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번 주 겨울추위만 넘어가면 봄이 온다고 하네요.
봄이 오는 소리를 기다리면서 블로그도 다시 시작해보려고
집에 인터넷 신청도 하고 뻑뻑한 키보드도 새로 장만했습니다.^
이글은 제가 활동하는 매체에 기고한 글인데
소재가 '나의 일상공간이야기' 이런겁니다.
제 마지막 포스트가 '잘리다'로 끝나
혹 뭐하고 사나 궁금하셨다면 이글이 약간의 정보가 될 수 있겠네요... .
고시원에서 안방텐트까지
96-97년 총파업이 끝난 늦겨울, 운동을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속한 단체에서는 ‘인생 별거 없다’며 3개월 쉬고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그렇게 백수로 봄 길을 거닐면서 생각해낸 직업이 이른바 ‘인테리어디자이너’였다. 고객들이 자신의 공간을 변화시키는 벽지를 고르고 색을 칠하는 미적 감각을 돕는 카운슬러 이거 멋질 거 같아. 이러한 운동권 아류스럽고 낭만적인 생각은 찾아간 학원의 담당자가 말하는 이 업계의 냉혹한 현실에 금세 기가 죽어 버렸다. 나는 3개월 뒤 다시 복귀했다.
시간을 흘러가고 21세기가 되었다. 활동도 나름 잘 풀려나갔다. 그 정점이 대학 졸업 후 운동 10년을 자축한다는 명분으로 전세금 빼서 지구의 서쪽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누구말대로 온갖 폼 다 잡으면서 지구의 반 정도를 쏘다니다 금의환향했는데 아무래도 기가 다 빠져버렸나 보다. 그때부터 완전 내리막길이었다. 2006년 초겨울 서울 봉천동 노벨고시원 입성은 관계와 활동, 생활 모두가 벽에 부딪힌 내가 선택한 공간이었다.
나중에 홍대쪽 고시원 생활하던 운동권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이 고시원 프렌드와 술한잔 하게 되었다. 대화를 해보니 고시원세계가 좀 더 눈에 들어왔다. 정돈해서 말해본다면 고시원은 세 등급으로 나뉜다. 우선 상급은 벽돌로 벽이 시공된 고시원이다. 벽의 재료가 벽돌이냐 아님 전통적인 베니어합판 인지가 상급과 중급을 가르는 기준이다. 고시원 상의 상급은 방에 화장실이 달려있고, TV와 냉장고가 구비되어 원룸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다. 어느 날 지나가다 ‘원룸고시원’이라는 간판을 본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분명 이는 고시원생들의 내면화된 원룸으로의 신분상승욕구를 들추어내는 광고기법일 것이다.
중급과 하급 고시원을 나누는 기준은 밖으로 창문 있는 방이냐 복도쪽 방이냐는 것이다. 물론 합판수준의 벽은 동일하다. 나는 그때 3만원이 더 비싼 창문 있는 방을 선택했다. 전망이 보여야 살지 않겠는가! 작은 책상, 아주 작은 침대, 얇은 책꽂이로 딱 들어찬, 창문으로 작은 재래시장이 내려다보이는 방이었다. 파라솔 밑에 야채거리를 놓고 파는 아주머니, 열쇠집 할아버지, 두부집 아저씨가 내려다 보였다. 처음 여행계획을 세울 때 그 중 하나는 각 나라마다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여관에 한 달씩 묵는 것이었다. 숙소의 2층 테라스에 앉아 시장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이유 없이 바라보자. 그리고 수시로 시장거리를 왔다 갔다 하자. 그렇게 한 달을 묵으면 그 공간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게 되지 않을까? 많이 움직이는 여행보다 이게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하는 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고시원 생활이 며칠 지나면서 생겨난 느낌은 어떤 모종의 이질감 같은 것이었다. 처음엔 이 느낌이 내가 마치 어떤 나라 한 도시에 여행을 와있는 듯한 느낌으로 여겨졌었다. 3층 방에 있다가, 때가 되면 1층 부엌에서 ‘햇반’에 ‘3분카레’를 비벼먹고 나와 도서관을 갔다가 공원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시장근처 슈퍼에 들르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일상은 장기여행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기여행자는 볼거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생활이 하루 이틀 반복되면서 다시 든 생각은 이건 여행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여행에선 그곳의 사물과 대상과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떤 상념이 생길 틈이 없다. 그런데 고시원생활에선 이 세계와 나는 점점 더 멀어지고 내가 격리된다는 느낌이었다. 8~90년대 소수의 외국배낭여행자들이 서울에 와서 묵은 곳이 영등포역 뒤 8천 원짜리 쪽방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 나도 여행 중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었다. 배낭여행자는 가장 싼 것을 선택하는 게 기본정신이다. 인도 델리의 유명한 여행자거리는 빠하르간지라는 곳인데 델리사람들은 이해를 못한단다. 그 좋은 숙소를 다 놔두고 그 진흙탕 거리에 왜 그리 꾸역꾸역 몰려가냐는 거다.
8~90년대의 쪽방은 21세기 들어 제도화 상품화 과정을 거치면서 고시원으로 재탄생했다. 붕어빵에 붕어 없고 고시원에 고시생 없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를 당당하게 리모델링 하고 있는 고층 아파트와 대형 쇼핑상가의 그 화려한 이면에 00고시원들은 음침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서열화된 한국주거공간의 최하층인 00고시원의 익명의 고시생이었던 것이다. ‘일상을 여행처럼’이라는 우아한 내 삶의 모토를 위해서라도 우선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2007년 초 봄 낙성대공원에서 탐스럽게 피었다 지는 하얀 목련꽃을 바라보면서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느꼈던 것 같다. 목련꽃은 필 때는 그렇게 예쁜데 질 때는 그렇게 허접할 수가 없었다. 선이 굵은 목련꽃...
아무튼 2007년 6월부터 다시 상근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거주공간도 노벨고시원에서 사무실 근처인 황금고시원으로 이사를 왔다. 역시나 창문 있는 방을 선택했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를 옥죄라는 컨셉으로 난 아주 작은 창으로는 골프장과 아파트가 보였다. 방이 더 좁아져 대각선으로 누워야하고 여름에 복도쪽 방 아저씨가 에어컨 틀어달라고 하며 고시원 총무와 몸싸움 하는 바람에 고시원주인의 역공으로 초가을까지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던 일 등등 70년대 풍 소설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 생각나는 칙칙한 얘기들은 이제 그만 두련다. 하나 터득한 경험은 노벨고시원 시절에는 베니어판을 사이에 두고 나던 옆방 백수청년의 소음이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데 황금고시원으로 오면서는 그냥 들을 만한 수준으로 여겨지더라는 것이다. 1년 동안 고시원의 그 일상적인 부대낌의 현실을 마주하는 공력이 쌓여지면서 썰렁하다고 정평 나고 운동권 활동 중에도 3D업종이라고 회자되는 조직의 상근업무도 별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2007년 늦가을, 드디어 나는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서 무려 열두 평이나 되는 양평동의 방 두 개짜리 1층 슬레트 기와집 독채에서 살게 되었다.
전월세가 섞인 이 집 일대는 이른바 재개발지역이다. 내가 활동하는 사무실 아래층에도 번듯하게 재개발 추진위가 들어서 있다. 그래서 이 다닥다닥 붙은 1층짜리 집들이 아직도 생명을 보존하고 있다. 몇 년 후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집이다. 허름한 이 집들 중 내가 계약한 집은 준수한 편이었다. 주인아들의 신혼집이었던 터라 집 내외부를 깔끔하게 개조공사를 했고 작은 마루 겸 부엌에는 에어컨까지 달려있다. 여기에다 작은 앞마당이 있고 채소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옥상까지 완전히 독립적으로 구성된 집이었다. 일 년 동안 고시원에서 부대낀 나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대궐과도 같은 집에 온 것이다. 내가 7살 때 살았던 미아리 언덕 1층집에서는 어머니와 나, 고모와 아저씨, 그리고 세 들어온 야구선수 김재박의 누나 부부 이렇게 살았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김재박 감독의 팬이다. 그런데 이젠 완전히 나 혼자만의 집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었다. 부동산에서 소개를 받아 집을 볼 때 집은 단번에 마음에 들었으나 가스보일러 밸브시공이 통째로 된 것이 흠이었다. 뭐 이 가격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기에 계약했지만 한 번 보일러를 돌리면 안방 건넌방 마루 화장실바닥까지 다 가스열이 투입되는 이 가스비를 어떻게 감당할지 참 난감했다. 전세금은 보다 못한 집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운동권상근비로 월세내면서 생활하는데 마음 놓고 보일러 온도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겨울이 시작되는데 말이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그 최종결론은 안방텐트전술이었다.
우선 인터넷쇼핑몰에서 저렴한 3~4인용 텐트를 구입했다. 깔끔한 녹색텐트가 도착했다. 길쭉한 안방에 텐트를 쳤다. 텐트 안에 가지고 있는 퀸 사이즈 크기의 자석요와 극세사 침구를 집어넣었다. 이제 기본 설치는 되었다. 보일러는 외출로 해두고 자석요의 전원을 켜고 온도를 적당히 유지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지퍼를 내리고 눕는다. 바닥은 따뜻하고 외풍은 막아주고 가스비는 절약되니 이 어찌 흡족하지 않으련가. 사무실의 사람들, 몇몇 사람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하면서 이 안방텐트를 선보였을 때 전반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 안방이 참신한 아이디어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텐트 안으로 스탠드를 끌고 와서 책을 읽으려고 마음은 먹지만 각종 생각에 빠지다 자고야 마는 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밤이었다. 텐트에서 자다가 나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어두운 공간 속에 안방텐트가 스탠드 불빛에 의해 은은하게 녹색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텐트는 하나의 상징물처럼 내 마음속에 있던 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난 작년 봄 탐스러운 목련꽃이 그렇게 허접하게 쭈그러지는 걸 보면서 현실을 깨달았었다. 이제 다시 깨닫는다. 삶도 활동도 그 굴곡의 과정을 담담하게 거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탐스러운 목련꽃을 피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삶의 평범 아닌 평범을 다시 생각해본다. 올 봄 목련꽃이 피어날 즈음에 다시 낙성대공원에 가보련다. 작은 시장거리에서 내가 머물렀던 노벨고시원의 그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으련다.
아직은 춥다. 빨리 꽃피는 봄이 왔으면 좋겠다. 나의 ‘안방텐트전술’은 올여름 시즌 ‘마루모기장텐트전술’로 이어질 계획이다. 기대하시라…….
앙겔부처
2011/12/26 14:02 Delete Reply Permalink
제가 전화받았었는데...< 옛날에 여행기 올려주실 때 너무 즐겁게 읽었었어요. 특히 캄보디아에 가고 싶었던 결정적 계기가 아이비님 글 읽고였거든요. 그래서 아는 척 하려다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만 두고 아이디만 가르쳐 드렸네요 ㅎㅎㅎㅎ 새삼 반가워요 :D
산오리
2012/01/13 16:49 Delete Reply Permalink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