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에 해당되는 글 6건

  1. 걷다 (11) 2008/08/29
  2. 굴복 (3) 2007/10/27
  3. 명문장 (6) 2007/09/12
  4. 에코페미니즘1 (6) 2007/09/10
  5. 자동차 (6) 2007/08/31
  6. 연관물 2004/10/05

걷다

from 그림독백 2008/08/29 15:19
알바로 단체 소식지에 들어갈 일러스트 하나를 그렸다. 요즘 계속 뭔가 그릴일이 들어오는군. 신기하게. 걷기의 즐거움이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쓰일 그림인데..생각보다 복잡하고 빽빽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자꾸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결국 선택된건 연필로 그린건 아니고 좀더 정리된 펜으로 그린거지만..




연필

"그리고 할머니 생각에, 너는 이해할 것 같구나. 그런 감성을 말이다. 식물이란 그런거야. 알로에 하나를 구해주면, 앞으로 많은, 여러 장소에서 보는 알로에도, 너를 좋아하게 될 거다. 식물끼리는 다 이어져 있거든. " 14

몸은 모든것을 알고 있다 , 요시모토 바나나










볼펜, 수채 색연필, 흑백스캔


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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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9 15:19 2008/08/29 15:19

굴복

from 너에게독백 2007/10/27 15:30

분리된 생산이 분리된 것들의 생산으로서 성공한 데 힘입어, 원시사회에서는 핵심과제에 속했던 기본경험들은 , 이제 체제의 발전이 최고조에 달한 현시기에, 무노동과 비활동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비활동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들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이다. 다시말해, 비활동 자체가 생산의 합리성의 산물이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떠한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타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된다. 그에 상응하여 현실적 활동은 이같은 결과의 전반적 구축을 위해 완전히 점령되어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여가의 증대는 결코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이 아닐뿐만 아니라, 이같은 노동이 창조하는 세계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다. 노동 속에서 상실된 활동이 노동의 결과에 대한 굴복 속에서 회복될 수는 없다.

스펙타클의 사회 , p.22


노동자는 자신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독립적인 힘을 생산한다. 이 생산의 성공, 그것의 풍요는 생산자에게 박탈의 풍요로서 되돌아온다. 그의 세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그의 소외된 생산물의 축적으로 인해 그에게는 소원한 것이 된다. 스펙타클은 이 새로운 세계의 지도, 그 영토를 면밀히 포괄하는 지도이다. 우리로부터 빠져나간 바로 그 힘들이 자신의 모든 위력을 우리에게 뽐낸다.

p.24


스펙타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

p.25


굴복 속에서 회복될 수는 없다.

적어두다가는 한도 끝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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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7 15:30 2007/10/27 15:30

명문장

from 텍스트 2007/09/12 17:49
오랜만에 RSS 리더를 열었다가 건진 문장 두개

파업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편함에 관한 것이라는 점, 그 불편함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그들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는가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 고로, 내 언어의 확장이 곧 세계의 확장이니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의 명문장은

한국재벌, 문제만 생기면 휠체어로 탈출

으하하하.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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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2 17:49 2007/09/12 17:49

에코페미니즘1

from 텍스트 2007/09/10 15:39
에코페미니즘 읽는중.
정리차원에서 발췌..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곧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핵확산과 호전적 남성문화 사이의 연관, 전쟁의 폭력과 강간의 폭력 간의 연관을 뚜렷이 알아본다. 실상 이런 것들이 여성들이 전쟁에 대해 갖는 역사적 기억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평화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기도 하다. 남성들 대다수가 즐기는 것 같은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놀이가 공격/정복/소유/통제라는 남녀관계의 전통적인 경로와 동일한 단계를 거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상이 땅이건 여성이건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핵기술이 폭탄으로 사용될 때는 나쁜 것이지만 북의 가정의 가전제품을 작동할 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좋은 것이라는 허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소비적인 생활양식도 자연과 여성과 이민족과 미래세대들을 상대로 하는 이러한 전쟁체제의 커다란 일부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부장적 과학과 기술은 이 여성들(마녀들)이 살해당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지식과 지혜,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도 파괴당한 후에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만물에 깃들고 스며 있는 여성원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경우 영성은 덜 '영적인' 즉 덜 관념론적인방식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영은 여성적인 것이지만 물질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사실상 연결원리 인 것이다. 이처럼 좀더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영성은 흔히 생각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주술에 더 가깝다.


다른 무엇보다 환원주의의 존재론적/인식론적인 가정들은 단일성에 근거하여 모든 체계들이 동일한 기본요소를 갖고 있고 낱낱의 부분들은 원자적이라 인식하며, 모든 기본과정은 기계적이라고 가정한다. 환원주의의 기계론적 은유는 자연과 사회를 사회적으로 재구성해왔다. 질서와 힘의 개념이 상호의존성과 호혜성에 기초하는 유기적 은유와는 반대로 자연이 기계라는 은유는 분할과 조작 가능성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상업적인 자본주의는 전문화된 상품생산에 기반을 두며, 따라서 생산의 획일성과 자연자원의 단일기능적 활용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환원주의는 복잡한 생태계를 단일 구성요소로, 단일 구성요소를 단일 기능으로 환원시킨다. 나아가 이것은 단일 기능, 단일 구성요소의 착취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조작하도록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시각에서는 재생력의 터전으로서의 종자와 여성의 육체가 최후의 식민지가 되는 셈이다.


소외를 의미하는 분리가 소유권과 통제의 수단이 된다. 정부에 관한 로크의 두번째 논문은 "자연이 제공하고 그대로 내버려둔 상태로부터 인간이 무언가를 끌어낸다면, 어떤 것이든 거기에는 인간의 노동이 섞여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든다"고 언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끌어내는' 행위는 소유의 행위가 되며 자본이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더 용이하게 '끌어내고' 분리하고 쪼개기 위해서이다. 끌어냄 그리고 '노동과 섞음'을 통해 확보되는 소유권은 그에 앞서 이미 노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노동이 비노동으로 정의 될때, 가치는 무가치로, 권리는 무권리로, 그리고 침략은 개량으로 정의된다. 사회적노동을 자연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이 '개량'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가지를 동시에 획득한다. ①그들이 착취하는  생산물의 원소유자의 공헌은 모두 부정하며, 그들의 활동을 수동적이라 치부함으로써 이미 사용되고 개발된 자원을 '사용되지 않고' '개발 되지 않은' '버려진' 자원으로 변모시킨다. ②착취를 '개발'과 '개량'으로 해석함으로써 '개량'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절도를 소유권으로 바꾼다. ③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전의 사회적 노동을 자연으로 정의하고 따라서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민중들의 관습적/집단적 용익권을 '해적행위'와 '절도'로 바꾼다.

---> 지적재산권문제가 생각나는 대목. 실제로 종자문제 - 특허 문제로 주요하게 다뤄지고 있음
절도를 소유권으로 바꾼다 
--->2번보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자포드가 우주선을 훔치는것을 정당화하기위해 하는 말이 생각남. 완전 정확한 표현~
"이봐 , 소유는 도둑질이야. 알겠어? 그러니까 도둑질도 소유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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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0 15:39 2007/09/10 15:39

자동차

from 텍스트 2007/08/31 12:24
대부분의 운송 수단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탈 만한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지구에서는----새로운 초공간 우회로를 내느라 파괴되기 이전, 지구라는 것이 있었을 때 --- 자동차들이 골칫거리였다. 아무런 해도 안 입히고 땅속 깊숙이 안전하게 잘 감춰져 있던 검고 끈끈한 물질을 끄집어내서 땅을 뒤엎을 타르와 대기를 채울 매연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바다에 버리는 과정에 따르는 그 모든 불이익을 생각하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좀더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익 정도는 도대체 상대가 안 돼 보였다. 게다가 그 결과 ,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장소라는 게 자기가 떠나온 장소와 별다를 바 없는 장소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결국 거기도 타르로 덮여 있고, 매연으로 가득 차 있고, 물고기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 p.211-212


<...안내서>의 이런 비아냥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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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1 12:24 2007/08/31 12:24

연관물

from 만화 2004/10/05 02:54

그렇겠지만..

특히 노래같은 건, 그렇다

처음들었을 때의 주변 상황이 강한 이미지로 남은 경우...

나중에도 그 노래를 들을때 마다 저절로 그 처음 순간이 생각나 버리는 것이다..

자의 적이고 우연적인, 그 어설픈<연관>.

 

그러나 그 지극히 주관적인 연상 작용은,

무의식의 관할 영역에 속하는지라-

한번 새겨지면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알고 있다. 대충 갈겨진 낙서 자체를, 람이 갖고 싶어한게 아니라는 것을.

그 낙서를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은, '그걸 그리고 있는 그 사람의 그때'

정말 원하는 것은-

<본체>는 따로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원하지만-

원하는 것을 직접 손에 쥘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대신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연관물>들을 원하게 되고...(중략)..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도 <본체>와 어설프게 나마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못내 사랑스럽고

탐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라디오에는 추억의 노래를 신청하는 엽서가

끊이지 않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넓힌다.

 

[쿨핫]-6, 유시진 p.19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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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5 02:54 2004/10/05 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