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

from 2007/07/24 01:37

목이 마르다.

 

목이 말라서,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어둠속에서 그의 체온만이 느껴진다.

 

성급하게 달려서 작업실의 컴퓨터를 켜고, 아주 잠깐 생각한 뒤 전등을 켰다.

목이 말라.

컴퓨터가 부팅되려면 조금 시간이 있다.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용서를 구한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는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싼다.

가슴 한 가운데의 오목한 부분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듣는다.

그의 생명이 태고의 깊이로부터 현재의 나에게 전달된다.

그의 생명은 언제나 나의 현실보다 조금 앞선 과거다.

확실한 것은 체온 뿐, 그의 체온은 그의 것이기보다 나의 현실에 속한다.

 

목이 마르다.

이 목마름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지만,

영영 해소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아시스를 찾는 일은 힘이 들기도 하지만, 전혀 힘이 들지 않기도 한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는 일에 완전히 매몰되어있어서, 너무나 집착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런 상태로 아주 오래 지내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들 것도 없다.

나는 느긋하게 리모콘을 들고, 마우스를 쥐고 앉아 나무늘보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아시스는 결국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쉬지 않고 보는 것 뿐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이 쉬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제는 지치지도 않아.

지칠만큼 품이 드는 일도 아닌걸.

 

나는 이제 너무 무심해졌어.

물 맛을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10년 전에는 너무 많은 오아시스를 발견해서,

한 오아시스에서 겨우 한모금씩의 물을 마시거나,

발이나 담그고, 기껏해야 가벼운 목욕정도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오아시스들은 그 뒤로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둔감해졌어.

신선하고 차가운 물 맛을 잊어버렸어.

날카롭게 찌르는 느낌, 눈과 코를 당기는 강렬한 자극.

한방울 만으로도 뿌옇던 세상이 맑아지게 만드는.

뇌주름 구석구석까지 쌓인 모래먼지를 들어내고 척수를 듬뿍 적셔

미세한 삶의 진동을 느끼게 해주는 물,

나는 목이 너무 말라.

 

나는 정말로 목이 말라.

 

누군가 독을 풀어 놓은 걸까?

죽은 오아시스들.

검은 시체들이 굳은 진흙더미처럼 놓였다.

거대한 물소의 뱃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아래에서 물소의 뱃속은 따스하다.

끈적끈적하고 부드럽다.

 

나는 물소의 뱃속에서 흐느껴 운다.

잠시 쉬어야 겠어.

나는 너무 지쳤어.

파리들, 파리들이 싫어.

잠이 든다.

 

 

'녹차랑 먹을래, 된장국이랑 먹을래?'

'키스해줘.'

우리는 키스를 하고 잔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대형마트에서 사온 초밥을 녹차와 먹으면서.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세상의 잔인한 걸 하나만 인식하고 나면, 그때부턴 끝이 없어. 난 이제 더이상 못 견디겠어.'

내가 칭얼대면 그는 내 머리를 그의 어깨에 갖다댄다.

 

하지만 나는 정말 더이상 못견디겠다.

우리는 왜 눈앞의 행복을 가질 권리가 없는걸까?

 

생리가 끝나서 가슴이 작아졌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풍선처럼 바람이 빠진거야.

가슴가득 터질 듯이 몰려들었던 피가 덕지덕지 딱지처럼 굳어서 떨어져 나가버렸어.

 

나는 이제 무심하고 둔감하고 타인의 감정에 부주의해.

차라리 표현하지 마.

만나지마.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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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4 01:37 2007/07/24 0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