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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봉기, 지역에서 변혁을 꿈꾼 노동자 민중의 저항

 

 

여순봉기, 지역에서 변혁을 꿈꾼 노동자 민중의 저항

 


1948년 10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들이 지역주민들의 지지 속에 일으킨 여순봉기는 단순한 군 내부의 ‘반란’ 사건이 아니라 지역 노동자 민중의 봉기였다. ‘민족’이나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그려져 온 노동자 민중의 ‘저항의 역사’는 지역적 관점에서 또한 끊임없이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에서 본 저항의 역사

 

흔히 우리는 “노동자는 하나”라고 한다. 물론 세대, 성정체성 등에 따라 노동자계급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며, 앞으로도 더욱 이러한 차이들에 민감해져야 할 것이 요청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를 ‘노동자’라 부른다. 이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궤적을 되짚어보면 사회변혁의 핵심적 주체로 부상하는 시기와, 자본의 ‘반격’에 직면하여 헤게모니를 빼앗기는 시기가 엇갈린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노동자 역사를 고려함에 있어 ‘사회적 범주’와 ‘시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공간’이라는 범주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수세 혹은 후퇴의 시기로 표현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에 자본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고, 이에 따라 ‘지역’이라는 공간적 단위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간의 노동운동은 ‘국민국가’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차이에 주목하며 ‘이주’노동자들을 언급할 때조차 그 기준은 국가간 이주다. 물론 새롭게 지역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은 현재의 시점에서뿐만이 아니다. 지역적 관점은 과거, 즉 노동자 역사를 되짚어 볼 때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단일한 하나의 역사란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지배적 역사서술에 대항해 온 노동자 민중의 역사, 나아가 조직 중심의 노동운동사를 탈피한 노동계급 생활사와 노동자 자기역사쓰기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저항의 역사’를 보다 정교화하기 위해서는 ‘민족’ 또는 ‘국민국가’라는 개념의 유령을 떨쳐낼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지역적 관점에서 역사쓰기의 시도들이 보다 더 필요하다.(주1) 지역적 관점에서 역사쓰기는 ‘장소정체성을 둘러싼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일례로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역사를 고려하면서 우리는 울산이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기업도시’와 ‘노동자 도시’라는 장소정체성이 경합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해방정국의 역사적 중요성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변혁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는다는 점을 고려 할 때, 해방정국이라는 시기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의 통치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공장을 접수하여 생산을 재개하는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을 탄압하였다. 또한 일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토지정책을 무효화하고 친일 관리와 경찰 등을 그대로 군정 기구에 재등용하면서 억압적인 국가기구와 법제도를 강화했다.
 

남한 단독정부를 준비하던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민중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본격화하였으나, 이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저항 또한 시작되었다. 한편, 해방정국의 좌파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을 펼치며 1945년 말까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발생한 1946년 9월 총파업은 1929년 원산총파업 이후 한국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조직화되고 규모가 큰 노동자 투쟁이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파업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철도, 출판, 항만, 전기 등의 부문을 중심으로 20여 만 명이 참여하였다. 약1,700여명의 파업지도부가 검거되기도 했던 9월 총파업에 뒤이어 10월 1일 전평 대구지부의 결성식을 계기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에서는 한 달 동안 서울에서만 3만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고, 1만 6천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휴업에 참여하였다.(주2) 이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난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이후, 1948년에 지역을 중심으로 발발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 바로 제주 4.3항쟁과 여순봉기다.

 

 

여순봉기는 노동자 농민 연대세력의 저항

 

여순봉기 자체의 사건 개요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좌익 장병들이 제주 4.3항쟁 진압 출동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지역주민들이 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군인들에 의한 봉기는 있었지만, 지역의 노동자 농민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참여했던 사례는 제주 4.3사건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쉽지 않다.
 

여순봉기의 배경을 이루는 전남동부지역의 ‘봉기의 전통’은 19세기부터 살펴볼 수 있다. 1860년대에는 수 차례에 걸쳐 민란이 발생하였고, 이후의 1894년 농민전쟁에서는 순천, 광양의 농민군들이 호남지역 농민군의 주요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노동자 농민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 산업화와 도시화는 항만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일제가 항만 배후지 곡창지대의 쌀 반출을 통해 식민본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저임금 구조를 뒷받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개항된 주요 항구들은 인천을 제외하면 동남권과 서남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서남권에서는 목포항과 더불어 여수항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전되었고, 이후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빈번히 발생하게 되었다.
 

그간 전남동부지역의 ‘저항의 역사’ 서술은 사료의 한계에도 기인하겠지만 주로 인물 중심이었으나,(주3) 일제강점기부터 여순봉기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인물들의 활동을 노동자 농민의 활발한 대중운동이 뒷받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30년대의 전남지역은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특히 순천, 광양을 비롯한 전남동부지역에서는 소작농 비율이 높아 소작쟁의가 활발하였다. 대표적으로 1922년 순천 서면에서는 약1,600명이 참여한 소작쟁의가 일어났고, 이후에도 전남동부지역 농민들이 결성한 남선농민연맹회를 중심으로 소작료 불납투쟁 등이 일어났다.
 

한편, 해방 직후 순천지역에서는 우익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장악하였는데, 이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세력이 순천지역 노동조합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이었다. 결국 건국준비위원회는 곧 해산되고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었다. 여순봉기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 2월에는 여수에서 철도 및 항만운송노동자 5,000여명이 파업을 벌이기도 하였고, 1948년 3월부터는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단선반대투쟁이 시작되면서 5월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이처럼 활성화되어 있던 노동자 농민의 저항운동이라는 배경과 단선반대투쟁의 확산이라는 지역 정세 속에서, 군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이 지역 차원의 봉기로 확산된 것이 여순봉기다. 그러나 여순봉기는 단순한 지역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여순봉기의 폭력적 진압이 반공국가 형성의 핵심적 계기라는 주장 또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를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흔히 ‘사태’로 불리곤 했던 지역의 봉기와 항쟁들 가운데에서도 여순봉기는 유독 ‘반란’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정과 우익의 폭력, 그리고 ‘장구통’과 ‘양날백이’

 

전남동부지역에서는 여순봉기 이후 1980년대까지 지역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이 침체기를 맞았는데, 이 배경에는 여순봉기 탄압이 남긴 “나서면 죽는다”는 트라우마가 있다. 물론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지역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되었으나, 폭력의 상흔은 오랜 시간 지속되며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역사회 차원의 노력들도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1988년 여순봉기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여순반란사건’의 명칭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는 지역주민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여순봉기는 ‘여순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여순사건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가 결성되었고 이를 계기로 여순봉기가 다시금 지역사회의 주요 현안으로 급부상하면서 국가폭력 진상규명 요구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관련 특별법이 제정된 제주 4.3항쟁에 비해 여순봉기를 둘러싼 논의는 더딘 편이다. 2009년 1월에 와서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여순봉기 때 전남 순천지역에서 민간인 439명이 군과 경찰에 불법적으로 집단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편, 1990년대 말부터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지역 학계와 사회운동단체들이 광범위한 구술자료 수집 등 조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구술자료들을 살펴보다 보면 생존자 구술증언에서 ‘장구통’과 ‘양날백이’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좌익과 우익 양편 모두에 협조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던 말이라 한다. 여기서 다시금 여순봉기가 외견상 군인들의 봉기였지만, 실은 지역에서 억압받고 있던 노동자 민중이 지지하고 참여했던 민중봉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히 좌익과 우익이 대립했다고 본다면, 피해자의 90% 이상이 경찰과 우익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이처럼 우익의 테러는 지역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는데, 또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당시의 표현이 ‘손가락총’이다. 당시 여수의 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의 기록에 따르면,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띠면 뒤따른 군경에게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 목숨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장구통’과 ‘양날백이’ 뒤에는 사회적 약자를 겨냥하던 ‘손가락총’이 있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평범한 겁쟁이들의 ‘비겁함’은 폭력에 대한 자기방어기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본의 테러와 ‘심사’는 수단과 방법을 바꿔가며 계속되고 있다.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삶을 포기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고,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비정규노동자들은 계약해지와 하청업체 폐업의 위협을 수단으로 한 ‘심사’에 직면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노동운동 또한 내부에 또 다른 형태의 ‘심사’의 기제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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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과학과 역사의 복수성을 강조하며 지역을 강조한 역사서술의 대표적인 예는 아날학파 역사가들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페르낭 브로델은 상품유통 권역으로서의 지역에 주목하며 <지중해의 역사>를 서술한 바 있다. 한편, 아날학파는 시간의 흐름 또한 단일한 것이 아니라고 보며 단기-중기-장기의 시간적 흐름을 구분한 이른바 ‘삼층도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주2. 10월 인민항쟁에 관해서는 2008년 10월 <이달의 역사> “10월 인민항쟁, 노동자와 농민이 도시와 농촌에서 함께 일어나다!”(안태정)을 참조할 것.

 

주3. 일제강점기 및 해방정국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지역의 역사서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로는 사회주의 정치운동 및 노동운동 지도자인 김완근, 정충조, 김기수 등이 있다.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2011년 10월 34호 <이 달의 역사>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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