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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났던 일본 여자

그녀가 소녀였을 때는 작가가 꿈이었다. 학교엔 한국인 선생님이 한 분 계셨었는데, 그 분의 글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품기 시작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서른이 넘었을 때도 여전히 작가는 아니었다.

 

서른이 넘어서도 어떻게 살아야하는 건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이 일 저 일 하고 있는 일들은 있었지만, 모두 그럴 법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그저그랬다. 그러다가 루돌프 슈타이너가 쓴 글을 보게되었다. 무슨 뜻인지 더 알아보려고 공부모임을 찾아갔다. 점점 더 그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일본 안에서는 할 만한 곳이 없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독일 사람이어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독일로 가야하는데 서른 넘어 새로 독일어를 배우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해본 생각이려니 했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관심 있으면 보라고 했다.

그 봉투 안에는 미국에 있는 발도르프 교사양성 대학 팜플렛이 있었다. 그녀는 당장 둘째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렇게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미국의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가 되었다.

어느날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에서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함께할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고?

미국에서 공부했던 대학에게 제안을 하였다. 교사양성프로그램을 지원해달라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함께 일할 동료를 만들수 있도록.

그 대학은 일주일 간의 회의를 거쳐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다. 매년 일본에서 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들었다. 7년 후 그동안 만났던 일본인 중 다섯명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국을 돌았다. 인형극과 강연을 하면서 학교를 세울 것을 알렸다. 몇몇이 관심을 보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에 학교를 지으라고 내주었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어서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홋카이도 화산 옆 시골마을, 자식들은 도시로 다 떠나고 혼자 빈 집에 살던 할머니 한 분이 자기 집과 땅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그녀는 첫 눈에 그 시골이 마음에 들었고 할머니의 온갖 친척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할머니의 지지로 학교를 세울 터로 결정하였다.

 

그녀와 그녀 동료들은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농사를 시작했다.

인원들 중 싱글맘 한 명의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어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방과후 학교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그리고, 수공예를 하고, 악기연주를 하고, 농업을 하고, 밖에서 뛰어노는 방과후 학교. 아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아이들이 늘어가서 토요일 하루만 있는 발도르프 학교를 열었다. 점점 관심이 늘면서 전일학교를 드디어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학교만 세우면 애들을 보낼 것 같던 많은 사람들이 감감 무소식이고 5학년짜리 딱 한 명만 입학하였다. 아이는 한 명인데 선생은 일곱이었다.

그러나 참 즐거운 시간들이었어요,라고 그녀는 회상하였다.

곧 그 학생의 동생이 입학하고 학생 수는 점점 늘었다.

현재 그 학교는 10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그 마을은 농장, 유치원, 정원, 교사양성 대학, 청소년 프로그램, 성인 프로그램, 까페, 공예가게, 캠프장 등이 있는 공동체이다.

 


 

 

푸른 엄지손가락 이야기-닿는 무엇이든 생기있게 살아나는 신비한 손가락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 그러나 소년은 학교에서 쫓겨난 부적응자이다. 그 소년의 신비한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집 정원사 뿐. 그 소년의 아버지는 무기공장 사장인데, 전쟁이 일어나 무기를 만들어 팔아서 큰 돈을 벌고있다, 그것이 너무도 마음이 아펐던 소년은 공장으로 가서 무기마다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갖다대는데 그 무기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사용되자, 무기 안에서 총알이나 대포가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전쟁할 마음을 잊고 집으로 돌아가 전쟁은 끝난다. 정원사는 늙어 죽고 소년은 정원사를 따라 하늘까지 닿는 콩을 심어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가 아름다워 내내 울면서 운전을 했다는 그녀의 말이 전혀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 온화한 미소를 가진 올해 육십 한 살된 일본여자.

공동체 마을을 세운 이 여자의 온화한 힘.

 

루돌프 슈타이너의 강연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그녀는 전했다.

"지구의 사람 모두의 할 일(미션)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기와 다른 타인에게 기여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타인을 타인으로 본다는 것, 하물며 내가 아닌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무엇일까.

 

어느 친구를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덧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어느 남자를 사랑하며, 또 그 사랑이 어느덧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어느 친구를 사랑하며, 또 그 사랑이 어느덧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을 과장하여 오만번 쯤 하고난 후,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지금껏 그 모든 사랑이란 것(친구를 대상으로 한 우정도 포함)이 사실 나의 나 자신 사랑, 자기애의 변주인 것이로군,하고 결론을 내렸었다. 즉, 친구건 남자건 대상은 거울이다. 비추어서 내가 잘 보이는가. 나를 얼마만큼 실천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이는?

아이도, 고백하기 어렵지만, 그렇다.

나는 아직도, 고백하기 어렵지만, 장애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무섭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

타인을 타인으로 본다는 것.

내가 아닌 그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에게 기여한다는 것.

그것이 지구인의 미션.

 

쓰면서 문득 든 생각.

그 미션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만이 장애아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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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 달링 규민

본격적으로 출근하기 시작한지 일주일.

불끈 일어난 충동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 그리고 마냥 늘어진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것. 우리 딸래미랑.

다시 또 엄마 얼굴을 보지도 못 한채 하루를 시작해야하는 규민이를 생각하면...

그러다 늦는 날엔 딸래미 잠든 후에 퇴근해 집에 돌아오고 그 다음날 새벽에 다시 나가, 결국 만 24시간 동안 엄마 얼굴을 못 볼 규민이를 생각하면....

아아, 그런데 우리 규민이 많이 컸다.

저녁에 퇴근한 나를 방긋 웃으며 맞는다.

하루 내내 엄마 못 본 스트레스를 꽉꽉 채웠다가 냅다 짜증으로 내놓던 아이가, 이제 엄마에게 웃으며 하루동안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수다로 늘어놓는다.

나는 어제 어깨에 천 근의 짐을 달고 다리에 만 근의 모래주머니를 달고 퇴근을 했다가, 규민이를 만나고는 그 모든 짐들과 모래주머니들을 갑자기 날개로 바꿔 달고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어 아이를 덥석 업었다.

업고 어린이집에서 우리집까지 걸어오며 우리 모녀는 소살소살 깔깔깔깔 소살소살 깔깔깔깔

규민이가 있어주어서 행복하다. 분에 넘치게 행복하다.

 

(자정에 귀가한 오늘. 저녁짬에도 보지못했던 딸래미 얼굴을 떠올리니 슬퍼서 이런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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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변의 여인>


 

(엔키노 사진)

 

위 장면이 그래도 가장 로맨틱했었던.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로맨틱함을 찾거나 기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외의 로맨틱한 부분, 반가움. <오,수정>에서도 잠깐 그랬던 것 같아. 거기도 해변이었었어. 아니, 강변이었었나.. 정보석과 이은주가 껌종이를 발견하고 둘이 살짝 입맞춤을 했었었지.

 

저 위 장면에서 문숙은 그런다.

"우주에서 의식이 있는 종이 정말 우리 밖에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우주를 바라봐주니 우주는 얼마나 고맙겠어요. 우주는 외롭지 않아."

"제가 믿는 것은, 제가 정말정말 믿는 것은, (쉬고) 별이에요."

홍상수도 가끔 이런 귀여운 대사를 쓴다.

결국 김중래는 문숙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데, 이것은 분명 홍상수의 어느 키스였을 것이다.

여자는 술에 취해 그렇게 귀여운 대사를 하고, 홍상수는 참지 못해 키스를 하였다.

참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어찌나 컸던지 우악스러운 키스를 한다.

남자가 키스를 한다고 새삼 몸을 뺄 연륜도 아니면서도 여자는 몸을 흔든다.

키스가 너무 우악스러워서였다.

결국 귀엽고 로맨틱한 저 장면은 우악스러운 키스 때문에 왈칵 질리고만다.

저런 우악스러움을 마구 퍼붓는 키스에 대해 문숙 정도 된 여자라면, 왜 이렇게 난리야(혹은 지랄이야)?라고 한 번 어이없는 표정도 해주면 왈칵 좋았을텐데, 역시 홍상수는 남자라 그의 한계다.

 

 

내가 홍상수가 변했다고 느낀 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였던가.

그 영화 즈음에서 홍상수가 너무 귀여워졌다고 난리난리했던 기억이 난다.

홍상수가 변했다고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해말길.

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다 좋았다.

그런데 <해변의 여인>을 보고나니, 홍상수가 그 무렵에 변하면서 귀여워진 것이 아니라, 원래 저렇게 귀여운 사람이었다,라는 걸 이제서야 알겠다.

<해변의 여인>을 보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데 드러나는 부분이 영화만큼이라 조금씩조금씩 알게되었던 것. 그러고보니 이제 꽤 그 사람을 알고있는 느낌. 길거리에서 만나면 친한 척이라도 해야할 듯.

 

<해변의 여인>도 변함없는 홍상수표.

재미도 변함없이 만점.

쌍쌍을 이루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형식도 여전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강원도의 힘>에서는 주인공 남자가 설악산으로 갔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도 설악산으로 가고, 남자와 스쳐갔던 여자가 실족해서 죽는다는 것을 주인공여자가 경찰에 신고하고...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과 추상미의 의도적인 쌍쌍대비나..)

그것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법한데도 여전히 속아넘어가주게 되는 건, 카메라가 너무 솔직해서인가. 그의 영화를 보고있으면 옛날의 무슨 영화를 보고있는 느낌. 썰렁한 해변에 덜렁 서있는 남녀들-잘 모르지만 에릭 로메르의 무슨 영화를 봤을 때도 저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다가 앉아서 술먹는 장면, 가운데 테이블, 등장인물들을 고루 배정한 화면, 그러다가 누군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쭈욱 줌 인해서 클로즈업. 이 웬 솔직한 카메라란 말인가.

이 카메라만으로도 참으로 정겨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상수만의 주장이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어찌나 기기묘묘한지, '기적'과 같아서,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의도한 것이든 내 외부에서 다른 식의 변주를 타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 한 쌍을 이룬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금요일 신문을 읽고있는데, 거기엔 내가 10년 전에 만났었던 인물이 실려있었다. 에스에프의 대부가 되었다. 내가 10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도 에스에프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나는 알 수 없는 에스에프계의 용어를 잔뜩 듣고 마치 잠시 외국에라도 나갔다온 듯한 느낌을 받았었었다. 그 후 화장실에서 나와 나는 에스에프 영화비디오를 하나 본다. 그것은 내가 외국에 나갔다가 헌 비디오가게에서 싸길래 사왔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나는 갑자기 이 에스에프영화를 10년 전의 그 남자에게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꽤 희귀한 것이라서. 그래서 만난다.

음, 후지군.

예를 들어보려했는데, 어렵다.

 

 

그래도 바로 전의 영화<극장전>이 너무 훌륭해서 그것보다는 실망했었다.

<극장전>은 지나가는 대사들, 지나가는 인물들이 다 극적이면서, 뭔가 암호라도 되는 것 같아 죄다 기억에 남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의미심장하다고 느끼면 의미심장하고 죄다 코미디다 느끼면 죄다 코미디같은 훌륭한 영화였었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대사들, 지나가는 인물들은 다 그냥 지나가는 대사와 인물 같았다.

똘이를 둘러싼 헤프닝은 쓸 데 없어 보이기도 했다.

선희랑 그녀 친구의 조깅도 그렇고.

아, 또, 처음 갔던 횟집에서 종업원이랑 싸웠던 것도.

 

 

훌륭했던 것 중 하나, 고현정의 연기.

그 여자가 그렇게 연기 잘 하는 줄은 몰랐었네.

도마뱀,도마뱀,어쩌구저쩌구노래를 부르며 수풀 사이를 걷는 것, 그리고  얼굴이 좋아요,라는 말에 고마워요,라고 대꾸할 때, 오 너무 잘해.감탄,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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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방학

옛날 옛적 나의 선생님들은 말했었다.

"방학만 길면 뭐할라고 그래? 게을러지기만 해서 되겠어? 빨리 개학이 되어야지."

그들의 말은, 아아, 거짓말.

나의 학생들이 내 입에서 거짓말이 나오게 하지말기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방학은 끝났다.

방학 시작하자마자 부산으로 연수를 떠나면서 바리바리 쌌던 가방 속엔, 그때 읽고있었던 소설 한 권, 이걸 다 읽고 나면 허전해서 어떡하나 걱정해서 소설 한 권 더, 소설만 내리 두 편 읽으면 무언가 어색해서 어떡하나 걱정해서 서경식의 그림 이야기 한 권, 이 쯤 읽으면 수업 준비를 위해 한 권 정도 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수업방법에 관한 책 한 권.

그런데?

지금 내 손에는 그 때 읽고 있었던 그 소설, 아직도.

 

한 일 있다면,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것.

<괴물> 두 번이나.

 

아무래도 이 번 방학은 이것으로 마무리해야할 듯.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31일.

<괴물>도 극장에서 봤는데, 홍상수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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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발견

일주일간 '엄마와 함께' 연수를 다녔다.

발도르프 교육 연수라서 거의 선생들이 다니는 연수를 엄마랑 함께 등록한 이유는 자질구레한 여러가지가 있지만 죄다 생략하고, 다녔다,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다른 교사연수도 그러한지 모르겠는데, 발도르프 연수는 시작하는 첫 날 첫 시간에 모두 자기소개하는 시간이 있다. 평소에도 그렇게 사는 지 알 수 없지만, 다들 착한 얼굴을 하고 남의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기울였다가 별 것 아닌 부분에도 활짝 웃어주고 별 것 아닌 부분에도 박수를 쳐준다. 자기소개라는 것을 이 나이에도 하며 살고싶지는 않지만, 그 착한 분위기에 그럭저럭 몇 마디. 이 번 연수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 나는 엄마 얘길 덧붙였다. 죄다 교사들, 그리고 거의 20,30,40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느끼고 있을 엄마를 위해 "사랑하는 엄마와 내가 요즘 재미있어하는 공부를 같이 하고 싶었다."운운, 박수.... 우리 엄마, 바톤을 이어받아 수줍은 자기소개.

한 발 물러서있는 엄마의 자세, 항상.

 

나의 엄마의 발견은 오후에 있는 미술 수채화 시간에서이다.

첫날, 엄마의 그림이, 오, 제법 괜찮았다.

노랑과 파랑으로만 칠하는 간단한 그림이라 우연히 괜찮게 나왔나보다, 했다.(못된 딸)

둘쨋날, 엄마의 그림, 오, 역시 괜찮은 것이다.

무엇보다 붓칠이 다른 것이다. 둘쨋날에 그것을 발견하였다.

셋째날, 엄마의 그림, 오, 정말 확실히 괜찮다. (나 보다 오만 배 낫다.)

확실히 붓 터치가 다르다.

엄마는 그림을 그리면서, 하하, 재밌다, 재밌어,하였다.

 

그림의 젬병인 나, 당연히 우리 엄마가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던 것이다.

하긴 언제 엄마의 그림을 볼 기회가 있던가. 노래라면(음악이라면) 재주를 확인해 볼 기회가 있다해도, 그림이란, 수채화란, 붓터치란 살면서 확인해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엄마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것을 삼십육년만에 알 게 되었다.

 

사흘째되는 날, 선생님도 엄마에게 한 마디.

"너무 잘 하시는데, 계속 그리셔서 아동미술치료 해보시지 그러세요."

 

오늘 연수 마지막날이다.(근데 안 가고 인터넷짓하고 있음)

그림그리는 마지막 날.

엄마가 재밌게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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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아룬타족

발도르프 학교가 다른 학교랑 다른 것 중 하나는, 2교시부터는 영어, 미술, 수학, 체육 등등 똑같은데, 아침 1교시에는 한 달을 주기로 달라지는 주제 공부 시간이 있다는 것.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3학년은 1학기 동안, 3월에는 창세신화를, 4월에는 텃밭가꾸기를, 5월에는 측량과 측정을, 6월에는 동화 속 인물을 공부하였다. 학년이 높아지면, 동물에 대해서 배우는 한 달이 있고, 기하학에 대해서 배우는 한 달이 있다. 역사나 지리 같은 과목도 고대역사, 한국역사, 아시아역사, 동네지리, 한국지리, 실크로드, 식으로 잘라서 한달 주기 공부시간에서 배운다. 내가 이 학교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인, 매력적인 수업이다.

 

 

수업방식은 매력적인데, 그러나 내용도 매력적일까.

이걸 정말 매력적으로 하고 싶었으나, 선생의 한계는 수업에서 고스란히 나온다.

결국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수업을 하다보니 내가 경험한 것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책 찾아보고 이것저것 뒤지고 그림에, 수수께끼에, 노래에, 게임에 벼라별 것을 아는 척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수업에 들어가지만, 애들 앞에서는 처음 말문을 열며 이야기를 해주고, 머리 속에 넣으라고 무언가(그림이나..)를 했다가 , 머리 속에 넣으라고 쓰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잘 넣으라고 마무리를 하는 식이다. 결국 뭐를 하든 '머리 속에 잘 넣으라'가 내가 하고 있는 짓이었다. 노골적으로 그런 식의 수업만 받아봤던 나로서는 아무리 쑈를 해봤자, '머리 속에 잘 넣으라'의 변주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전혀 받아보지 못 했던 류의 수업을 앞에 두면, 그나마의 경험 조차 없는 것이라 밑바닥만 박박 긁어대는 꼴을 보이지나 않을까 두렵거나, 아예 내 마음대로 해버릴 수 있는 새 기회라 반기거나 헛갈리는 감정이다. 이럴 때 좋은 자료를 만나면 좀 만만해지는 기분인데, 그런 걸 못 만나면 밑바닥을 긁는 게 아니라 아예 땅을 파고 무덤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다음 학기 수업에는 "집"이 있다.

이걸 두고 지난 학기 내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처음엔 아예 안 할 생각이었다.

학교 뜰 구석에 조그만 움막을 세우기도 한다는데, 나보고 그걸 어찌 하라고. 뭐, 하면 하겠지만,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하라고. (밖에서 뭘 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남자애들을 생각하면 걔들하고 얼레발 설레발 한 달 떼우기 좋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도 드는데, 하여간에 그걸 어떻게 하라고.... 근데 웬 뚱딴지 같은 집이람.

 

그리고 어거지로 방학 중에 책 한 번 보겠다고 도서관에서 책 검색을 했다.

도서관 책 검색 주제어에 "집"을 치니, 검색된 책이 삼십 몇 페이지가 나온다.

그걸 어거지로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사과나무 한 그루의 내 영혼의 집"류라 페이지는 잘 넘어간다.

이러다가 적당한 책이 없겠지. 그러면 나도 자료 하나 없는데 수업 어찌하라구. 그냥 못 하지, 뭐. 하는 마음 자세로.

 

이십오페이지가 넘어가고, 제목이 냅다 "집"인 책이 하나 나왔다.

소제목으로 [6,000년 인류 주거의 역사]. 오호라, 이것이라면.

책은, 삼만오천원짜리로, 장장 오백팔십사페이지에다가, 싸이즈마저 에이 포로 크기도 크고, 껍데기가 대단한 양장이라 무겁기도 오지게 무거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누군가 평생을 '집'만 좇아다니다가 죽기 전에 그걸 죄다 쏟아놓고 죽은 모양이었다.

표지에 이렇게 써있다.

 

        건축과 역사와 인류학이 한데 어우러진 이 백과사전적인 책은 도시가 생겨나기 전 원주민이 살던 움막집에서부터 중세의 요새도시, 근대의 전원주택, 현대의 최첨단 아파트까지 전 세계와 전 시간에 걸쳐있는 집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안을 펼쳐보니, 크고 두꺼운 책에 글씨체도 작다.(여기서 글씨체 커버리면 사기지.)

촘촘히 적혀있는 글과 연필로 그려진 것들을 옮긴 듯한 그림들- 각종 집의 입면도 단면도 평면도 앞모습, 위에서 본 모습....

 

수업이고 뭐고 이런 책을 보면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평생을 손에 든 것인데...

 

당장 집으로 빌려와 본다.

지은이의 머리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주거는 예외 없이 동굴이었을 것이라는 완고한 통념을 헤쳐버리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동굴보다도 빈번하게 '움막'이 최초의 주거역할을 하였다. 예수회 성직자였던 로지에가 시적으로 연출한 것처럼, 한 남자가 방형의 원시 오두막을 발명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가장 초기의 오두막은 원형이었으며 대부분 여성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옮긴이의 머리말

       ........................새로운 눈을 열어준 지은이에게 경의를 표하며...............

 

중간에 재미있었던 것

호주 원주민 아룬타족 이야기; 아룬타족은 호주대륙 중앙 사막에서 사는데, 가끔씩 매우 추운 밤이 찾아오지만 아룬타족은 옷을 전혀 입지 않는다. 잠잘 때 역시 아무것도 덮지 않는다. 그러면 날씨가 너무 추우면 어떻게 하느냐. 온 가족이 개를 껴안고 잔단다. 아하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웃으면 안됨.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굉장히 진지한 생활방식임.  아룬타족이 바깥기온을 말할 때 그 단위는'개 몇마리'이다. 즉, 따뜻할 때까지 필요한 개의 마리수로 바깥 기온을 얘기한다는 것이다.

"오늘 밤은 너무 추워. 개 세마리 쯤이야."

"날씨가 많이 풀렸군요. 개 한마리야."

사막에 사는 그들은 물이 어디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수지식인데(그들뿐이랴, 누구나 그렇지), 하여간에 물이 굉장히 소중하다. 성년식의 시험문제는 부족 영역 내 샘물의 위치를 모조리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벼라별 각종 방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아룬타족은 자신의 정맥을 잘라 피를 마신다고 한다. 허.

 

사실 아룬타족의 이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인데, 사설이 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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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안 받고.

 남편쟁이의 혹평이 어딘가에 실려있길래....

(아니, 이런 방을 만들어놨으면, 말을 할것이지.. 우리 사인 정말 매우 브로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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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을 보았다. '왕의 남자'도 '친구'도 '동막골'도 뭐도 하나도 안 본 내가 '괴물'을 보았다. 그리고 보는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겨웠던 게다.

 

 이 영화는 아마추어가 만든 아마추어 영화이다.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난 의도적으로 못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의도적이지 잘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한 B무비가 되었다.

 

 우선, 인물의 성격에 하나도 깊이가 없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매력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물마다 그저 짤막한 메모 정도 해놓은 수준이다. 취직못한 386, 가난하지만 정이 많은 가장, 이런 식의 외적인 조건만 있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이 하나도 없다. 집중할 인물이 없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했다고 하는데, 글쎄. 왜냐하면 인물 자체가 아무런 특성이 없기 때문에 배우들이 개성을 발휘할 여지가 별로 없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최대한 노력해서 연기하지만 본래 그 인물이란 게 그리 심혈을 들일 인물이 아니다. 연구를 해야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변희봉이 그럭저럭 잘했는데 그 정도는 그 사람에게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게다가 주변 인물로 나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로봇이나 다름없다. 이건 머릿속에서나 있을 인물이지 실제로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인물이 아니다. 이건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메시지가 있는가? 없길. 있다면 코미디.

 

 가족이 있는가? 과연 가족에 대한 재발견이 있는가? 현대 사회의 가족에 대한 탐구가 조금이라도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광고에는 괴물 대신 가족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가족 대신 괴물이 있을 뿐이다.

 

 공허하다. 모든 게 적당적당하고 조금이라도 깊은 여운이 없다. 텅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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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귀가 얇은데, 특히 옛날부터 이 남자의 말에 혹하는 이상한 기류가 내 몸에 있다.

이 글을 읽고나니, 아 맞다, 싶은 것이다.

 

음, 그런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도 영화 보는 내내, 그들의 대사가 그들만의 대사라기 보다는

누구나 툭툭 내뱉을 수 있는 말장난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사가 좀 후지다,란 느낌이었다.

 

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재미있는 것 같아.

 

음, 그러나 그것은 정말 나의 가슴에 정확하게 파고드는 지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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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모에게 다시 한 번 재미거리를 선사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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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

각설하고,

아, 멋져, 멋져.

 

날휘 블로그에서 가져온, 오, 이 근사한 사진의 포스터를 보라.


 

누구야, 사진까지 이렇게 잘 찍어주다니.

 

날휘 말대로, 잡다한 것 다 치우고 오직 깊이와 넓이로 공간 감각을 공포로 확장시킨 이 하수구.

 

봉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그의 도시 공간 감각은 참으로 탁월하다.

 

두 미천한 주인공이 서로 쫓고 쫓기는 아파트, 그것도 복도식 아파트(나도 어렸을 적부터 느꼈던 것인데 이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만 걸으면 공간감에 압도됨. 유럽의 古大성당식 압도감이 아니라, 공간도 나도 피차간이 천박한 존재라는 식의 압도감.)의 복도.

그리고 모두에게 친숙한 그 시멘트 덩어리 아래, 아무도 가 본적 없는 아파트 보일러 지하실....

 

 

그랬던 그의 공간 감각이, <살인의 추억>에선 농촌의 탁 트인 벌판으로 나와버려 좀 시시해져버린 것일 수도... 꼬불꼬불 길의 형사의 혐의자 추격씬이 생각나기도 한데, 이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헛갈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가 다시 <괴물>에서 살았다.

<괴물>은 진정 <플란다스의 개>를 잇는 봉 감독의 계보인 것!!!

날휘가 극찬한 서울의 골목하며, 한강의 그 밋밋한 철제 시멘트 덩이 다리들.

 

누구는 반미의식과 반자본주의의식을 서둘러 겉에 둘렀다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괴물 컴퓨터 그래픽이 좀 미흡했다고 하기도 하고,

날휘는 괴물과 괴물을 좇는 인간 무리들 간의 미묘한 교감이 있었더라면, 괴물에 좀더 델리키트한 캐릭터가 있었더라면 하는, 고급스러운 아쉬움을 살짝 남기던데, 나는 모두 그 정도도 대만족.

 

박강두 가족이 매점에 들어가 요기를 때우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박강두가 문틈으로 발견한 괴물.

"우릴 보는데."

그리고 카메라는 문 틈으로 괴물을 내다본다.

멀리 보이는 괴물.

이 장면에서 괴물 컴퓨터 그래픽이 미흡해서 그런건가, 아무튼 나는 멀리 보이는 그 괴물이 마치 다리 꼬고  앉아 시선은 먼 하늘에 두면서 휘파람을 불고 딴 청을 피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껏 딴청을 피우지만, 살짝살짝 시선을 돌려 매점 안을 살피고 있는.

그랬다가 총 알 한 방이 발사되자마자 즉각 매점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그 자세바뀜.

그리고 총알을 퍼부어대며 악다구니로 자기를 내몰아치는 박강두 가족에게 정말 '삐친 듯', 먹이에게 상처를 내지않고 아지트로 끌고가는 습성에 반하여, 박희봉을 땅바닥에 패대기질치는 그 앙가품.

난 이 대목에서 괴물에게 살짝 연정(?)이 가던걸.

 

근데 아무리 봉감독이 잘 했어도, 배우가 반.

 


(프레시안)

 

이 배우들이 나오는데 어째 천만이 넘지 않겠는가.

나만해도 두 번이나 봤다.

부산가서 애 없이 열흘 지내는 동안.

애 없이 지내니까, 어쩜 그렇게 시간이 많은걸까.

예전에 애 없을 때 이 많은 시간들을 다 어디다 쳐발랐던걸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노벨상을 타리, 세계일주를 하리, 팔만대장경을 해석하고 다시 청동에 새기리.

 

그런데 서울에서 애 보며 고생했을 남편에게 미안해서 처음엔 영화 봤다는 말도 못 했다가, 살짝 봤다고 말을 흘렸다가, 두 번 봤다고 결국 고백하였다.

남편은 오늘 <괴물>을 보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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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며칠 전, 규민이 물음.

 

" '어차피' 가 나쁜 말이야?"

 

어린이집에서 나쁜 말처럼 쓰여지나고 있는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ㅊ'발음에 'ㅍ'발음까지 있어서?

날 때린 친구한테 화가 나서 "야"하고 부른 후, 이를 앙 다물고, "어차피!"하고 외칠 아이들을 상상해보니 웃겼다.

 

"아니야. 나쁜 말이 아니야."

하고 설명해줄랬더니, 너무 어렵다.

"규민이가 좀더 언니가 되면 알 수 있을거야. 아무튼 나쁜 말은 전혀 아니야."

 

그 후 며칠이 지나, 규민이가 '어차피'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 우리 먼저 밥 먹자. 아빠는 '어차피' 아침 밥 안 먹는다니까."

 

오, 놀라움 놀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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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ing 제시카 스타인

늦게까지 함께 놀았던 친구를 무작정 뒤따라가는 규민.

어차피 그 아이는 아빠가 집으로 데리고 가는 길. 가봤자 돌아서서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될테니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아이 아빠는 집으로 곧장 가는 대신 비디오가게에 들렸다. 그 가게는 폐업한다고 비디오테이프들을 싸게 팔고 있던 중이었다.

덩달아서 비디오가게에 들어선 규민과 나, 그리고 규민의 친구와 친구의 아빠는 문에 들어선 순간부터 각각 갈라져 눈을 휘번덕이며 비디오테이프 꽂이 사이사이를 누볐다.

 

그 가게는 제법 컸다.

구석구석 잘 살펴보면 횡재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가게가 자꾸만 문을 닫는 건, 불행이다.

넓어봤자 삼분의 이 쯤의 공간을 만화책에 거의 내어주고 있는, 그래서  비디오 테이프래봤자 구비하고 있는 자산은 없고 죄다 최신프로를 반짝 내놓고 거두고 내놓고 거두기를 반복하는 비디오가게들만이 남아가는 현실은, 불행이다.

 

그렇다고 사실 내가 영화를 자주 봐주면서, 그들의 생업에 도움을 주면서,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니 비디오가게계의 현실비판은 관두고, 아무튼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펄떡 휘번덕휘번덕 뛰며 이곳저곳을 누볐던 네 명의 사람들로 돌아가자면.....

 

규민이과 그의 친구는 곧 함께 만화비디오 칸 앞에 서서 하나하나 품평회를 하기 시작했다.

미키마우스 만화 씨리즈라면 규민이는 전문가 급. 친구 앞에서 무어라고 평을 해주는데, 친구가 못 알아듣는다. 친구는 우리나라 만화 씨리즈 '백구'를 규민에게 추천하고 있다. 들려오는 그애 아빠의 목소리, "너 그거 본적도 없잖아."

 

규민이가 친구랑 시간을 잘 보내주는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눈을 핑글핑글 돌리고 있는데...(단시간에 가장 많은 글자를 읽어낸 순간일 듯.)

그날밤 나는 횡재하였다.

3개 2,000원 부분에서 <멘>과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그리고 <안토니아스 라인>을 찾은 것이었다.

 

<멘>은 내가 짱 좋아하는 영화다.

평생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그리고 남편쟁이를 위해서 한 편의 좋은 작품의 스탠다드를 고르려고 했는데, <안토니아스 라인>이 눈에 딱 들어왔다. 흠, 이 영화는 두고두고 볼 것 같지는 않지만, 발견했으면 왠지 예의상 사드려야할 것 같은 기분에...

그리고 다시 남편쟁이를 위해서... 먼저 <숏컷>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걸 고르면 4편의 영화가 되니(<숏컷>은 비디오 2장), 2,000원 넘는다고 할 것 같아 포기.

그러면 무얼????? 하고 눈을 돌리고 있는데, 저 멀리멀리 꼭대기 구석에서 이 눈에 착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남편쟁이를 위한 것은 영원히 물건너 가고, 알차게 나만을 위한 세 편.

 

규민이도 세 편의 비디오를 골라놨음.

<미키마우스의 생일잔치>, (친구가 추천했던)<백구>, 제목은 기억안나고 순정만화 하나.

 

그래서 엊그제 을 보았다.

 


 

 

이 영화, 주인공이자, 씨나리오를 쓴 두 여자배우들이 하나는 70년 생이고, 하나는 71년 생이다. 작정하고 나와 딱 맞는 것이다.

한국/서울 남자 백 보다 지구 반대편 여자 둘이 훨씬.....

 

 


 

 

이 영화가 동성애로 안내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결국은, 이성애자들을 안도하게 해주지만, 무엇보다 큰 이 영화의 미덕은 동성애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있다는 것.

영화의 씨나리오를 두 여자가 썼기 때문인데, 무척 세심하고도 유머러스한 관찰의 눈은 분명 훌륭한 것.

그런데 나는 여자의 시기를 지나 인간의 시기에 입문하고 있어서인가(이, 뭐, 썰렁한 표현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고나선 후의 제시카, 그리고 신문사를 그만두고 작가의 길에 나선 조쉬(뉴욕 여피의 전형이었던 제시카와 조쉬의 복장이 달라졌다. 촌스러운 원피스에 청자켓을 입은 제시카, 빵꾸난 티셔쓰를 입은 조쉬)가 더 궁금해지는 기분.

 

그것은 마치 그녀 제시카 역시 여자의 시기를 지나 인간의 시기로 옮겨가고 있음처럼 느껴진다. 너무 내 식대로 해석인가.

다니던 회사 관두고 아티스트로 전념하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삶에 입문했다는?

엉터리 도식이겠지만, 여전히 일면 일리가 있다고 믿는다.

회사와 아트 ---- 그것은 정녕 생활과 삶의 차이인 것이다.

그것은 정녕 하루하루와 인생의 차이인 것이다.

으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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