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from 우울 2008/07/01 23:30

나는 도망쳤다.

 

남은 것은, 그림 세장.

 

볼품없는 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림도구들. 벽장안에 가둬두었다.

 

단단하게 생긴 상자에 담아서.

 

그리고,

 

뚜껑은 열어두었지만, 벽장문은 닫았다.

 

벽장 앞에는, 잡동사니들이 쌓여갔고, 잡동사니들때문에,

벽장문은 힘을 주어 열어도, 가까스로 엿볼 수 있을 만큼만 열리게 되었다.

 

나는 좁은 방과,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만들어진 벽장을 탓했다.

 

그리고,

 

방안을 가득 채운 컴퓨터 책상으로 도피했다.

 

시간은 흘러간다.

 

너무 열심히 도망치다보니,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어떻게 다음 늪을 지날 것인가, 어떻게 다음 산을 넘을 것인가,

어디에서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잠을 잘 것인가.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이용해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들이 언제나 충분히 닥쳐와 주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도 같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어렵지 않게 되었다.

 

어떤 문제들은 그냥 두어도, 별 탈 없이 해결되곤 했다.

 

어둠 속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거대한 숲은,

아침이 오면 그저 작은 풀숲에 불과했다.

 

닥쳐올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 쉬어주면

가야할 길이 보이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지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격렬하게 미친 듯이 도망치는 인간은, 무언가 도망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쳤다고 생각하자, 쉬게 되었다.

 

무작정 숨도 쉬지 않고, 꽤나 오래 달려주었다.

 

달리던 버릇은 내 몸 곳곳에 남아있지만,

쫓아오던 공포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인정해버렸으니,

나는 일단 이 곳에 멈추어 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7/01 23:30 2008/07/01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