 자유주의적인 노동시장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은, 보다 큰 비중의 노동인구가 도표의 왼쪽에 몰려 있는 형태일 것이다. 이렇게 도표의 왼쪽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영업 형태의 노동을 하는 개인들, 그리고 기업 내부에서 승진할 기회나 당장 취업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교육훈련을 받을 기회를 거의 누릴 수 없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기 어려운 임시직이나 파트타임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형태의 노동시장을 가진 나라에서는 기본적인 고등교육 이상의 자격을 가진 노동자들은 그런 자격을 자신이나 부모의 비용으로 획득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노동시장을 가진 나라에서는 코너 C 근처에 위치한 다수의 무차별적 불안정 노동자 대중과 코너 A나 B 근처에 위치한 소수의 특권층 노동자 사이에 생활수준의 큰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이상의 두 가지 모델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용상의 지위보다는 개인의 시민권에 더 밀접하게 연계된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교육훈련은 공적으로 제공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높은 수준의 기능을 가진 노동인구가 도표의 위쪽 절반 영역에 많이 위치하고, 코너 C나 D 근처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노동자들만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이와 달리 공식부문의 노동자 수가 아주 적다. 다시 말해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코너 A와 C가 위치한 도표의 왼쪽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사 공정성을 제고하는 규칙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든 형태의 노동시장 각각에서 실제로 모든 인구에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백인 남자인 거주자가 일반적으로 코너 B가 들어 있는 사분면을 지배할 것이고 이주자, 유색인, 여성은 코너 C가 있는 사분면에 주로 위치하게 될 것이다.
  
  이 도표는 노동시장을 정태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으로서만 유용한 게 아니다. 이 도표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조직적 리스트럭처링이 노동자들에게 상이하게, 동태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방식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용자들로 하여금 노동비용을 줄이도록 하는 유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동일할는지 모르지만, 그에 따른 리스트럭처링의 모습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 조합주의 국가의 노동시장에서는 고용된 노동자들이 강력한 조합이 사용자와 체결한 노사협약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내부 노동시장의 경계선이 분명하고, 따라서 노동자 각 개인이 내부 노동시장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가 분명하다. 이런 나라에서 내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공식적인 취직 절차를 통하는 것이고, 가장 일반적인 퇴출의 방식은 공식화된 해고나 퇴직의 절차를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부 노동시장 안에 들어와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복지혜택의 대부분이 고용상의 지위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퇴출당할 경우 잃어버릴 것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퇴출당하는 데 대해 격렬히 저항하며, 내부 노동시장에 자신이 갖고 있는 발판을 잃기보다는 직장에서 자기가 맡고 있는 일자리에 대해 급격한 리스트럭처링이 이루어지는 것을 수용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다기능(멀티태스킹)화로 불리는, 전통적 직업구분의 붕괴를 수용하는 것도 그같은 리스트럭처링 수용의 한 형태다. 이런 나라에서는 노동자가 일단 실업자가 되면 다른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다. 이는 노동기능이 특정한 산업이나 기업에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용자들이 장기간의 고용계약을 해줘야 하는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를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나라에서 보수가 괜찮은 일자리에 안정적으로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자가 이탈하는 경로는 도표에서 '실업'이라고 쓰인 화살표의 방향으로 가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가 적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내부 노동시장이 훨씬 덜 보호되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내부 노동시장에 들어 있다는 것의 편익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나라에서는 사용자들이 상황변화에 대해 정규직 고용을 비정규직화하는 것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임시 고용이 풀타임 고용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데에 점점 더 많이 이용되고, 여전히 필요하긴 하나 항상 필요하지는 않은 기능만을 갖추고 있는 직원들은 파트타임 노동자나 프리랜스 노동자로 전환하도록 권유되며, 노동의 아웃소싱이 점점 더 많이 이용된다. 따라서 이 경우 내부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는 과정은 도표에서 '비정규화'라고 쓰인 화살표의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의 비정규화는 미국과 영국 외에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서도 실업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실업이거나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경향이 덜한 경우가 많다. 그 대신 이들 나라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마치 포드자동차의 기계장치에 녹이 스며들어 번지는 것처럼 노동시장 전체에 고용의 위태로움이 확산되면서 노동조건이 전반적으로 나빠지고 고용의 안정성이 점차 악화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들이 중요한가? 경제 전문 언론매체의 독자들은 독일에 500만 명의 실업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유럽의 노동시장 정책이 '경화'되었거나 '경직적'이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기사에 익숙할 게 뻔하고, 보다 리버럴한 유럽 언론매체의 독자들은 자기착취의 집단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한 채 늘 과로하는 '앵글로색슨' 국가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기사에 익숙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식은 노동자들 사이에 단합을 촉진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많은 수의 실업자 대중과 기간제 노동자를 비롯한 한시적 노동자 대중은 어느 정도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즉 실업자와 한시적 노동자는 둘 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노동시장에서 보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운동을 제약하는 산업예비군이라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현대 경제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내고 있고, 그러는 가운데 다양한 생산요소들이 투입되며, 모든 작업은 아니더라도 많은 작업들이 단순한 근육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리 말해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이제는 대부분의 직업이 각각 특정한 노동기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각의 직업이 요구하는 특정 기능을 갖추지 못한 산업예비군은 쓸모가 없다. 그런데 많은 작업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노동 기능의 대부분은 한 세대 전에 요구되던 노동 기능, 즉 20세기 후반에 직업 정체성을 형성시킨 노동 기능과 같지 않다. 선반공, 식자공, 재단사, 그래픽 디자이너, 영화 편집자, 교정원, 천공기사, 오디오 타이피스트(테이프에 녹음된 소리를 들으면서 그대로 타자하는 사람), 전화교환원과 같은 직업들은 과거에 베를 짜던 사람이나 필경사와 같은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됐거나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는 일의 모습이 바뀌어버렸다. 이런 변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보기술(IT)이다. 컴퓨터의 이용이 상이한 생산과정들, 산업들, 기업들 사이에 남아 있던 많은 차이들을 모두 다 없애버린 것은 아니지만 상이한 생산과정들, 산업들, 기업들에 필요한 정보를 조직화하고 조작 또는 활용하는 데 표준화된 절차를 도입했다.
  
  일상적인 노동에서 실제로 컴퓨터를 이용하는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사용자들은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실제로 컴퓨터를 작동시킬 줄 아는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 집단과 협상해야 하는 입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용자들 가운데 일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소수 컴퓨터 도사들만의 배타적이고 신비화된 영역이었던 1960년대에 그런 협상을 해야 했지만, 지금의 사용자들은 그 누구도 그런 입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이 컴퓨터를 잘 다룰 줄 알게 하기 위한 교육훈련에 스스로 큰 투자를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노동자들이 풍부하게 공급되어,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런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고, 필요 없게 되면 얼마든지 해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 수요가 급증할 때 필요한 노동 기능을 구하지 못해 손발이 묶일 수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노동자들의 풍부한 공급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흥미롭게도 19세기의 상황이 지금과 비슷했다. 당시 산업과 국가경제, 제국주의 국가의 조직화가 복잡하게 되자 글을 읽을 줄 알고 셈을 할 수 있는 노동인구가 필요해졌다. 국제무역을 하는 데 따르는 모든 거래와 관련된 송장과 영수증의 처리를 담당할 사무원들이 필요해졌고, 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했는지를 기록해뒀다가 그것을 토대로 임금계산을 하는 일도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육체노동자도 읽고, 쓰고, 간단한 산수를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됐다. 그래야만 그들도 작업지시를 받고 재고량을 세는 일 등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능을 소수의 노동자들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기능이 그들에게 얼마간의 협상력을 갖게 해주어 사용자들의 운신공간을 좁혔을 것이다. 물론 시간엄수, 강도 높은 노동,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관이 이미 주입된 새로운 노동자들이 작업장에 원활히 도착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들이 소비자로서도 글 읽기와 셈 하기 능력을 갖추는 것이 도움이 됐다. 그래야만 그들이 갈수록 더욱 더 화폐에 의존하는 경제 속에서 현금을 다룰 줄 알고, 공적인 신호를 읽을 줄 알고, 어느 상품을 살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던가? 기본적인 학교 교육을 보편적으로 실시하면서, 권위가 존중되고 강력한 노동윤리가 권장되며 무단결석이나 시간 안 지키기가 엄하게 징벌되는 분위기 속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런 기능이 보편화되면 그런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 누구도 시장에서 추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에는 노동 기능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수사가 좀 다르다. 이제 사용자들은 디지털 기기 이용능력이 있고, 자발적 동기부여가 돼 있고, 팀플레이를 잘 하고, 소프트 스킬(soft skill)을 갖추고 있고, 피고용경쟁력(employability)이 있고, 기업가적 정신을 갖추고 있는 노동자들을 원한다. 또한 사용자들은 기술과 시장이 변화함에 따라 새로 필요해지는 노동기능을 학습할 자세가 돼 있는, 흔히 '평생학습의 의지가 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을 요구한다. 아울러 사용자들은 특정한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익숙하게 잘 다루고, 글로벌 시장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객들과 의사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기능, 능력, 적성, 노하우를 어떻게 조합해 갖춘다 하더라도 그것이 안정된 직업 정체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실들은 지금의 세계에서는 직업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내 직업의 일부로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직업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각각의 직업에 대한 규정이 무한히 신축적으로 되어, 노동자가 물러앉아 "마침내 나는 숙련된 상태가 됐고, 인정받는 직업을 갖게 됐다. 이제부터는 좀 느긋한 자세로 이 직업을 계속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에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 국면에서는 19세기에 노동자들이 글 읽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보편적으로 필요하게 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새로운 범용의 태도와 능력들을 갖추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19세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국가기관들은 그런 범용의 태도와 능력을 갖춘 노동자들을 사용자들에게 원활하게 공급해주는 일에 적극 나섬으로써 사용자들을 돕고 있다. 19세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런 일이 어느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만, 또는 서로 경쟁하는 몇몇 제국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뿐이다.
  
  자본주의는 늘 새로운 시장을 찾아 해외로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새로운 노동공급 원천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은 서로 분리되기 어렵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러나 세계은행이나 유럽연합(EU)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의 교육정책이나 그런 기구의 지원을 받는 개별 국가의 교육정책은 '지구적 지식노동자 산업예비군'을 창출하는 것을 명시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지구적 지식노동자 산업예비군이 창출되는 과정에서, 그런 지식노동자가 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어느 정도 배타적으로 가진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누리던 비교우위는 파괴돼버렸다.
  
  이런 식으로 지식노동자 집단을 창출하는 시도는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조합주의 모델을 유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정부가 '노동기금'을 다수 설립하고 이를 통해 지역별로 사용자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실업자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한스 게오르크에 따르면 이 나라의 레오벤 시에서는 교육훈련을 받는 피교육생의 38%가 실업자가 되기 전에 일하던 회사로 복귀한다. 이와 관련해 질리언은 오스트리아의 노동기금은 사용자들에게 노동력의 저수지 역할을 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노동기금은 사용자가 다시 노동자를 공급해줄 것을 요구하게 되는 시점까지 납세자의 비용 부담으로 노동자를 재교육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도표에서는 이런 일이 코너 D 근처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심하게 훼손되기는 했으나 아직은 내부 노동시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곳으로의 진입에 대해 국가가 사용자들과 함께 규제에 나선다. 이보다 규제가 덜한 경제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교육훈련이 각 개인의 비용 부담과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도표에서 보면, A-C 축에 놓이는 비정규 노동자들, 그 가운데 특히 왼쪽에 치우쳐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런 과정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용자들에 대한 국가의 보조금 지급이 교육훈련에 직접 지출되는 방식이 아닌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역할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본다면 국가의 보조금 지급이 구인광고 및 노동자들의 디지털 기기 이용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초점이 옮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럽연합의 전 지역에서는 '유럽 컴퓨터 드라이빙 라이선스(ECDL, European Computer Driving License)'라는 자격이 강조되고 있고, 이 자격의 소지자는 기초적인 컴퓨터 이용능력을 갖춘 것으로 대우받는다.
  
  국제적 수준에서 보면,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교육비 원조가 글로벌 지식기반 경제의 육성과 갈수록 더 명시적으로 관련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를 이른바 '케이 포 디(K4D, Knowledge for Development)'와 긴밀하게 연계시킨다. 이런 원조 프로그램은 교육의 개혁을 통신망의 확장과 기업가 정신의 권장, 그리고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의 효과적인 혁신 시스템 도입과 연결시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유럽연합의 개발도상국 원조 프로그램도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의 2001년도 정책 중 하나인 '제3세계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 정책'은 "인적자원 관리를 개선하고, 경쟁적인 세계경제 속에서 유럽연합을 교육, 훈련, 연구개발의 강력한 주도기구로 만드는 것"을 교육정책의 목적으로 꼽았다.
  
  이런 개발도상국 원조 프로그램들은 피원조 국가들에 대해 국가 단위의 자격체계를 해체하고 국내 교육훈련을 국제적인 교육훈련 과정에 연계시킬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적인 교육훈련 과정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의 대학에 의해 운영되는 교육훈련 과정을 프랜차이즈해갈 것, 초등교육 기관에서 영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 등을 요구할 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 이용능력, 피고용 경쟁력, 기업가 정신 등을 강조한다. 초국적 기업들은 노동 기능의 지구적 표준을 설정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나 SAP와 같은 초국적 기업들은 자사의 소프트웨어 제품 사용에 관한 자격 코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자사 제품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초중등학교나 대학에 하드웨어나 통신장비를 기부하기도 한다.
  
  유럽연합에서는 e유럽(eEurope) 정책의 실행계획에 따라 2005년에 새로 가입한 10개 국과 아직 가입을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등 3개 국에 대해 컴퓨터 과학 분야의 전체적인 학업성취도에 관해 여러 가지 목표들이 설정됐고, 이밖에도 인터넷 접근성의 수준과 전자상거래의 이용도와 같은 다양한 지식사회 지표들에 관한 목표들도 설정됐다. 헝가리, 체코공화국, 폴란드,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을 위해 비용이 적게 드는 '후방 지원부서(백 오피스)'의 역할을 이미 떠맡고 있다. e유럽 정책 관련 문서에서 '제3의 국가들'이라고 언급된 나라들은 이보다 더 외곽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알바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연방, 마케도니아공화국,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그루지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러시아연방,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몽골,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모로코, 시리아, 튀니지, 팔레스타인이 그런 나라들이다.
  
  이런 나라들은 영어권에서는 인도, 필리핀, 바베이도스, 프랑스어권에서는 튀니지, 모로코, 마르티니크, 스페인어권에서는 도미니크공화국, 멕시코, 콜롬비아와 같은 처지가 되어간다. 지구적으로 정보노동자들이 바닥으로의 경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에서 이런 나라들은 정보노동 아웃소싱의 역외 대상지가 되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는 대용량 통신 인프라가 갖춰져 있을 뿐 아니라 글로벌 언어를 말할 줄 알고 표준화된 글로벌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돌릴 줄 아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과정이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사용자들은 이런 나라들을 넘나들며 일자리를 이 노동자로부터 저 노동자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부단히 옮길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글로벌 소싱이란 사업상 고객의 수요에 맞춰 필요한 작업들을 다수의 여러 장소에 분산 배치해 각각 현지의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도록 하는 '노동의 복잡한 혼합 및 연결' 체제를 가리킨다.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국내의 일자리가 해외로 옮겨지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국내의 일자리가 제거되는 데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산업예비군이 존재하는 목적은 모든 일자리를 다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규율을 강요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선진국 노동시장의 전체 규모에 비하면 해외로 장소를 옮기는 일자리의 수는 실제로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선진국의 사용자들은 주된 고객들이 본거지를 두고 있는 곳, 즉 국내에서 필요한 노동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대부분 민감한 '핵심' 연구개발 작업은 해외로 옮기기를 꺼린다. 그런가 하면 콜센터와 같이 해외이전이 많이 일어나는 작업 부문들은 전체적으로 확장의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기업들은 자신의 제품을 사줄 국내시장도 필요로 하지만, 국내에 대량실업이 존재한다면 그런 국내시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 시장은 중국이나 인도의 시장보다 여전히 몇 배나 더 크다.
  
  실업은 분명히 발생하고 있고 실업에 의해 현실의 비참이 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해외이전이 가져오는 가장 강력한 효과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일자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이전이 가능한 일자리에 고용될 수 있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노동 기능을 전 세계에 걸쳐 수십만 명의 다른 사람들도 역시 갖고 있음을 안다면 직업 정체성을 토대로 조직화를 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가 얼마든지 해외로 이전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면, 이런 의식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데, 그리고 잔업 등의 추가 노동을 거부하는 데 강력한 잠재적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노동자들의 삶의 안정성과 협상력이 파괴될 수 있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창조성과 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고, 때로는 고도로 전문화된 노동기능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고정적이고 안정된 직업 정체성 속에 존재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이처럼 직업 정체성이 파괴되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현됐던 고임금-고소비의 타협이 종국적인 죽음을 맞고 일자리의 안정성도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속에서 또 한번의 변전을 겪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조직화된 노동이 보호주의와 인종주의에 밀려 붕괴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아니면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창의성과 능력이 국가별로 쳐진 전선을 가로질러서 새로운 형태로 노동의 조직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미래에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때 우리는 그때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번역=이주명 기자)
   
 
  어슐러 휴스/영국 런던메트로폴리탄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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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바라보는 몇가지 관점

▲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시인 백석의 절창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도입부다. 이 시를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다. 특히 ‘가난한 나’의 사랑노래가 마음에 물기를 돋게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유년시절, 신약성서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가난’과 ‘천국’의 관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곤 했다. 알쏭달쏭했다.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라는 시의 일부다. 삶의 남루에도 불구하고 인간됨의 위엄은 훼손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자못 울림이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던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도, 가난에 대한 꽤 낭만적인 헌사에 바쳐진 듯했다.

그러나 산 체험으로서의 가난은 사실 혹독하다. 가치나 지향이 사라진 가난의 혹독함은,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절규와 함께 강림한 비극이다. 가난에 단련될 수 없는 구체적인 인생들에게, 가난에 대한 성찰적 물음은 죄다 ‘개똥철학’에 불과하다. 게다가 ‘돈’ 본위의 사회가 되어버린 오늘 날, 가난은 ‘무능의 증거’로 규탄된다. ‘부자 아빠’가 노골적으로 예찬되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의 사랑, 행복, 타고난 마음씨는 물론이고, 천국 따위는 도대체가 낯선 은하계인 것이다. 설화 속의 흥부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와 놀부 사이에서 갈등했던 ‘제비’는 오늘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가난은 신자유주의라는 지배적 시스템의 측면에서도 규탄되지만, 그것의 모순을 지양하려는 대안적 시스템에서도 곧잘 ‘제거’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한다. ‘민중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가난’을 악의 상징으로 규정하는 일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의 반대편에 있는 ‘부’야말로 ‘선’이라는 이야긴데, 이러한 관점은 가치론적으로 보자면, 결코 올바른 시각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과 ‘부’의 문제를 물질적 차원에서 보는 일과 가치론적 차원에서 보는 일, 그리고 공동체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잘 구분해야 한다. 대원칙은 ‘가난’과 ‘부’가 그 자체로 옹호되거나 규탄되어야 할 상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난과 부, 그 자체를 양극화하여 규탄하거나 옹호하는 시각은 오히려 초점이 빗나간 논의를 이끌어내기 쉽다. 부자 아빠를 예찬하면서 가난한 아빠에 대해 무능의 딱지를 씌우거나, 부자 아빠들의 정체야말로 가난한 아빠에 대한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는 시각은 선동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주장이지만, 이는 물질적 양극화 못지않은 인식론적 편견을 불필요하게 확대재생산 한다.

가난과 부의 가치평가 문제에서 중요한 사항은 ‘경쟁조건의 평등성’과 이에 따른 ‘분배구조의 형평성’, 개별적 필요를 과잉 초과하는 부의 사회환원을 통한 사회구성원 공통의 이익과 복지의 증진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가치론적 차원에서 ‘가난의 철학’을 정립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좀더 섬세해지고 성숙해져야 한다. ‘자발적 가난’에 대한 지식인의 담론이 자주 공허한 지적 허위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비움을 통해 삶을 채울 수 있다는 사색은 인간들이 지속해왔던 오래된 성찰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명원/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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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자립형 소농 10만명을 기르자


농촌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구조적이며 복합적이다. 구조적인 문제들은 한결같이 본질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들은 틀림없이 현상적이다. 구조적 문제는 뿌리깊고 고질적이라 해법에 본질적 한계를 각오하고 있다. 복합적 문제는 복잡다단하고 다종다양해 다수의 공감대를 짚어내기 쉽지 않다.

농산업 본래의 태생적 저부가치성, 농산물 유통시스템의 전근대성, 비교열위의 대외경쟁력, 소농 중심 생계형 생산기반 구조, 가용 노동력 급감, 노령인구 점증, 전통 농경문화 훼손, 농민의 자구의지 상실 및 생존 무력감 만연 등으로 농촌공동체는 골다공증을 앓고 있다.

관료적이고 전근대적인 기존의 대책으로는 실패의 악순환 고리만 더 길어질 게 뻔하다. 정부는 오로지 가해자이고, 농민은 순전히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다. 무책임한 양비론으로 심판이나 보자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해보자는 진심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는 우리 농촌문제의 훌륭한 표본이다. 마을 주민 중 60% 이상이 65살 이상의 이른바 노인이다. 홀로 사는 독거노인도 적지 않다. 빈집은 이가 빠진 듯 거슬린다. 산골 다랭이논에 기대는 벼농사는 연간소득의 10분의 1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소득 절반 이상을 태풍피해복구 공사판에서 품을 팔아 충당했다. 농촌경제가 아니라 조경회사나 인력송출회사의 매출구조다. 전형적인 저부가가치 작물인 단감 농사는 하던 농사니 계속 하고 있다. 마을 뒷산을 타고 다니며 산나물이나 송이버섯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마을에 정부에서 농촌개발사업을 시범적으로 시행해보겠다고 나섰다. 수십억원의 사업비를 써야 하는 정부도, 개발의 마스터플랜을 그려내야 하는 개발사업자도 난제일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그저 좋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비를 차라리 돈으로 나눠주면 어떤가. 다른 마을처럼 어설프게 개발하느니 그대로 놔두는 게, 더 농촌스럽고 친환경적일 게 아닌가” 하는 자조와 우려가 무성하다. 정부의 사업목적이나 개발업자의 자세가 틀렸다기보다, 농촌의 입장과 조건이 그만큼 어렵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촌과 농업의 처지를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다. 어쨌든 농촌·농업지원책은 자꾸 기획되고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농촌은 국가공동체의 존립기반이고, 농업은 국가안보의 보루이자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세상사 문제의 핵심이 대개 사람이듯, 해법의 본질도 사람으로부터 찾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날 농촌의 문제나 현상을 웅변하는 가장 현저한 장면이 무엇인가. 농촌경제의 노동력, 농촌공동체에서 물심일체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책임져야 할 청장년층의 부재 아닌가.

‘자립형 10만 농군’을 길러내자. 대도시에 기형적으로 집중돼 결국 도시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청장년층을 농촌으로 이주, 분산시켜내자. 농촌에서, 농업을 생업현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자. 그들에게 천지사방에 놀리고 있는 농토를 경작하게 하자. 살 집도 빌려주고 영농·생계자금도 지원해주자. 농산물은 우선 정부에서 제값쳐서 팔아주자. 이른바 ‘자립형 소농 10만 농군’이 우리 농촌을 지탱하고 살아간다면, 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현재의 농촌마을 중심의 하드웨어’가 아닌 ‘미래의 자발적 농민 중심의 소프트웨어’로 틀을 새로 짜자. 그렇게 새로운 정책과 사업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해보자. 속도와 개발 일변도의 계량적 성장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선물한다는 착각에서 이제 깨어나자. 그래서 유기적이고 연기적인 생태공동체와 생명중시 이데올로기가 사람사는 세상을 보장한다는 제 정신으로 다투어 돌아가자. 스스로 먼저 마음을 놓치지 않으면, 세상에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은 없다.

(정기석 생태공동체마을 기획자 )

 

지구의 미래와 소농의 부활
현대사회가 농업중심의 자급적 생존방식을 버리고, 공업사회를 지향해오는 과정에서 농사마저도 화폐증식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실제로 진짜 농민이라고 할 수 있는 ‘소농’이 거의 소멸 직전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의 생태적 미래를 생각할 때, 공업화의 전략으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 즉 농업중심의 순환사회가 아니고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경작지를 근거로 기계화와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현대적 농법’으로는 이러한 순환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급속히 사라져가는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소농은 자연과 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자연의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여 왔으며, 다양성이 풍부한 농사체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 자급적 집약농업인 소농의 공적 가치는 제3세계는 물론, 미국 등 선진국에서조차 다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땅에 뿌리박은 지혜
그러나, 소농의 운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반드시 생태적 위기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쓰노 유킨도는 이 책에서 이와 관련해서 퍽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당시 그는 시골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서,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애국적인 감정에 꽉 찬 순진한 소년의 항의에,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면서, 자기가 지금 쓰고 있는 전정(剪定) 가위는 20년 전쯤에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데, 20년이나 사용한 가위가 아직도 새것이나 다름없이 말짱한데, 이 정도로 튼튼한 강철과 용수철을 이미 오래 전에 만들 수 있는 미국이 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리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
이 일화가 갖고 있는 함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사물의 핵심을 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소농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소농은 식량안보와 국토보존이라는 측면에서만 보호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소농을 살리는 문제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작은 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이웃들과의 연대와 협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존조건 때문에 소농은 거대자본과 국가기구에 예속된 지식인, 전문가, 관료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자주적 정신과 협동적 자치의 삶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땅에 뿌리박은 자주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진보라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서 지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농업의 영속성과 소농의 의의

제1장 '규모확대'라는 태풍 속의 소농
한 점을 응시하는 토착 소농민
대농을 지향하는 '국민적 농민'
토지이용형 농업은 왜 대농을 지향하는가 - 그 생물학적 근거
이농으로 성립된 규모확대
소농의 얼굴을 지워버린 농협
허언(虛言)의 시대에 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2장 소농은 풍토를 살린다
한줄기 강가의 논을 보면서
논과 농가의 인연을 끊는 것
'풍토'를 알고 '풍토'를 활용한다
소농을 망하게 하는 농업연구
'미자와 풍토학'의 본모습
적극적으로 풍토를 만든다
부적지(不適地)를 품종의 힘으로 극복한다
홋카이도의 벼농사를 개척한 '풍토에 적응하는 품종'
풍토품종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내 고장의 농업'이 아니라 '이 논의 농업'을
강과 물이 만든 다양한 논의 형태
사구(砂丘)의 풍토창조 원리
향토애가 경영을 지킨다

제3장 농경의 변천과 그 계기
인공자연, 농지에 대한 인간의 활동
전통농업의 농경과 지력 유지
화학비료로 볼 수 있는 근대농법의 구조
인구증가와 농경의 대응
식민지형 농법의 전개와 현대농업

제4장 소농의 의의를 탐색한다
현대사에서 소농의 의의
제4의 눈
농경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육체노동 - 관점의 전환
농업경관을 해독한다
농경에 의한 정념의 해방과 그 명암
자연권에서 자연신으로

후기
역자 후기|자연과 땅을 지켜온 소농
편집자 후기|땅에 뿌리박은 지혜

 

 

저자가 그냥 농업도 아닌 '소농'을 주장하는 이유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땅을 지켜온 소농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땅을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농은 이런 방식으로 농지의 영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잉여 노동력의 활용과 환경보전의 역할까...
동아일보 | 김형찬 기자 | 2003.10.25
이 책의 부제는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전 일본 돗토리(鳥取)대 농학부 교수로 스스로 농부이기도 한 저자의 답은 간명하다. 지금까지 지구를 지켜온 것은 소농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다는 것.

이것은 기계농법의 도입을 통해 농업을 대규모화하고 소수의 농민만을 농촌에 남긴 채 공장에 필요한 인력들을 도시로 빨아들이는 산업화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저자가 그냥 농업도 아닌 '소농'을 주장하는 이유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땅을 지켜온 소농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땅을 이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농은 이런 방식으로 농지의 영속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잉여 노동력의 활용과 환경보전의 역할까지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농업정책은 전통적인 자급자족 소농을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기업농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 영남대 식품가공학과 교수인 옮긴이에 따르면 1960년에 총인구의 58%였던 농가 인구는 1980년 28%, 1990년 15.5%, 2000년 8.6%로 급격히 감소하며 그 '잉여인구'를 도시로 배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시는 인구를 수용할 만큼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식 기업화를 통한 농업근대화가 인류 생존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영속성과 생존을 위한 최소 공간의 사용이라는 면에서 동아시아의 소농 모델에 다시 주목할 것"을 역설한다. 나아가 농촌에 뿌리를 둔 농촌공업의 지원을 통한 인구의 분산, 주5일 근무제의 확대를 활용한 겸업농가의 육성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가 첫장에 앞세운 어린 시절 소농 노인들에 대한 경험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시사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 국가권력이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토착 소농들의 지혜와,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의연함을 말하고...
문화일보 | 엄주엽 기자 | 2003.10.23
저자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았고 저명한 농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책의 첫 장을 중학교 2학년이던 2차대전 종전 직전의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학교에서 '신풍(神風)으로 일본은 이긴다'는 교육을 받으며 애국심에 불타던 그에게 마을 농사꾼 노인들은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자주 해 속을 끓이게 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말인 즉, 예전에 선물로 받았다는, 20년전 미국농장에서 쓰던 가지치기 가위를 보여주며 "아직도 새 것 같은 이 가위를 만든 나라면 무기도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패전 후 마을에 미군이 진주한 뒤, 어느날 미군이 던져준 초콜릿과 담배를 가져간 그에게 할아버지는 "나라는 싸움에 졌어도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도대체 거지같이 던져준 것을 받다니…"라며 불속에 던져버린다.

저자가 첫장에 앞세운 어린 시절 소농 노인들에 대한 경험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시사한다.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 국가권력이 유포하는 정보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토착 소농들의 지혜와,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의연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같은 지혜와 의연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땅과 밀착된 소농들의 건강한 삶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소농이야 말로 환경재앙을 막는 지속가능한 농사를 유지시키고 생산효율도 뒤지지 않을 뿐더러 영성적인 삶까지 이끌 수 있다고, 저자는 구체적인 일본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 역시 국가권력이 농업근대화를 내세워 이농을 조장했고, 소농의 붕괴 위에 대규모 근대영농을 펼쳤지만 얼마 안가 그 결과는 농약과 비료의 다량살포로 인한 땅의 황폐화와 식량 자급률의 저하로 돌아왔다. 소농의 몰락에서 야기된 이같은 과정은 ‘생산성’만을 최고가치로 여기는 농법의 결말이며,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다를 게 없다. 한정된 면적의 농지에서 농업근대화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식량자급 문제만 해도, 현재 전체농지의 틀안에선 불가능하지만, 일본 열도와 같은 습곡산지가 많은 지형에선 골짜기를 이용한 소규모 농법을 통해 55만㏊의 농지를 개간해 식량자급을 꾀할 수 있으며, 이는 소농의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근본 생태주의자로 분류되는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식량자급을 위해선 공장·학교·병원 등을 지방으로 분산시켜 대도시의 인구가 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 뒤 이들이 '겸업농가'가 되도록 한다는 것. 곧 자신이 먹을 식량을 스스로 재배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는 것인데, 주5일제의 확산으로 많은 사람들의 겸업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즐기면서 자급하는 농업'이 그 이상적 형태이다.

우선 비현실적이고 다소 과격하게까지 들리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일본농업을 어떻게 그 본래의 기능으로 부활시킬 것인가"라는 당면문제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대안'이 없다는 절박한 철학적 인식이 전제돼 있다.

그의 소농예찬은 생존의 기본조건에서만 그치지 않고 범신론적으로 확장된다. 인간은 땅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며 그를 통해 자신을 닦아가는 '수행'의 과정도 만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땅과 사귐(농사)으로써 동물적 욕망이 중화되고 생존투쟁이 완화돼 왔다"고 말한다. 손으로 풀을 뽑고 괭이로 흙을 돋워주면 작물이 좋아서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고도 한다.

"이같은 교류야말로 옛날 농사꾼들이 젊은 나이에 이미 도달했던 근본 마음이 아닐까. 무심히 하루하루의 농사일을 해온 것이 예기치 않게 농경을 도덕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다."

이같은 땅과의 교류도 땅과의 친화력을 보장하는 소농일 때만 가능하다.

저자는 점점 사라지는 소농을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며, 생태적 위기만이 아니라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름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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