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바라를 내 속옷에

from 불만 2006/08/03 11:35

"미제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우다가 숨진 혁명가가 술이나 여성 속옷 광고에 모델이 된 꼴은 비극이다"

 

언듯 공감이 갈 듯 하지만

솔직히 굉장한 시대착오적이고 초라한 사고방식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2006년 8월,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자본주의는 '운동'을 이윤의 도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이윤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미지를 이윤의 도구로 삼은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기획자들, 디자이너들, 작가들이다.

 

그들은

'혁명'을 비하하거나 게바라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 게바라의 강하게 반전된 얼굴 이미지가 너무 멋져서,

단지 멋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그 이미지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면 멋지다고 느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철없음을 탓할 것인가? 도덕에 대한 무감각을 탓할 것인가?

고래부터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도덕을 무시하고 아름다움을 지지해왔다.

그들은 진보진영만의 도덕을 따라주지도, 자본의 도덕만을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체 게바라의 반전된 얼굴이미지가 특별히 너무 아름답고 멋진 이유는 무엇일까?

모자에 붙은 별과 잘생긴 게바라의 얼굴이 너무 잘어울려서?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조가 조화로워서?

 

다른 누구도 아닌 게바라의 얼굴이 정말 멋진 이유는,

위에 적은 내용들도 포함되겠지만,

무엇보다, 뜬금없게도, 게바라가 정말 멋진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게바라의 아름다움은 진보진영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의미를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붉은 바탕에 놓여진 게바라의 반전된 검은 얼굴에서

자기 삶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막연하게 느끼게 된다.

게바라는 그런 삶의 상징이며,

기표만 남은 것같은 이 시대에도, 잡히지 않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개개인에게 조금씩 다른 어떤 기의(의미)로 그 상징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술병이나 스타벅스 잔에서, 심지어 여성속옷에서(여성속옷이 어때서?)

게바라의 얼굴을 발견하는게 가슴 아픈 이유는,

그들이 자기연민에 빠지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이 게바라의 얼굴을 상품광고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슴아픈 이유는

더이상 그들이 게바라의 의미를 자기것으로 만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의 상징인 게바라의 얼굴 이미지가 자본주의에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게 된것은,

자본주의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진보진영의 잘못이다.

 

자본주의가 이전 운동의 성과를 너무 쉽게 무시한다고,

진보진영에서 징징대는 것은 진보진영 스스로에 대한 모욕이다.

대체 누구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게바라의 얼굴은 아름답다.

나는 그의 얼굴을 곳곳에서 보는 것이 좋다.

 

자본론이 드라마에 언급되는 것은 웃기다.

이해도 못하면서 중얼대는 것이 그냥 재밌다.

 

게바라 본인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기분이 많이 나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그의 아내에게도 많이 미안하다.

그녀의 투쟁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모욕하지 않는 길은

이미지를 사용한다고 자본에게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대항하는 다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언젠가는 다른 세상의 술병과 내 속옷에서 게바라를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아 글에 빈곳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 빈곳을 메우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

그래서, 귀찮아서 그냥 두기로 했다.

 

될대로 되라지 췟, 퉤!

 

생각해보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자본과 상품과 그 내부의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통째로 묶어 '자본'이라 지칭하는 것이 기분나쁘다.

자본주의 내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고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는데,

그들이 세계를 변혁하기 보다 사사로운 자신의 노동,

그 누군가가 그렇게 숭고하다 했던 그 노동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해

무시하거나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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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3 11:35 2006/08/03 1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