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from 2006/12/17 00:58

1996년 여름 뉴욕 웨스트 112번가의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내가 가진 짐이라고는 티셔츠 3장과 청바지 2벌,

이모가 남긴 황토색 트위드 재킷 한벌,

엠마뉘엘 카레르의 '콧수염'이라는 페이퍼백 한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들어있는 낡은 갈색 가죽가방 한개 뿐이었다.

 

그나마 티셔츠 하나, 청바지 하나는

이삿짐을 나를 때(?)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짐이라고 하긴 뭣한 면이 있다.

소설책은 뉴욕으로 오는 버스를 타기 전에 대합실에 있는 간이 서점에서 산 것이었다.

 

대학 수업이 시작되기까지는 2달 정도 남아있었지만,

나는 그 전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도시를 나에게 친숙한 곳으로 만들어 두고 싶었달까.

 

부엌 겸 침실 겸 응접실의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는

허리높이 정도의 냉장고 한개와 매트리스 하나가 놓여있었다.

내게 필요한 전부였다.

 

빨래하기가 싫어서

일주일씩 같은 옷만 입고

뉴욕의 온 거리를 쏘다녔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 뿐이어서 옷에 케찹과 마요네즈의 기름때가 묻어있어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스니커의 뒷축은 거리의 아스팔트에 닳을 대로 닳아서

걸을 때면 아스팔트의 우둘투둘한 면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고등학교때부터 쟈니 조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모든 돈은

뉴욕에서 빠듯하게 생활할 경우 3개월 안에 바닥날 터였다.

하지만 겁날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잃어버릴 게 없어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아침에 집 앞의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먹고는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하루종일 아낀 식비로 길거리 문구점에서 질 좋은 노트와 데생용 연필을 사기도 하고

서점에서 얇은 화집이나 소설책을 사기도 했다.

일주일만에 45kg에서 43kg으로 몸무게가 줄었지만

얼굴과 머리칼에서는 윤기가 돌았다.

 

나는 모든 것을 노트에 그렸다.

심지어 타임즈 광장의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던

펄프픽션까지도(나는 그 영화를 두달동안 서른번쯤 보았다) 보이는 대로 노트에 옮겼다.

내 노트의 펄프픽션에는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에 나오는 인물들보다 더 펄프픽션적인 인물들이 출연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시절이었다.

 

나는 그 여름의 뉴욕에서 쓰레기를 만났다.

센트럴 파크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파란 새를 그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내가 앉은 벤치 반대편 끝쪽에 앉아서

내가 그리는 파란 새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가까이 오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라고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쓰레기야.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내가 쓰레기임을 인식하기도 훨씬 전에

우주의 어느 한복판에

누군가의 손으로부터 아주 가볍게 던져졌지.

그것이 누구였는가는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

나는 누구인가 하고.

나는 이곳에 왜 던져졌는가 하고.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오른손에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스타벅스의 종이컵이 들려있었지만

커피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들어있는 것처럼

아주 가벼워 보였고

컵바깥쪽에 커피자국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흔적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왼손에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것이 틀림없는,

베어 문 부분이 심하게 갈색으로 변한 사과를 들고 있었다.

눈을 뜨고 파란새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쓰레기로 살아왔지.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관심갖지 않았어.

거리를 굴러다니면서 가끔은 밟히기도 하고

쓰레기통에도 몇번 들어갔었지만

용케 살아남아 이곳까지 왔어.

 

지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깊은 곳부터 우러나오는 가벼운 냄새가 그녀에게서 내게로

바람을 타고 전달되었다.

 

그 냄새가 너무나 당연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꽤나 찢겨져 있었지만

그런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언뜻 키치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클리셰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이 때를 기다려 왔어.

 

그녀의 목이 잠겨있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조절한 뒤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 안에 찬란히 빛나는 무언가가 있어서

때가 되면 드러날 거라는 걸.

나는 그래서 내 주름을 몇번이고 접고 다시 접었어.

더 멋지게 아스팔트에 문질러지기 위해서 사람들의 발밑으로 뛰어든 적도 많았지.

무서웠지만, 하이힐 아래로도 들어가 본적이 있어.

나는 정말로 오래 기다려 왔어.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여러번 포기하고 싶었어.

소각장으로 가는 쓰레기차안으로 뛰어들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어.

하지만 나는 기다렸어.

 

나 역시 그녀를 오래 기다려 온 듯 했다.

 

나는 노트에서 새 종이 한 장을 찢어 그녀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없이 노트에 집혀 내 집까지 옮겨졌다.

 

냉장고에서 피클 병을 꺼내 내용물을 비우고

따듯한 물을 틀어 수세미로 문질러서 병의 겉면에 붙은 종이를 깨끗하게 떼어냈다.

종이타월로 병의 물기를 완전히 닦아낸 뒤

쓰레기통에서

며칠전에 산 책에 끼어있던 크림색 두꺼운 광고지를 꺼내어

피클병 뚜껑보다 약간 작게 오려 뚜껑에 적힌 글씨를 가렸다.

풀이 없어서 한블럭 건너에 있는 문구점에 허겁지겁 달려갔다 와야 했다.

남은 광고지의 여백에 나는 아주 공들여 두꺼운 글자를 그렸다.

G.A.R.B.A.G.E.

그리고 글자들을 오려내어 피클병에 붙였다.

제법 깔끔했다.

 

그녀를 병에 담아 창틀에 올려 놓았다.

검은 하늘 바탕에 색색의 조명이 반사되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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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00:58 2006/12/17 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