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박현채 '민족민중론' 에 대한 부연 메모

지난 여름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에 대한 논의를 중국어로 써서 기고를 해 두었는데, 그 문제의식과 단편적 내용은 앞에 간간히 소개한 바 있다. 여전히 여러모로 가설적이고, 번역 일로 인해 진척시킬 여러 고민거리들을 그냥 방치해 놓은 상황이다. 오늘 몇 가지 생각이 들어 간단히 메모해 둔다. 소 논문의 구상 정도에 불과하다.

 

박현채의 '민족민중론' 추기.

 

*민중과 정치성(정치적인 것)

내부적 정치성에 기초한 대중 사회운동의 전개되는 가운데, 일정한 정세 속에서 외부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당과 국가, 심지어 독립 또는 합병 등의 정치체의 주체와 공간에 대한 결정(이른바 국제적인 요인)을 고려할 수 있다. 여기에 과거적 기원을 갖는 '분단'이 미래적 목적으로서 개조되어 제시될 수도 있다.

 

*정치성의 한계와 민족민중론의 변증법
그러나 내부적 정치성의 전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즉 남북한의 분단을 초래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및 신 제국주의적 상황을 인식 및 극복하지 않고, 남한 내에서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적 변혁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변혁은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인민'과 '민족'을 파괴하였는데, 분단은 그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데 일차적으로 분단으로 왜곡된 '공간' 및 '주체'에 근거한 민중의 주체적 정치성의 전개에 기초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기원'으로서의 전근대적 '민족'은 '민중'의 정치화의 과정을 거쳐 다시 미래의 '목적'으로서의 새로운 정치체 '민족'으로 표상된다. 이는 '정치성'의 전개를 해체에서 구성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은 '민중'의 정치화의 과정에 그 기초를 부여하고 일정한 지향점을 제시한다.

 

*분단의 문제설정의 일반화
한반도나 양안의 분단이라는 특수성은 현대민족국가 체계의 일반적 특징이 결정(結晶)된 것이 아닐까. 강한 의미에서, 현대 민족국가에서 '분단'을 발견하지 않고는, 나아가 분단을 발견하여 내재화하지 않고서는 '민중'의 정치화는 지속적으로 출현되지만 구성되지 않고 불안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세계 체계를 지탱하는 현대 민족국가 일반에 대해 "우리는 모두 '분단국가'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분단'을 초래한 원인은 민족국가 내부의 '민중'의 주체와 이념 안에 이미 각인되어 있고, 이를 인식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하지 않는 정치성의 전개는 궁극적으로 과소결정된다. 이는 모든 현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발견하고 발굴해야 하는 일반성을 갖는 비판적 지식생산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 구체적 양상은 매 국가와 사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렇게 '분단'을 발견하는 일, 이른바 '분단'의 문제설정은 바로 '역사적인 것'으로의 우회를 의미한다. 근대 민족국간간체계의 형성은 이러한 체계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지식 사상적 자원이 이미 민족국가 단위의 절대화/본질화를 통해 민족주의적으로 제거되어 온 역사였다. 따라서 이는 기존의 '역사'에 대해 '역사성'을 대립시키는 일종의 '해체'적 작업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탈식민주의적 방법론이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분단의 일반성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 또는 양안의 분단은 바로 분단 내용의 개별적 특수성으로 변증법적으로 개별화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

천정기문(淺井基文) 선생 대만 방문 토론회 단상

2009년 대만 교통대학의 '진영진의 문학과 사상' 토론회가 진행되고, 2010년에 대만사회연구계간에서 특집으로 다룬 바 있는 진영진이 대만 전후의 사상 및 지식 상황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안에 2009년 토론회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가이자 사상가이며, 또 출판가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사상가로서의 진영진의 젊은 시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일정한 계기로서의 역할을 한 당시 일본 주 대만 외교관이 오늘 대만에 초청되어 토론회를 가졌다. 천정기문(淺井基文) 선생인데, 그는 동경대학 재학 중인 22살에 대학을 마치지 않고 시험에 합격하여 대만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대만에 오면서 모택동 선집, 마르크스레닌주의 관련 서적을 가져왔고, 이는 당시 냉전과 국민당 독재체제 하에서 사상적으로 목말라 있던 진영진의 관심을 끌었고, 독서회를 조직해서 국민당 정권의 감시 하에 천정기문 선생의 집에서 활동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수준은 매우 초보적인 것으로 회고된다. 1968년 진영진은 이 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을 살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진영진은 당시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대만 독립 담론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고 한다. 중간에 휴식 시간을 통해 만난 汪 선생은 그가 말하는 독립 담론은 당시에 시명덕施明德, 팽명민彭明敏 등에 의해 이미 암암리에 제기되고 있었다고 한다.

 

토론회 단상을 적어 본다. 이는 박현채 선생으로부터 끌어와 발전시키고자 하는 '민족민중론'과 연관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토론회 중간에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에 대해 나름 진일보 했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정리해 두었는데, 조만간 다시 검토해서 지난 번 글의 후속 글로 개요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대만의 정체성 담론 속에서 독립파는 근대적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통일파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통일은 이미 '분단'을 극복하는 미래지향성을 담지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의 통일됨은 당시의 인식의 지평에서 중국이라는 이상적 공산주의 세계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당시 국제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하나의 현실적 선택 가능성이었다. 물론 현실에서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통일이 미래지향적이라면 중국 역시 '분단'을 내재화하여 정치성을 전개함을 통해 변혁됨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중국 대륙은 건국 이후의 갈등이 긍정적 방향으로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실질적으로 대만이라는 분단의 한 항을 외재화하면서 내적으로 민족국가적 체제를 공고화하는 가운데 모순이 심화되었고, 대만에서도 통일은 이러한 대륙 중국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전략도 부재한 채 관념적으로 제기 되었다. 좌익적 통일담론은 그 후 오히려 대만 독립 담론의 형성에 대항하면서 '과거의 중국'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현재 대만의 비판사상의 맹목점이 재생산되는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대만이 '사실상의 민족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를 인정하면서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질서에 복무하는 민족국가간체계와 갈등적일 수 있고 진보적일 수 있다. 반면 대만 독립은 그 담롬 형성에 참여한 주체나 그들의 동력을 감안할 때 기본적으로 반공주의를 의/무의식적으로 전제한 자유주의를 전제로 설정하 있었다고  보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

[번역] 모택동의 대외개방과 대만 관련 메모

 모택동의 이러한 전략적 결정[1971~2년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작용은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중국의 대외개방의 신 시대를 열었습니다.[1]그리고 대외개방은 필연적으로 대내적 개혁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의의에서 중국 개혁개방의 시대는 모택동이 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택동이 중국의 일반인에게 물려준 중요한 유산이며, 그 이후의 중국에 비교적 넓은 공간을 물려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은 모택동의 최초의 개척에서 크게 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자주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지만, 사실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앞의 강의에서 등소평 및 그 후계자의 시대를'포스트 모택동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택동의 이러한 결정의 두 번째 작용은 대만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대만 역사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대만에서 독립 자주가 강조되고, 금지된 당 활동의 공간을 열어, 후에 '대만 독립' 세력이 출현하여, 이른바 '남록(藍綠)대립'[2]의 구도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중미 국가 관계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중미 화해가 대만의 청년 세대의 사상에 준 충격과 그 영향이 이후 대만 몇 세대의 사상적 방향을 결정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점은 여러분이 아마 더욱 두텁게 체험한 것일 것입니다.



[1]1972년이 중국의 경제개방의 첫 해가 된다. 모택동의 검열과 동의를 거쳐서, 국가계획위원회는 플랜트, 화학섬유, 화학비료 및 연속 압연 기술설비를 수입한다. 이는 신 중국 성립 이래 가장 규모가 크고 종류가 많은 국외 선진 기술 설비 도입 프로젝트로서, 장기적으로 폐쇄적이고 기술이 선진국에 크게 뒤진 국면을 타파하기 시작했으며, 중국 국내의 개혁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轉引自逄先知、金沖及主編:《毛澤東傳》(下),頁1622-1623。

[2][역주] 남색을 상징으로 하는 국민당(國民黨)과 녹색을 상징으로 하는 민진당(民進黨)의 대립 구도를 의미.

 

********************************

이 대목은 개혁개방 이전과 이후를 모택동 시기와 등소평(개혁개방) 시기로 나누는 구분이 갖는 허구성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는 모택동 이후의 시기가 그 연속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포스트' 모택동 시기라는 전리군의 기본적 관점의 기초이다. 아울러 이러한 중국의 변화 및 중국과 세계의 관계 변화는 대만에 일정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좀 더 역사적으로 구체적이게 논증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몇 가지 가설적으로 메모를 해 둔다.

 

1) 중미관계의 개선은 미국이 '대만을 버리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는 의미에서 대만의 지배세력인 국민당과 자유주의 우익의 통치성의 위기를 불러오지만, 대만의 국민당 우익 정권에 대한 저항의 참조점을 대륙의 공산당으로 삼아 왔던 백색테러 이후 미미하게나마 존재했던 대만의  범 좌익에게도 위기를 불러 온다.

 

2) 국민당은 경제발전과 중화 민족주의 등을 통해서 자구책을 마련하고 실행하기 시작한다. 경제발전 및 민족주의는 일정하게 위기를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3) 그럼에도 대중적 층위에서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지배체제는  일정하게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대만주체성' 등의 담론을 동원하여 국민당이라는 지배체제와 경쟁관계를 형성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개혁적 자유주의의 노선을 보임으로써 기존 국민당과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진 이른바 '대만독립세력'의 출현으로 전개된다.

 

4) 이러한 지배체제의 균열을 틈타 또 다른 자유주의 세력이 일정한 개혁성을 기반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중국 공산당의 변화로 인해 참조점이 상실된 대만 범 좌파는 이념적 쇄신이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 설정한 통일/독립이라는 주체성의 담론 구성에 흡수되면서, '통일파'로 전락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