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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3

이번엔 무슨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감기몸살에 걸렸다. 몇 개월 동안 운동을 안하다가 탁구를 두 시간 쳤던게 무리였는데, 마침 날씨가 갑자기 여름에서 초겨울로 바뀌는 바람에 위험에 노출되었던 듯 하다. 암튼 이틀은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덟시 쯤이겠지 하고 시계를 봤는데 열 한 시다. 이왕에 늦게 일어난거 며칠만에 방 청소하면서 집에 있다. 이제 9월도 일주일 밖에 안남았다.

 

참고로 현재 번역은 12강 후반부를 하는 중이다. 내용으로는 곧 87년 천안문을 다루면서 12강을 끝낸다. 그리고 13강과 14강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서문과 후기 그리고 1강부터 9강은 지난 해 말에 나온 초고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중문판 1교와 다시 대조해야 한다. 이달 안에 14강까지 마무리 짓기가 만만치 않다. 10월로 넘길 가능성이 있다. 중문판이 11월 쯤 나온다니 아마  10월 중에 번역 초고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중문판 최종본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2009년까지의 원고에다가 올해 봄에 쓰여진 2010년에 대한 회고의 글을 추가해서 역사적 시기를 1949~2010까지 1년을 더  연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편, 그렇게 되면 분량이 너무 많은데 세 권으로 나누는 가능성은 없는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내용이 모택동 시기와 포스트 모택동 시기로 나뉘지만, 사실 내용적으로 보면 1949년 혁명이후 건국과정, 즉 기본적인 당 국가 체제, 이른바 '1957년 체제'의 확립기 및 그에 근거해 진행된 대약진과 그에 따른 조정기가 첫 번째 단계이고(1강~7강), 문화대혁명 시기가 두 번째 단계이며(8강~11강), 그 이후의 포스트 모택동 시기가 세 번째 단계(12강~14강 및 2010년 회고)가 될 수 있다. 2010년에 대한 회고의 글은 그가  운동과 사상 등등 현재 진행중인 중국 내부의 상황에 대해 일정한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방금 탁구를 두 시간 치고 왔다. 정말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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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체제?

'2013년 체제'가 백낙청 선생 등에 의해서 제기되면서 세간에 일부에 의해(주로 창비 그룹)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1987년 체제'가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통해 6. 29선언 등 제한적으로 제도 정치에 그 성과가 반영되어 일정한 체제의 변형을 가져왔다면, '1997년 체제'는 세계적 경제위기의 한 측면이 남한에 반영되면서 새로운 '빈곤'이 구조화되는 강화된 초과착취의 체제로의 변형을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 그 해 말에 있었던 대선의 결과와는 별 상관 없이 체제적 변형의 의미를 보존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이는 역사의 전개를 보는 관점의 차이와 관련되는 것 같다. 사실상 '체제'론은 본래부터 사회적 변형의 우선성을 전제하는 것인데, '2013년 체제'는 이러한 맥락을 소거한 채 정치적으로 체제론을 먼저 구성하려는 목적의식적 개념으로 제기된 듯 하다. 이러한 개념은 일정하게 선거/의회라는 계기를 통해서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지향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운동과 대중운동에 맹목적일 수 밖에 없고, 한편 백낙청 선생의 경우 분난체제론에서 도출된 '평화구축' 및 '남북연합' 등의 분단극복 지상론을 기본 입장으로 갖는다는 점에서 민중의 내부적 정치성의 전개과 출발부터 접점을 가질 수 없는 상층의 논의로 머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거대한 변형을 일으킬 만한 1987년의 사회운동 또는 1997년의 강제적 구조조정이 없다면 '2013년 체제'는 체제로서의 분석개념의 지위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그 개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더욱 '2013년 체제'의 불가능성을 높혀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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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대 보위 운동(보조운동) 40주년 토론회(2011. 9.17~18) 후기

1971년 조어대 보위 운동(보조운동)을 사상적으로 어떻게 계승하고 전화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가 이틀 동안 청화대학에서 열렸다. 보조운동은 해외 대만 유학생, 대만 내부의 대학생, 홍콩 및 대륙 등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몇 가지 단계로 구분되기도 한다. 나는 주요하게 대만 유학생 및 대만의 대학생 그리고 학생운동 및 그 후의 당외운동 나아가 좌익운동 등 대만 내부의 사회운동과의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고 이 토론회를 방청하였다.

 

조어대 보위운동은 기본적으로 백색테러와 극권 독재체제 하에서 일정하게 망각되었던 '민족적 조건'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 같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조건 또는 민족 모순은 대중적 층위에서 정치를 전개하는 조건이 된다. 이렇게 민족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제기되면서 이 내부에 정치적으로 좌/우의 분열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나 개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조어대 보위 운동은  적어도 대만에서 '민중'(즉, 정치성)의 조건으로서 민족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관심사와 관련해서 정홍생 선생에게 질문을 제기했다. 이 질문은 전리군 선생의 근간에서 인용된 정홍생 선생의 책 '청춘의 노래'에서의 역사 인식을 기본으로 한다. 정홍생 선생은 두 가지 조건의 변화를 지적한다.

 

1) '대륙 중국'의 변화, 즉 사회변혁의 이상적 참조점인 대륙 중국이 미국과 화해함이 대만 좌익에게 주는 의미이다. 나는 이 조건의 변화(이상적 참조점의 동요)가 대만의 좌익에게 새로운 비판사상의 자원을 모색할 계기를 부여했다고 본다. 어떤 시도가 있었는가? 그 시도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2) '대만 독립 세력'의 형성 및 확대. 나는 이것이 '반국민당'적 개혁이라는 대중적 목소리에 부응함을 통해 일정한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좌익적 관점에서 이러한 개혁의 흐름이 전유될 수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개혁 보다는 '독립'에 주목하면서 본래의 좌익이 '통일파'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대만이라는 일정한 민족국가 형식과 내용을 갖는 정치체의 변혁에 대해 구체적 분석과 전망을 전혀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결은 조건 1)의 변화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관련된다고 보인다. 본래의 좌익들은 대체적으로 대륙 '중국'을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과거지향적' 민족에 근거해서 점점 더 교조화된 인식을 갖게 된다. 이는 진영진의 삶의 궤적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이는 나로 하여금 좌익 운동이 1950년대의 백색테러를 경과하면서 거의 궤멸된 상황에서 소수(예를 들어 진영진 등)의 지식인들이 어떤 운동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묻게 한다. 특히 1970년을 전후한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는 사실상 대만 문제가 본래의 기대나 희망처럼 '중국'이라는 외부에 의해 간단히 해결될 가능성이 희박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해방'으로서의 대만의 좌익적 변혁을 고민하는 흐름도 나왔던 것 같다. 현재로서는 가설적이지만, '하조' 잡지(1976~1979)는 일정하게 이러한 시도가 담긴 구체적 성과인 것 같다. 여기에는 국민당 독재에 반대하는 진영진 등과 같은 좌익 뿐만 아니라 이후 당외운동 나아가 민진당으로 전개되는 흐름을 대표할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미 통/독이 잠재적 긴장이었지만, 적어도 공통의 적인 국민당에 대한 대항의 성격을 가진 지식인 운동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개혁적 흐름이 일정하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면서 정치세력화되었던 반면 좌파는 이에 대해 고집스럽게 과거의 '중국'이라는 이상을 붙잡고 오히려 통일파로 관념적으로 왜소화되는 전락하는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대중성의 부재, 또는 대중운동을 위한 정세인식의 부재가 관건이었다고 보인다.

 

대중성의 부재는 일종의 지식인 중심주의와 관련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흥미로운 것은 조어대 사건이 일어난 1971년 전후에 미국 유학생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유학생의 국적이 이란과 대만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만 인구의 규모로 보았을 때 이러한 유학생 숫자는 매우 비정상적 규모이다. 이는 물론 미국의 전략적 유학생 정책에 기인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대만이 일정하게 민족국가의 형태와 내용을 가지게 되면서 이러한 기형적 유학패턴이 대만의 지식사상의 형성과 그 체계에 지대한 왜곡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학문 체계가 이식되는 차원을 넘어서 비판사상의 전통이 주체적으로 형성될 가능성 자체가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문득 이란의 상황은 어떨지가 참 궁금하다. 이러한 학문적 조건은 비판적 지식과 이념이 대중적 사회운동과 더욱 결합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지식인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문화적으로 계승되며 여러가지 병폐를 낳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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