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드림

from 영화에 대해 2007/05/07 01:22

대화란 가능한가?

 

내가 '개'라고 말할때, 너는 정말 나와 같은 '개'를 듣고있니?

내가 'FTA'라고 말할 때, 너는 나와 같은 'FTA'를 듣고 있니?

 

누군가에게 내가 경험한 무언가를 전달하려할 때 우리는 '미디어'를 사용한다.

'매체' 혹은 '매개체'라고 번역되는 그것.

순수한글이던 한자한글이던 한글로 말해보려 하지만 '미디어'가 좀 더 넓은 의미로 쓰일 수 있는 것 같아.

사실, 이게 재미있는 부분이다.

내가 '미디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좀 더 잘 나를 이해할 것이라는 믿음.

 

대체 더 잘 이해한다는 것, 서로 대화가 더 잘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디어'를 거치면, 원본은 손상되게 마련이다.

원본은 '미디어'의 생산자에 의해 일부 강조되고 일부 삭제되는 등 편집이 되는데,

'미디어'의 소비자는 이 내용을 제 멋대로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이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우리는 '미디어'의 순수성이라던가 '진실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죽음'에 매우 집착하는 '바르트' 따위는 사실 현실 속에서 너무 심한 사치다.

대체 '미디어'에 진실성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나 고독하지 않은가.

 

'체코드림'은 '미디어'의 '진실성'에 대한, 

고독할뻔 했지만 고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다.

 

분명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말이다.

대화라는 것이 가능할 것만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수많은 '거짓' 미디어들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이해하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하나의 '진실'한 미디어에 대해서는 정말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다.

 

'진실한' 미디어는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 때문에,

다른 미디어로 그것을 옮기려하면 '원본'이 손상되어

그 고유의 것을 느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할만큼 강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이 인간사회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런 평가라니, 너무 오만한거 아니니?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나는 과연 '진실한' 미디어를 만들어 내고 있는걸까? 

 

개토는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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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7 01:22 2007/05/07 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