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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수업

안드레스 아른트, 칼 맑스

제목 karl Marx 222p-226p

4.6 Andeutungen der Ökonomie des Sozialismus/Kommunismus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암시

 

 

 맑스의 방법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형태와 목적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소멸시킨다는 구체적 서술을 포기하도록 이끈다. 사회주의 체계를 정립하는데 어떠한 의견도 명확하게 정립된 것은 없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발전과 사회적 생산의 자연법칙적 발전에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데,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의 발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파리코뮌의 경험에 중점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추론을 할 수 있다. 맑스 논의의 불충분함은 그 양쪽을 분리해서 함께 고찰해야 그 의미가 고정이 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더 많은 예시들이 나타나는 절들이 있는 『자본』에서 어떤 경제적 발전인지와 어떻게 시민사회의 계급투쟁의 요소가 나타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맑스의 서로 다른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통치관계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안에서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립에서 알수 있으며, 따라서 정치영역을 통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이 직면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정치영역의 계급투쟁은 경제관계에서 초래한 혁명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관계의 조건은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이론의 결함이 맑스 이론안에서 해명되는 것을 통해 유지된다. 경제관계의 재생산과 발전이 정치형태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처음부터 유효하다. 경제적 관계가 사회적 개인의 의식적 연관을 표명하는 사회안에서, 정치에 대한 고려는 유효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개인의 노동력이 지출되고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는 것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자본3권에 상응하는데, 눈먼 권력이 자연을 규제하는 것 대신에 공동의 통제아래 자신의 신진대사를 자연을 이용해 합리적으로 규제할 때 인간적 자연을 가치있고 적합한 조건아래서 최소한의 수고로 보전하게 된다.

이성과 공동의 통제로서 자기의식은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정치권력을 확정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고 어떤 형식안에서 공동의 통제가 실천되는가의 문제를 설명한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경제학의 문제를 풀지 않고도 정치의 적절한 형식의 전제를 경제적 영역의 문제 내부에서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은 사회적 생산을 지향하는 욕구위에서 욕구의 총량과 그 본성을 넘어서는 논의를 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욕구 자체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욕구에 따라서 사용가치로서 부를 생산하는 것은 생산의 목표이다. 목적 그 자체로서 객관적인 부의 생산의 확대가 무절제함으로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명백한 판단위에서 생산의 확대를 구체적으로 단념하는것으로 생산의 지배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위한 결말에서 기술의 포기는 산정할 수 없거나 부정적으로 산정될 것이 명백하다; 자유로운 여가를 위한 필연적 부로서 일반적인 생산의 제한이다. 그것을 위한 전제조건은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역사적 권력을 넘어서서 욕구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은 객관적 부의 방향으로 노동원칙을 세밀하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참된 부가 실현되는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의 자유의 왕국에서는 개인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부이며, 그것은 필요 노동이 최소한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욕구의 양을 넘어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노동은 항상 있어야한다. 노동하는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기 전에, 사회적 총생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첫째 생산수단의 대체, 둘째, 확대재생산의 수단, 셋째 자연재해등과 같은 상황에 대한 예비 기금이나 보험 기금의 마련, 그 외에도 넷째로 생산에 있어 관리비용의 절감, 다섯째 욕구의 사회적 만족에 대한 규정, 여섯 번째 노동무능력자 등을 위한 기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과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적 생산을 하는 개인들의 욕구가 공동체적 필요노동을 규정해야 하며, 맹목적 생존을 보장하는 필요의 만족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필연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그것은 공동체적인 필요로 인식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항상 상대적 욕구이다.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고, 필요노동의 단축 수단으로서 생산력의 증가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유의 왕국은, 항상 필연의 왕국에 머무르는 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처음 시작된다. 그것이 자유를 위한 물질적 기초이며 전제조건이다; 이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이 지향되어야 하고, 공동의 통제아래로 도달되어야 한다. 경제적 과정 안에서는 자본주의 이후 공동체로의 이행도, 역동적 구조로서 내부의 기능연관도 사유할 수 없다. 필연과 자유는 절대적 필연안에서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긴장관계안에 머물러야 한다. 공산주의는 선형적 역사진행의 종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창조하고 책임지는 최고의 단계에서 인간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그러한 구조가 가능함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의 조건은 아니다. 보편적 필연성이 단번에 건너뛸 수 있는게 아닌한, 필연의 왕국안에서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실천적으로 실행되고 통제되는 사회적 실험이라는 조건하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제조건은 우선 공산주의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즉 적절한 토대위에서 서서히 진전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본주의적 사회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사회의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 면들과의 연관속에서, 즉 그러한 모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전체노동의 구성요소로서 개인의 노동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경제적 지속의 토대로 존재한다. 다시말해, 의식에 의해, 계획에 따라 분배된다. 개인에게 분배되기 전에, 전체생산물의 일부를 분배할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개인적 소비를 위한 생산물의 분배는 노동시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즉 가치법칙이다.

 

 

맑스는 여기서 분배의 올바른 통제기능만 생각해서, 상이한 사회적 관점과 개인욕구의 상이한 측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권리는 추상적,일반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민의 동등한 권리이며, 각 개인들의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그러한 이유로 불평등하다. 따라서 가치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분배는 구체적 사회적 욕구, 다시 말해 차이가 인정되는 개인들간의 욕구를 지향하는게 아니라 욕구의 보편적 기준과 욕구충족의 수단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개인적 욕구의 총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시민의 권리지평은 생산과 분배의 연관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통치학으로서)독립적인 지식이 직접적인 생산자사이를 분리시키는 조건아래에서 처음 위배된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정립이 사라진, 노동의 분리아래서 개인의 노예적 종속을 넘어서서 자신의 신진대사를 연합된 생산자들이 공동으로 통제하면서 그 조건은 폐지된다. 맑스가 말한 코뮨사회의 고차국면의 전제라고 불리는 이러한 측면은, 사회적 통제와 생산과 분배의 규제는 판단과정에서 생산자의 참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적 통찰을 토대로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서 생산자의 통치가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언급된 맑스의 인식은 어느정도 불명확한데, 한쪽 측면이 물질적 생산의 규정안에머무르는 필연의 피안으로서 자유의 왕국이라면, 다른 측면은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의 실현에서 삶의 욕구 자체로 노동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공산주의에서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지는 정치기구의 이론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하고, 두 번째 부분은 개인이 직접적으로 보편화의 준거로서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판단이 합치하는 물질적 인륜성의 범주안에서, 사회를 사유하게 한다. 실제로 맑스의 이러한 성찰은 경제적 해방의 전제로서 미규정된 정치의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러한 이론으로부터 공통의 양식으로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경제적 조건이 추론되어지는게 아니라면 그것은 물질적 생산에 연관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개인적 욕구에 상응하는 생산력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윤곽인데, 거기는 욕구를 넘어서는 지배가 지양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본3권 48장

Ⅶ. Abschnitt·Die Revenuen und ihre Quellen

48. Kapital·Die trinitarische Formel(828p)

 

 

 사회의 현실적 부나 재생산과정의 끊임없는 확대의 가능성은 잉여노동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잉여노동의 생산성과 그 생산조건의 풍부함이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이루어진다. 자유의 왕국은 외부적 편의와 총합이 규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의 행위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그 본성상 진정한 물질적 생산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자유는 오로지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가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며, 그 신진대사가 장님을 인도하는 권능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 대신에 그 신진대사를 사회적 통제 아래로 가져온다. 그 신진대사를 최소한의 수고로 그리고 인간적 자연에 알맞고 적합한 조건아래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필연의 왕국에 머문다. 그것을 넘어서야만 자기목적 자체로서 인간적 능력, 즉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왕국을 자신의 토대로 해야만 꽃피울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은 그 기본전제이다.

 

 

 

 

 

고타강령비판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20-21p

 

 

 

공산주의 사회는 스스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하여 등장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의 초기모습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낡은 잔재들이 여전히 들러붙어 있다. 공산주의사회에서 개별생산자는 자신이 사회에 제공한 노동량에 따라 자신의 몫을 제공받는다. 상품교환이 같은 가치물의 교환인 한, 여기에는 상품교환을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가 지배한다.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변하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소비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이러한 평등한 권리는 내용과 형식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르주아적 평등의 권리이다. 여기서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동안 노동할 수 있다. 그런한에서 노동이 척도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 불평등한 권리로서 평등한 권리이다. 즉 그것은 내용상으로는 불평등한 권리인 것이다.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불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 아닐 것이다.)이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동일한 관점아래 놓이는 한에서, 즉 특정한 측면에서 파악되는 경우이고, 그것은 바로 그들이 노동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도외시된다. 어떤 이는 결혼을 했고, 어떤 이는 자식이 많다...이러한 다양한 경우에 동일한 노동을 하고 동일한 몫을 분배받아도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부유해지거나 가난해진다.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권리는 불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폐단은 코뮨주의 저차단계에서는 불가피하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코뮨주의 고차국면에 이르르면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지며, 노동이 생활수단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생활의 욕구가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사회적 부가 흘러 넘치면 그 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단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는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가 실행될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그린비출판사 김호균 옮김

자본에 관한장-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 373-383p

 

 

생산과정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가치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이었다. 하지만 가치의 증식은 자본의 발전단계에서 보자면 단지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자본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생산과 유통의 교대를 통한 통일’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자 과정이며, 이 운동의 주체가 자본이다. 모든 자본은 원래 유통하고 있는 자본이며, 유통의 산물임과 동시에 유통을 생산한다. 유통과정 자체가 자본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가치증식과정 자체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유통하는데, 여기서 ‘유통’은 단순히 ‘상품의 순환과정’으로서 유통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전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고정자본은 유통하고 있지 않은, 즉 생산과정에 머무르는 자본이다. 그런 한에서 고정자본은 자본의 진행에 있어 하나의 과정, 하나의 단계이다. 자본이 생산과정에 머무르는 한, 그 자본은 유통할 수 없다. 자본이 유통 중에 머무르는 한, 그 자본은 생산할 수 없으며, 잉여가치를 낳을 수 없고, 자본으로서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자본이 시장에 던져 넣어지지 않는 한, 그 자본은 생산물로서 고정되어 있다. 자본이 시장에 머물러야만 하는 한, 그 자본은 상품으로서 고정되어 있다.

 

생산과 상품의 순환 자체가 자본이며, 이 단계중 하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고정자본이다. 자본은 항상 고정되거나 유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유통단계에 머물러 아직 회수되지 않은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고정 자본’이다. 생산 수단이 고정자본인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생산과 유통의 두 규정으로의 자본의 분해는 자본의 가치증식경향에 모순되므로, 자본은 고정 상태에 있는 국면을 줄이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렇듯 자본의 가치증식 경향에 위배되는 자본의 고정성이야말로 자본을 더 많은 생산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자본과 ‘유통’자본의 구별은 구체적인 운동의 과정, 즉 본래의 유통과정인 생산국면 외부의 자본운동을 취급할 때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본의 교대되는 형태는 이제 생산수단(고정자본)과 가변자본과 원료와 보조재료(유동자본)이라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존재양식으로 드러난다.

 

 

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을 살펴볼 때,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 수단으로서 기계장치 또는 기계체제의 발달이다. 노동수단이 기계화되면 대상화된 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며, 현실적 생산과정에서도 살아있는 노동을 자기 아래로 포섭하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대상화된 노동은 직접 생산물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는 생산물의 형태로 그리고 생산력 그 자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사회적 생산력인 지식과 숙력의 축적은 노동에 대립해 자본에 흡수되며, 따라서 자본의 속성으로서, 고정 자본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계 장치는 고정 자본의 가장 적합한 형태로 나타나며, 또 고정자본은 자본 그 자체의 가장 적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고정자본의 발전으로 기계장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정도를 측정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원래 생산물은 사용가치를 지니면서 동시에 교환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생산수단으로서 기계는 직접적으로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즉, 생산 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 시간의 증가는, 상품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이 생산시간 중 일부에 의해서도 충분하다는 것이 입증해 주는 것이다. 잉여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고정자본의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시간은 생산물의 직접적인 생산 시간에 좌우된다. 즉, 생산과정에 사용된 노동시간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더 커서 이제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상대적 잉여인구와 잉여생산이라는 것이다.

기계의 발전이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인간이 노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에 독자적인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가 생산과 부의 커다란 기초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사회는 가치법칙이 소멸해야 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자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인간 노동의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때문에 노동해방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고정자본의 비율확장은 유동자본이 자신의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해 잉여가치의 감소를 초래하면서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요컨대 대공업의 생산력 발전에 비례해서 증가하자마자, 생산과정의 중단-고정자본의 미작동-은 자본 가치의 감소로 작용한다. 고정 자본은 대규모로 발전하자마자 생산과정의 연속성의 외적 강제조건이 된다.

여기에서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이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살아있는 노동의 활동이 기계의 활동이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노동을 흡수하던 자본은 이제 노동자에게 맞서게 된다.

 

 

살아있는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의 교환, 즉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형태로의 사회적 노동의 정립은 가치관계와 가치에 입각한 생산의 마지막 발전이다. 이것의 전제는 부의 생산의 결정적 요소로서 직접적인 노동시간의 양이다. 하지만 대공업의 발전으로 실제적 부의 창조는 직접적인 노동시간과 비례관계에 있지 않은 작동체들의 권능에 의존하고, 오히려 과학의 일반적 상태와 기술 진보 또는 과학의 생산에 의존한다. 노동은 더 이상 생산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생산 과정 자체에 감시자와 규율자로 관계한다.

 

수정된 자연 대상을 대상과 자신 사이에 매개고리로 삽입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그가 산업적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자연과정을 자신의 제어하에 놓여 있는 무기적 자연과 자신 사이에 수단으로 삽입한다. 그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 옆에 선다. 이러한 변환에서 생산과 부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은 노동량도 아니고, 노동시간도 아니며,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따라서 교환가치에 입각한 생산은 붕괴하고 직접적인 물질적 생산과정 자체는 불가피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는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의 조건이 등장하고 여기에는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개인들의 예술적 과학적 교양등이 조응한다.

 

 

자본의 운동은 노동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정립하면서 동시에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모순의 진행이다. 따라서 자본은 필요노동의 형태를 감소시켜 잉여노동을 증대시키려 한다.

 

자본은 한 측면에서는 부의 창출을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온갖 과학과 자연의 힘을 이용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렇게 창출된 방대한 사회력들을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고자 하며, 이미 창출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한계 안에 이 사회력들을 묶어두고자 한다.

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상이한 측면인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는 자본에게서 수단으로만 나타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들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고정 자본의 발전은 부 일체의 발전 정도 또는 자본의 발전정도를 가리킨다. 고정자본, 즉 생산수단을 생산하려는 생산은 직접적으로 실현가능한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따라서 갈수록 더 큰 부분이 생산 수단의 생산에 사용되는 것은 이미 달성된 생산성의 정도에 좌우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고정자본으로서 기계의 발전이 가지는 자본의 자기파괴적 지양성이다.

유동자본의 경우 재생산은 유통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고정 자본의 경우 유통은 고정자본이 생산에서 사용가치로 소모되는 시간에 의해서, 즉 고정 자본이 재생산되어야 하는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기계장치가 발전하면 할수록(내구성이 좋아지면 질수록) 고정자본의 회수율은 점점 더 오래 걸리게 되고, 이것은 유동자본의 회전수를 더 빨리 필요로 함을 알게된다. 유동자본이 회전되지 않는 것은 잉여가치의 창조가 잠시 중단됨에 불과하지만, 고정자본의 중단은 사용가치의 단순한 중단이 아니라 고정자본의 원래적 가치의 파괴이다. 따라서 고정자본의 발전에 따라 자본개념에 조응한 생산 과정의 연속성이 자본의 보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정립되고, 따라서 소비의 연속성과 지속적인 성장도 마찬가지로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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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넘어선자본1편-이진경 선생님 책보고 요약정리

자본을 넘어선 자본 강추입니다...ㅎ 물론 이진경 선생님의 견해에서 대해서는 가타부타 얘기하고 싶지 않구요...

정말 글을 쉽게 쓰시는거 같아요....자본(강신준 역)볼때는 잘 이해안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그부분들을 이해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더군요....ㅎㅎ

글구 제가 이해한 식으로 예시나 표현들을 바꿔 썼슴다....좀 허접하게 느껴진다면 제 이해도와 표현력의 문제이지 이진경 선생님이

이렇게 쓰신건 아니니 오해마시길..........

 

 

 

1. 상품

상품-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직접적인 대가를 받고 팔기위해 만들어진 물건

 

상품은 어떤 사물의 성질이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교환의 관계속에서만 상품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부르는 노래는 상품이 아니지만 미사리 카페에서 부르는 노래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노래는 노래일뿐이다. 특정한 조건아래서만 노래는 상품이 된다. 하지만 사물이 교환관계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유용성, 즉 사용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사물이 상품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용성이 있다고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가 있는 사물을 대가를 지불하고 교환하는 한에서 그 사물은 상품이 되는 것이다. 유용성 만땅인 공기는 사용가치가 있음에도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지 않는가!!! 따라서 상품의 속성은 질적인 측면인 사용가치와 양적인 측면인 교환가치를 지닌다.

(왜 교환가치가 양적이냐면 얼마를 받느냐가 교환의 핵심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

 

 

상품의 생산

상품 탄생의 두 가지 종류

1-단순상품생산/소상품생산=상품으로 생산하게 아닌데 이후 그 생산물이 상품이 되는 경우.

ex)농부가 농사짓는 것은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쌀값이 폭락해도 농사는 짓는다. 하지만 밥만먹고 살지는 않으니까 먹고 남은 쌀을 시장에 ‘상품’으로 판매함으로써 나머지 생필품을 획득한다.

 

2-상품=걍 첨부터 팔려고 만든 상품으로의 상품생산

이것도 종류를 구분해야 하는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이 그중 하나일 것이고, 방망이 깍는 노인의 방망이가 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구분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 상품은 양화된 화폐가치만 중요하기 때문에 결과만 중시하는데 반해 방망이 깍는 노인은 행위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에 과정을 중시한다.

 

 

가치와 노동

앞서 보았듯이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교환의 등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교환을 비교할 척도가 필요한 것이다. 남극에서 싸구려 난로를 하나 사기위해 최신형 에어컨 100대를 지급한다해도 그것은 성립된다. 물론 적도부근의 열대지방에서는 고물에어컨 하나를 사기위해 최신형 난로 100대가 지급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기후에 의해서 유용성이 결정되고 이것이 교환의 척도로서 기능한다.

이렇듯 교환을 위해서는 ‘교환가치의 등가성’을 결정해줄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담 스미스의 핵심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스미스는 상품들의 가치를 결정해줄 척도로서 노동시간을 제시한다. 근데 문제는 노동시간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는데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두 가지 명제가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거를 설명하기 위해 스미스는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사회적 평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균형가격이 교환의 사회적 척도로 등장하는 것이다. 리카아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노동가치투하설을 제시하며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근데 리카아도 식으로 하니까 이제 현실사회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양태를 설명하는데 애로사항이 생긴다. 어쨌든 모든 상품의 가치 척도, 즉 기준을 노동량이라고 보고,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는 것을 노동가치론이라고 한다. 후에 맑스는 이 가치론을 더욱 더 발전시켜서 ‘잉여가치’개념을 추가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노동가치론을 발전시킨다. 자 이 골치아픈 문제는 난중으로 일단 패스하고 계속 간다...

 

 

가치개념의 발생

일단 앞서 나온 내용을 토대로 문제제기를 하나 해보자. 상품의 등가성 원리로서 교환의 척도를 노동시간으로 양화시켜서 설명할 때 요거 골때리게된다. 내가 견문을 넓히고자 겨울에 로마에 널러갔다. 거기 바티칸 박물관에 구경가면(이 띱때들이 일본어 오디오 가이드는 비치하고 한국 오디오 가이드는 비치안해놨다..) 시스티나성당이랑 연결시켜놨는데(고로 시스티나 성당만 따로 들어갈수는 없다.) 시스티나 성당 천정은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이고 벽화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다. 졸라 크고 졸라 장엄하다..그리고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가면 벨라스케스의 그 유명한 ‘하녀’그림이있다.(얼마나 유명하냐면 피카소가 자신의 기법대로 이 하녀그림을 재해석한 그림만 수십개일정도다.)

자 둘다 가격을 매길수 있나? 어떤게 더비싸나? 노동가치설대로 하면 당빠 미켈란젤로게 더 비싸것지.

그럼 미친듯이 그림을 그려낸 고흐의 그림은 노동시간이 쬐금 들어갔으니 싸구려인가?(고흐는 ‘광인’이라는 평가를 받을정도로 기록적인 수의 작품을 쏟아냈다.)

이렇듯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개념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제조건하에서만 발견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하에서 ‘가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 맑스의 네 가지 가치형태론을 통해 자본주의의 가치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쳐보자. 팍팍....

 

 

1. 단순한 가치형태-볼펜×1개=연필×2개

이거는 연필 두 개는 받아야 볼펜 한 개를 주겠다는 개념이다. 즉 볼펜은 연필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맑스에 의하면 이 관계는 ‘아직 양적인 관계로 환원되지 않은 가치’의 표현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볼펜은 자기의 가치를 연필로 표현하며, 연필은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된다. 여기서 좌

변인 볼펜항은 상대적 가치형태이고 우변인 연필항은 등가형태이다. 우변이 좌변의 값어치를 표현하는 등가물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등가는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양적인 개념의 등가가 아니라 질적인 개념의 등가이다. 즉 사용가치 간의 비교인 것이다. 이진경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자면 여기서 등호는 영어의 be동사처럼 주어와 술어를 이어주는 논리적 등호인 것이다. 즉 양적 동일함(등가성)을 표시하는 수학적 기호가 아니므로, 수학적 습관대로 양변을 바꿀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남자다.와 남자는 나다.는 같은 문장이 아닌 것이다. 즉 아직 이 형태는 질적 형태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근데 스미스씨는 여기서 양적 관계를 끄집어낸다.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볼펜 한 개를 만들때 연필 두 개를 만드니깐 둘은 양적으로 같은 개념이라는 비약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물건을 양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일한 단위로 환원한 뒤라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맑스는 비판한다. 양적인 가치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양적인 가치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순환의 오류가 아닌가!!!

결론: 핵심은 이 도식에서 좌우가 바뀌면 곤난하다는 거!!!!!!!!!!!!!!!

 

 

2. 확대된 가치형태-볼펜×1개=연필×2개

                                                    =바지×3개

                                                    =가방×4개

                                                    =책상×5개

                                                    =수저×12개

(여기서 볼펜의 값어치가 왜이리 높냐고 물으신다면 황금볼펜이라 말하겠어용~~부끄~~~)

 

자 여서 상대적 가치형태인 좌변항 볼펜은 자신의 값어치를 표현할 표현물을 다양하게 확장시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변항들 각각은 오로지 좌변항과만 관계를 맺고 있지 지네들끼리는 관계를 맺는게 아니라는 거다. 왜? 서로를 양적으로 비교할 척도는 아직 없으니까.....질적으로 비교할려면 또 다른 바지의, 가방의, 책상의, 수저의 도식이 새롭게 필요한 것이다.

 

 

3. 일반적 가치형태

연필×2개

바지×3개

가방×4개 = 볼펜×1개

책상×5개

수저×12개

 

이 도식은 확대된 가치형태의 좌우변만 바뀐듯이 보이나 여기에는 엄청난 비약, 즉 사기와 구라가 넘실대고 있다. 물론 이 도식에서도 좌우변의 관계는 서로 바뀔수 있는게 아니다. 아직 양적으로 교환될 척도는 여전히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 가치형태의 이 도식은 확대된 가치형태 도식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확대된 가치형태에서 하나의 생산물이 자신의 사용가치를 표현할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반대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오직 하나의 등가물로만 자신의 가치가 변화된다는 엄청난 변화가 발생한다. 드디어 우변의 볼펜이 모든 ‘가치’를 통일적으로 표시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황금볼펜~~두둥~~)

이것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러도 될만큼의 전복적 상황이다.

이제 하나의 등가물이 등장함으로써 이전에 중요했던 사용가치들의 다양성은 스뤠기가 되고 오로지 양적인 척도에 의해서만 좌변항들의 가치를 표현하게 되었다. 확대된 가치형태까지는 좌변항이 우변항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 가치형탱에서는 우변항(일반적 등가물)에게 채택되지 않으면 상품이 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가수가 수만이형과 계약을 맺는게 아니라 수만이형이 계약을 맺어줘야 가수가 되는 것처럼......이제 be동사 역할을 하던 논리적 등호는 수학적, 양적 등호로 바뀌었다.

 

 

4. 화폐형태

화폐형태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화폐가 대체하여 차지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등가물인 우변항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양적 가치를 통해서 좌변의 ‘상품’들을 표시한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이제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화폐가 차지하면서 화폐형태의 도식은 완성된다. 즉 화폐형태와 일반적 등가물의 도식은 본질적으로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일반적 등가물이 가진 모호성을 화폐형태는 해소했다는 것이다. 이제 화폐형태는 동질적인 양적 가치를 표시하는 단일한 척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물이 등가물과 교환가능성을 얻을 때만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되므로 이제는 상품이 화폐의 가치를 재현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화폐는 모든 상품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상품세계의 신이 된 것이다.

 

 

5. 화폐와 물신주의

생산물의 가치가 등가물에 의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로 인해 생산물이 가치를 부여받고 상품으로서의 생명을 부여받는 것처럼 나타나는 이 신비한 역전현상, 이것을 맑스는 fetishism이라 부른다.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이라는 노동의 본질적 능력이 노동생산물의 자연적 성격으로 보이게 되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제 화폐는 교환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수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목적이 되고 말았다.

 

 

6. 확대된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가치형태로의 비약

앞서 제기된 거대한 비약을 이제 설명할 차례이다. 맑스는 이러한 비약을 설명하기 위해 화폐의 기능(자본 1권의 3장)을 논의로 끌어들인다. 논리적으로 봤을때는 화폐의 발생은 상품유통, 즉 교환의 유용성을 양화시켜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화폐가 유통수단 이외에도 축장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의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유통수단으로 등장한 화폐의 용도가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부터 이미 화폐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 존재해왔으며, 정치경제학에서 화폐의 논리적 발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통수단, 즉 등가물로서 화폐의 발생을 논리적 필연인 것처럼 끼워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화폐는 그 이전부터 유통수단 이외의 수단으로(예를 들면 조공이나 지불수단으로)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통수단으로 ‘등장한 화폐’는 인과성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화폐는 경제학적 발전과정에서 그 필요에 의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을 마치 필연적 발전과정에 의해 등장한 것처럼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비약이자 위대한 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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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데 수업정리

3월23일 수업

독일이데올로기

1편 포이어바하편 박재희 옮김. 청년사 72페이지까지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이 아닌 맑스의 유물론에 대한 고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인용하며 감각적 인식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만이 진리임을 주장하며 감각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전제한다.

플라톤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론은 자기‘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으로 본데 반해 포이어바하는 감각과 현실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본다.-유물론적 사고관의 등장

 

여기서 한발자국 더아나가 맑스의 혁명적 사고가 시작된다. 사유는 유(類)의 경험에 의거해 일반화, 보편화되는 ‘과정’이며, 그러한 사유의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 이 지점에서 맑스는 진리와 현실로 양분된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여 사유는 현실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물임을 고발한다. 순수한 사유, 순수한 진리는 없다.

 

맑스 철학과 경험론과의 관계

철학이 현실의 추상화과정이라는 맑스의 테제는 로크적 테제와 연결점이 있다.

 

 

41페이지

2.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위한 전제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여러 전제들은 결코 멋대로 정한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 전제들이며, 이들 전제로부터 이끌어지는 추상은 단지 상상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전제들은 오로지 경험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모든 인간역사의 첫 번째 전제는 두말할 것 없이, 살아있는 인간 개개인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첫째로 설정되어져야 할 것은 이들 개개인들의 물질적 신체 조직 및 그로 인해 발생되는 여타 자연에 대한 그들의 관계이다......무릇 모든 역사서술은 이러한 자연적인 토대와, 역사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이러한 토대가 변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인간이 둥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들이 신체조직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에서,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

이 생산의 방식을 단지 개개인들의 육체적 생산을 재생산해 낸다는 측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생산의 방식이란 곧 이러한 개개인들의 일정한 활동의 방식이고,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일정한 방식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일정한 ‘생활양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그들의 생산, 즉,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어떠한 존재인가는 그들이 수행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에 따라 좌우된다.

 

 

경험론과 연결되는 듯한 맑스의 테제는 인간과 자연대상과의 관계라는 전통적 테제를 폐기하고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구별점을 드러낸다. 즉 순수관계는 없으며 이는 사회적 삶에 대한 함의를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철학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철학은 자립적인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과학의 1차적 일반화를 거쳐 얻어진 추상화의 2차적 산물에 불과한 의존적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는 구별된다. 독일고전철학의 종언에서 엥겔스는 기계론적 물질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 하지만(포이어바하와 유사하다.)맑스는 물질개념을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다.’는 제1원리로부터 이끌어낸다. 즉, 현실적 개인들, 현실적 개인의 생활관계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한다. 이러한 탈형이상학은 이후의 전개에서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 출발이 되는 전제는 니체와도 유사한 사유를 보여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하의 출발점인 ‘인간 그 자체’라는 개념도 추상적 개념이라고 보고 구체적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맑스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인간을 파악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의 인간‘이야말로 사변을 벗어던진 구체적 개념이라고 본다.

 

 

47페이지

4. 유물론적 역사관의 본질,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이념, 개념, 의식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인간의 물질활동 및 물질적 교류-현실 생활의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인간은 그들의 개념, 관념, 그밖의 것들의 생산자이다. 하지만 현실의 활동하는 인간은 그 발전의 최고 형태에서조차도 그들의 생산력 발전수준과 그에 조응하는 교류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의해 제약된다. 의식이란 의식되어진 존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실제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오히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만이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자신들의 사고와 그 생산물들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자립적인 철학이란 현실에 관한 기술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존재의 매개물을 상실한다. 자립적인 철학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역사발전으로부터 이끌어낸 추상 즉, 가장 일반적인 결론들을 총괄할 것 뿐이다.

 

 

맑스의 유명한 테제인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의 개념이 여기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 명제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은 상호규정적이다’라는 명제로 보충되어야 한다. 구조와 행위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측면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맑스의 ‘실천 철학’을 낡은 것으로 폐기하지 않으면서 인간해방을 위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지점은, 맑스는 경험과 역사를 벗어난 외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보며 인정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말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가?

맑스주의와 근대성이라는 글에서 이진경 선생은 ‘사회적 무의식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맑스의 재해석을 촉구한다. 이 주장을 올곧이 받아들이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테지만 문제의식의 출발이라는 측면은 공유가능하다고 본다. 맑스도 ‘경제학비판’에서 “그렇지만 곤란한 것은 그리스의 예술이나 서사시가 어떤 사회적인 발전과 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대해서 아직 예술적인 즐거움을 주며, 그리고 또 어떤 점에서는 규범으로서의 도달할 수 없는 규범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맑스의 혁명적 사고인 실천철학이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인간해방을 지향한다는 대전제 아래서 맑스의 사유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지적한 전통철학의 오류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흔히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이후 맑스를 ‘죽은 개’ 취급하는 것은 맑스를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천철학이 그 역동적 해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존재’들이 ‘실천’을 유기적으로 끊임없이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고자 할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다시 외부라는 개념으로 돌아와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현대철학의 가장 큰 위기를 초래하게 만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난제를 철학에 제기했다. 그리고 이 난제는 맑스철학을 재구성하는데 무척이나 큰 어려움을 주고있다. 하지만 이론적 완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의 모순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최근들어 이러한 ‘외부’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은 그러한 측면에서 진정한 맑스적 사유의 계승을 위한 노력이라고 보인다. 알튀세나 라캉주의적 맑시즘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 사유노선의 풍부함이 추가적으로 덧붙여진다면 현실의 모호한 모순을 극복하고 해방을 위한 실천적 동력이 지속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맑스가 경계한 기계적 목적론에 대한 구절을 살펴보고 오늘 수업 끝....

 

 

67페이지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의 여러 조건들 역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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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정의의 타자

하버마스와 탈근대의 윤리적 도전

 

 

탈근대의 문제제기

1. 동일성이념에 반대-인간의 자유확대

2. 단순한 질서파괴에 반대-윤리적 무관심에 반대

대안-형이상학 비판을 인도할 규범적 정치적 지향 필요

 

 

탈근대론의 윤리

특수한 것, 이질적인 것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념이 출발점.

그러한 윤리는 비동일자를 적절히 다루어야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충족함

문제점

1. 특수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도덕적 보호의 종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다양한 대답

1. 사회적 평등 실현의 확대

2. 윤리적 민감성의 증대

3. 사람들 사이의 비대칭적 의무

 

호네트는 3번관점이 칸트 전통을 잇는 근대 도덕이론들에 대해 참된 도전을 의미하는 탈근대윤리의 형식이 될수 있다고 봄.

정의의 타자=인간적 배려

 

 

호네트의 이론전개

1. 리요타르의 윤리학은 담론윤리에 포섭됨을 보여주면서 비판

2.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 기대는 스테판 케이 화이트의 연구제시. 하지만 이 관점도 담론윤리틀안에 재생산 가능

3.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저작에 기대어 제시한 윤리적 반성이 대안. 데리다의 반성은 구체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관련해 평등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고 긴장관계에 있는 관점을 보여줌.

 

 

1. 리요타르

칸트를 겨냥한 상쟁과 탈근대적 지식이라는 저작.

형이상학의 종말-보편적 이성의 종말=마르크스주의의 거대서사 종말

이성의 우위는 역사철학이 이성에 해방적힘을 부여한다는 상황에 이성이 기생함으로 타당성 확보

 

언어이론을 통한 비판

모든 담론은 독자적 증명논리를 가지는데 그것은 서로간에 불의를 행사하고 있음.

언어체계안에 인간주체 재도입

예: 한 말놀이가 다른 말놀이로 번역되지 않음으로 생기는 불의

1. 노동자의 언어가 경제적 효율성의 언어에 종속

2. 나치 수용소 생존자가 형식법 담론안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음.

 

리요타르 도덕철학의 핵심

특정종류의 담론이 우위를 보이는 상황을 극복하자

1. 무시와 소외를 겪는 말놀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고발적 윤리학.-결실맺기 어려움

2. 소외된 말놀이의 사회적 의사소통을 개방하자

 

1번은 아도르노식의 자기포기적 한계 때문에 피해야 하는 관점

2번은 하버마스의 담론윤리에 포함되어 버림.

 

 

하버마스의 윤리학

칸트의 절차주의적 도덕윤리의 계승(정언명법은 고립된 당사자 상정)+인간의 언어적 상호주관성 고려

행위주체가 요구하는 실천적 규범의 보편타당성 여부는 행위주체들간의 공론장에서의 절차적 소통을 통해 확보됨-평등한 의사소통기회의 확보가 전제

 

리요타르의 논의는 억압된 말놀이의 해방이 가능하기 위해 절차적 규범이라는 담론윤리에 포섭됨을 확인할 수 있음.

 

 

 

민감한 도덕적 감수성에 대한 고찰

 

탈근대윤리학 정초를 위해 화이트는 타자의 고유성에 대한 무시를 문제삼는다. 그의 반성의 출발점은 칸트전통의 도덕적 보편주의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

근대의 윤리적 사유는 실천적 결과가 없는 행위는 도덕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있음.

비판-칸트는 실상 행위의 도덕적 질을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의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에 대한 책임개념으로 논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

 

화이트의 논의는 근대철학의 사태를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

화이트 사상의 논거는 아도르노, 니체, 하이데거에서 발견

근대 도덕이론은 행위에 고정됨으로써 잠재적으로 타자의 고유성을 추방한다.

하이데거-초연한 내맡김 Gelassenheit

아도르노-모방적 반응 mimetische Reaktion

화이트에 의하면 두 개념 모두 행위를 억제하고 대립자의 고유성에 주의력을 향상시키는 태도를 가르킴

타자와 그러한 태도를 취함으로 타자를 도덕적 의무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인격이 지닌 모든 차이를 고려하면서 타자를 인식하게 됨.

개별적 특수성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화이트가 제시하는 방안-덕론의 가공=배려

 

덕론의 역할

1. 타자에 대한 민감성의 증대

2. 평등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으로서의 민감성

로티와 유사한 발상. 로티는 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규범적 개선의 제도화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불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가능-미학적 감수성의 찬양

로티가 예술가의 감수성만을 신뢰한 반면 화이트는 그런 능력을 개별주체의 인륜적 능력으로 뿌리내리고 싶어함.

하지만 이러한 화이트의 윤리학은 칸트의 상호주관성 도덕이론과 보완관계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상호주관적 논증의 주고받기와 아주 유사

하버마스와 화이트는 모두 개별 개인의 고유성을 규범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기회는 단지 우리가 행위의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직접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도덕적 판단을 내릴경우에만 가능함.

 

즉 화이트는 새로운 도덕원칙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평등의 이념을 민감성을 가지고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

이러한 윤리학은 덕이라는 관점이 하나의 행동방식으로 규범적으로 높게 평가된다는 점

그렇다면 완전히 중립적이고자 하는 담론윤리와 얼마나 결합이 가능한가하는 문제 발생

이러한 역지사지의 관점은 인지적인 것인가 정서적인 것인가

정서적이라고 한다면 하버마스의 비판이 가해진다. 도덕담론은 우연적 정서적 결속에 의존하고 타당성에 근거한 진리추구라는 기능을 상실함.

 

 

또 다른 쟁점

도덕적 담론이 일정한 행동유형에 의존하는 것은 경험적 방법인가 규범적 방법인가

1.경험적 방법-하버마스

도덕적 논증에 참여하게된 의사소통행위는 역사적 학습과정의결과이다

2.규범적 방법-하버마스 비판=부정합적

그러한 속성은 경험에 의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속성

 

어쨌든 화이트의 윤리학은 하이데거에 기대어 윤리적 민감성의 증대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담론윤리에서는 도덕적 담론에 참여하기 위한 인격적 전제라고 내세울수 있는 의사소통 덕목의 중심요소이다.

 

 

 

데리다의 방법론

리요타르가 사회내의 갈등을 윤리적으로 의식화하려는 것이든, 화이트가 개별적 인격의 개인적 특수성을 강조한 것이든 이 모두는 하버마스가 칸트의 의도를 상호주관성이론적 전제위에 발전시킨 도덕이론의 발상을 못벗어남

왜냐하면 모든 주체가 자신의 개별성을 강제없이 표현할수 있다는 보편적 이념이 전제되어야만 상호적 이해도달의 장애나 타자의 특수성에 대한 정서적 개방을 이야기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평을 데리다는 넘어선다.

 

데리다는 개인적 특수성을 정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대체하려고 하지 않음.

오히려 평등이념에 생산적 대립의 관계를 가지는 관점만이 타자의 차이를 인지하게 해줌.

긴장관계의 필요-엄청난 윤리학적 부담

데리다 윤리학의 전개를 위한 예시

우정의 정치=우정안에서는 대칭적 의무가 없는 비대칭적 책임원칙이 지배

 

우정의 이중적 역할

1. 비대칭적 의무를 수용하라고 호소할수있는 존재

2. 보편적으로 도덕적으로 존중해야할 존재

=긴장관계의 공존

 

하지만 왜 이러한 관계가 도덕적 경험영역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지 드러나지 않음.

데리다는 근대법의 형식으로 설명을 시도함.

근대법이 구체적 경우에 적용되면서 다루는 반성을 주목

정당한 관점을 구현하는 두 가지 책임원칙이 충돌하는 속성을 우정의 정치와 공유한다고 봄

 

 

데리다의 논증

1. 근대법의 규범적 출발점-법적 주체의 자유를 행사하기위해 평등을 보장한다는 이념에 따라 이해갈등을 규제해야함

문제-매 경우 무엇이 어떤 관점에서 평등해야 하고 또 무엇이 불평등해야 하는지 해명요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해석상의 문제 등장=법적용은 개방적, 해석학적, 절차적 성격

 

2. 데리다는 법적용의 실천이 지향하는 것은 평등원칙이 아니라 구체적 타자의 무한성에 대한 정의의 이념이라고 본다.

 

우정과의 유사점은 정의는 무한하고 계산할 수 없고 모든 규칙에 반항적이고 대칭에 대해 낯설고 이질적이며 독특하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의 적용은 비교할 수 있고 명문화되어 있고 계산할 수 있고, 정리되어 쓰여진 부호화된 조항들의 체계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별적 타자성의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정의 비대칭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근대의 형식적 권리의 체계를 문제삼는 사회적 수준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사랑의 인정유형에 해당하는가?

여기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유를 빌려온다.

 

레비나스는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 존재영역에 앞서 실존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존재론과 윤리학의 관계를 거꾸로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레비나스 사유의 단계

1. 타자의 얼굴을 통해 무제약적 배려를 경험-무한성에 대한 세계내적 경험

2. 중립적 관찰자의 관점-수많은 배려의무들 사이에서 어떻게 공정하게 처신할지의 판단의 심급이 필요=보편화된 제3자=칸트적 정의와 유사

평등과 배려의 관계에서 상위의 심급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긴장관계를 경험한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법과 자비라는 두 개의 긴장관계로 본 관점을 평등과 배려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여기서 차이는 레비나스는 법과 자비의 지속적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데리다는 평등과 비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도덕적 지향의 원천이라고 본다.

데리다는 두 개의 도덕적 관점이 폭력적이고 해소될 수 없으며, 그러나 또한 동시에 생산적이기도 한 갈등관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결론

하버마스 역시도 평등과 배려라는 관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길리건의 비판에 의해서

길리건은 칸트의 담론윤리가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의무를 무시한다고 보았다.

절차적으로 타당한 실천적 담론의 대칭성은 배려를 배후로 밀려나게 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도움주기나 이웃사랑이나 자발적 원조와 같은 도덕원칙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와 연대라는 논문에서 연대라는 관점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다. 하버마스가 정의의 타자라고 규정한 이 원칙은 다른 인간의 실존적 운명에 대해 정서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관심이라는 특징을 배려와 공유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개별적 관심이 모든 인간존재에 똑같이, 다시 말해 어떤 종류의 특권이나 비대칭성도 없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배려와 구별된다. 즉 연대는 정의의 또다른 측면인데 왜냐면 연대관계에서 모든 주체는 평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의사소통적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서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는 그것이 형성되는 동기나 경험이 불명료하다. 그러한 연대의식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치공동체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연대를, 하나의 공동체가 생길 때 어떤식으로든 따라다니는 특수주의의 요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평등과 달리 연대는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 추상적-유토피아적인 것인데 그것은 공동체 성원들이 윤리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목표를 위해 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또한 특수한 부담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추상성 때문에 연대는 일방적 배려와 도움주기의 형식으로 언제나 우리의 사회를 초월하는 요소를 형성하고 있는 배려를 대체하는 보편적 이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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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타자-사회적 병리현상 정리-

호네트 정의의 타자

 

논문 1-사회적 병리현상[사회철학의 전통과 현상황]

 

사회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역할이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에서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요구와 과제를 밝히면서 이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인접학문분야와의 연관성을 명확하게 할 것임.

1. 사회철학의 과제를 사회적 병리로 판단하는 사유전통의 윤곽을 밝힘.

출발점은 문명비판을 수행한 장 자크 루소.

2. 이러한 전통이 풍부해진 것은 경험적 연구를 주도하는 사회학의 등장.

사회학 이후 사회철학의 구상이 파시즘과스탈린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탐구할 정도로 거대한 구상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논의

3. 결론적으로 역사적 고찰의 성과를 통해 사회철학의 이론적 요구와 특수한 문제가 무엇인지 대략의 윤곽을 그려냄

사회철학은 사회적 삶의 성공적 형태에 대한 척도를 논의하는 반성의 차원으로 이해됨.

 

 

1. 루소에서 니체로 - 사회철학적 문제제기의 등장

루소는 홉스가 관심을 가졌던 시민사회의 존속 조건보다는 시민사회가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원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들이 확장되면서 등장한 사기, 기만, 등의 행위에 기반한 생활방식 전체가 과연 인간이 좋은 성공적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제반조건을 포함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

루소의 사회철학의 탐구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자기실현을 강요하는 사회적 제약요소.

 

루소는 초기에 개인적 자유와 공적 덕의 상태에 따라 사회적 삶의 윤리적 수준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비판의 준거틀로 작동할 이상사회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루소는 인간이 자족성에 따라 살았던 선사시대를 이상사회로 바라보는 듯 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불평등의 조건의 원인뿐 아니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생활방식 전체에 대한 비판까지 확장해서 탐구를 한다.

루소는 비판적 진단의 척도로 활용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두 가지 속성을 끌어낸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기보존의 충동과 동점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정심이 있는 인간은 자기보존이라는 재생산적 필요기능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덕적 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즉 루소의 동정심은 이전 폴리스의 인륜적 삶이 수행했던 역할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공적인 덕은 자연적 사태가되고 만다. 즉 루소는 시민사회의 병리를 진단하며 자신 그대로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루소가 말하는 자신 그대로의 의미는 자연상태에서의 극단적 고립상태이다. 즉 인간은 상호작용없이 독립된 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이 상태야말로 루소가 문명비판을 수행하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1. 루소는 자연적 생활방식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떤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지 묘사한다.

2. 이 이탈이야말로 인간의 자기소외의 과정이다.

 

루소에 의하면 욕구의 확실성에 따른 삶이라는 자연적 존재방식이 붕괴하면서 인간은 규율된 상호관계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그의 행위방향을 외부로 이전케 하는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외부로 이전된 삶의 구조에 의해서 자기표현의 불안도 생기고 동정심과 같은 근원적 덕성도 약해진 것이다.

 

루소를 근대 사회철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수행한 사회진단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 방식과 이에 대한 대답의 방법적 형태이다. 루소는 당시의 삶을 인간의 근원적 형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소외라는 철학적 이념을 창조했다.

루소의 방법론의 의의는 이제 사회적 삶의 형식을 더 이상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만 탐구하지 않고 사회적 삶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부과한 구조적 제약에 대해서도 탐구해야 할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루소가 자유의 상실과 덕성의 붕괴로 왜곡과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 분리의 결과라고 본데 비해 헤겔은 결코 주관적 자유의 상실이 그 원인이 아니었다.

헤겔은 루소와 정반대로 개인적 특수주의가 무절제하게 강화됨에 따른 파괴적 결과가 사회병리의 원인이었다. 헤겔이 진단한 사회병리는 사회적 개별화, 정치적 무관심, 경제적 빈곤화등이었다.

헤겔에게 있어 핵심문제는 시민들이 단지 법적 규율이라는 협소한 결합을 통해서만 서로 관계하는 사회적 영역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로서 헤겔

헤겔은 인륜적 총체성이 형성된 사회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적 사회를 이상향으로 본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획득되고 교환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인륜성은 파괴된다. 즉 시민사회의 등장은 역사적 분열의 결과인 것이다. 즉 이상적인 보편적 사회(개인적 삶과 공적 덕성이 서로 교차되는, 보편속에서 자신을 구성적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회)는 시민의 자유증가와 더불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루소와 헤겔의 차이

이 둘은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을 다르게 본다.

루소에게는 가능한 극단적 자족상태가 성공적 삶의 조건이라면 헤겔에게는 공동선에 기초한 인간 상호간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사회적 병리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에 대립되는 사회적 발전과정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사회진단은 노동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사회적 조건을 자본주의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소외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이후 정치경제학에 심취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진행법칙속의 구조적 모순이 입증될 때만 적합하게 비판될 수 있다는 통찰이 성장하면서 과학적 모델에 경도된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적 소외의 논의가 인간의 속성에 대한 사변적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신념을 갖게되면서 자신의 철학적 목표를 과학적 프로그램으로 전환한다.

맑스는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소외를 과학으로 전화했던 것처럼, 물화를 좋은 삶에 대한 장애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기실현구조, 즉 인간의 욕구본성에 대한 실체적 가정에 대한 증명도 포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맑스의 새로운 비판모델이 인간의 자기실현 구조에서 전제한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이나 의도가 아니라 그것의 필수적 실현조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단일한 그리고 포괄적 위기의 문화적 증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관점에 도달한 것은 니체였다.

니체는 당시의 사회를 전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허무주의는 완전무결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병리현상의 증상적 표출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사회적 현상에 관심없음. 니체는 장애를 예증하기 위해 사회적 현상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기만할 뿐. 이 장애의 기원이나 쟁점은 단지 인간의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

이러한 관점전환을 통해 니체는 역사주의나 관념론과 단절할 수 있는 역사적 고찰방식을 얻어냈다. 왜냐면 니체는 과거에 대한 문화적 해석체계에서 바로 현재의 병리적 현상에 토대를 마련한 지적 내용들을 끄집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만든 문화사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프로그램은 푸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가 보여주듯이 오늘날에도 사회철학적 시대진단을 위한 방법적 모델로 남아있다.

 

니체의 시도에서 처음부터 불분명한 것은 근대 문화비판의 정당한 평가척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 좋은 삶의 조건

 

루소-고립적 자기관계

헤겔-공동체에 살아있는 인륜성

마르크스-노동을 통한 대상화

니체-삶을 긍정하는 가치지평이 실행력있게 존재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특별한 재능덕에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특권적 능력을 가진 협소한 범위의 개인들

니체가 밝힌 것은 좋은 삶의 윤리적 이상은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루소, 헤겔, 맑스에게도 적용된다. 즉, 윤리적 보편주의의 배후에는 특수한 세계관을 선호하는 가치관이 숨겨져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2. 인간학과 역사철학 사이에서-사회학 등장이후의 사회철학

 

사회학자들의 문제의식-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사회적 가치구조는 지금까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목적과 관련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윤리적 구성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과제-윤리적 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

이것은 헤겔의 문제의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점은 내용적 규정에서 발생한다. 즉 현재의 윤리적 위기를 출현케 한 사회적 과정은 더 이상 원자화와 분열의 증대가 아니라 도덕적 방향 상실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1세대 사회학의 영향지점

니체-객관적 가치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목적 역시 붕괴되고 말았는가?

마르크스-새로운 경제양식이 인격적 유대 대신에 목적합리적 사고에 따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가지 모델은 이후 혼융되면서 사회학적 시대진단을 지배했던 테제에 도달하기 위해 작은 사고의 진전이 필요하다. - 윤리적 방향상실. 즉 허무주의의 제도적 기원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관철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짐멜-인간관계의 물화지적

퇴니스-사회적 공동체 유대의 해체에 주목

베버-세계의 근본적 탈주술화에 관심

뒤르켐-유기적 연대 형태의 형성 탐구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사회화 과정은 새로운 경제질서의 정착이 사회적 생활세계의 도덕적 공동화를 초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회학자들의 시대규정이 갖는 이론적 문제는 헤겔이나 맑스보다 훨씬 분명한 문제지점이었다.

1. 사회철학이 사회학과 합체되면서 경험적 검증에 대한 압력이 등장하자마자 사회철학의 역사철학과의 연관성이 조명받게되었다. 그러나 목적론적 역사철학에서 소외진단이 갖는 가치평가적 의미는 역사철학의 서술적 의미 요소 뒤에서 은페된다.

그래서 여전히 병리현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평가척도의 정당화를 논증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점에서 방법론적 장애에 부딪힌 사회학은 니체 문화진단의 연장선상에서 사회가 윤리적 임의성과 같은 허무주의에 놓이게 되었다고 가정하게 되는데, 그렇게 될 경우 사회학은 자신의 가치평가 척도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화 가능성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철학은 자신의 근원적 탐구영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회학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의 마련은 역시 철학적 틀 속에서 마련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입장은 크게 두가지이다.

1. 철학적 인간학-경험적 연구를 통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기되었던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

2. 역사철학적 사고유형에 대한 새로운 관심증대

 

대표적으로 루카치와 플래스너

헬무트 플래스너-공동체의 경계

사회적 병리현상은 자본주의적 산업화과정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동의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촉발된 구조변동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조건과 화해불가능하다. 즉 공동체의 상호작용 유형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인간의 강제없는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인간학적 전제는 훼손된다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자본주의가 만든 근대의 병리가 공동체 형성의 사회적 기능을 파괴한다. 플래스너를 비판하면서 루카치는 맑스와 베버를 조합해 자본주의사회에서 물화는 직접적 현실이며 이는 이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 조건을 남김없이 파괴한다는 것이다.

 

루카치나 플래스너는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규정 척도를 설정함에 있어 모든 규범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윤리적 상대주의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플래스너는 경험과학연구를 통해 인간의 탈중심적 입장을 자신의 근거로 세우려 했고 루카치는 역사유물론을 객관적 필연성에 대한 예언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후의 사회학적 연구도 인간학과 역사철학이라는 두 가지 준거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플래스너와 같은 단독적 사상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의 자기실현의 장애로서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의 일면적 합리화 압력을 분석의 사회적 준거점으로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후 등장한 파시즘도 그 배경을 형성한 원천은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연구라 할 지라도 사회철학적 방법론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계몽의 변증법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연구 역시 인간학과 역사철학의 근거 중의 하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된 전체주의의 압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압박속에서 진보에 대한 역사철학적 희망은 사라져갔고 문화비판적 회의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회철학의 분석과제가 전체주의의 형성을 전권적 주제로 만든 변화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전체주의적 상황의 원인을 찾기 위한 근거는 문명화 과정 전체의 잘못된 발전결과로 이해될 때만 적절히 해명될 수 있었다. 루소가 잘못된 문명발전의 시원을 인간간의 교류에서 찾았다면 아도르노는 노동에서 찾았다. 즉 마르크스의 인간노동의 긍정성을 전면부정하면서 노동은 단지 도구적 지배에 기여하는 요소로만 파악된다. 즉 주체는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형성하며, 역으로 노동활동을 통해 자연세계는 단지 인간의 목적달성을 위한 조작영역으로 축소된다. 최초의 도구적 지배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장할 알게 되었지만, 이제 이러한 행위는 단계적으로 자신의 본능적 삶을 훈육하고, 자신의 감각적 능력을 빈곤화시키고, 사회적 지배관계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루소에게서 타락과정의 끝이 위신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통제되지 않은 투쟁이라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서는 이는 결국 현대사회의 총체적 폭력지배로 흐른다.

 

 

도구적 이성의 발전논리에 대한 두 가지 단점

1. 기술적 합리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모든 작용요소들이 전체주의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공백으로 남는다.

2. 전체주의적 지배는 인류의 초기 역사로까지 소급되는 합리화과정의 정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지배의 문명적 특수위치는 근본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문명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병리현상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에 의하자면 법적 자유의 확장이나, 정치적 결정의 민주화, 개인적 행위영역의 개방과 같은 진보들은 더 이상 전면에 등장할 수 없다.

 

비판의 준거를 헤겔과 같이 역사적 이상론에서 찾는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아도르노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체주의적 폭력지배의 등장이 바로 근대사회 내부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던 사회적 병리의 결과로 규정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근거마련을 위해 경험적 증거들을 제시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학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강화하는 대신 항상 고대 폴리스에 대한 이상적 서술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렌트의 역사철학적 입장을 제거하면 그녀의 사회철학적 진단을 뒷받침하는 인간학적 주장이 드러난다. 즉 인간주체는 그 본성상 공적 영역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인간주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실존적 문제들과 위험성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안정성과 자기의식의 척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자유와 공적 실천은 인간에게 서로 얽혀있는 것이므로 정치적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영역의 존재만이 인간에게 성공적 삶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이런 테제로부터 도출된 아렌트의 사회적 이상은 이제 전체주의라는 사회적 지배체제를 사회적 병리로 규정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우선 근대 산업사회에세 세계소외Weltentfremdung라는 일반적 경향이 지배하고 있음이 주장되고, 두 번째 단계로 이러한 소외의 특수한 형성과 완성이 전체주의적 지배체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근대적 세계소외의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회적 행동방식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은 독일에서 비타 악티바Vita activa 라는 제목을 단 연구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테제에 의하면 발전하는 산업화조건아래서 생산과 노동의 기술적 활동이 강한 사회지배력을 획득하면서 공적 협의나 의사소통과 같이 자유를 신장하는 실천들이 배제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보편적 소외.

그녀의 저작인 전체주의 연구에서 나오듯이 개인들은 공적 공간이 쇠약해지면서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부여 활동에서 단절되고, 홀로 고립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면서 단지 전체주의적 운동 속에서만 자기 이익의 적절한 형식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조직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위기감과 책임감을 형성하기 위해 모든 공격성을 외부로 향햐게 하고 외부의 적에 집중하게 만드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통해서만 안정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숙명적이고 치명적인 순환과정이 등장한다. 즉 전체주의 운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점차적으로 대량학살 행위로 변형시킴으로써만 자신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분석은 이성비판 요구에 있어 약소하고 심리학적 차별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대중매체의 영향 방식과 관련해서는 소박성마저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등장을 사회적 병리현상의 맥락속에서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아렌트의 주장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설명력을 갖는다.

즉 기술적 활동의 확장을 통해 자유를 보장하는 행위영역이 제한된다는 것이나, 이를 통해 동시에 정치적 공공성의 붕괴가 동반된다는 것이나,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계가 아렌트에게서는 발견되며 이는 실제 역사과정에 대한 큰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3. 사회적 병리현상 진단에 대한 근거설정 방식들-사회철학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60-70년대 아렌트에 영향받아 하버마스, 테일러, 카스토리아디스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철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어분석철학의 발전으로 인해 철학적 진술의 근거지움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을 통해 사회철학내에서도 방법론적 정당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 종합을 통해 오늘날 사회철학의 근거설정을 둘러싼 문제가 어디 있는지가 가늠될 필요가 있었다.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되는 정치철학의 전통과 단절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그 구성원의 좋은 삶과 정의로운 삶을 어떻게 동시에 보장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편적 동의가 가능한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겠는가가 홉스가 다룬 유일한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를 제한함으로써 칸트는 이후 정치철학에서 도덕철학의 정립을 위해 도덕과 윤리를 분리한다. 즉 사회적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만이 철학에 의해 대답될 수 있으며, 좋은 삶의 조건에 관한 문제들은 거의 일반적 규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학의 틀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는 윤리적 문제가 사회적 공동생활에서 간단히 제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루소는 사회적 생활조직을 과연 그것이 인간의 성공적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또 그조건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했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상태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 비판적 지향은 그 이전에 발전한 형식적 윤리관점과 연관되어 있듯이 이제 사회철학은 시작부터 직간접적으로 어떤 개념과 결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자기실현조건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가정들이 존재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적 삶의 병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상성의 표상이 필요.

다양한 해석들이 행하고 있는 이상적 상태의 특성이 아니라 그 목적을 준거틀로 끌어들이면 일종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비판개념은 간단히 말해 성공적 삶을 가능케 한다는 특징을 지닌 사회적 조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실현의 가능조건에 적합한 사회적 정상성에 대한 윤리적 표상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이러한 윤리적 배경개념이 형식적인 것은 자기실현의 목적자체가 아니라 그 사회적 전제들만이 규범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정상적 사회적 관계의 척도를 획득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의 준거틀은 개인적 주체의 사회생활 조건이다. 공동체주의이든 개인주의이든 사회철학의 비판적 척도가 되는 좋음에 대한 형식적 개념은 개인의 행복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회적 삶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각 사회철학적 시도들이 겨냥하는 이상적 상태는 개인주의적이거나 공동체주의 둘 중에 하나로 귀결된다. 나머지 차이는 각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구체적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이다. 사회적 삶에서 개인의 성공적 삶의 조건이 공동체적 인륜성인지, 개인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공공성인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지,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관계인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회철학이 정상적 사회적 삶에 대한 보편적 척도에 의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학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철학의 존속여부는 형식적 윤리학의 정당화 가능성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점에서 사회철학의 미래는 과연 인간의 삶의 필수적 조건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사회철학이 필요로 하는 윤리적 판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안은 윤리를 절차화하는 시도이다. 하버마스는 윤리적 문제를 실천적 담론의 과제로 보려는 사고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나 가능했던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즉 정상적 혹은 이상적으로 간주되어야 할 사회적 삶은 사회구성원이 민주적으로 조직된 의사형성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발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안의 단점은 사회철학의 해석권한이 남김없이 해당구성원들에게 넘겨지고 만다는 것이다.-사회철학이 할일이 엄서..

 

두 번째 대안, 이러한 사회철학의 무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사회이론 자체가 비판적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되며, 이 경계를 넘어서 체제의 명령이 사회적 생활세계로 침투할 때 이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정상과 병리의 구별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는 인간의 담론행위를 사회적 재생산의 필수 전제로 증명하려고 하는 보편화용론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약한 의미의 그리고 단지 형식적 의미의 인간학에 기원한다.

 

세 번째 대안, 사회철학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푸코와 일치한다. 사회철학이 사회적 장애를 진단하고 설명할 수 있는 평가척도는 역사적으로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척도는 단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자아의 근원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적으로 상대화된 근거를 윤리학의 토대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문화적 자기이해가 기원하는 윤리적 가치를 해석학적으로 되돌아 보는 것은 어떤 사회적 발전과정이 병리로 이해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은 장차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와 이에 상응하는 삶의 이상에 근거하여 사회적 장애를 논의할 수 있는 반성적 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철학의 성공여부는 약하고 형식적인 의미의 인간학적 요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당화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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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세계철학사 참고

스피노자의 실체개념-그 자체가 원인이 되는 일자이자 무한자.

하지만 모든 개별자들은 그 안에 신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

능산적 자연=신, 소산적 자연=개별자

신과 개별자를 매개해주는 중간항은 만물

실체가 드러나는 양상이 바로 양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적 실체를 비판하며 둘은 신의 사유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을 서로 다른면에서 바라봄으로 발생하는 차이라고 주장

 

 

라이프니츠의 실체

데카르트의 물체적이고 연장적인 실체 비판. 데카르트는 모든 자연현상을 운동과 연장의 개념으로 설명하며 운동보존의 법칙을 제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며 운동을 연장으로만 파악하면 운동은 물체들의 위치이동에 불과해진다고 파악. 그럴 경우 운동의 일반의 객관적 확인은 불가능하며 상대적 관찰에 불과해질것이다.

운동은 힘의개념과 분리될 수 없음. 운동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힘보존 즉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주장

라이프니츠는 연장적 실체에 대한 데카르트의견해를 연속성과 분할가능성이란 관점에서도 비판. 물리학적 물질은 기하학적 공간과 다르다. 수학적의미의 연속은 관념적 표상일 뿐이며 실재하는 부분들로 이뤄지지 않음.-현실은 실재하는 부분들로 이뤄지며 분할되지 않음.고대원자론적 사고.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옹호하면서도 넘어서려함.

라이프니츠는 기계론적 원자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 즉 형상과 영혼을 부여하는 힘의 개념과 결부시키며 이로부터 특유한 개념인 모나드를 이끌어냄.

 

예정조화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를 상정했으나 인간에게서 이 양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밝히지 못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실체는 무한히 많은 모나드다. 그런데 개별적 표상은 각자의 모나드가 발생시킴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명되는가?

모나드들은 서로 조화될수 없는 속성이어서 다양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현실이 되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물음은 모나드를 발생시킨 근본모나드, 즉 신성으로부터만 해명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체계

 

초월적 요소론/초월적 감성학

                            초월적 논리학/초월적 분석학

                                                      초월적 변증학

초월적 방법론

 

 

모든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시간적으로 경험은 모든 인식에 선행한다.

하지만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어떤 복합체, 즉 외부에서 주어진 인상과 우리 자신이 덧붙인 무엇에 의해 합성된 복합체일 수 있다. 이 두요소는 분리되어야 한다.

즉 선험적a priori인 것과 후험적a posteriori인 것은 분리되는 것이다.

그 구별을 가능케 하는 것이 필연성과 보편성이다.

이것은 경험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선험적 근원이 있어야 한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별

분석판단은 주어가 술어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판단은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이 명제는 종합명제이다.

하지만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존재

1. 수학적 판단은 종합판단. 7+5=12

2. 자연과학적 명제

3. 형이상학적 명제

 

문제.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에 의하면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 불린다. 이 개념은 경험을 넘어서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초월적 감성학

감성적 인식능력에 관한 초월적 연구

감성이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작용을 가해오는 무엇에 의해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오직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직관이란 개별 대상들에 관한 직접적 표상이다.

비판적 탐구에 의하면 개별표상의 생성에는 이미 두가지가 관여해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 즉 감관은 단지 감각을 제공할 뿐이며 우리안에는 감각을 정리하는 무엇인가 있다. 감각을 정리하는 특정한 방식은 공간적 시간적 통일의 방식이다.

 

 

공간

우리가 경험적인 것을 배제한다고 해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물체의 연장성이다.

장미에서 후각, 시각을 배제한다고 해도 연장은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표상은 선험적 감성 형식이다.

 

 

시간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감관의 순수형식이다. 즉 우리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에 대한 직관의 순수형식이다.

우리 내부의 감정상태는 시간상으로 진행된다. 시간은 이러한 마음 상태중의 어떤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조건이다

시간과 공간이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에서부터 수학이 가능해진다

기하학은 공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산술학은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렇게 해서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대답된다.

 

 

초월적 분석학

문제

인식은 어떻게 생성하는가?

로크는 감성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은 지성에도 없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그 말이 맞으나 지성은 예외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대답

우리의 모든 사유, 즉 개념은 감각에 의해 획득된 직관을 통해 대상들에 결부될 수 있다.

따라서 지성은 직관적 재료를 제공하는 감성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성도 마찬가지로 지성에 의존한다.

감성은 우리에게 직관, 즉 감성의 선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정리된 감각을 제공한다.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고로 인식의 작용을 위해서는 감성과 지성이 서로 협력한다.

 

지성의 두 번째 활동, 즉 결합활동은 지성이 감성으로부터 받은 원료를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또 개념들을 결합하여 판단을 이루어낸다.

지성의 이러한 활동은 논리학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이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개념들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였다면 칸트의 논리학의 문제는 우리 지성은 어떻게 개념들에 도달하는가? 즉 특정한 대상과 결부되고 그 대상과 일치하는 개념들을 우리 지성이 어떻게 해서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범주

모든 개념의 형성에는 직관이 제공한 경험적 요소와 지성의 형식부여활동이 결합되어있다.

그렇다면 개념을 탐구할 때 이 두가지를 분리하는 것을 통해 개념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더 나은 방법.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의 발전=개념을 결합시키는 지성활동과 관련해 이미 기본형식을 발견했음.

개념형성=판단

사유에서 통일성을 유지하려면 개념형성의 형식들을 판단형성의 형식들과 일치시켜야 한다.

 

 

 

 

 

 

판단형식의 표

1.판단의 양

-판단의 타당성 범위

2. 판단의 질

=관계의 타당성 여부

3. 판단의 관계

=관계의 종류

4. 판단의 양태

=관계의 타당성 종류

전칭

긍정

정언

미정

특칭

부정

가언

확정

단칭

무한

선언

명증

12가지 형식의 예

1. 전칭판단-모든 인간은 죽는다

2. 특칭판단-어떤 별은 행성이다.

3. 단칭판단-칸트는 철학자이다.

4. 긍정판단-이 장미는 노랗다

5. 부정판단-이 장미는 노랗지 않다.

6. 무한판단-이 장미는 향기가 없다.(향기를 제외한 한에서는 무한히 많은 가능성이 있음)

7. 정언판단-이 삼각형은 하나의 직각을 포함한다.

8. 가언판단-삼각형에서 하나의 각이 직각이면 다른 두 각은 예각이다.

9. 선언판단-삼각형의 각은 직각이거나 예각이거나 둔각이다.

10. 개연판단-오늘은 비가올지도 모른다

11. 실연판단-오늘은 비가 올 것이다.

12. 필연판단-오늘은 반드시 비가온다.

 

이러한 판단형식은 우리 사유의 기본형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판단형식들의 이면에서그에 상응하는 개념들을 찾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개념형성의 기본 형식들을 얻는 셈이다. 개념형성의 이러한 기본형식을 칸트는 범주라고 한다.

 

범주표

1.판단의 양

-판단의 타당성 범위

2. 판단의 질

=관계의 타당성 여부

3. 판단의 관계

=관계의 종류

4. 판단의 양태

=관계의 타당성 종류

전칭

전체성

긍정

실재성

정언

실체와

우유성

미정

가능성과

불가능성

특칭

다수성

부정

부정성

가언

원인과

결과

확정

현존성과

비현존성

단칭

단일성

무한

제한성

선언

상호작용

공통성

명증

필연성과

우연성

 

 

대상 개념의 형성과정

1. 감성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감각으로부터 공간과 시간에 의해 직관이 형성

2. 이 직관들을 지성이 열두 범주의 관점에 따라 결합하며 이렇게 해서 경험적 개념이 획득

경험적 개념=직관적 재료를 갖고 형성한 개념

 

 

순수지성개념의 연역

선험적으로 지성에 주어져있는 범주들이 어떻게 경험의 대상들과 결부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이런 선험적 형식들의 도움으로 어떻게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답을 칸트는 순수 지성개념의 초월적 연역에서 도출한다.

인과성의 예

로크는 우리가 두 현상의 인과적 관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에 작용하는 하나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흄: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계기(繼起)현상 뿐이다.

흄이 옳다. 즉 인과율은 지성에서 유래한다. 그럼에도 인과성은 모든 경험에 대해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갖는다. 이런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경험은 감성에 의해 제공된 원료에 지성이 자신의 사유형식들을 각인함으로써 성립된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경험에서 이 형식들과 재차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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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

맑스는 초기작업인 경철수고에서 인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꽤나 모호해보이는 입장들이 많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계급중심적 관점을 확고히 하는듯 하다...

특히 그룬트뤼세와 자본론에서 그러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요즘들어 맑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1. 경철초고의 인간주의적 관점을 주목하는 마르쿠제의 해석

2. 자본론 해석은 그동안 인식론적으로 잘못 읽혀져 왔으며, 이제 인간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알튀세...

3. 베이컨적, 프로메테우스적으로 읽혀온 맑스의 인간우월론적인 생산력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이 맑스를 생태적으로 해석하려는 관점...

 

이러한 문제의식을 종합해보니 맑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현대사회에 걸맞게 새롭게 정리되야할 필요성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먼저 소외된 상태의 극복이란 무엇인가?

정말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극복되면 기계적으로 인간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자기실현이 가능해질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찰이 함께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라캉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하며 상징계진입과 더불어 구조에 의해 형성되므로 영원히 타자의 욕망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자본주의가 극복된다하더라도 물적 토대에 의한 소외는 극복될지언정 진정한 소외의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들뢰즈의 욕망개념을 따른다면 욕망은 생성의 힘이고 서로들간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므로 욕망이야말로 무한한 생성의 힘이고

창조의 원천이 될 것이다.

들뢰즈의 사상은  욕망이 결핍에서 기인한다는 부정성을 극복하긴 했지만 규범적 토대를 마련하진 못한다...

사회적 억압을 철폐하고 홈패인 공간을 통해서 무한대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을 통해 모두의 욕망이 올곧게 실현됨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히틀러의 욕망, 만인에 대한 지배욕구에 대한 통제의 근거를 마련하기 힘들게 된다...

 

일단 여기서 욕망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더 많은 논거와 연구를 필요로하므로 일단 패스한다..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끝장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으니 출발점을

먼저 제한하기로 한다....

 

 

최근들어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간의 대결구조가 눈에 띄게 분명해지고 있다.

즉, 다시말하자면 해방의 동력을 어디서 찾느냐의 문제가 될터인데, 노동안에서의 해방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느냐의 문제 되시겠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지만 후기저작인 자본론에서는 노동의 부정성을 지적한다.

즉 노동을 하지 않을수록 인간의 자기실현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두번째 관점에 의하자면 고용노동의 종식이 향유의 노동으로 변환될 수 있느냐의 문제 되겠다..

 

이러저러한 해석의 문제를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맑스 본연의 노동개념을 좀 더 정확히 봐야한다.

 

맑스는 헤겔의 추상적 노동개념을 극복하면서 유물론적 관점을 제안한다.

헤겔의 노동은 고립자인 정신의 자기전개과정 자체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서 고립자의 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의 사유전개는 논리적일수는 있으나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는 개념인 것이다.

마치 사회계약론자들이 상정하는 자연상태라는 개념이 실제하지 않지만 논리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맑스는 대상과 대상의 관계맺음이야말로 노동의 정체라고 해석한다.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상으로서 대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규정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에 의하면 노동은 다음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자기보존행위

2.자아실현행위

 

여기서 어떤 관점이 맑스의 관점인가로 논쟁하는 것은 맑스에 대한 오독일 수 있다.

두 가지의 노동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실상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이 자아실현행위가 되는 것.

즉 자본주의 하에서 분리된 상태를 재결합시키는 것이야말로 맑스가 생각한 올바른 상태가 아니었을까/

 

다시 노동패러다임과 탈노동패러다임의 대결구도로 돌아와보자.

노동패러다임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주자는 에리히 프롬과 알렉스 캘리니코스등이 있고, 탈노동패러다임의 선두주자는

비루, 앙드레 고르, 안토니오 네그리등이 있다.

 

두 입장 모두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으로 노동시간단축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대안에 동의한다는 것이 그것이 문제해결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다.

 

나는 노동시간단축도 현실에서 필요한 단계이지만 더 나아가서 행위주체의 행위에 대한 통제권 귀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나의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게된다는 점, 나의 노동행위에 대한 결과가 나에게 귀속하지

않고 타자(일례로 자본가)에게 귀속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의 소외는 행위주체의 행위지배권 상실인 것이다.

 

나는 사적소유의 철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말그대로 공동재산주의로 가게 될 경우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다같이 못사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주장한 코뮨주의 1단계와 2단계는 사실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에 의한 분배와 노동성과에 의한 분배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며(필요에 의한 분배), 동시에 노동의 결과에 대한 사회적 기여에 의해서

추가적 분배도 이루어져하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노동을 신성성과 부정성이라는 이분법적 틀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올바른 노동개념을 정립하는데 장애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국민경제학과 칼뱅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의 신성성이라는 관념아래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노동을 부정성이라고만 바라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만을 고집한다면 소외된 노동의 극복은 소외된 문화의 향유라는 새로운 문제를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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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노동개념을 살포시 훔쳐보기

헤겔의 노동개념을 간단히

 

 

 주노변증법에 나타난 노동개념의 해방성

노예의 자기의식이 해방되기 위한 두 가지 계기

①공포속에서 주인에 대한 봉사를 해야되것지....

②노동을 통한 교양Bildung-교양이라는 의미에 헤겔노동의 비밀이 숨어있어염...

⑴노예는 대상의 자립성 즉, 노예자신의 부정이라는 상태에 직면하고 그 이후에 대상 을 자신의 의도대로 변형, 가공하는 것을 익혀나간다.

⑵노예의식의 자립성 획득=노예의 노동은 대상세계의 가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자신의 의식을 풍부히 해서 자기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결국 자연으로부터 소외(공포)를 지양하고 또한 노동하는 자로서의 노예가 간직한 사유된 내면적 자아(자유)를 실현시킴으로서 노동하는 자를 미개한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강제 노동 속에서 노예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헤겔노동개념의 긍정적 요소를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맑스는 헤겔을 조낸 깐다....

비록 헤겔이 고대의 노동개념을 벗어나서 노동의 긍정성을 포착한 것은 고무될만한 점이지만 버뜨...but....여전히 헤겔은 추상적 정신노동을 벗어나지 못했고, 노동을 부의 원천으로 파악했으나 여전히 비참한 노동의 실상을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데 그친 국민경제학적 관점을 견지한다. 하지만 현실은 실상 그렇지 않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헤겔은 주인이 강제하는 억압적 노동을 자기의식의 획득을 위한 해방의 외적 계기로만 위치지우고 계급적 적대상황에서 노동의 지속적 소외가 사실은 해방의 계기가 아니라 노동소외의 심화과정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만 것이다.

 

 법철학에서 헤겔 노동개념 쪼아보기

헤겔은 한 때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며 조낸 열광한다..보편적 자기의식의 고유한 통일로의 복귀라는둥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흥분하다가 시민사회의 모순을 직감하면서 역시 보수적 입장으로 회귀한다. 물론 자신의 체계상으로도 시민사회는 인정될 수 없기도 하다. 결국 시민사회는 관념론 체계에서 국가 아래의 단계로 격하되고 만다. 즉, 특수자의 보편자로의 고양이라는 자신의 체계완성을 위해 시민사회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바라본 시민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①천민의 증대...원인은 천민의 게으름과 낭비란다....뷁....

②사회적 분업에 의한 보편적 재산의 분배방식인데...여기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자질이나 자본의 소유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해서 분배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천민의 발생은 필연적이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해외무역이나 식민지 정책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결국 여기서도 국가로 귀속되는 것이다....

그럼 해외무역해서 손해보는 나라는?? 식민지배 당하는 나라는?? 어쩔.....

 

헤겔을 까보자....

비판

1-주노변증법에 의하면 해방의 계기는 노예, 즉 천민에게 내재한대매??

2-정신현상학에서도 인간의 구체적 노동이 절대지라는 리바이어던에게 삼켜지더니 법철학에서도 역시 노동을 허구적 관념으로 보는 헤겔이 발견된다....

 

아부지 잘 계시냐??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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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뭐냐.....동이 아닌게 노동이냐??

어줍잖은 노동개념 정리 개시탄

 

 

고대 노예제 사회의 노동개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자면

포이에시스=자기외부에 목적을 두는 대타적인 노예의 제작행위-비천한 행위로 취급

프락시스=자기자체내에 목적을 두는 자기목적적인 주인의 인간적 행위(정치, 전쟁, 철학)

 

 

근대 부르워주아 경제학

헤겔에 의하자면

노동은 정신의 자기실현의 계기, 인간의 자기 산출행위- 적극적, 긍정적 노동개념 포착

 

 

맑수의 노동개념

인간이 생존을 위해 욕구에 의해서 자연대상을 가공해 내는 감각적 물질적 생산행위

 

-감각적sinlich, 대상적gegenstaendlich 인간이 감각적 대상적 타존재를 목적의식으로 가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인간 자신의 본질적 능력들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sinlich, gegenstaendlich 는 비대상적ungegenstaendlich와 대비되는 용어. 즉,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자연대상의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미루어 짐작만 할 뿐....ㅡ,.ㅡ)

 

 

♂맑스의 소외된 노동

유적존재의 자유로운 유적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오히려 유적존재인 인간자신에게 부자연스럽고 강제된 활동으로, 자신을 대상에 실현시킴으로서 또한 동시에 자기 자신 스스로를 새롭게 산출해나가는 창조적 활동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자신을 대상속에 대상화Vergegenstand 할수록 인간자신에게는 탈대상화Entgegenstaendlichung로, 탈현실화Entwiklichung로 나타나는 이러한 노동의 양상을 소외된 노동Entfremde Arbeit, 혹은 외화된 노동entäuserte Arbeit이라고 명명한다.-MEW40권 경철수고515P)

CF. 외화된 노동의 u뒤에 있는 s는 원래 에스체트......뷁.....못찾것어서.....걍....

 

 

 

헤겔의 노동개념을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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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알까 겁나는 하다만 스피노자 정리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존재론: 실체, 속성, 양태

통념에 의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데카르트가 코기토의 확실성에서 모든 학문적 진리의 토대를 발견한데 비해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절대자에 대한 지적직관으로부터 출발하는 독단적인 절대자의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개인의 자유나 주체성의 여지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수동적 조건과 가상적 인식에서 비롯된 자유의지의 환상 및 목적론적 편견과 이와 긴밀히 결부된 유태교-기독교의 창조론 신학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인식과 존재역량의 원천이자 해방과 지복의 원천인 신에 도달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목표이다.

스피노자 존재론의 최대쟁점은 유일한 실체만이 실존함을 보이려는 데, 즉 다시 말해 어떻게 ‘자신의 유(類) 안에서 무한한’ 속성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을 구성할 수 있는가를 보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때 스피노자의 신은 기독교적 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연화된 신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신 존재 증명은 전통적 의미의 신 부재 증명이기도 하다.

 

개념의 쇄신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먼저 실체와 속성, 양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간단하게 스피노자의 실체는 신이기도 하며 자연이기도 하다.

실체는 무언가를 무한히 산출하는 능산적 자연인 동시에 그렇게 산출된 소산적 자연이기도 하다. 능산적 자연으로서 실체는 순수한 힘, 역량, 에너지이다.

 

속성은 이 순수한 힘이 표현되고 전개되는 차원, 혹은 그것이 파악되는 관점에 해당한다.

 

양태는 이 속성의 차원에서 산출되는 개별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 있어 우리가 마주치는 특수한 사물은 모두 양태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성은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드러난다. 그의 철학에서 실체는 자기안에 있고 자기를 통해 인식되는 것, 즉 그 개념이 다른 사물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통해 인식된다는 구절이다. 데카르트 철학을 비롯한 전통 철학에서 실체는 존재론적 자립성은 있지만 개념적 자립성은 지니지 못하므로 항상 어떤 술어나 속성들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개념적 자립성을 자신의 실체개념에 포함시킴으로서 전통철학에서의 실체는 실체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스피노자 실체개념의 특성

1.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한하다. 유한한 것은 자기안에 있지 않으며 자기를 통해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2.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산출될 수 없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과 공통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유한자를 창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함축한다. 또한 실체가 개념적 자립성을 가짐으로써 초월적이고 파악불가능한 실체라는 관념은 배제된다. 자기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실체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가능성의 원천일 뿐 아니라 인식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실체의 개념적 자립성을 통해 실체 전체는 합리적 인식가능성을 획득한다.

 

실체개념의 변화는 속성 및 양태개념의 변화를 가져온다.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의 특징은 그것이 실체가 소유하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속성은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 즉 다만 지성과 관련해 속성이라 불린다는 점만이 다를 뿐,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실체와 동일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한히 많은 속성들은 각기 유일한 실체의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면서 이 실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동일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는 스피노자 존재론의 핵심적인 쟁점이다.

 

양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전 철학에서 양태는 비본질적이고 우연적 성질이있으나 스피노자에서 유한양태는 개별적인 사물들을 의미한다. 무한양태는 유한양태들의 본질 전체(이는 신의 속성들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직접적 무한양태의 경우로, 연장속성에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 사유속성에는 무한한 지성이 있다. )이거나 유한양태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들(이는 매개적 무한양태의 경우로, 연장에는 우주전체의 모습이 있다.)을 의미한다.

 

신의 구성 또는 역량의 존재론

이러한 개념을 기초로 윤리학 1부에서 스피노자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유일한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함을 보이고자 한다. 유일한 신 존재의 증명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어떻게 그 자체로 무한한 속성들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량(potentia)개념이 핵심 역할을 떠맡는다. 자연 전체의 궁극적인 존재원인과 설명근거를 제시하는 이 논증과정은 전통적인 창조주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인 동시에 실체다원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논증은 2단계로 이루어진다.

1. 실체가 무한함을 증명한다.

2.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이 필연적으로 실존하며, 이 실체는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번 논증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동일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같은 유(類)간의 동일성, 보편성의 획득은 어떻게 설명되는지 몰것으,,,), 그리고 이 실체는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논증의 핵심은 자연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둘 이상의 실체들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체들은 속성의 차이나 변용의 차이로 구분되는데, 그 본성상 변용에 선행하는 실체들은 속성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동일한 속성을 가진 다수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반론= a와 b라는 속성을 갖는 A와, b와c라는 속성을 갖는 B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스피노자의 이 정리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반론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임을 간과한 반론이다.

2번논증에서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산출될 수 없으므로 자기 원인적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 논증은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 이상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속성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실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이제 각자 자신의 유(類)안에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어떻게 동일한,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구성하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논증과정은 간단하고 압축적이지만 그 함의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 논증의 기본전제는 ‘각각의 사물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가질수록 자신에 속하는 더 많은 속성들을 가진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서 실체는 하나 이상의 주요속성을 갖지 못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실재성의 증대와 속성들의 증대를 결부시킴으로서 논의의 방향을 바꾸어놓는다. 즉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이상,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서의 신이 가장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따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무한히 많은 각각의 속성이 동일한 실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모순이 아니며, 가장 자명하다는 점이 증명된다.

그리고 이어서 이 실체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사실은 네 가지 증명을 통해 입증된다.

이 네가지 증명의 핵심은 역량에 의한 논변이다.

두 번째 증명-근거율의 원칙/ 실존과 비실존의 원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모든 것은 근원적으로 실존의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증명에서 역량의 논변이 제시되는데,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은 역량이 없다는 것이고, 역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실재적인 존재,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가장 많은 역량을 지닌 존재자,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존재자이며, 따라서 이 존재자가 실존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역량과 권능은 존재론에서 인간학, 정치철학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개념이다.

전통철학에서 역량은 잠재력이나 가능태로 이해되기 때문에 신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실재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과 역량을 동일시하고 나아가 모든 사물의 현행적 본질을 역량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역량은 더 이상 현실태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현행적인 힘이 된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적인 능력을 권능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의지는 독립적인 능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역량은 모든 사물의 본성에 내재적인 실존의 충동이기 때문에, 권능이라는 개념은 항상 가상과 수동성, 나아가 예속의 상태와 결부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은 기독교 철학 및 신학의 창조론에서 중심적인 신의 자유의지와 가능태로서의 권능개념을 비판할 수 있는 개념적 지주이다. 나아가 역량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에서 코나투스 및 욕망 개념과 이어져 인간의 능동성의 기초를 확보하며, 그의 정치철학에서 자연권개념을 재정립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또는 인과성의 쇄신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는 이 정리로부터 신의 역량에 의한 자연의 생산, 다시 말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인관관계가 논의된다. 여기서 인과관계는 스피노자에 의하자면 ‘신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여기서의 구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오히려 두 측면에서 고찰한 하나의 인과관계이다.

신이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것은 ‘신은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임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자기원인의 정의로 시작한다. 이는 원인의 일차적 의미가 전통적 의미의 작용인이 아니라 자기원인으로서의 내재적 원인임을 함축한다. 나아가 자기 원인은 ‘신 자신만의’ 인과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신안에 존재하므로 자기원인은 모든 사물안에서 활동하는 원인이다. 모든 사물 안에서 일어나는 신의 인과적 활동은 모든 사물의 본질과 실존의 근거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와 활동 일체에서 항상 신의 내재적 인과활동을 전제한다.

이러한 인과론의 중요성

1. 내재적 인과론을 통해 스피노자 철학의 반 유출론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헤겔은 스피노자 철학을 유출론적 체계로 특징지었다. 헤겔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체계는 절대자로부터 속성, 양태의 순서로 실재서이 점점 줄어드는 쇠퇴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유출론적 체계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외재성을 전제한다. 스피노자에게서 능산적 자연은 항상 소산적 자연의 내부에서 작용하므로 이런 비판은 전제 자체에서부터 성립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런 내재적 인과관계는 왜 무한자가 유한자를 산출하는가의 문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2. 내재적 인과관계는 중요한 윤리적 함축을 갖는다. 신이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필연의 법칙에 구속함으로써 사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이 사물들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그 정의상 강제나 구속은 외재적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은 무한한 존재자이기에 일체의 외재성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강제하거나 제약하지 않는다. 신은 오히려 유한한 사물의 ‘자기’, 즉 능동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유한한 사물은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하는 존재자이므로 절대적 자기,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으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덕분에 원초적인 능동성을 부여받는다. 이를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정치적, 윤리적 노력에 달려 있다.

 

평행론과 인식의 종류

평행론의 함의

속성들의 독립성-속성과 속성 사이의 상호작용 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

속성들의 자율성- 속성들 각각이 무한하다는 것, 따라서 속성들은 실체에 속하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의 동등성- 특정한 속성, 예컨대 사유속성이 연장속성에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

 

이처럼 속성들이 독립성, 자율성, 동등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다양성이 성립한다. 반대로 이것들 모두가 동일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저에서 존재론적 통일성이 성립한다.

이렇듯 무한한 속성들이 각기 동등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실체를 표현한다는 존재론적 사실로부터 평행론이 전개된다. 즉 속성들 각자는 서로 인과관계를 맺거나 상호작용하지는 않지만 동일하게 실체를 표현한다. 이러한 동일성으로부터 속성들 사이의 삼중적 차원의 평행성이 존재하게 된다. 먼저 각각의 속성들에 따라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양태들 사이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예컨대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그러하다. 그리고 각각의 양태들의 질서와 연관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속성에 따라 생산된 각각의 평행한 양태들이 동일한 사태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존재의 평행성 또는 동일성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들은 무한히 많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에 따라 생산된 우리 인간은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평행론적 원칙에 따라

1.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들은 그 자체의 실재성을 지니며 자율성을 유지한다. 즉, 관념들은 표상적인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형상적 실재성을 지닌다. 이는 무엇보다 적합성 개념을 새로운 진리기준으로 도입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적 특징들을 지니는 관념으로 정의한다. 이때의 내적 특징은 관념과 대상의 일치라는 외적 특징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관념 그 자체의 본성에 준거하는 적합성 개념은 관념과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관념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를 인식론의 핵심문제로 부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관념의 내적 원인을 파악하여 그로부터 가능한 모든 결과들을 도출해내는데서 지성의 역량을 발견한다.

다음으로 평행론은 인간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즉 양자는 각기 자율적으로 인간이라는 통일체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인식의 종류

신체의 부분들에 대한 완전한 지각은 이 부분들 자체가 아니라 외부 물체가 신체를 변용시키는 방식들을 반영해야 하며 외부 물체의 지각역시 그 물체 자체의 본성이 아니라 이 물체가 우리의 신체를 매개로 드러나는 방식들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정신이 자신의 신체나 자기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은 부적합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자기의식의 명증성에 기초한 근대 관념론 철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부적합한 인식의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인식론적 문제이자 동시에 실천적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서 부자유와 예속은 항상 부적합한 가상적 인식과 결부되고, 역으로 자유와 해방은 항상 적합한 인식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식의 종류 이론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이론의 의의

1.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2. 인식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해명의 기초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인식의 세 종류

1종인식- 상상 혹은 가상작용-표상과 간접경험등-오류의 원인

2종인식- 공통개념에 기초하므로 적합한 인식을 제공함. 공통개념의 특징은 이것이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여러 종류가 있고 모든 사물에 공통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항상 참이지만 정보상으로는 그만큼 빈약하다. 하지만 부적합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최초의 관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극히 유용한 개념이다.

3종인식-신적 인식/직관적 인식-신의 한 속성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감. 이 인식은 인간의 해방과 지복의 근원.

 

 

예속에서 해방으로

코나투스

스피노자 존재론에서 내재적 인과성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내재적 관계를 정립시키고 유한자가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데 신의 이러한 내재적 활동은 유한자 안에서 코나투스로 표현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유한한 사물들의 현행적 본질이라 정의한다. 즉,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 자신의 존재속에서 스스로의 보존을 추구한다. 여기서 자기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이라는 규정이 중요하다. 이는 정진 어떤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도출되며, 그 본성에서 어떤 결과과 도출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스피노자의 인과론의 근본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윤리학1부에서 양태는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한다고 규정되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불일치는 유한양태들이 전적인 수동성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재적 원인인 신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유한양태들은 원초적 역량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과 실존의 불일치 때문에 유한양태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타동적 관계를 자신의 실존조건으로 지니게 된다. 이러한 실존 조건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들로부터 제약과 이와의 갈등을 함축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구속적이다. 다시 말해 유한양태들을 수동성의 조건에 얽매이게 한다. 나아가 이러한 제약과 수동성은 유항양태들이 기본적으로 지닌 긍정적 역량의 여지를 협소화하기 때문에, 존재보존의 추구인 코나투스에 반하는 경향을 지닌다.

따라서 유한양태의 존재 보존의 추구는 정의상 ‘수동적인 자기보존’에 그칠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실존조건을 구속하고 수동화하는 경향에 맞서 원초적인 실존역량을 확대하고 능동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인간의 실존조건은 항상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므로 능동화의 노력은 수동적 의미의 자기이익에 대한 추구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이익의 성경 변화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성적 개조의 노력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은 근대 초기 부르주아의 소유적 개인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속적 실존조건의 이성적 개조에 토대를 제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욕망과 정서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표현은 충동 또는 욕망이다.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에 함께 관계할 때 충동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동은 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을 증진하는 것들을 낳는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욕망은 충동에 대한 의식이 포함된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정의한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 즉 인간은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인과관계속에서 존재하며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정서이론에서는 변용과 정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용-일차적으로 신 또는 신의 속성들의 변용, 즉 양태들 자체/ 스피노자는 물체와 물체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 또한 변용이라 부른다.

정서-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진 혹은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들인 동시에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서는 정신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체나 신체 일부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실존의 힘을 긍정하게 되는 혼란스러운 관념

 

변용이 외부 물체나 인간 신체의 한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인데 비해, 정서는 변용되는 사물의 존재역량의 증대 혹은 감소와 사물의 작용의 변화, 즉 이행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본질이 코나투스의 인간학적 표현인 욕망에 있는 이상 당연히 정신이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대 혹은 증진하는 것을 가능한한 상상하려고 한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수동적인 실존적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이 코나투스를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역량을 증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상과 예속

인간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가상과 상상의 예속상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스피노자 정서이론에서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우리가 자신과 동일시하던 인물이 어떤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면 우리도 그 대상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정서들의 모방이라 부른 것이다.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가상에서 비롯하므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선과 악에 대한 비판

스피노자에게서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이를 의식하는 한에서는 기쁨과 슬픔의 정서일 뿐이다. 이는 도덕적 가치를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심리적 상태로 환원시키려는 주장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

1. 선과 악은 실제로는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범주를 이 정서들로부터 독립시켜서 거꾸로 존재의 증대와 감소의 원인으로 만들어서 선과 악을 코나투스의 초월적 목적으로 승격시키려는 목적론적 가상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추구하고 의욕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이를 선이라고 판단한다.

2. 선과 악은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성이 있다. 이는 특히 우리가 목표로 삼을 만한 인간 본성의 전범을 세우려 할 때 유용하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선을 그것이 우리가 인간 본성의 전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악은 우리가 이 전범에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스피노자가 수동적 정서를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고 선과 악을 재규정한 데서 알수 있듯이, 가상과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주요전략은 수동성과 가상의 조건 자체 속에서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연적으로 생겨난 존재역량의 증대 기회를 보존 확장하려는 노력과 비록 가상적이고 부적합한 관념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의 전범을 설정하고 이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은 능동성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5장 정치철학

종교와 정치의 분리

자유로운 학문과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신학-따라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반드시 필요[신학정치론]

방법론

1.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을 제안/우리의 이해관계로 성서를 해석해서는 안됨.

2. 성서에 씌어진 그대로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최고의 도구인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이성이 철학의 시녀라는 중세의 원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정치체제론

신학정치론-정치에 대한 종교의 간섭을 비판하면서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다.

정치론-한층 현실주의적인 자연권 이론의 관점에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탐구한다.

 

바람직한 국가체제

스피노자는 혁명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형태의 국가이든 기존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치명적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을 모두 인정하고, 여러 제도와 조직들을 제안하면서 각각의 체제내에서 최상의 형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절대군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군주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제도의 설립에 대해 언급한다.

1. 의회의 설립-군주정내부에는 귀족정의 요소가 숨어있다. 이러한 요소는 군주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영향을 주므로 의회를 통해 개선되어야 한다.

2. 국가의 전 영토는 군주가 소유해야 한다. 군주는 세를 받으면서 영토를 임대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땅을 소유하는 계급이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교역과 상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어느정도 국민들간의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3. 의용군제도의 옹호. 오직 필요할 때만 싸우는 의용군은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보호책이다.

 

이렇듯, 스피노자는 군주정을 어렵게 허용하는 반면 귀족정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귀족정의 장점

1. 귀족정은 다수의 통치체제이므로 정부가 충분한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국민의 의견수렴도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의회는 불필요하다.

2. 최고 통치자가 사망하더라도 최고통치권을 가진 의회는 유지된다. 따라서 격변을 겪지 않는다.

3. 군주정의 군주는 그 자신의 재능이나 주변여건에 따라 절대적이기도 하고 미력하기도 하지만 의회의 권력은 불변이다.

4. 군주정의 법은 군주의 선포된 의지이지만 군주의 모든 의지가 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귀족정에서는 선포된 의회의 의지는 모든 경우에 필연적으로 법이 된다.

통치권의 조직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귀족정은 군주정과 다르다. 스피노자는 군주정에서 용병제와 사유재산을 부정했지만 귀족정에서는 이를 인정한다. 귀족정은 이미 절대권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군주정에 내포된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즉 싸워서 지켜야 할 자신들의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귀족정에서 국민들이 돈을 받지 않고 군인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군주정에서는 의용군이 귀족정에서는 용병제가 적절하다. 사유재산권의 인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국민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재산 소유권마저 없다면 정부에 완전히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서도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한다. 즉 사유재산의 인정은 정부를 지지하도록 국민들을 자극한데 필요하다.

 

민주정에 대한 논의-귀족정과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민주정은 의회의 구성방식에서 귀족정과 다르다. 민주정은 독립적이고 정직하게 사는 모든 시민이 최고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될 자격을 지니며, 국가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어린이와 금치산자, 여성과 하인은 시민의 자격이 배제된다. 여성은 남편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종속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지적으로, 물리적으로 열등하다는 주장이 그 바탕이 된다. 스피노자의 민주정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죽는다. 뷁

단지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민주정이 정부의 가장 자연적인 형태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최상의 국가형태라고만 언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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