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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4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낮에 접했다. 나는 이소선 어머니를 뵌 기억이 없다. 전태일 평전은 고3때인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후 사서 읽게 되었지만, 그 어머니 이소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가, 오도엽 작가가 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작년에 읽고서 조금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앞 페이지에는 이소선 이라고 투박한 글씨체로 친필 서명이 되어 있다. 내가 받은 것은 아니고, 아마 오도엽 작가가 받아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대만에 있던 나에게 온 것일 것이다. 대만의 왕묵림 선생이 '엄마 안녕' 연출을 구상하면서 처음 참고한 것이 이 책이었다. 나는 대만에 있으면서 오도엽 작가를 대만에서 한번 뵌 적이 있고, 연극놀이터 쉼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을 왕묵림 선생에게 중국어로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었다. 나름 노력했지만, 나의 삶의 가벼움으로는 어머니와 아들의 그 관계를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느낌은 오히려 쉼과 왕묵림 선생의 연극을 통해서 어느정도 전달되지 않았을까 기대하는데, 나중에 동영상이라도 구해서 봐야겠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도서관에서 읽으면서 메모하고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그 결이 너무 달랐다. 그녀의 삶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던 한 사람으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소선 어머니 좋은 곳으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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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decolonialism의 타율성

번역 중 틈틈히 박사 논문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곤 하는데, 그러다가 진광흥 선생이 짧은 글을 발견해서 메모해 둔다. 이는 탈식민주의의 타율성에 대한 논의와 연관된다.

 

진광흥 선생이 '독서' 지에 발표한 지난 해 쓰여진 글로, 제목은 '방법으로서의 인도'인데, 중국과 인도의 사상교류활동을 기획하면서 쓴 글이다.
http://www.chinese-thought.org/whyj/008772.htm

 

이 글은 그의 지난 10여년 작업에 대한 기본 생각을 잘 정리하고 있다.

 

두 가지 부분이 나에게 있어 흥미로운데, 간단히 인용하여 번역해보면,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 이번에 요청하여 방문하게 된 평민연구(서발턴 스터디) 역사학자 Dipesh Chakrabarty가 '유럽의 지방화 provincializing Europe'라고 부르는 사상적 방안, 또는 2010년 7월 서거한 미조구치 유조(沟口雄三) 교수가 제기한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로'라는 사상 정신이 존재한다."

 

"이 사상방안의 전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본토주의적 자폐방식으로 생산한 국수주의는 이미 현대로 빨려 들어온 자아를 명확히 볼 수 없으며, 단지 휘황찬란한 과거에 빠져서 스스로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며, 문을 열고, 단지 구미를 초월하고 따라잡을 대상으로 삼는 참조방식은 이미 효과를 상실했기 때문에, 반드시 민족국가의 내부에서의 본토주의(nativism)와 구미 중심의 세계주의 (cosmopolitanism) 이 양자의 바깥에서 새로운 참조체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식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지식생산에 있어서 운동으로서의 탈식민주의(decolonialism)는 불가결한 시각이자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안은 기존으 지식에 대한 해체의 역할과 새로운 지식을 위한 참조체계의 구성의 역할을 하는데, 문제는 새로운 참조체계의 구성에 있어서 그 계기, 매개, 또는 기준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게 있어서 '역사성'에 대한 관심 속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정치성'의 문제를 무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의미있는 '역사성'은 단순이 '잊혀진'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곳 속에도 있고, 이 역시 기존의 지식을 해체하는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성 또는 정치적인 것'은 마땅히 지식생산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 진광흥 선생은 본문의 다른 곳에서 '지식을 위한 지식'(역사가 부재한 대문자 지식을 위한 지식)을 비판함으로써, 적어도 탈식민주의적 지식생산에 부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것이 갖는 위험, 즉 '지식인을 위한 지식'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다. 게다가, '지식인을 위한 지식'은 역시 '타자'를 가지는 것으로 그리 자율적이지 않은데,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다시 정치의 장에 놓이게 되고, 때로는 우익적이고 보수적으로 '자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아온 역사가 증명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나는 이러한 위험이 '문화연구' 일반과 관계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한편, 진 선생은 근래 거의 언급이 없지만, 사실 인용문에도 있듯이, 그 역시 '현대'로의 진입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 공통적 내용 또는 그 관계성 및 구조를 어떻게 들여와서 정합성을 갖는 논의를 만드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현재는 그것이 자주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는 것 같고, 그래서 현대성 자체가 배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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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과 송두율

지난 해 '경계도시 2'를 뒤늦게 대만의 영화제 준비 과정에서 보고, 그 후에 그 안에 깊숙이 관여했던 모 선생님과 논의도 해보면서 문제가 간단치는 않구나, 그렇지만 '양심'과 관련한 부분은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여러 관계 속에서 혼란스러워 했던 송두율 선생 보다 오히려 조금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의 부인이 더욱 강력하게 그 주장을 폈던 것이 아주 인상 깊었다. 그 안의 긴장 속에는 '북한에 대한 일반인의 정서'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상 그것 자체 보다는 그것과 진보운동과 선거 프레임의 관계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이미 개인이 아니니 개인의 양심 같은 것은 내다 던져버리라'며 사실상의 '전향'을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모습과 정작 지지가 필요한 시기에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뒤늦게 거리로 나온 진보의 모습을 화면으로 보면서, 비로소 진보의 상당수는 '자신의 자신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적어도 나의 경우, 그 불편함에는 진보와 보수가 공유하는 '당'과 '의회주의'가 개인의 양심을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 등의 문제가 있었고, 이를 좀더 살펴보면 모종의 '반공주의'가 진보 내에 은폐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분단의 문제설정이 배제된 남한 내에서의 의회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진보 노선은 궁극적으로 내부에 모종의 반공주의를 의/무의식적으로 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이러한 '북한'은 올해 초부터 논란이 되었던 진보신당과 민노당 사이의 벌써 잊혀진 듯한 쟁점과도 관련되는데, 요즘 상황은 그게 사실 중요한 쟁점이 아니었고, 오히려 '국민참여당'이라는 다른 실질적 쟁점이 제기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반성할 계기가 제공된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올바르게 반성될 가능성은 높지 않은데, 오히려 그것이 쟁점이 되지 않을 가능성을 '진보정당들'의 의회주의 및 국가주의적 노선이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곽노현 서울 교육감의 스캔들을 접한 여러 정당과 개인들이 '사퇴'를 요구하고, 이에 맞서 곽노현 교육감은 자신의 양심을 걸고 한번 싸워보겠다고 한다. 송두율 선생도 올 때부터 감옥갈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왔다고 했는데도, 전향을 하고 감옥에 가지 말라는 강요를 받았다. 물론 결국 감옥에 갔다 무죄로 나왔다. 나는 곽노현 교육감을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해서, 그의 양심이 믿을만 한 것인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 진보정당과 개혁정당 및 그에 관련한 개인들의 무의식에 당/의회/국가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아주 많이 하고 있다. 물론 내 의심은 아직 그냥 내 의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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