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에 한가지

from 우울 2007/02/14 11:14

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아주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한번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는 것이다.

카툰을 그리는 동안, 나는 카툰을 그리는 일밖에 못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데 들어간 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는데,

왜 나는 다른 아무것도 못했던걸까에 대해서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내안에는 너무 많은 내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어서,

나는 그들이 왜 그러한가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결국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관음을 즐기는 전지적 작가시점의 엿보기 나일 뿐이니까.

 

카툰을 그리는 동안, 결국 나는 해야할 돈버는 일을 하나도 안했었다.

그 일은 고스란히 미뤄져서,

지금 나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도착해버렸다.

며칠째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구석에 처박혀서 눈치만 보던 '내'가 슬금슬금 일어나서

마지못해 책상앞에 앉아 기계적으로 일을 한다.

억지로 끌려나온 것이 못내 괴로운 표정이, 역력하다.

나는 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아따위는 없어보인다.

자신을 주장하는 대단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먹여 살리는 일을 하다니,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의 표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누군가 다른 나에게 자리를 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최대한 빨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아요.'

별 대단치도 않은 정도가 아니라 끔찍하게 약해빠진 몸뚱아리 하나를 두고

피둥피둥 살찐 탐욕스런 이빨들과 눈동자들이 교차할 때,

그는 가장 안보이는 구석에 구겨진 휴지조각마냥 스스로를 던져놓고 나와야만 할 때를 기다린다.

차라리 없어져주면 좋으련만.

초라하고 추레하다. 비굴하고 멍청하다.

그런 행색은 모두에게 죄책감을 안기고 만다. 

극악한 자이다.

 

나는 카툰을 그리던 '나'를 좋아한다.

그의 무관심은 너무나 견고해서 누구나 그를 관찰하고 만지고 볼 수 있지만,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는 개미처럼, 63빌딩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다.

작고, 단단하고, 가볍다.

비밀이지만, 모두들 그를 두려워한다.

그는 몸뚱아리의 곳곳에 찔끔찔끔 남은 영양분을 쪽쪽 빨아들여,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그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낙서에 혼신을 기울이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대할때 사용하는 그 태도는 존경할 만한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이에게는 매력을 느끼고 말 것이다.

그는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니까...

 

부끄러워하는 것은 내 일이다. 나는 훔쳐보면서 그들이 한 짓거리들에 부끄러워하고

은밀한 쾌감을 얻는다.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극악한 자에게 나를 맡겨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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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11:14 2007/02/14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