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10
    [펌/한겨레] 유재현의 쿠바 탐방기
    칸나일파
  2. 2006/02/07
    수감기록을 시작하며...(3)
    칸나일파
  3. 2006/02/07
    또 한 명을 보내며...(2)
    칸나일파
  4. 2006/01/25
    부르뎅에게 보내는 편지
    칸나일파
  5. 2006/01/25
    한국종교와 병역거부 토론회
    칸나일파
  6. 2006/01/25
    출소 이후(기고글)
    칸나일파
  7. 2006/01/25
    [2003년] 강철민의 행동이 남긴 것
    칸나일파
  8. 2006/01/25
    대학 강연 때 쓴 글
    칸나일파
  9. 2006/01/25
    동유럽사회주의국가에서 CO
    칸나일파
  10. 2006/01/25
    병역거부소견서
    칸나일파

[펌/한겨레] 유재현의 쿠바 탐방기

현장속 현장ㅣ유재현의 쿠바 탐방기/③ 쿠바의 무상교육

 

 

 

2005년 4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서 쿠바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82페소에서 300페소(12,000원)로 상승했다. 12,000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싶은데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었다. 비결은 배급제도에 있다. 90년대 휘청했던 쿠바의 배급제도는 2000년 이후 정상을 되찾고 있다.

여행 중에 적어두었던 쿠바의 배급 관련 메모를 옮겨본다.(1페소는 40원의 환율로 계산했고 파운드와 온스는 킬로그램으로 바꾸었다.)

“쌀 2.27㎏은 10원. 독한 시가는 3개, 순한 시가는 하나에 40원. 10월부터 초콜릿 가루를 배급하기 시작했다. 1봉지에 320원. 감자 2.72㎏ 40원. 토마토 5㎏ 120원. 생선 매월 312g 68원. 대가리 떼고 꼬리 떼면 남는 게 없다고 불만. 설탕은 백설탕과 흑설탕으로 나누어 1.36㎏씩 배급. 백설탕은 콜롬비아산.(맙소사 쿠바는 설탕수출로 먹고살던 나라였다.) 커피는 매달 142g 200원. 달걀 15일에 6개. 한 알에 36원. 성냥 3-4개월마다 (겨우)한 갑. 한 갑에 4원. 7살 때까지 하루에 우유 1리터. 이후 13살 때까지는 요구르트. 그 뒤로는 없음.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날 케이크 배급.”

 

 

1만2천원으로 한 달 살기

 


이밖에 팥, 돼지고기, 닭고기, 햄, 피카디요(Picadillo), 비누, 세제 등이 배급품목에 포함되어 있으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성인에게는 분유와 생선을 별도로 배급받을 수 있다. 덧붙여 학교와 직장에서의 급식은 무료이다.

공과금은 아바나에서 머무르던 집 고지서를 예로 든다면 전기요금 640원, 수도요금 62원, 가스사용료 200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 집의 노부부는 연금생활자인데 37년을 근무한 부인이 190페소, 43년을 근무한 남편이 231페소를 지급받고 있는 반면 관따나모의 한 할머니는 월150페소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 또는 보조금은 은퇴한 노동자, 장애인, 학생 등에게 지급된다.

배급물품은 국영배급소인 보데가(Bodega)에서만 구매할 수 있고 주거지역에 따라 보데가가 정해진다. 보데가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배급물품만 구매할 수 있는 보데가이고 다른 하나는 품목은 거의 동일하지만 배급물량과 상관없이 구매할 수 있다. 단, 값은 배급가보다 비싸다. 보데가의 창고에서 빼돌린 물품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배급물품만으로 한 달을 꼬박 버티기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대략 20일 정도의 필요량을 충당한다. 나머지 필요물품은 국영상점과 페소상점, 농민시장에서 구입한다. 가격은 배급가격의 5배에서 20배까지 높다. 그밖에 달러상점이 있다. 오직 콘버터블 페소로만 지불할 수 있으며 가전제품 등 멋지고 폼나는 수입물품들은 모두 그곳에 죽치고 있다. 월12,000원으로 달러상점 출입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적용하면 4인 가족을 기준으로 300페소라면 충분히 최저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 사이의 괴리는 없는 셈이다.

알려진 것처럼 쿠바의 교육은 무상이다. 학제는 초등 6년, 중.고등 3년, 대학 5년으로 짜여 있다. 이 중 의무교육은 9년이다. 교복과 책, 학용품 모두 무상으로 지급된다. 교복은 연간 2-3차례 지급하지만 신발 사정은 나빠 보였다. 적어도 모든 학생들에게 신발이 제대로 공급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중고등 학생의 상당수, 대학생의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모두 무료이며 대학생은 학년에 따라 20-40페소의 보조금을 받는다.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의 학생들은 연금 수준의 보조금을 받는다.

장애인에 대한 특수교육 프로그램을 학교마다 두고 있으며 성인교육 역시 활발하다. 바라코아에서 모아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직업학교에는 20대 중반의 학생도 눈에 띠었고 트리니다드의 전직 치과의사였던 30대 후반인 민박집 주인은 절치부심 직업전한을 목적으로 치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두 공짜라니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교육을 비용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무상이라고 해서 훌륭한 교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심지어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서 훌륭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보다는 사회와 교육이 어떻게 동거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마련이다.

쿠바의 교육을 폄하할 때 흔히 등장하는 의사를 살펴보자. 의사의 월급은 5-600페소이다. 일반 노동자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지만 의사의 주거이전을 제한하는 쿠바정부의 방침과 교육기간 동안의 불이익을 고려하면 높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경쟁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래서야 누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할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마련이다.

 

 

누가 의사되려 할까마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쿠바에는 인구170명 당 한 명이 배치될 수 있는 6만7천여 명의 의사가 현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의 4배에 달한다. 쿠바에는 또한 (학생이 아닌)인구 36.8명마다 한 명의 선생이 있다. 선생의 월 급여는 400페소 수준이다. 누가 선생이 되고 싶어 하고, 누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은 왜 누군가 기술자나 노동자가 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일까?

아바나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던 산업공학을 전공한 대졸 출신의 젊은이에게 물었다. ‘접시를 나를 바에야 산업공학은 무엇 때문에 공부했어?’ 짓궂은 질문이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적성에 맞았고 재미있어서 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과서적으로 정답을 말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해 입문하는 것이 인간적인 교육은 아닌 것이다. 인간적인 교육을 사회가 보장함으로써 쿠바에서 사회와 교육은 이 상식선에서 동거하고 있다.

인간적인 교육은 유전자적인 다양성에 기초한다. 누구에게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사회가 그것에 순위를 매기고 경쟁에 교육을 이용한다면 교육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1천2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6만7천명의 인간들이 의술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4천8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6만4천명만이 의술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뼈아픈 일이다. 교육의 성과로 배우고 익히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란 성취감일 것이다. 의사라면 아픈 사람을 낫게 한 것, 선생이라면 아이들이 배우게 된 것, 기술자라면 기술이 빛을 발 한 것, 농민이라면 농산물을 생산한 것이 성취감이다. 이 다양한 성취감을 오직 ‘얼마를 벌었는지’로 치환하는 사회라면 인간적인 교육 또한 제자리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그 사회가 필요한 인력 역시 제대로 육성해낼 수 없다. 경쟁교육은 긴요한 분야일수록 언제나 턱없이 못 미치는 인력만을 공급할 뿐이다.

 

 

영감으로서의 쿠바

 

 

배급과 교육의 예를 들었지만 쿠바는 우리와 다른 사회이다. 모든 이질적인 문화가 그렇듯이 이질적인 체제 또한 영감을 준다. 가치 있는 영감을 얻으려면 보려는 사회의 프리즘으로 비추어보아야 하다. 달러로 환산된 수치만으로 그 나라를 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평균임금 1만2천원과 217만5천원 사이에 181배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한 아이의 교육비에 1억 원 이상을 지출해야 하는 사회와 한 푼도 지출하지 않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외진 두메산골의 보건소에 의사와 치과의사, 간호원 1명을 두는 사회와 의사를 찾기 위해 읍으로 도시로 향해야 하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 유재현/소설가
 
‘사’자 돌림과 일반 노동자와 실업자의 사이에 넘지 못할 간극이 존재하는 사회와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몰락을 면하고 여전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현실사회주의국가일 뿐인 쿠바. 지구 반대편의 이 이상한 나라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이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쿠바의 시선으로 쿠바를 보면 그 너머에 우리 안의 일상화된 잔혹함과 비인간성의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꼴을 볼 수 있다. 그 그림자가 주는 영감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회주의적 영감이 사라진 자본주의만큼 참혹한 체제는 없는 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수감기록을 시작하며...

1년 3개월을 조금 넘는 수감생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읽.고.썼.다.

 

3평이 채 못되는 공간에 7명이 함께 산다. 출입은 불가능하고 방 안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이 인정된다. 인터넷을 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핸드폰을 때릴 수도 없다. 그러면 누구라도 글을 읽.고.쓴.다.

사람들은 잘 보지도 않던 신문을 꼼꼼히 분석한다. 신문 하나로 두시간을 버티는 사람도 있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편지를 쓴다고 예의 식상한 문구를 끄집어낸다. '겨울이 가까워오니 바람이 차가워지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따위를. 사람들은 갑자기 한문을 공부하고, 영어를 공부한다. 그것도 질리면 네모네모 로직을 구입한다. 그래도 지치면 그 다음엔 월간잡지들을 섭렵한다. 최고 인기가 많은 건 여성지다. 속옷 광고 모델들이 벽지를 대신한다.

 

읽고 쓰는 일은 때로 커다란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집착이기도 했고, 어쩔 때는 절박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 뭔가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몸부림. 결국엔 나는 살아있다는 심리적 보상. 그래서 가끔은 재미도 없는 책을 꾸역꾸역 오기로 읽는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이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읽은 책이 쌓이면 시나브로 날아간 시간들이 모두 헛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읽고 쓰다가 의도하지 않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진지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좀 더 제대로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처음엔 일기를 썼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쓸 내용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지겨웠다. 수감생활 중반을 넘어서면서 독서도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억지로 책을 붙들고,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다시 덮고. 혼자서 옥신각신 '이걸 읽어 말어' 고민만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이미 지겨움이 다른 모든 욕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만큼 할 일이 없었고, 더 정확히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희일비의 연속. 하루에도 여러번씩 오르내리는 바이오리듬. 잠자리에서 결심했다가 날이 밝으면 쓰레기통에 쳐박히는 수많은 결심들. 그러기를 반복하다 컨디션 좋은 어느 하루. 이 번에는 일기가 아니라 에세이를 써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쓴다. 수감기록을.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가면서. 그러다 또 결국엔 그만두었다.

 

 

출소하고 한참 시간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수감생활에 대해 물어온다. 곧 수감될 병역거부자들과 후원을 맡을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 공세를 펼친다. 의.외.로. 나에겐 아주 사소하고 단순했던 일들이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정보가 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정보를 필요로 한다. 또 단순한 지적 호기심 때문에 궁금해한다. 그런데 알려진 건 거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다녀왔지만 여전히 감옥의 일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감옥을 다녀온 사람 누구도 자신을 전과자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군대 이야기처럼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떠들 이야기가 못된다. 나는 수감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로 집단주의와 위계질서에도 비판적이기 때문에 수감생활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사실은 내가 지루하다고만 느꼈던 그 일상들이 아주 많은 문제들을 시사하고 있었다. 인권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위계질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남성성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는 군대 못지 않은 현장이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군대 문화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마지 못해 가해자가 되아가는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는 순간, 많은 경험들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 자의식을 건드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수감기록이 필요다는 생각을 굳혔다.

 

또 병역거부를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도 병역거부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군대 2년에 비하면 감옥 1년 6개월도 과분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난 군대를 안 갔다와서 잘 모르겠다. 제대로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라고 해야겠다. 함부로 지껄이는 말 때문에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는 것도 모르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감옥에 갇히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병역거부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는 수감기록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마치 의무처럼 느껴진다.

 

 

우려되는 건 단 한가지, 술자리에서 계속 내뱉는 군대 이야기처럼 일방적인 설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배타적인 경험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장벽을 만들고 싶지 않다. '넌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를 수 밖에..'라고 말하는 순간, 그건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또 한 명을 보내며...

병역거부를 하고 나서부터 여러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각자의 표정이 있다. 모두 슬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모두 담담해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어떤 이들은 담담해하고 어떤 이들은 해석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다.

 

병역거부자보다 더 힘든 건 그들을 보내는 가족들이다. 표정에서 그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보통 아버지들은 마지막까지 말이 없다. 아직도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모습이다. 그러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반면 내가 느끼기에 어머니들은 훨씬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어머니고, 향후 일정을 캐묻고 수감생활을 꼼꼼히 체크하는 것도 어미니다. 어머니들은 보통 아버지들 보다 쉽게 병역거부의 가치를 인정한다. 최소한 이해하려 애쓴다. 아무래도 경험의 차이가 큰 것 같다. 아버지들은, 동시에 가장이었고 군인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두고 두고 자식이 겪게될 사회적 불이익을 생각한다. 앞이 깜깜하니까 당장 해야할 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병역거부를 긍정하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형량은 반으로 줄었고, 국회에서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고, 언론은 끊임없이 병역거부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성과들에 만족해하면서 한 명 한 명 수감되는 모습에 무뎌지기도 한다. 각자 영리하게 수감생활을 꾸려가고 더 밝은 모습으로 나오리라 생각하며 편하게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오늘 또 한 명의 병역거부자 재판에 다녀오고 나서 지금 내 기분은 아주 예민하다. 그가 재판을 받고 형사의 손에 이끌려 가고 남은 사람들은 그를 보내며 걱정한다. 오늘 어머니는 냉정하게 다가올 날들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마냥 답답해하시고 이모는 시종일관 불안한 듯 수다를 떨다가 울기를 반복한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지만 그런 행동엔 익숙치 못하다.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왜 갇혀야 하나? 그들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란?'

물론 그 이유란 열가지도 더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열가지 이유인즉, '인간에게 평화란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이라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매번 병역거부자들을 보낼 때마다 짜증과 분노와 무기력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안고 돌아온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르뎅에게 보내는 편지

언제나 냉정한 듯하지만 때론 장난스러운 부르뎅. 그래서 가끔은 건조해 보이기도 하는 태훈이. 얼마 전 갑자기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 나를 놀라게 했던 부르뎅. 전쟁없는세상을 시작한 이후로 늘 곁에 있어서 서로 많이 알고 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르는 게 더 많은 태훈이.

난 너와 용석이의 병역거부 이유서를 보고 지난 몇 년간을 돌아보았다. 병역거부를 결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계속되는 일정에 쫓기던 그 때를. 반복되는 기자들의 질문에 준비되지도 않은 답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던 그 때를. 그래서 어느 한가로운 날 가만히 누워 자신을 생각하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던 그 때를. 내가 했던 말들을 되새김질하기 바쁘고, 내가 뱉은 말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혼자 헤매이던 그 때를. 그래서 내 인생 처음으로 사람은 결국 개별자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때를. 가끔은 불면증을 어쩌지 못해 생각없이 리모콘을 누르며 밤을 새기도 했던 그 때를. 어쩌면 인생은 항상 이렇게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버거운 상대를 대하면 나가는 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때를.


착취된 피땀이 모여 누군가에게 부를 가져다주었고, 그 부가 권력을,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기를, 그리고 그 무기가 다시 슬픈 눈물의 사람들을 겨누고 있다는 너의 병역거부 이유서. 사상의 한 귀퉁이가 심각하게 무너졌을 때, 껍데기뿐인 병역거부자에 불과했다는 자기 고백. 너의 병역거부이유서를 읽으며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과 새롭게 받아들여할 것들 사이에서 한참을 망설였던 그 때를. 때로는 겉잡을 수 없는 적대심과 분노로, 들끓는 승부욕으로, 거친 말과 배타적 태도로 살아왔던 그 때를. 

세심하게 보호받아야 할 너의 신념은 이미 수많은 검증 과정을 거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너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은 널 병역거부자로만 검증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때로는 너 자신이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편견의 장벽이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긍정보다는 냉소가, 대화보다는 침묵이, 관심보다는 소외가, 애정보다는 외면이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완벽을 기대하면 상처받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고,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등지는 게 더 편하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난 오늘 네 결심을 축복해주고 싶다. 원래 값진 인생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에게는 이 과정을 충분히 이결낼 만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더 멋진 모습으로 성장한 너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긍정의 에너지가, 희망의 언어가, 평화의 기운이 너와 함께하리라 믿는다.

수감되면 종종 글로 찾아가도록 하마. 항상 건강하고 밝게 지내길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종교와 병역거부 토론회

한국종교, 스스로 길을 묻다

 

서구사회와 반대로, 한국 종교는 여호와의 증인을 제외하고 다소 뒤늦게 병역거부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병역거부자 오태양과 김도형은 불교신자였으나 사람들은 병역거부와 종교의 관계를 심각하게 묻지 않았다. 병역거부 운동 초기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데도 병역거부를 했다는 사실만이 화제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발 앞서 생각했다. 베트남 전쟁 때처럼 현역군인이 병역거부 하는 일도 가능하겠다고.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가 병역거부를 하게 된다면 종교계 내에서도 병역거부 관련 논란이 뜨겁게 전개되리라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전자는 강철민의 농성으로 현실이 되었다. 군입대 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양심에 위배되는 부당한 행동을 강요했을 때 개별자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후자는 천주교 신자 고동주씨 병역거부가 계기가 되었다. 이제 종교계도 오랜 침묵을 깨고 발언하려 한다. 흥미로웠다. 한국 현대사에서 종교는 과연 제 역할을 다 했는가? 한국 종교는 국가안보와 국민여론이라는 장벽을 넘어 병역거부를 옹호할 수 있을 것인가? 토론회는 한국 종교 스스로 길을 묻는 자리였다. 그래서 열린 토론회는 <한국종교와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자못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있었다.

 

>> 토론회 전체 풍경(12월 12일 오전10시, 국가인권위원회 11층)

 

 

노회찬, 임종인 의원 축사, 발제자 2인 각각 30분씩 발제, 지정토론자 4인 15분씩 발제, 질의응답, 전체토론까지 4시간 가까이 진행된 토론회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고~고고~(자료실에 올릴 예정이니, 토론회 자료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노회찬 의원 축사
 
 
이 늦어져서 이런 토론회들이 마련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병역거부는 군대문제라기보다 신앙, 양심, 사상의 자유 문제로 봐야한다. 다른 사람의 신념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차별, 억압의 상태 벗어나는 게 문명이다.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것이 기본권으로서 인권을 보장하는 길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타인의 신념 존중하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 최근 황우석 교사 논란을 보며 다른 생각, 다른 판단에 대한 공공연한 폭력을 보았다. 애국 이름으로 포장해서 다른 생각을 매도하는 데 공포와 전율을 느꼈다. 차이를 인정 못하는 우리 현주소를 보여준 것이다. 오늘 이 토론회가 그런 의미에서 유익한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함께 열심히 하겠다.
 

>>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임종인 의원 축사

 

입법운동 상황을 말씀드리겠다. 현재 국방위원 18명 가운데 9명이 찬성, 9명이 반대하고 있다. 구성은 열린우리당이 9명, 민주당 김홍일의원, 한나라당이 8명이다. 현재 한나라당 전원과 열린우리당 김명자 의원이 반대하고 있다. 얼마 전 국회 여론조사에서 65%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문안에 문제가 있었다. 여론조사 다시할 예정이다. 국방부와 병무청은 무조건 반대한다고 보고 한나라당의 태도가 중요하다. 찬성측이 강제로 표결 밀어부칠 예정이 없다. 한나라당 설득이 중요하다. 최소한 표결 과정을 막지는 못하게 병역거부 관계자들이 박근혜 대표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토니 블레어를 비롯해 유명한 외국 정치인들의 지지의사를 받아볼 생각이다. 국내 유명인사 선언도 할 생각이다. 대만처럼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병역거부는 대체복무 입법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군대가 기득권을 놓치 않으려는 상황에서 군대개혁운동 역할도 한다. 군대는 바뀌어야 하고, 반드시 바뀔 것이다. 또 양심의 자유와 시민권을 확대시킬 것이다. 작년에 처음 입법 얘기했을 때 국방위원들이 다 ‘이게 무슨 소린가’했다. 이정렬 무죄판결 때도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훌륭한 판결이라고 했다가 당원들에게 엄청 비난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곧 되리라 생각한다. 종교인들이 도와줬으면 한다.

 

>>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


 

발제 1 - ‘보편적 인권으로서 양심적 병역거부, 그리고 종교의 역할’

 

이대훈(참여연대 협동처장, 평화학 연구자)

 

 

이 자리에 병역거부 운동을 해오시던 분들이 많으실텐데 항상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고동주 씨를 비롯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는 기본인권의 문제다. 인권의 보편성, 불가침성을 적용해 볼 때, 병역거부권을 보장해주는냐 마느냐 하는 선택사항이 존재하지 않는 최소한의 권리 문제라는 것이다. 병역거부를 인권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예외성 인정할 수 없다. 가령 국가안보, 재정상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보장하지 않는 것은 사회가 그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도 의사표현의 자유로 보장해야 한다. 결국 핵심은 어떤 사회가 인권을 기본적인 사회운영원리로 삼고 있는가의 문제다. 정치공동체가 인권을 정치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문제다.

유엔 89년도 결의안이 중요하다. 양심의 자유 일반으로 확대 해석했다. 1998년 결의안은 ‘마그나카르타’라 불린다. 한국정부는 국제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헌법상 국제법 존중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인권 관련 국제법은 대체로 무시해왔다. 정상적 민주국가라면 이런 괴리가 없어야 한다. 강제사항이 없으므로 시민사회가 나서서 다양한 루트로 압박을 해야한다.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평화박물관’에 간 적 있다. 1차세계대전 당시 병역거부자들이 탄광이나 산림노동을 하며 3~4년씩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사진을 봤다. 이처럼 초기에는 극심한 처벌이 뒤따랐다. 허용한 나라조차도 매우 제한적으로 특정교파만 인정하거나 비전투 복무를 권장했다. 한국사회의 최근현황은 최정민 씨가 나와 있으니 생략하겠다.

끝으로 도전과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먼저 선택적 병역거부, 시민으로서 군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가 있다. 불법무기사용, 부당한 명령, 민간인 학살 등 양심에 반하는 경우 현역 군인이 선택적 거부 할 수 있다. 병역거부는 집총거부를 넘어 양심의 자유 문제다. 여기에는 부당한 군사적 명령에 대한 거부권도 포함된다. 한국은 시민으로서 병사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전혀없다. 군인을 어떠한 시민으로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미국의 경우, 군인의 시민권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 불복종 권리는 물론, 명령을 거부했을 때 구제절차도 사전에 교육시킨다. 반면 우리는 명령 불복종에 대한 이해가 없다. 국가명령에 대해 개인의 윤리적 판단권을 열워둬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군이 핵무기를 사용하려 할 때, 핵무기 사용은 국제법상 불법이므로 저항권을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양심의 자유, 윤리적 판단을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적용범위는 매우 넓다.
다음으로 최대장애물인 국가안보문제가 있다. 국가안보는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모든 전문가가 해석의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 가령 서해교전도 어떤 사람들은 국가안보 문제로 이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꽃게잡이(생계) 문제로 이해한다. 그 동안 소수 안보전문가들의 해석만을 추종해왔다. 안보 관련 해석, 토론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설득과정에 참여해서 안보논리의 독점을 깨야한다.

 

 

>>발제 중인 참여연대 이대훈씨

 


발제 2 - 한국 종교와 양심적 병역거부, '정통'과 '이단'을 넘어서

강인철(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발제문 자체가 매우 길다. 다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중요한 요점만 지적하겠다.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종교적 해석, 주요종교의 대응방식(가령 군종장교 같은), 주류 기독교 특히 한기총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먼저 병역거부자를 배출한 세 종교(개신교, 불교, 천주교)의 전쟁에 관한 입장을 살펴보자. 천주교의 경우, 정의로운 전쟁은 사실상 현대 전쟁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교황청 역시 점차 평화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서 공식적으로 병역거부 지지 의사를 표하고 있다. 개신교는 초기부터 평화주의 지향한 몇몇 교파가 있었다. 특히 WCC(세계교회협의회)의 경우 창립총회부터 전쟁교리를 비판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극복하려 했다. 심지어 양심적 납세거부권까지 인정하고 있다. 천주교보다 훨씬 빨리 공식 결의로 병역거부권을 인정했다. 불교는 기독교같은 통일적인 중앙조직이 부재하지만 대체로 정의로운 전쟁을 긍정하고 있는 듯하다. 교리 상으로 평화주의와 혼재하고 있는 양상이다. 적어도 한국불교는 평화주의가 소수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렇다면 전쟁을 인정한다쳐도, 부당한 전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오늘날 선택적 병역거부 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1968년(베트남 전쟁 중)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미국 천주교의 경우 선택적 병역거부 문제를 적극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한국종교는 전쟁을 어떻게 바라볼까? 개신교 주류는 한국전쟁을 긍정했다. ‘성전’, ‘거룩한 전쟁(Holy War)', '십자군 전쟁’등에 비유하며 매우 호전적 자세를 보였다. 2001년 이후로 한국교회협의회(NCC) 중심으로 평화주의 입장을 옹호하는 쪽도 나타났다. NCC는 교리상 이유보다, 현실적으로 한기총과 복수가입해 있는 단체들 때문에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강철민 농성 과정에서 이미 견해는 굳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내에서는 불교가 가장 적극적인 종교세력이다. 적극적 입장 피력은 없으나 내부 반발이 거의 없다. 천주교는 발표 시기만 남아 있을 뿐, 공식적으로 지지한다고 봐야한다. 왜냐면 교황청의 공식 입장이 병역거부 지지인 상태에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스스로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외견상 한기총 외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은 없다. 그럼 한기총은 왜 반대하는 것인가?

한기총은 이단과 국가안보 논리를 들고 있다. 그 기저에는 한기총의 전쟁이론이 놓여 있다. 한기총은 이라크 파병은 물론 추가파병까지 적극 옹호했다. 심지어 선제공격까지 운운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 대북선제공격도 가능하다는 발언을 했다. 이라크 침공도 마찬가지로 불법적인 선제공격이다. 선제공격은 절대로 정의로운 전쟁에 포함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익이나 한미동맹 따위도 정의로운 전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결국 한기총은 성전이나 십자군 논리를 이용해서 전쟁을 합리화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나 종말론 같은 교리를 이용해 매우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내부의 배신자를 향한 처벌이 가장 가혹했다.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처절한 싸움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한기총은 심지어 이단을 향한 국가폭력까지 정당화한다.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병역거부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단과 배교를 강요하고 강력한 국가폭력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예수재림교는 핵심교리를 수정하기까지 했다.

한국종교가 강경한 태도를 취할수록 내부 신자들은 열광하겠지만, 전체 상황을 볼 때 외면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발제 중인 강인철 교수


 

지정토론

 

지정토론1 - 천주교 / 박창균(신부, 창원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지정토론2 - 불  교 / 전재성(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사)작은손길 이사)
지정토론3 - 개신교 / 정종훈(목사, 연세대 교수)
지정토론4 - 시  민 / 최정민(연대회의 집행위원장)

★ 지정토론자 발제는 생략합니다.

 

>>지정토론 발제자들.. 왼쪽부터 박창균씨, 전재성씨, 정종훈씨, 최정민씨

 

 

질의응답 및 전체토론

 

- 정종훈 : 이대훈 선생에게 질문. 양심적 병역거부가 애국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과 맞물릴 수 있지 않을까? 강인철 교수에게 질문. 대체복무제가 시행되면 종교가 먼저 그 과실을 누릴 수 있다는 발언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위험이 있지 않은가?

 

- 인터넷 신문 ‘참말로’ : 병역거부에는 꼭 평화주의같은 입장표명이나 절차가 있어야 하나? 그냥 병역거부면 안되나?

 

- 청중 : 강인철 교수에게 질문. 종교단체의 경우 자신이 속하는 단체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대체복무를 할 수 있어 유리하다는 주장도 그렇고 지나치게 교파별 분석에 신경쓰다보니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집단적인 결론만 내린 게 아닌가? 시민과 종교인은 별개의 인간인가? 정종훈 선생에게 질문. 진정한 애국이란 표현은 무슨 의미인가? 전체에게 질문. 인터넷 신문 참말로의 질문에 동의한다. 소위 병역거부와 병역기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식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기피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 사회자 : 패널들이 각 종단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토론회 관례상 이렇게 분류한 것이다. 오늘 질문이 날카롭다.

 

- 이대훈 : 청중에게 답변. 현재 상황에서는 병역기피자에게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자살과 사고사 등등 일반적으로 군대 안보내려는 심리를 이해한다. 과도하고 비효율적인 군대를 개혁해야 한다. 모병제도 토론 가능하다. 병역거부자와 기피자가 칼같이 나눠지지 않는다. 아무튼 한국 사회에서는 일단 기피자에게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양심’은 가치관의 문제다. 평화주의를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기보다 어떤 상황을 강요받았을 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체적 상황이나 명령을 요구받았을 때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무력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쪽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나 각자 선택을 한 것이고 그 자체로는 존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병역거부자는 어느 나라에서나 소수였다. 다른 생각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정종훈 선생에게 답변. 애국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는 국가간 무역분쟁이 발생한 경우에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 시민권의 문제가 핵심이다. 일국 시민권은 이미 다 해체되어 가는데 약자들에게만 일국적인 시민권을 강요하고 있다. 외국계 자본에게는 사실만 모든 권리를 주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은 어떤가? 애국을 조건으로 정치공동체를 성숙시키는 시대는 지났다. 그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가 문제다. 일단 양심적 병역거부는 무조건 보장해야 한다.

 

- 정종훈 : 이대훈에게 답변. 병역거부자들이 매국노라는 비난을 듣는 게 안타까워 애국이란 표현을 썼다. 애국과 애국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네 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다. 네 이웃이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나라사랑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까지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듯이 올바른 의미에서 나라사랑을 한다면 인류 공동체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화실천이나 보편적 대의와 융합되는 나라사랑을 말한 것이다.

 

- 강인철 : 박창균에게 답변. 90년대 이후 한국 종교는 생명운동에 주력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전쟁문제는 분리해서 사고한 게 문제다. 풍요로운 생명 담론이 개인의 문제로 탈정치화되면서 약자들로부터 멀어졌다. 이제 종교가 전쟁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운동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이 번 토론회의 계기를 제공한 고동주씨, 천주교 신자 최초로 병역거부를 했다. 후원회 사람들과 함께 토론회를 경청하고 있다.

 


- 박창균 : 12월 5일 정평회의에서 고동주 문제를 논의했다. 공식입장을 정리하자고 정식 안건으로 요청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 자체가 거부감을 많이 주고 있으니 대체복무 도입과 고동주 불구속 수사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 강인철 : 비록 부담스런 용어 사용을 피했다고는 하나 중요한 진전이다.
정종훈에게 답변. 평화교리 교육의 중요성 공감한다. 아울러 신학계 내에서 한기총 계열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토론회를 자주 연다면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청중에게 답변. 어차피 지금 최대 걸림돌은 한기총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집중 비판을 한 것이다. 천주교는 찬성할 수 밖에 없다. 공식 입장이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당분간 계속 침묵할 듯하고 NCC는 찬성입장이다. 한기총의 태도 변화 내지는 지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한국 종교가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미 기반시설이 잘 되어 있다. 좀 더 대체복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외국 사례처럼 판정절차도 점차 기계적으로 갈 것이다. 아직은 판정절차 논의가 부족한 상황인데 병역거부 운동 초기라 그렇다. 결국엔 누가 누구의 양심을 보증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엔 민관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뽑아 병역거부 판정을 내리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권위있는 종교인의 신원보증같은 방식으로 점차 간소화, 기계화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권리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독일의 경우도 이제는 모병제 논의가 진행 중인데 모병제를 할 경우 대체복무가 감당하고 있는 복지분야 재정과 인원을 메꿀 방법이 없다. 대체복무는 아주 싼 비용으로 사회복지 요구를 멋지게 소화해내고 있다. 이 정도로 대체복무 효용이 높다는 게 증명된다면 점차 인정되는 추세로 갈 것이다.

- 사회자 : 오늘이 종교계가 모인 두 번째 자리다. 움츠려 있는 종교계가 나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나도 천주교 신자이고, 인권운동 한 지 얼마 안됐는데 모든 문제의 대척점에는 항상 종교인들이 있어 씁쓸하다. 너무 민망할 때도 많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내부 변화와 성찰이 있어야겠다. 그런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 감사드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출소 이후(기고글)

또 이사를 했다. 메가패스를 다시 깔았는데 모뎀을 바꾸는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우리집 컴퓨터는 악성 스파이웨어와 바이러스 놀이터가 되었다(고 짐작할 뿐-.-;;). 결국 포맷했다. 여기는 PC방이다. 다시는 PC방 신세 안 져도 될 줄 알았는데 역시 바깥세상은 나름대로 험하다. 며칠 전에는 지하철을 타는데 환승역을 못 찾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엉뚱한 출구로 나와서 헤매기도 했다. 너무나 빠르게 걷는 사람들, 너무나 계획이 많은 사람들, 너무나 돈 욕심이 많은 사람들, 챙겨야 할 관계가 너무 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난 당분간은 이렇게 어리버리 하겠지. 곧 그마저도 적응이 되겠지. 그래도 나오니까 참 좋다. 이 맑은 공기, 푸르고 높은 가을하늘은 정말이지 매력 그 자체다. 적응이 빠를수록,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 아름다운 것들도 잊고 살게 될까? 솔직히 사람에 대한 매력은 가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이 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게 될까?


구치소와 군대는 비슷한 면이 많다(고 짐작할 뿐-.-;; 군에 다녀온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니까).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집단생활, (소위 짬이 쌓여) 갈수록 편해지는 위계서열 구조, 수많은 벽 앞에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심정. 기본적으로 낯선 사람들 끼리 집단생활을 하는데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공간이 너무 좁은 게 결정적이다. 3평도 안 되는 공간에 7명까지 들어온다. 다리가 겹치는 건 둘째 치고 재수 없으면 어깨도 못 펴고 자야한다. 그런데도 화가 안 난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서열이 높은 사람은 조금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구조가 그런 식이니 딱히 누구에게 화를 내기 애매할 때가 많다. 이럴 땐 ‘그러니까 감옥이지 달리 감옥이냐’는 운명론적 사고가 싹튼다. 사람들과 1:1로 얘기를 해보면 각자 불만이 다 있다. 특히 누구 누구는 이래서 재수없다는 식의 감정을 다 가지고 있다. 1:1로 수다떨기가 서로 맺힌 감정을 푸는 데 효과적일 때도 많다.

갈등을 무마시키는 가장 큰 무기는 위계서열. 일단 이 구조에 적응하려면 처음엔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인내한다. 더러 불만이 생기면 대화로 풀어보려 하지만 토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 남성들만의 세계라 더 거칠다. 가끔 주먹다짐도 벌어지지만 대개는 폭언으로 끝난다. 징벌을 받으면 자기도 손해니까. 교도관들도 어지간하면 말로 해결하라 하고. 그 다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나도 곧 서열이 올라간다는 기대심리가 생긴다. 기대심리는 웬만한 불만을 참게 만든다.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감옥 생활은 조금씩 편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만큼 익숙해지기도 하고 대처방법을 터득해가니까. 사람들은 위계질서가 가하는 폭력도 두려워하지만, 그 구조에 적응 못해서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군대, 회사, 학교, 감옥... 이 세상에 많은 것이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가겠구나 생각도 든다.


처음엔 굴욕감도 조금 있었다(그래, 지나고 나니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 가끔은 정말 진저리나도록 사람이 싫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냉정해지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가 될 때도).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 나중엔 점점 늘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너무 안 가더라. 도 닦으러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온갖 수단 다 동원해서 제 입맛에 맞출 때까지 저항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다. 난 여러 가지 태도를 두루 고려해서 적당히 잘 지낸 거 같다.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상대를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하고. 시스템을 알고 나니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범한 의미에서)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잘 지냈다. 서로 조금은 들어주려는 노력도 하고, 더러 사소한 것들은 배려도 해주고. 평범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모아놓으면 누구라도 예민해질 수 밖에. 이건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운동하는 사람들하고 있어도 반드시 발생하는 비슷한 문제들도 많았다. 요컨대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걸 순응이냐 저항이냐 하는 식으로 사고하는 건 좀 자신을 지치게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간 생각을 바꾸니까 좀 편해졌다. 무리 가운데는 꼭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실히 개개인마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많이 난다. 무조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면 더러 통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지는 생활에 적응하더라. 안 그럴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했던 거 같다. 조금은 달라 보려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더러는 오래 살다보면 정들기도 한다.(이건 참 신기한 발견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는데...) 결정적으로 자존심을 상할 정도로 거친 사람들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자존심이 다쳤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만큼 거친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 생활이 잘 안 맞는 사람들은 많이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여기서 바뀐 생각이 또 하나 있다. 원래 난 공무원을 싫어했다. 국가는 자본가들의 위원회고, 공무원은 그 위원회를 떠받치는 벽돌같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도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박봉을 탓하고, 아이들 교육을 걱정하고, 내집 마련 생각에 가슴 설레고,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보려고 주식투자에 목을 매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 내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들. 정치적인 문제를 두고 입장을 가르면 더러 같은 편에 서는 경우도 많다. 공무원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교도관은 공무원 중에서도 가장 막다른 선택이라는 피해의식이 팽배하다. 사람은 원체 복합적인 존재니까. 무엇보다 1:1로 만나면 그들 역시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격체다. 그러니 공무원이라는 집단을 묶어 생각하지 말고 각 개인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부분에서는 묘한 인간적 유대가 생겨나기도 한다. 아주 미세한 연대의식이랄까? 참 외로운 사람들 많더라. 무슨 책이었었나? ‘상대방에 대해 너무 완벽한 걸 요구하면 자신도 상처받는다’는 말을 보았다. 자신이 완벽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걸 인식하면 할수록 상대방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되는 거 같다.


처음에 병역거부를 결심했을 때는 형량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워낙 의지가 남다를 때였으니. 당연히 3년형을 예상했다. 출소를 두 달 정도 앞둔 시점부터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갔다. 짐작컨대 군에 입대한 사람들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3년형을 받았다면 참 힘들었겠다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해서 이만큼 온 거라고 생각하니 뭉클했다. 작은 변화도 그 과정을 직접 겪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벅찬 감동인가!! 1년이 가까워오면서 자주 구치소를 배경으로 꿈을 꿨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여러 번 등장했다. 자고 일어나면 멍한 상태에서도 그 꿈 때문이 기분이 무지하게 찝찝했다. 1년 6개월에 가석방까지 받아서 나왔으니 참 다행이다. 이 좋은 가을에 나와서 참 재수좋다.


GP 총기난사 사건 때, 리셋 증후군이란 말이 사회화되었다.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에 익숙한 신세대들은 삶도 언제든 리셋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철없는 행동을 벌인다는 식이다. 정말 속편한 논리다. 온라인 게임 수출국이니, IT 최강국이니 자랑하다가도 무슨 사건만 터지면 애먼 곳만 두드린다. 관련이 없진 않겠지. 그렇지만 사람이 어디 그렇게 간단한 존재냐? 사회적 책임은 생각도 않는 한심한 사람들.

출소를 앞둔 시점부터 리셋 증후군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봤다. 이 시기를 나는 리셋시키고 싶은건가? 처음엔 뭔가 의미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이런 저런 계획을 잡고 바깥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건 단절의 시간임이 점점 더 분명해져가더라. 혼자 견뎌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마음을 콩 밭에 두고 안에서 잘 살기는 힘든 노릇이다. 한 두 달이면 가능하겠다. 그렇지만 1년이 넘는 시간은 그런 식으로 지내기 힘들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야말로 자연스레 빵잡이가 되었다. 다들 그렇듯이. 그러면서 점점 지루함에 지쳐갔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잘 지냈다.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넌 참 잘해냈어’라고 한마디 해주고, 밖에서 격려해준 사람들에게도 ‘참 고마웠어’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그 시간을 리셋시킬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많은 걸 배웠다느니, 자유로운 공기와 푸른 하늘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느니 그런 말들을 할 수도 있겠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몸 버리고 마음 상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저 난 지금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게 쉬고 싶을 뿐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해야할 일들이 파도처럼 몰아치리라. 그러기 전에 마구 쉬어보자. 사람들이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을 어이없는 듯 쳐다보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3년] 강철민의 행동이 남긴 것

강철민의 행동이 남긴 것



1.  현재까지 경과


2003년 7월 7일  강철민 군입대

       파병반대를 생각하며 군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11월 17일 백일 휴가

       11월 18일 신문 기사를 보고 염창근 씨(최근 이라크전 파병 반대를 이유로 병역거부)와 연락

       11월 19일 염창근 씨를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을 해오던 사람들과 만남.

       11월 21일 휴가 마지막 날, 파병반대 병역거부 기자회견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이등병의 편지' 발표.

                  어머니, 삼촌 상경 및 부대 복귀 설득

                  KNCC 인권위원회에서 파병반대 농성시작

       11월 22일 0시 부대 복귀 시한 경과                  

                 스물두번째 생일축하 잔치

       11월 23일 계속된 지지방문자들과의 만남, 언론인터뷰

       11월 24일 향후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서 강철민, 변호인단, KNCC, 지원단 사람들과의 회의

                 자발적인 강철민지지 문화제 시작 <심봤다! 강철민>

       11월 25일 <심봤다! 강철민> 2회, 촛불집회 시작

      11월 26일 이등병 강철민씨 향후 일정및 종교 시민사회단체 의견 발표 기자회견

             <노무현대통령께 드리는 두 번째 편지 발표>, 청와대 면담을 위해 평화행진 계획 발표

     11월 27일 3차 촛불시위 및 문화제

     11월 28일 11시 기자회견

               <저는 파병반대의 길을 계속 걷겠습니다>

                12시 <강철민과 함께 나누는 평화의 식탁>

                1시  기독교 회관앞 약식집회

                2시 “강철민과 평화를 위해 걷자” 행진 시작

                2시 10분 경찰과 대치

                2시 40분 수방사 헌병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

     12월 12일 강철민 씨 첫 공판 - 광주 31사단

               강철민 씨 “ 파병 철회때까지 병역거부할 것 ”, 군 검사 징역 3년 구형

     12월 27일 강철민 씨 선고공판, 실형 2년 선고

     12월 31일 항소, 육군교도소로 이감


※ 군사재판은 2심까지 밖에 없으며, 강철민 씨는 현재 육군교도소에 있음.

주소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3리 사서함 900-10 (우편번호 467-909) 강철민 앞



2. 농성과정


지난 해,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반전운동이 크게 성장했다. 역사적으로 반전운동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저항의 광장으로 불러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으로 시작되었던 68년을 전후로한 전세계적인 저항을 되새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대대적인 규모의 반전시위는 국익과 힘의 논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반전 운동이 들끓었던 유럽 역시도 이라크 전쟁이 가져다 줄 국익을 계산하는 정치인들의 사고 안에서만 움직일 뿐이었다. 반면 이전과 다른 저항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다른 한 편으로 끈질기게 평화를 위해 활동할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늘어간다는 점에서 2002년의 저항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강철민을 계기로 뭉쳤던 농성단이 그러한 변화의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인 의지들이 합쳐진 농성 프로그램, 평등하고 민주적인 농성단 운영,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소통과 홍보, 평화적인 수단의 행진과 다양한 저항방식들 등등. 몇 달 전을 생각해보면 강철민 농성장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슈들로 농성이 곳곳에서 진행되었었다.

우리들이 농성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민주주의, 자발적 의지, 그리고 진심어린 행동들이었다. 우리는 강철민의 양심에 진심으로 동감하고 함께 행동하려고 했다. 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소외되거나 단순히 지지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의 주체가 될 때 농성이 참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때로는 의견의 충돌이 없을 수 없었고 그것을 시시각각으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일이 항상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농성을 마무리 할 때 한총련의 조직적 개입으로 함께 토론해서 냈던 결론이 번복되고 다시 재번복 되었던 경우가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또 아무리 지도부 없는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었다고는 하나 농성장 내에서의 지도관계와 위계적인 서열은 항상 문제가 되었다. 임시로 구성된 지원단 집행체계는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언론과 접하고, 더 많은 일이 몰리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항상 운동의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철민 농성은 매우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길 것이다. 병역거부자, 아나키스트, 문화 활동가, 평화인권 행동가 등등 다양한 이들이 농성에 함께했으며 이들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 이전 대중운동의 주류에서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조직적으로 사람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며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냈던 강철민 지원농성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매일 문화농성단이 직접 기획하고 홍보해서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던 저녁 문화제와 촛불집회, 마지막날 장미꽃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떤 평화행진은 아마도 내 인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3. 전쟁과 선택적 병역거부


양심적 거부자들은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양심에 따른 거부를 수행하는 동기에 따라 종교적 거부자(religious COs)와 세속적 거부자(secular COs)개인적 혹은 정치적 동기에 따른 거부자들)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념의 범위에 따라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보편적 거부자(universalitic COs), 특정 전투에 반대하는 선택적 거부자(selective COs) 특정 무기를 거부하는 임의적 거부자(discretionary COs)로 나뉜다.

선택적 병역거부는 20세기 대규모 전쟁으로 때로는 아주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기도 했으며,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저항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선택적 병역거부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분명하다. 한국에서도 병역거부 운동이 시작된 지 채 몇 년 되지 않았고 반전운동이 본격화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저항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나고 영향을 주었다. 반전운동의 대중적인 성공 이후로, 한국군이 파병되어 침략자의 일부가 되는 순간 선택적 병역거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그리고 실제로 강철민을 통해 그러한 생각이 현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냉전이 시작되었고, 자본주의는 이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나 공황을 겪지 않고 20년간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역설적으로 전쟁을 통해 자극받은 과학기술의 발달은 마치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이 보였으며,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타협으로 자기 지분을 높이는 법에 익숙해졌다. 상대적인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모두가 텔레비젼과 전화를 소유할 수 있는 풍요의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베이비 붐1)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 되었을 때 불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져서 수많은 도시에서 대학생 수가 10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비좁은 강의실과 보수적인 커리큘럼, 안정을 선호하는 숨막히는 기성제도, 성적 편견, 권위주의, 무기확장(특히 핵무기),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점철된 세계. 불만은 점점 거칠어졌고 젊은이들은 락음악에 열광하며 프리섹스를 즐기는가 하면 종종 마약을 애용하기도 했다. 자신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기성언론에 맞서 지하언론으로 맞섰으며 점거를 통해 저항을 표현했고 수만개의 꼬뮨을 만들어 기성 가치관에 맞섰다. 학생운동은 순식 간에 급진화되었고 폭발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었다.2) 히피문화가 다수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좀 더 자유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저항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젊은이들은 전쟁을 통해 기성의 삶의 가치 전반을 되돌아보게 되었으며, 일상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군사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백일몽으로 끝난 꿈같은 나날들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열정을 통해 보게 된 세상의 부조리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적어도 학생들은 점증하는 전지구적 군사화, 일상적 전쟁의 위협, 대학과 군수산업의 관계를 바로 보게 되었으며, 그에 저항하는 방식을 새롭게 찾아냈다.

1965년부터 미국의 지상군이 베트남에 파견되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토론회(teach - ins3))를 통해 동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적인 반전행동에 나섰다.4) 특히 반전시위가 폭발적으로 전개된 계기가 된 것은 대학생들에게 병역 면제 혜택을 대폭 철회하는 내용의 병역법 개정이었다. 1966년 2월에 병무청장 루이스 허쉬(L.B. Hershey) 장군은 모든 남자 대학생들에게 ‘병역시험’을 보게하여 성적이 낮은 순으로 징병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른바 ‘허쉬 규정’을 발표했는데 이 발표는 미국 대학생들의 정부에 대한 반감,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필립 베리건(P. Berrigan) 신부는 뉴포트의 징병사무소를 습격하여, 징병 서류에 피를 쏟아붓는가 하면 대학생들은 저항의 표현방식으로 공개적인 집회에서 징병카드를 모아 태우는 방식으로 전쟁참여 거부의사를 표현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소 당한 사람이 20만 9,517명, 징역은 3,250명, 집행유예가 5,500명, 불기소 처분이 19만 7,750만명 이라고 하니 저항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간다.5) “베트콩들은 우릴 깜둥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람 죽이기 위해 1만 마일 날아갈 생각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 알리는 알리는 1967년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한 편, 반전가수로 잘 알려진 존 바에즈는 반전콘서트를 허락하지 말라는 보수세력의 압력에 맞서 워싱턴 파크 앞에서 수만명이 참가한 무료공연으로 맞서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봤다면, 혹은 ost를 들은 사람이라면 그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학생들은 대학과 군수자본의 관계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에 맞섰다. 국방부나 기업의 후원 하에 진행된 생물학전, 화학전 관련 연구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착취적인 투자를 지원하는 연구 등이 밝혀졌고, 대학이 이러한 현실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데 깊이 협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은 저항했다. rotc 건물을 점거하거나, cia나 군수회사6)를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대다수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침략전쟁은 거부한다’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대대적인 선택적 병역거부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의 선택적 병역거부가 계속되고 있다. 침략전쟁의 당사자인 미국과 영국에서도 침략전쟁에 항의하는 선택적 병역거부자들이 싸우고 있다. 미국은 현재 약 270만명의 남성 및 여성들이 현역병이나 예비군으로 복무하고 있다. 자신의 양심상 이라크 전쟁에 파견되기를 거부한 군 복무 장병들의 규모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집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반전 단체들은 지난 1월 군인들이 전쟁에 반대한다며 비상 전화망을 통해 상담을 타진해온 전화 건수가 3천500통에 달했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에 대한 학살에 항의하는 병역거부자들이 다수 있다.7)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과 북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동족에게 총을 들 수 없다거나, 혹은 한국 정부가 파병을 하는 상황에서 이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징병을 거부하는 것 역시 적절한 의사 표시 방법의 선택적 병역거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선택적 병역거부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선택적 병역거부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전쟁과 군대 자체를 인정하면서 선택적으로 특정 전쟁을 반대한다는 신념은 매우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정된 어떤 지원이나 법률적 대안을 마련하기도 매우 힘들다. 그 때 그 때 상황논리, 여론, 정치권 동향 등이 해결방향을 결정 지을 수 밖에 없다.


4. 재판 그리고 이후 활동


현재 강철민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농성단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지지 서명을 받고 거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농성단이 무죄를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유인물에서 발췌, peace.gg.gg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헌법 제5조 1항 '대한민국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조항에 따르면 대통령(군 최고통수권자)는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 위헌적 행동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우선한다. 더욱이 군형법 상 항명은 ’정당한 명령‘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 데 여기서 정당한 명령의 기준은 무엇인가? 최소한 헌법은 준수하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이 성립된다. 강철민의 경우는 헌법에 따르자면 오히려 법을 철저하게 준수한 것이 되는 셈이고 침략전쟁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이를 어기에 되는 것이다.


2. 1998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결의안 77호를 통해 “복무중인 군인일지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 바 있다. 현재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중 1700명이 휴가를 나와 복귀를 거부하고 있으나, 쉽게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3. 2차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군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유죄선고를 받았다. 국가가 학살과 침략행위에 참가하고 동조할 때 개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박정희,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이에 저항하는 군인이 있다면? 광주시민을 진압하려는 명령을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군인이 있다면? 거꾸로 어쩔 수 없는 명령이었다고 하나 이러한 행동에 동참했을 때는? 역사적인 평가는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 역시도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고 공격해 들어왔다. 우선 이라크 전쟁이 침략전쟁인가 하는 규정부터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철민이의 경우 직접 파병을 요구받은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공격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철민이는 한국군대라는 조직의 결정에 동참할 수 없으며, 한국군대가 그러한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단 하루도 그 조직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답했다. 재판부는 ‘모든 결정에 100% 동의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100%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들에게 강철민은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군사법정은 오만한 태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친구에게 진 빚을 갚는 편이냐?’, ‘미국이 한국전쟁 때 얼마나 참전했는 지 아느냐?’, ‘모르면 사지선다형으로 물어볼테니 답해라.’ 등등 재판부가 쏟아내는 말들은 하나같이 훈계조다. 검사는 멍청히 서있고 중간에서 냉정하게 사태를 평가해야 할 재판부가 흥분해 있는 상황. 이 한심한 상황은 그나마 여호와의 증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에 비하면 훨씬 좋아진 편이라고 한다. 판사는 시종일관 철없는 애를 꾸짖는 어른의 태도처럼 오만했다. 자신의 친미적이고 호전적인 군인정신을 가르치려 들었는지 방청석에는 억지로 끌려온 이병들이 꼿꼿하게 앉아(정확히 말하면 앉혀져) 있었다. 한심할 뿐이다. 처음 군사법정에 섰다는 변호사도 이런 재판부의 강압적인 태도에 매우 놀란 나머지 최후변론에서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현재 강철민은 홀로 외롭게 군대와 국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런 국가기관들 못지 않게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다. 국가주의, 군사주의적 편견들.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이 되라는 요구,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다는 발상, 소영웅주의로 치부하려는 냉소와 조소. 그러나, 면회에서 직접 본 철민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밖에서 농성단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필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학 강연 때 쓴 글

1. 교양(혹은 지성), 대화


5월로 기억합니다. 광운대에서 진행되었던 김규항 씨 강연회 갔었습니다. 새내기를 대상으로 한 강연회가 으레 그렇듯이 딱히 이렇다 할 제목을 잡기 어려운 난상토론식 강연회였습니다. 굳이 내 나름대로 제목을 붙이자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보란 무엇인가’ 정도가 가장 적당할 듯 싶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이 남는 대목은 교양과 지성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요약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는 무척 성실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민족이나 국민국가와 같이 거대한 집단을 사고할 때는 매우 보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만큼 집단이 거대해질수록 진짜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을 구분하기란 더 힘들어집니다. 사회 모순을 덮어두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쓰는 말은 ‘국민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흔히 엄숙하고 점잖은 태도로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과 형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교양 있고 지성 있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양 혹은 지성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과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을 볼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9월 12일,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뒤로 스물 다섯 해를 살아오며 여기 저기서 만났던 기억 속의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더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기뻐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서로 미안해하며 하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올라와도 참고 작별인사를 합니다. 조용히 후원인으로 가입해서 남모르게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 내가 너를 끌고라도 군대에 보내겠다는 옛친구, 인터넷을 보고 잊었던 별명을 상기시켜가며 애석해하는 친구, 당장에라도 군대에 가길 바라는 부모님...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주를 이룹니다만 종종 이런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존경스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주위 후배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경우에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반면, 주로 인터넷과 서명운동 과정에서 만나는 비슷한 또래 사람들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대화 파트너입니다. 이들은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종종 흥분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병역거부에 대해서만큼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병역거부로 인해 감옥을 가는 것도 힘든 일이겠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서로가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증오하게 될 때 나는 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세상에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빈곤과 모든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독재정권도 ‘한국식 민주주의’를 말하고 부시정부도 ‘민주주의 수호’를 부르짖으니까요. 누가 혹은 무엇이 진정으로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빈곤과 불평등이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방식을 바꿔가며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언제나 모든 행동에는 명분이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평등, 평화, 자유, 민주, 인권이란 이름 아래 온갖 불평등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병역거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수많은 장벽에 부딪칩니다. 양심은 종종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거대한 집단과 부딪칠 때, 사회가 요구하는 통념이나 가치관과 부딪칠 때 이 문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국가, 민족, 국민, 안보, 군대, 남성/여성 등 거대한 담론들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그 동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글로 대신하고 진심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끝난 뒤에는 진정으로 우리가 함께 비판하고 뜯어고쳐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한마음으로 평화와 인권을 말하고 싶습니다.



2. 결심하기까지


우리 나라에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양심수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예비병역거부 선언까지 잇따르면서 전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상식이 되어 버린 이 문제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나 역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오태양 씨가 공개적으로 병역을 거부함으로써 금기에 도전했고, 또 다른 젊은이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시민, 사회, 종교단체들이 모여 연대회의를 구성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전면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 역시 이들과 함께 행동해 왔습니다. 한 편으로, 911 테러 이후 탈냉전 이후 새롭게 조성되는 전쟁 분위기는 한국에도 깊게 영향을 미쳤고 이와 때를 같이해서 다양한 형태의 반전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국가, 민족, 계급이나 자유, 민주, 평등, 인권과 같은 말을 두고 오랜 시간 고민하게 되고 때로는 사회가 강요하는 통념들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언제나 동세대 청년들과 맞서야만 했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수많은 폭력 앞에 때로는 무력해지기도 했습니다. 작은 권리 하나 찾으려고 나선 싸움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아파해야 했고,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나 상식처럼 받아들여져서 무덤덤해지기도 하고 내 마음 속 깊이 들어앉은 관성에 놀라기도 합니다. 집회에 나가 졸기도 하고, 빨리 행진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가 왜 그리 많았는지. 요컨대 나에게 운동은 일상적인 삶이어야 했고, 그것은 거대한 권력보다 때로 타성에 젖은 자신과 싸워야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매번 절대 순응하고 타협하면 안된다고 다짐하면서도 항상 수많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여전히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나를 어떤 ‘특이한’ 사람 취급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과 성적, 졸업, 직장 등 일상에 대한 고민들입니다. 나는 오늘도 며칠 전 선물받은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가방에 들고 다니며, 민족의 미래를 고민했던 청년이 사상전향서 한 장을 거부한 이유로 왜 17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는지 고민합니다. 그것에 비하면 훨씬 편한 길을 가고 있는 내가 진정으로 이겨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권력과 맞설 때,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 그것이 바로 신념이며 양심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양심수라 불러 왔습니다. 나는 내 양심에 가장 떳떳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가장 투명하게 자신을 인식할 때 타인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신에게 가장 떳떳할 때, 사회를 바꾸고자는 목소리에 진실의 힘이 담기게 됩니다. 나는 국가나 민족 혹은 자유나 평등을 고민합니다. 반전평화, 인권과 민주주의를 고민합니다. 무엇보다 내 삶에 대해 고민합니다.


평화란 소극적인 의미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전쟁을 예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인권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반전 운동은 동시에 가장 절실한 인권 운동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쟁과 싸우는 것이 평화인권 운동입니다. 노점상, 철거민, 정리해고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나는 병역거부자로 연대할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오늘 새롭게 우리 앞에 던져진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가장 실천적인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내 문제를 사회 문제 속에서 고민하지 않고,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 의미를 찾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만은 예외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삶과 운동은 절대 분리된 어떤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이중생활입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집단, 대학인과 동시대 청년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고민해야만 가장 확실한 답이 나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논평하기는 쉽지만 자신 안에 깊이 녹아들어있는 그 모순들을 스스로 인정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병역거부는 또 한번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때마다 기회비용을 다양한 관점에서 따지게 됩니다. 우리는 돈, 권력, 시간, 명예만을 기회비용의 요소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꺾여야만 하는 상황보다 큰 기회비용이 있을까요? 일생을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3. 평화인권 - 진보적 대학인의 새로운 행동좌표


우리는 외세와 독재에 맞서 민족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희생을 딛고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대학인은 언제나 한국 현대사의 흐름 한가운데서 진보의 저수지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진보의 기준은 언제나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어제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어제는 미쳐 깨닫지 못했던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가 오늘날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동안 금기시 되어 왔던 군대와 관련된 문제들이 지금 논쟁의 도마 위에 올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평화인권이야말로 오늘날 사회진보를 갈망하는 대학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구체적인 행동좌표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평화란 앞에서 말했듯이 전쟁을 예방하고 반대하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유․무형의 모든 억압적인 권력과 폭력에 맞서는 적극적 평화를 말합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평화는 동시에 인권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미증유의 경험으로 남아있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평화인권 운동 역시 민중에게 권력을 되돌려주기 위한 역사의 장강을 따라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첫째, 민주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땅에는 기본적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본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로 급진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보장해야 할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우리에게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국민여론을 무시한 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고 사상전향서까지 만들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짓밟고 있습니다. 냉전시대를 지배하던 반공 의식이 민주주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복무는 둘째치더라도 우리에게는 군대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겨운 상황입니다.


둘째, 인권 운동을 통해 우리는 잊고 지냈던 권리를 되찾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됩니다. 인권의 문제는 시혜나 동정 혹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권리의 문제입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가장 보편적인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구시대적인 잣대로 어떤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권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 사회가 떠안고 있는 수많은 숙제들이 의외로 금방 풀릴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 장애인 이동권을 주장할 때 누군가 ‘이동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는 일화를 생각해 봅시다. 이동할 권리는 숨쉴 수 있는 권리 만큼이나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살아가기 쉽지만, 이제 우리에게 장애인이동권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피와 눈물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경제적 효용이나 경쟁사회 논리로만 바라본다면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셋째, 인권은 반전평화, 민중생존권, 병역거부권, 장애인이동권, 노동권/교육권 등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사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회구성원들은 각자 처한 위치에서 자신의 문제를 사회와 연결시켜 바라보게 됩니다. 대학인 역시 대학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군대 문제에 대해 다양한 대안을 내놓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인권의 확대를 기준으로 사고하고 실천할 때 그것은 이익집단의 이기적인 요구가 아니라 보편적인 권리를 찾기 위한 실천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더 크게 단결하게 더 넓게 연대할 수 있습니다. 인권은 어떤 특정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인간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대학인의 문제나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의 문제는 모두 인권을 되찾기 위한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넷째, 서준식 선생님 말씀처럼 인권운동을 통해 우리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해방을 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사회모순을 지적하면서 우리 역시 동일한 모순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만을 요구했던 암울한 시대를 지나왔습니다만 여전히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 획일주의적 사고방식이 전사회적으로 만연해 있습니다. 혹 사회변화를 주장하는 우리는 똑같은 함정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장애인의 권리를 깨닫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위험이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 민족이나 계급을 이유로 다른 문제들을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하거나, 다양한 의견을 획일화시키려 하지는 않습니까? 인권에는 위, 아래가 따로 없습니다. 어떤 조건이 무르익은 뒤에야 다른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지금 바로 억압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 인간의 권리와 모순에 처해있는 잘못된 의식과 제도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운동은 제도의 문제인 동시에 의식의 문제입니다. 국가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면, 군대 문제에 있어 우리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력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방적인 국가주의는 아시아에서는 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군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든 법, 도덕, 윤리와 같은 약속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어떤 제도나 의식적인 약속을 끊임없이 토론 속에서 새롭게 고쳐나갈 힘이 그 사회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는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두고 이야기할 때도 이 문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가며 군대 문제에 대해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산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군대를 바라보며 비판해야 될 대상은 제쳐두고 왜 우리끼리 서로 증오하고 갈등해야 합니까? 고위층 병역비리, 군대 민주화와 효율 문제, 군대 내 인권문제 등 우리는 아주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겨레21을 보니 사병 월급 문제를 지적했는데 아주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한마음입니다.


작위적인 웃음을 자아내는 어느 개그맨과 ‘고장난 레코드를 바라보듯’ 웃어제끼는 시청자처럼 이 시대 청년들이 서로 배타적인 모습으로 만나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신화를 넘어 90년대 학생운동 역시 뼈를 깎는 반성과 모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90년대 학생운동은 언제나 삶을 화두로 던졌습니다. 대학인의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학생운동, 그래서 대학인의 이야기를 가지고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장강에 합류하는 학생운동이 언제나 우리들의 화두였습니다. IMF를 계기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청년실업해결, 등록금 저지, 대학구조조정 저지(학부제/광역화 반대)와 같은 실천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적 청년학생이나 (사회 나가면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예비 노동자로서 도덕적 당위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구체적인 과제를 통해 ‘왜 대학인이 보편적인 인간해방을 위해’ 싸워나가야 하는 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어떤 문제들은 남의 문제, 학교 밖의 문제로만 보였고 어떤 문제들은 학교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이제 사회 모든 분야에는 다양한 단체들이 성장하여 단체의 이익과 더불어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진보정당의 발전은 이런 다양한 진보적 요구들을 한 데 묶어 정책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나옵니다. 그들의 입으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고, 대체복무를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연대에 대한 당위성만으로 대학인의 보편적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우리의 문제인식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실천과제를 찾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진정 대학인의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사회로 나아가는 실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보편적인 인권을 획득하는 실천을 전개해야 합니다. 반전, 평화, 인권이야말로 21세기 학생운동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이 군대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는 문제, 사회구성원들이 엄청나게 불신하고 분노하면서도 언제나 순응하고 복종해야만 했던 문제, 끊임없이 사회적 적대를 조장하고 남성우월주의/권위주의/국가주의를 재생산해내는 거대한 학교. 보편적인 인간해방을 위해 우리는 이제 제한없는 실천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마음을 터놓고 대학인들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기 위해 중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비병역거부 선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함께 손맞잡고 연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시작으로 50년간 비판조차 하지 못했던 거대한 문제에 직면해서 아주 중요한 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학인이 나서야 합니다. 대학인의 삶으로부터 우리나오는 진실함과 평화와 인권을 갈망하는 절실함이 한 데 뭉쳐 아우성치는 그 날을 상상해 봅니다.


4. 나가며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강연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학인들과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어색할 수 있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병역거부 이유서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을 세상에 되돌려 주는 방식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유럽사회주의국가에서 CO

번역글) History about Conscientious Objection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ANTON BEBLER
(번역자 : 나동혁)
이 장에서는 소위 “사회주의”라 불리며 공산당의 통치를 받았던 국가에서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양상을 다룬다. 초점은 공산주의 시기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맞추어져 있지만, 그 이전 시기도 간단히 관찰하고 넘어갈 것이다.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이전 시기에 사회적 조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반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 지역의 대다수 국가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징병의 전통을 유지해왔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동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관용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으며, 정당정치가 빈약했고, 사법부 독립이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더욱이 평화주의 교단의 힘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간단히, 약간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동유럽의 사회적 상황은 병역거부에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사회주의 사회 성립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와 co conscientious object(or), 보통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줄임말.


사회주의 국가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다루는 양상은 일반적으로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현상과 꽤나 잘 맞아 떨어진다. 스탈린주의는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분적 병역거부자(patial objector)에 대해서는 종종 임의로 비전투 복무를 허용했으나 철저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서는 거칠게 억압했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co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논의되기는 더 힘들었고, co와 관련된 객관적 데이터는 구할 수도 없었다. 병역거부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분위기는 이후에 소련 이외의 사회주의 국가로 확산되어 나갔는데, 적군의 임무를 부과하던지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이런 특징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co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과 공산주의 스타일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몇몇 증거들을 통해 보일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군사시스템이 발전했다. 보편적으로 남성에게 군복무 의무가 주어졌으며(또한 어떤 것들은 여성들의 의무로 제한되기도 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연대라는 강력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항상 따라다녔다. 군복무와 국방의무를 묘사한 용어들의 유사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highest"(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holy“(소련, 헝가리, 루마니아), ”holiest“(폴란드), ”honorable"(동독). “정당한 조국의 방어”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배신자와 똑같았으며 범죄자였다. “제국주의”와 잠재적인 군사적 대결은 어떠한 공식적인 민간대체복무의 수용도 가로막았다.
co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은 여타의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 시스템의 특징들-예컨대 실질적인 정치적 경쟁의 제거, 반대의견에 대한 억압, 종교적/문화적 다원주의에 대한 가혹한 정책, 폭넓게 퍼진 인권침해-과 함께 형성되었다. 꽤나 다른 두 연방 국가 소련과 유고에서는 국민 방위군(territorial militias)의 폐지, 군대 내 소수민족 언어의 금지, “사회주의적 인간” 창조를 위한 문화적 동화 정책 등등과 동시에 대체로 co를 범죄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소련에서 이러한 변화는 1930년대 일어났고, 유고에서는 1940년대 전후 기간에 일어났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공산주의가 반드시 co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공연히 합법적으로 병역거부자들을 보호하거나, 또는 관용하거나, 적어도 침묵하던 기간이 있었다. 공산주의의 모국, 소련이 가장 좋은 보기다. 1918년 1월 23일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창시자 레닌은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시민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는 첫 번째 법령에 서명했다. 1919년 1월 4일에, 소련은 모든 종교적 동기의 병역거부자들을 징집으로부터 면제시켜주는 법령을 발표했다. 1년 뒤,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정이 세워졌다.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레닌 시대 소련은 co에 대해 짜리즘보다 훨씬 관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 서유럽 국가보다 훨씬 진일보했다.
co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용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로 통합되면서 사실상 끝났다. 어떤 사람도 그런 지위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거짓된 이유로 1939에 co에 대한 합법적인 권리가 폐지되었다. 최근 1990년대 후반까지 소련의 형법체계는 입대, 등록(병적), 훈련 등등을 “기피”한 경우에 매우 강력하게 처벌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병역거부 선배들은 철저한 종교상의 병역거부와 연관이 깊다 : 러시아 정교, 오순절 교회파(Pentecostals), 나자레파(Nazarenes), 톨스토이 신봉자들(Tolstoyans), 재림론자(Adventists), 그리고 무엇보다 여호와의 증인의 오랜 신도들. 1980년대 병역거부자 수가 급증하면서 병역거부의 동기도 크게 바뀌었고,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이 가시성이나 숫자의 양 측면에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의 침식

co를 대하던 스탈리주의의 양상은 196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병역거부의 가능성이 인지된 첫 번째 사회주의 국가는 동독이었다. 13장에서 윌프리도 폰 브레도우(Wilfried von Bredow)가 이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독이 1964년에 co들이 복무할 수 있는 비무장 건설부대(unarmed military construction units)를 만듦으로써 스탈린주의에  첫 번째 틈새를 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동독은 co에 대한 서구적 기준이 가장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특히나, 서독으로부터 접해있기 때문에 그랬다. 1960년대 후반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건설부대(construction battalions)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72년에 이르면 위와 같은 건설부대는 소련에서도 등장한다. 일명 ‘stoybat’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 뿐만 아니라, 반체제 인사나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부르조아 계층의 후손들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행정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신적으로 미친 사람들로 분류함으로써 징병 명단에서 병역거부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덧붙일 필요도 없이, 이런 식으로 면제된 사람들은 그 후에 계속해서 직장 배치나, 고등교육 허용, 기타 여러 가지 사항에 있어 차별을 받았다.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형태의 군복무 면제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요구받는 직업의 노동자들은 징병이 면제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불가리아에서는 제철공장, 조선소,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면제를 받았다. 폴란드 석탄 광산 노동자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이런 직업상의 면제를 받은 병역거부자가 존재하는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물론 스탈린주의 하에서도 사실상 가장 확실하게 면제를 받았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업상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사람들(예를 들면 군산복합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수의 면제 또는 징병유예가 존재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세속적 병역거부자들이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동유럽에서 전형적인 정치적 반대는 각 정부의 군사정책과 소련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대항적인 행동은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군복무를 거부한 수십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만들어냈다. 지식인, 학생, 그리고 중간층에 속하는 일부 자영업자들이 가장 왕성한 세속적 반대 그룹이었다. 동독의 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는 잘 알려진 대로 면제를 받았고, 폴란드나 헝가리에서 카톨릭 성직자들도 일부 면제를 받았는데 동유럽에 설립된 교회들은 대체로 ‘정당한 전쟁’ 교리와 일반화된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동유럽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와 대체복무 도입은 명확히 서유럽의 경험, 특히 서독,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반면 사회주의 체제는 구성원들 가운데 평화주의자들과 반체제적인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사상적인 독단주의, 국가주의, 외국인을 혐오를(xenophobic) 강요했다.
그 때까지도, 몇몇 국가들은 어떤 양보를 결정하는 데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1977년 헝가리는 동독을 따라 평화주의적 분파의 구성원들에게 비무장 부대에서 복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에게 까지 그런 조건을 적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여호와의 증인 같은 절대적 거부자들에 대해서도 허락하지 않았다. 1980년 폴란드는 무기나 화기(fire-fighter)없이 병원이나 사회 봉사기관 같은 곳에서 인도주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민간 복무를 조용히 도입했다. 병역거부자들은 봉급과 군복 없이 복무했다. 육체적으로 부적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종교적, 비종교적 거부자들 모두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다.
몇몇 동유럽 국가에서는 정치적인 반대도 원칙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동기로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헌장 77(Charter 77 1977년 설립된 반체제운동 단체인 77헌장(Charter 77) 그룹은 현 체코 대통령인 하벨(Vaclav Havel)과 체코 지식인의 상징인 하예(Jiri Hayek) 등을 포함한 지식인들과 작가, 예술가 등이 주축이 된 반체제단체이자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사회의 효시로,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개입으로 무산된 이후, 다시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새로운 봄을 일으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과 폴란드 자유노조연대(Solidarity 연대(Solidarity)는 1980년 여름 ‘폴란드 위기’ 때 일약 각광을 받았던 바웬사가 이끄는 폴란드 자주관리노조의 정식 명칭이다. 노동조합활동으로서 기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제1회 전국대회(1981년 10월)는 정치·사회에 이르는 ‘자주관리공화국’이라는 이상상(理想像)을 내세웠다. 이 자유노조에는 100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고 있으며, 폴란드의 민주화·자유화를 향한 조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의 대표자들이 소련의 체코침공 19주년에 맞춰 체코와 폴란드 국경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낸 공동성명에는 민간 대체복무를 수행할 권리에 대한 요구도 포함되었다. 특별히 몇몇 반체제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시행되는 의무적인 군사 교육에 대한 저항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인 반대자들은 체제의 억압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개 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을 박해했던 잘 알려진 사례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근본적인 평화주의자 그룹들은 정치적 반대 그룹들과 함께 왕성하게 활동하지 않았으며, 대신 정부를 향해 조용히 변론하는 편을 택했다.
폴란드가 여전히 군사정부의 지배 아래 있었을 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종교적, 세속적("도덕적") 병역거부자 모두에게 민간 대체 복무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단호히 평화를 지키기 위한 소비에트 군대 및 그 동맹군대와 형제로서의 동맹"이라는 징병자 선서 문장을 두고 당시 존재하던 군사시스템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이 오갔다. 징병 저항 조직체였던 자유와 평화(Freedom and Peace)에 자극을 받아, 장교 Woljciech Jaruzelski가 병역거부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단계들을 밟기 시작했다. 1988년 7월에 단호한 조처가 취해졌으며,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젊은 남성들이 2년간 의무 군복무를 대신해서 3년간 대체복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생은 졸업 후에 1년간 군복무를 대신해서 2년간 민간 복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 시스템은 절대 북 대서양 패턴을 따라 설계된 게 아니었다. 양심을 결정하는 것은 군대와 경찰의 보호 아래 운영되는 위원회였다. 병역거부자들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방과 식사를 제공 받았지만 보수는 없었으며 병원이나 사회봉사기관에서 불편하고 힘든 작업을 수행했다.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처음 석 달 동안에 764명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주장했고 그 가운데 480명이 인정받았다. 세속적인 병역거부자들이 종교적 병역거부자들보다 두 배 정도 많았다. 1989년에 병역거부자 숫자는 약 1500명이었고 그 중 오직 1%만이 군복무를 했다. 폴란드에서 일반 대중이 징병제를 지지한다는 말은 새롭게 합법화된 병역거부를 인정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8년 공산당 내 개혁주의자들의 반란에 뒤 이어, 헝가리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중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가장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1989년 1월에, "유럽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헝가리는 헌법에 민간대체복무 조항을 삽입했다. 곧 이어, 의회는 필요한 입법절차를 밟았는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보편적 권리, 민간 대체복무, 투옥 중지, 공평한 판정 기구 구성 등 유엔 인권위원회가 기본적으로 추천한 사항들을 명확히 포함시켰다. 처음 입법이 되었을 때, 헝가리의 민간대체복무는 징병 기간인 2년보다 10달이 더 길었다.
또 헝가리의 경우 1988년(옛 체계에 따라 투옥된 마지막 해)에 투옥된 병역거부자들의 배경과 수가 나타내는 특징도 매우 흥미롭다. 여호와의 증인 148명, 로마 가톨릭 신도 6명, 나자레파 1명, 안식일 재림파 1명, 그리고 비종교적 거부자 5명. 이 숫자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절대적 병역거부의 사회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대략 훑어볼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1940년대부터 1980년 티토 유고슬라비아 초대 대통령(재임 1953∼1980). 1948년 6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코민포름에서 제명되고 그의 정강(政綱)은 수정주의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그는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목표로 한 비동맹중립외교의 정책을 굳게 지켰다. 1969년에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74년 5월 연방의회에서 종신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을 지키며 경제건설을 추진하였다.
사망 때까지 co와 관련된 유고슬라비아의 시스템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양상을 따랐다. 유고슬라비아 사회가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교하여 훨씬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군복무 거부(징병 통지 수령을 거부하거나, 소재를 알리지 않거나, 무기 소지를 거부하거나, 기타 경우를 포함하여)는 여러 가지 형법을 통해 처벌 받을 수 있었다. 징병을 거부한 사람은 군재판관이 재판을 주재했는데 이 경우에 독립적인 변호, 공개 재판, 효과적인 호소 등 여러 면에서 권리가 매우 축소되었다.
법률상 최고형은 10년까지 가능했지만, 유죄를 선고 받은 병역거부자들은 대개 3년형을 받았다. 중복 처벌을 할 경우 30년까지 붙잡아 두는 것이 가능했다. 명백히 이 체계의 목표는 병역거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시스템의 고의적인 잔인함은 여호와의 증인인 이반 체코(Ivan Cecko)의 사례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는 동일한 죄로 네 번에 걸쳐 12년이나 형을 살았다.
유죄로 판정을 받은 병역거부자들은 유고슬라비아 군사법정에서 형을 선고 받았는데 1970년 초반 이후 평균적으로 한 해 열 명 정도 되었다. 국제 앰네스티의 보고에 따르면 1989년에는 최소 20명의 병역거부자가 투옥되었다. 물론, 일부 병역거부자들은 간단히 지역 징병 사무소(local induction board)에서 "부적합"으로 분류되어 효과적으로 소집자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여전히, 유고슬라비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대하는 방식은 매우 퇴보적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일당 정치체제를 유지하던 티토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자유화의 과정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대중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가유고 연방 내에서 가장 서구적이며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슬로베이아는 병역거부자들을 거칠게 대하는 데 제일 강력하게 반발했다. 1986년 여름 슬로베니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와 민간대체복무 도입의 요구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연방 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방 내 전문적인 군사주의자들은 로비를 통해 훼방을 놓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방해하는 데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 별 셋 퇴역장교 Milian Daljevic였는데 그는 사회주의자 동맹(Socialist Alliance)의 단체 리더라는 새로운 지위를 이용-남용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하였다. Daljevic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는 유고슬라비아 시민들 사이의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며 유고슬라비아의 방어지침과도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또, 유고슬라비아인들 중 아주 극소수만이 군복무 거부의 자유화를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Daljivic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들이 국토를 방어하는데 전혀 기여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보호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행동이라거나, 국가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이 종교적 병역거부가 인정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거나, 종교적인 믿음이 시민으로서 의무이행을 방해할 수 있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병역거부자가 넘쳐날 것이며, 결국 연방 군대의 토대를 허물어 뜨릴 것이라는 유고슬라비아 군부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공개적인 사전 발표 없이 갑작스럽게 다시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을 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기 위한 노력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듯 보였다. 1989년 2월, 유고슬라비아 최고간부회의 Presidium,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간부회의를 지칭한다.
(집단적인 지도체제와 최고지휘기관)에서 완강했던 소수파는 보수적인 입장을 뒤엎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합법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멤버들을 무던히 설득했다. 최고간부회의의 이러한 움직임은 Ivan Cecko의 고통스런 처지와 서방세계에 유고슬라비아의 이미지를 개선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인 듯 보인다. 어쨌든, 최고간부회의는 연방의회에 징병법 개정을 제안했다. 개정안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역-유고슬라비아 직업 군인 가운데 수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지역들-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좀 더 개발된 지역의 대표들은 대부분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989년 4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 합법화되었다. 오직 종교적 거부자들만이 허용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비전투 분야에서, 무장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복무해야 했다. 더구나, 병역거부자들은 징병된 사람들보다 복무 기간이 두 배나 길었다. 민간대체복무는 없었고, 다만 군대 내 지휘관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을 가졌다. 군대 외부에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이러한 병역거부 관련 조항들은 유엔인권위원회나 안보협의회(Conference on Security)등이 제시한 기준에 훨씬 못미쳤다.
유고슬라비아 붕괴가 임박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정치적으로 자유적이었던 슬로베니아는 1990년 10월에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유고슬라비아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갔다. 민간대체복무가 종교적, 세속적 거부자 모두에게 허용되었고 기간은 군복무 기간과 동일했다. (병역거부) 지원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민간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본질적으로 슬로베니아는 발전한 서유럽 국가들과 동일한 병역거부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시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실질적인 상황이 어떻게 전환될 것인가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1992년에 탈영과 징병 기피가 옛 유고슬라비아의 중심 지역이었던 세르비아에서조차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록 이런 군복무 회피가 대개의 경우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는 유고슬라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계승한 곳 구(舊)유고연방의 6개 공화국 중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2개 공화국이 합쳐 1992년 4월 신유고연방 구성.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4개 나라가 새롭게 독립했다.
에서 계속 확대될 것이다.
1989년 혁명 이후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들을 따라 co의 상황도 드라마처럼 바뀌었다. 1990년 10월 동독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독일연방공화국에 귀속된 5개의 주에서 이전 서독의 시스템이 확장되었다. 1990년 5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의회가 종교적, 세속적 거부자 모두에 대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합법화했고 대체복무를 도입했다. 폴란드는 전통적인 평화 분파들과 비종교적 거부자들 모두 부분적으로 병역거부를 합법화했다. 1991년까지 오직 루마니아와 알바니아만이 오래된 스탈린주의 모델을 고수했고, 이 국가들의 경우에도 포괄적으로 보면 군개혁의 차원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합법화되면서 자유화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구소련에서 변화는 특히 중요하다. 소련 붕괴 직전, 징병 저항은 마치 풍토병처럼 번져 소비에트 군대의 기초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유력한 정보에 따르면 1989년에 소련에서 400,000만명이 군복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중에 오직 2~3000명만이 종교적이거나 또는 나름의 신념을 갖춘 병역거부자로 간주되었다. 발트해와 카프카스 지방에서는 대중적인 견해와 지역정부 당국 모두 소비에트 군대 복무 회피를 지원했다. 1990년에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군복무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체복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라트비아의 경우, 새로운 대체 복무가 병역거부자 뿐 아니라, 모든 지원자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소련 말년의 거의 모든 징병 거부자들이 군복무 자체가 아니라 소비에트 군대에 대한 복무 거부에 기초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때 적군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궁극적인 구현물이었던 곳에서, 1990년에 이르면 적군은 소련이 해체되는 격렬한 긴장과 분해의 반영물이 되었다. 되살아난 (민족)국가주의 속에 새로운 공화국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완결되지 않았다. 단명했던 소련의 첫 번째 계승자 주권국가연합(the Union of Sovereign States)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국가연합(CIS)결성 이전에 구성된 과도적 단계
은 1991년 8월 15일에 새롭게 제정된 징병법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조항도 포함시켰다. 징병법은 징병된 복무자들보다 긴 기간의 대체복무를 인정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거부자들 모두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았다. 1991년 막판에 구성된 독립국가연합(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d, CIS) 소련은 15개국 연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발트해 3개국은 소련 시대에 1989년에 이미 따로 독립했으며 나머지 12개국이 1991년 12월 독립국가연합을 형성함로써 소련은 해체되었다.
에서는 포괄적인 군개혁이 지연되는 바람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조항들이 미정인 채로 남았다. 독립 러시아 군대의 경우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시스템은 다소 이전에 사회주의 체제였던 국가들의 상태를 닮아 있는 듯하다. 완벽하게 전문화된 군대를 지향하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중심으로 한 열띤 논쟁에서 많은 부분 긴장을 완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향해

사회주의 체제 그리고 그 이후에 이러한 발전들이 이 책에서 서술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단계와 그리고 병역거부의 세속화라는 주장과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현대에 이르러 주로 세단계를 밟았던 변화를 따라 동유럽의 현상들도 일반적으로 병역거부의 세속화 경향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전형적으로, 초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다가 스탈린주의로 변모한 이후에 병역거부자들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퇴보하였다. 스탈린주의 후기에 완고한 종교적 거부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병역거부를 인정했고 비무장 부대(unarmed military service)복무를 허용했다. 1989년 공산주의 국가들이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좀 더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주의 이후(ex-socialist) 국가들은 북서부 유럽 국가들을 따라 병역거부자들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정책들을 신속히 도입하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병역거부와 관련된 정책들은 이전 공산주의 국가 단계에 비하면 좀 더 다양한 형태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는 모두 좀 더 자유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역시나, 1990년대 초반에 좀 더 발전한 국가들은 -특히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비키아, 슬로베니아, 발트해 국가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나토에 가입한 지중해 연안 국가들보다 더욱 인본주의적인 정책들을 도입하고 있었다. 특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해서 몇 몇 사회주의 이후 국가들은 남부유럽에서 오래 동안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왔던 나라들을 앞지르고 있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병역거부소견서

병역거부 소견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작은 행동


나동혁


저는 올 해 26살 먹은 평범한 청년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남성으로서 저 역시 군대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2일로 입영날짜가 확정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고민을 던져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론은 점점 명확해졌습니다. 수많은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 길을 간 당찬 청년들이 있었기에 저는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떳떳해지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전쟁 대신 평화를 원합니다.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과 순응 대신에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회 -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원합니다. 전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는 군사주의와 권위주의 대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를 원합니다. 저는 이러한 제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제 양심을 투명하게 글로 보여준다는 게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간절한 마음이 닿으면 진실이 전해질 것이라 믿으며 이 글을 씁니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난관이 닥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 난관들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감옥에서 실형을 살아야 하고 평생을 전과자, 병역거부자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릅지만 막상 결심을 하고나니 아주 홀가분합니다. 전과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그만한 각오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결심했던 사람들과 저를 계기로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진심이 전달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평화와 인권을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행동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특정 집단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제 꿈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는 학교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종종 마치 짐승을 다루듯 학생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체벌을 가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굴욕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반면, 제가 교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낀 것은 돈을 벌기 위한 노동 대신 학생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대학에 가야했고, 그 때는 대학에만 가면 탈출이라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공부했는데 고등학교도 사회의 축소판이란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온 획일주의 문화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한 귄위주의, 일상화된 유무형의 폭력. 또 거기에 길들여진 사람들. 복종과 순응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에서, 선배와 후배 사이의 관계에서, 남성과 여성 사의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권위주의는 대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알아서 대세에 적응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침묵하는 게 훨씬 일신의 안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학생회 활동은 제 인생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회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협한 시각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기본적인 문제의식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 때부터 변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사실, 현실의 모순에 눈감지 않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냉소하고 체념하는 것보다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인들과 함께한 지난 몇 년은 저에게 공부 이상의 많은 의미를 던져 주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함께했던 농민학생연대활동, 빈민학생연대활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활동과 학생회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행복과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실천이 제 삶과 일치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을 전투경찰로 만나야 하는 현실은 언제나 저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주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는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학생운동은 이렇게 저에게 사회와 나의 관계에 대해 기본적인 가치관을 정립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긴 했지만 그것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저는 많은 고민 끝에 3년간 휴학을 선택했고, 더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해서 휴학을 하고 사회운동을 경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3년간 공부 못지 않게 소중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특히 올해 초에는 평화인권 운동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9.11 테러 이후 지속적으로 반전평화 운동에 함께하면서 느끼는 바는 여전히 한가지입니다. 자신들의 불만을 테러를 통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로 테러를 폭력으로 보복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는 더 비참한 결과만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피투성이가 된 아이는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서해교전 사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의 긴장 속에서 계속되는 무력 대립은 무고한 젊음을 앗아갔습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평화로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힘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그를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인류에게 더 큰 아픔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이제 우리도 최근 이루어진 변화에 발맞춰 남과 북이 조금씩 무기를 줄여나가고 대립을 완화시켜 나가며 국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을 넘어 전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전쟁은 무수히 많은 인적, 물적, 정신적 피해를 남긴 채 승자도 패자도 없이 쓸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비용과 전 국민을 동원하는 총력전으로 진행된 20세기 전쟁에서 선은 누구고, 악은 누구였는지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부가 축적되고, 과학기술과 문명이 발전하여 더 없이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할 것 같던 20세기, 이 모순에 가득찬 전쟁의 세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무고하게 죽어간 수천만의 생명 앞에서 우리는 이제 전쟁 대신 평화를, 국가에 의한 일방적인 희생강요 대신에 인권과 민주주의 확장을, 끝없는 무한경쟁 대신 공존을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원합니다.


또한 저는 지난 3년간 활동을 통해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구성원들의 토론을 통해 삶의 가치를 다시 찾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어제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국가가 강요하는 한가지 정답만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때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복지와 더 많은 인권을 위해 토론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바꿔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미쳐 깨닫지 못했던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가 오늘날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진정한 인권국가,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습니다. 또, 무조건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려 해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정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국가에 어떤 해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원칙적으로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동의 위에 세워지며 국민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구성원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발전함에 따라 낡은 관습과 제도는 끊임없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전세계적인 추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한 말 이후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36년간 계속된 일제 식민지를 거쳐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국가에 의한 일방적 폭력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제 지연된 현대사를 실천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왜 서로 대립해야 하는걸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당연히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일방적인 침묵과 강요 순응과 복종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원들에 의해 국가 토대를 이루는 가치들이 새롭게 합의되고 평가받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원하는 데 사람들은 왜 서로 대립할까 고민이 들었습니다.

많은 대화를 통해 결국 저는 친구들과 제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위층 병역비리 문제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으로 그 어느 때보다 군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군사주의 문화가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 문제에 대한 비판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국가에 의해 주어진 정답만을 따라해왔던 수동적인 문화는 반드시 잘못된 구성원 간의 마찰을 불러올 수 밖에 없습니다. 구성원들이 부당하게 대립하고 생산적인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고, 상호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와 인권 확대, 군대 내 인권개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군대 운영, 전사회적인 민주의식 함양, 사회복지 확대 등 동일한 것을 원하면서도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오직 한가지 정답만이 존재한다는 획일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또, 무조건 복종하고 순응하기만을 강요하는 사회 문화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느끼는 문제점과 제 문제점이 다르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대체복무제가 개선되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 확대된다면, 이는 비단 어떤 특정 집단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와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릴 것이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군대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사회복지 확충에도 기여할 것이며, 인적자원의 재분배라는 측면에서도 유용할 것입니다. 실제로 대체복무제를 시행하는 나라에서 이런 효과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무엇보다 이 문제가 사회 모든 구성원과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몸이 편치 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당당히 말하려 합니다. 저에게는 그것을 모두 설명할 능력이나 재주가 없습니다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진정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더 많은 청년들이 이 길에 함께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명운동을 받으로 다니면서 저는 이러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의식과 시선이 날이 다르게 바뀌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들을 언제까지 범법자로 묶어 두어야 합니까?

저는 진정으로 월드컵 4강 진출이나 놀라운 경제적 성장 못지 않게 인권과 민주주의로 존경받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저는 이후에도 계속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 더 나아가 반전평화의 문제가 전 사회적으로 토론되고 성숙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행동할 것입니다. 또한, 기회가 주어지는데로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을 세상에 되돌려 주는 방식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