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경 - 천연의 요새

 

1.

지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남경에 와보면 절로 아 이곳은 정말 천연의 요새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남경시는 중국 최대의 강인 양자강이 파양호 근처에서 북동으로 흘러 안휘성을 가로질러, 강소성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의 남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양자강과 접해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초보자가 보아도 천연의 요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옛날부터 이 지방은 중요한 거점이 되어왔다.

 

2.

옛날에는 남경에서 양자강을 건너려면 양자강 연안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해방 뒤에 남경장강대교가 만들어진 덕분에 기차를 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양자강을 넘어갈 수 있다. 남경에서 포진까지 철로와 고속도로로 된 이중 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철도가 놓인 다리의 전체 길이는 6700여미터이고, 고속도로가 뻗은 다리의 길이는 4500미터에 이른다. 남경장강대교는 중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공사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특수강을 입수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기술자와 노동자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특수강 생산에 성공해 마침내 준공하게 되었다. 지금 이 다리는 남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3.

1842년 8원 영국 함대는 양자강을 거술러올라가서 진강을 무너뜨렸다. 남경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자, 청조도 의지가 꺾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아편전쟁의 서막을 알린 남경조약이다. 그 당시에는 강녕조약이라 했다. 홍콩을 할양할 것, 다섯개 항(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을 개항할 것, 아편 배상금을 지불할 것, 실질적인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 군사비용을 배상할 것 등 영국이 일방적인 요구를 내세운 것이 이 조약이었다. 그렇지만 이 조약은 그 때부터 계속해서 맺어지게 될 불평등조약의 시작일 뿐이다.

 

4.

이렇게 해서 열강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었다. 청조는 부패하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편전쟁 뒤에 전국의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인민이 살아가기 위한 궐기였다. 수많은 반란군 속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확실한 혁명이념을 가지고 일어난것이 태평천국이었다. 1851년 금전촌에서 굴기한 태평천국군은 무창을 공격하고 성난파도와 같이 세력을 몰아 양자강을 남하했다.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장악한것은 1853년 3월 19일이었다. 태평천국은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유명한 천조전무제도를 간행해 건국의 이상을 분명하게 밝혔다. 국가의 원수는 천왕인 홍수전이었다. 그리고 남경은 천경이라 바뀌었다.

 

5.

태평천국은 11년동안 남경을 유지했다. 강남 일대에 병사를 배치하고 각지의 기점을 확보했지만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증극번의 상군, 이홍장의 화군, 골든의 외인부대에게 격렬하게 공격당하면서도 태평천국군은 몇 번이나 적에게 타격을 주었다. 증극번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실패해서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던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6.

남경은 강남의 아름다운 산수에 둘러싸여 있다. 고도 남경을 찾은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든다. 역사는 흐르고, 아편전쟁으로 맺은 남경조약에서 태평천국 운동의 비극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우화대에 서면 슬픔은 극치에 달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남경장강대교가 상징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남경은 기복이 많은 지형처럼, 역사도 수없이 기복을 겪은 곳이다. 여행자들은 남경을 찾으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다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 소주. 양주 - 물의도시, 정원의 도시

 

7.

소주는 오래 된 도시이며,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두보나 이백처럼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당대에 시를 썼던 장계의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있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천지 가득 서리가 내리네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 마주하여 시름 속에 졸고

고소성 바깥 한산사에

한밤중 종소리 울릴 제 객선이 닿았네

 

이 시에서 말하는 고소란 바로 소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대에 이 지역의 장관을 지낸적이 있는 백거이는 이렇게 읊었다.

 

푸른 파도 동서남북의 물

묽은 난간 삼백 구십 개의 다리

 

8.

사람들이 지금 소주거리를 걷다보면 어쩐지 부드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소주를 여성적인 도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에 출판된 석계산인의 오문화방록은 청대의 명기전인데 소주는 미인의 고향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주의 단면이고, 그 이면에는 격렬한 저항정신과 강인한 생명력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9.

양주는 운하의 기점이며, 종점이기도 한 곳이다. 내륙 수로가 가장 좋은 운송방법이었던 시대에 양주가 번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 양제는 대운하를 열고 이곳에 강도라는 지명을 붙였다.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지만, 양제는 강도를 좋아해 이곳에 오랬동안 머물렀으며 반란이 일어나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한 곳도 양주였다.

 

 

* 상해 - 중국 근대사의 중심지

 

10.

당시 청조는 무역활동을 광주(광저우)에서만 하도록 제한했다. 청조의 중반까지는 그곳만으로도 괜찮았지만, 훨씬 전에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았던 영국은 이제까지의 비좁고 답답한 광주 무역에 만족할 수 없었다. 중국 전체를 상대로 장사하기에 광주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영국은 만약 중국의 긴 해안선 중앙부에 좋은 항구가 있다면 그곳을 교역기지로 삼고 싶어했다. 1756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사원하나가 상해를 무역항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회사는 상해를 조사해보고 그곳이 이상적인 항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청조는 원칙적으로 쇄국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상해를 외국무역에 개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외국무역은 광주의 13행이라는 특허상사가 담당했으며, 국가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청조의 태도였다. 영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청조와 직접 교섭하고 싶어했다.

 

11.

영국인 제독 파커가 원정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위해 홍콩을 출발한 것이 1842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같은 달 16일 이른 아침에 영국의 함대는 오송의 청군기지를 공격했다. 오송의 입구를 지키던 청군은 강남의 제독 진화성의 지휘아래 있었다. 그러나 진화성은 이미 70세가 넘은 노장군이었다. 진화성은 열심히 싸웠으나 화력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마침내 노장군 전화성은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사한 진화성 제독을 깊이 애도했다. 진제독의 영정을 안치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군은 상해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했다. 그들은 부호들의 정원이나 사당을 병사들의 기지로 사용하고, 목상들을 때려부수어 취사용 연료로 썼다고 한다. 상해를 나온 영국 함대는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을 점령하여 포학의 극치에 달했다.

 

12.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때 상해에서는 소도회가 궐기했다. 소도회란 일조으이 비밀결사 조직으로 삼합회이 한 분파였다. 회원은 단검을 차고, 붉은 천을 둘렀다. 1853년 9월 7일 상해의 소도회는 봉기를 일으켜 눈 깜짝할 사이에 현성을 점령했다. 회원 중에는 뱃사람, 상인, 직인이 많았으며 멸청복명, 탐관초멸을 표어로 내세웠다. 이 시대의 청조의 관리들이 얼마나 심하게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으며, 소도회는 그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13.

상해의 예원안에는 점춘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소도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진아람이 지휘한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상해 특별시 안에 있는 가정현은 당시의 격전지로 회룡담이라는 연못의 물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연못 주변에 소도회의 혁명투쟁을 기린 혁명열사기념비가 서 있다. 상해 소도회의 싸움은 열강이 무력 간섭으로 청조를 도와주자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소도회사건을 계기로 열강은 조계를 독립국가로 만들었지만, 중국인민은 그것에 대항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저항의 전통이 상해를 지극히 혁명적인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상해 전체가 혁명의 커다란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14.

소보사건은 20세기 들어와 일어났던 일이다. 상해에서 발행된 소보에는 반청적인 혁명문구가 자주 실렸다. 190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추용이 혁명군이라는 혁명사상 선전 문장을 소보에 발표했고, 민족주의적 혁명지도자인 장태염이 그 서문을 썼다. 청조가 조계에서 이와 같은 반청적인 활동을 두려워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계 경찰에게 장태염과 추용을 체포해달라고 의뢰했다. 조계의 주인인 열강도 중국에 혁명이 일어나면 단물을 빨수 없게 된다. 조계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장태염은 3년, 추용은 2년 금고형을 받았다. 추용은 옥사했지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1905년 4월 3일에 죽은 그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장태염음 금고 3년뒤에 조계로부터 추방한다는 처분을 받고 출옥하는 날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는 일본에서 쑨원의 동맹조직에 들어가 그 기관지 민보편집을 맡았다.

 

15.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상해에서 일어난 혁명적인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외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늘어나 그런 곳에서 자주 쟁의가 발생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1925년 5월 30일에 일어났던 이른바 오주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에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도 참가했다. 남경로를 피로 물들였던 오주운동은 중국의 근대사에서 5.4운동과 같이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었지만, 운동이 일어나자마자 중국공산당이 앞에서 지도했다.

 

16.

중국공산당의 탄생지는 바로 상해였다. 중국의 노동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결합된 데는 역시 5.4운동의 힘이 가장 컸을 것이다. 5.4운동은 1919년에 일어나 계속 이어져 중국 곳곳에 작은 공산주이자 집단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7월 1일 중국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대표12명을 파견해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회의를 열었다. 각지 대표 중에는 마오쩌둥, 동필무, 진담추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중국공산당 강령을 통과시키고 중국공산당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했다. 그 장소는 상해의 흥업로76호로 현재는 혁명기념유적이 되었다.

 

17.

상해에는 문필의 힘으로 혁명을 추진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루쉰은 불멸의 빛을 발한다. 1936년 루쉰은 상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현재 홍구공원에 있다. 상해를 찾는 사람이라면 홍구공원 안에 있는 루쉰의 묘에 참배하리라. 그곳에선 느긋하게 허리를 굽힌 루쉰의 동상이 마치 부드러운 눈길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묘 앞에는 헌화가 끊이질 않는다.

 

 

 

* 항주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14.

소동파는 30대 중반이었을때 항주의 통판(부지사)으로 부임했고 50대 중반에 지사로 근무한 것까지 합하면 이곳에 두 번이나 온 것이 된다. 백거이보다 항주에 더욱 정이 든 사람이다. 소동파가 쌓은 제방이 길게 보인다. 아치모양 다리를 몇개나 건너야 한다. 서호의 중심에 호심정이 있고 남쪽에는 삼담인월이 있는데 이곳은 여행자가 반드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삼담인월은 물이 병탑 세 개가 서 있어 달 그림자가 달 세 개로 비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소동파가 호수의 진흙을 캐낼 때 표시 삼아 세워놓은 곳이라고 한다.

 

15.

뇌봉탑은 1924년 9월 25일에 무너졌다. 뇌봉탑은 오월국의 왕비 황씨가 세웠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넘어지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서호의 남쪽에 있었던 셈이다. 뇌봉탑이 쓰러진 데 대해서 루쉰은 글 두편을 발표했다. 팔각 5층짜리 뇌봉탑은 확실히 노후해서 위험한 상태에 있었지만, 탑의 기와를 집에 두면 집안이 평안하고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미신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와를 몰래 가져갔기 때문에 균형을 잃어 쓰러졌다고도 한다.

 

와력의 들판에 있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니다.

와력의 들판에서 옛날 관습을 고치는 것이야말로 슬픈일이다.

우리들은 혁신적인 파괴자를 원한다.

그의 마음에는 이상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뇌봉탑이 넘어졌을 때 루쉰이 적었던 문장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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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3 23:35 2005/01/2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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