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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2
    라이프니츠가 보면 욕할만한 라이프니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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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3/02
    데카르트가 보면 신경질낼만한 데카르트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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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2/24
    2월24일 수요일 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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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2/15
    칸트4탄 감성과 오성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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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2/15
    칸트3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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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2/14
    칸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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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2/08
    서양근대철학-칸트편 BY한자경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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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가 보면 욕할만한 라이프니츠 정리

라이프니츠

 

1.방법론과 인식론

라이프니츠의 사고는 분석적 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을 두 축으로 한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체계에 대한 불신이 근대의 지적경향을 이룬 가운데, 많은 이들은 범주론과 삼단논법을 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가졌다.

근대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학문적 방법으로는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논리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라이프니츠는 언어가 알파벳의 조합으로 구성되듯 인간의 모든 사고도 기계적인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방법은 수학적 공리적 방법이다. 그는 언어를 단순개념과 공리적이고 분석적 체계로 재구성하고 기호학을 창안하며 컴퓨터의 시초가 되는 계산기도 발명했다. 또한 새로운 진리의 파악을 위해 조합법을 시도했다.

이러한 논리학적 시도들과 더불어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고와 언어를 하나의 통합된 원리에 따라 이해하고자 하는 보편언어학의 창안을 모색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당대의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모든 자연활동이 기계적 과정으로 환원된다는 신념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갈릴레이, 케플러, 뉴튼 등 근대과학자들의 기본방법론이 수학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로서의 수학을 라이프니츠도 채택한 것이다. 또한 보편언어에 대한 이념은 중세 이후 전개된 언어사적 상황과 관련깊다. 라틴어 중심의 중세언어체계가 붕괴되면서 언어가 민족언어로 분화되자 이전의 보편언어체계로 되돌아 가려는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각 민족언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인류가 공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언어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구축하려 하였다.

 

논리학에 있어 라이프니츠의 주된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 혹은 대체하는 것이었지만, 존재론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근대의 형이상학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수준에서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일반존재론적 문제에서부터 특수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두루 포괄하며, 목적론을 핵심사상으로 계승한다. 당시의 대부분 학자들은 목적론을 과학적 사고에서 추방했지만 라이프니츠는 ‘이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충족이유율로 목적론을 수용한다. 그밖에 라이프니츠는 자연에는 근본적으로 비약이 없다는 연속성의 원리와 자연의 단순성 및 풍요성 이론 그리고 창조의 완전성에 관한 가설들을 존재론적, 자연철학적 전제로 채택한다.

 

본유관념과 인식의 원리

라이프니츠는 인식의 근거와 방법에 대해 합리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인간의 인식의 원리는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니츠도 본유관념, 선험적 원리를 인정한다.

 

경험론에서 특히 로크는 인간의 정신을 백지상태tabula rasa라고 생각하고, 어떤 종류의 타고난 관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인식을 감관(感官)을 통한 경험과 관념연합, 추상 등의 관습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경험론적 관점에 맞서 인간 정신은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원리가 바로 감각적 경험들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원리인데, 이는 모든 사고의 전제가 되는 모순율과 충족이유율 그리고 연속성의 원리를 비롯한 다양한 존재론적 원칙들로 이루어진다.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한 근거로 동물과 인간의 의식차이를 들어 뒷받침한다. 그에 의하면 동물은 단지 경험과 기억 그리고 단순한 관념연합과 추상행위를 하는 정도의 의식을 갖는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별 차이가 없을뿐더러 동물도 과학을 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동물과 인간의 의식수준 및 그에 따른 경험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의식활동의 수준을 지칭하는 지각의 명증성 개념으로 밝힌다. 명증성은 명석과 판명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명석은 어떤 대상을 그것의 외연적 징표에 근거하여 다른 대상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의 의식상태를, 판명은 대상을 그것이 그것이게 하는 원리적 근거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명석은 경험을 단순히 수용함으로써 주어지는 인식을, 판명은 인과적 근거지움 또는 정당화라는 논증적 행위에 의해 주어지는 인식의 질을 가르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단순경험적, 관념연합적 인식과 그가 주장한느 과학적 인식의 차이는 명석과 판명이라는 의식활동의 차이에 기인한다. 의식활동이 판명하지 못한 동물은 논증적 과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니츠는 과학과 같은 보편타당한 인식은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박한 경험적, 심리적 방식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으며, 선험적 원리에 따라 논증적으로 경험을 구성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의 의식, 즉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데카르트 반박

데카르트는 수학적 인식도 공간적 직관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인식에 있어 경험의 비본질성과 선험적 사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자면 공간지각을 경험할 수 없는 맹인도 논리적 사유에 의해 공간기하학을 배울수 있다.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감각자료의 비교추상도 원리적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이는 현대의 방법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관찰의 이론의존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논지는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실험과 관찰 검증이라는 경험적 통찰이 선험적 원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식으로 곡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리의 종류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진리에는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가 있다.

이성의 진리-형이상학적 명제=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는 충족이유율을 비롯한 존재일반에 관한 원리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명제들

-논리학과 수학의 명제=모순율과 공리적 구성을 통해 성립하는 명제들

사실의 진리-경험적, 역사적으로 얻어지는 지식들, 즉 반대가정이 가능한 것들이므로 우연 적 명제라 칭한다.

이성의 진리는 오늘날로 치면 종합명제, 사실의 진리는 분석명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실의 진리가 궁극적으로는 필연적인 이성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충족이유율에 따라 모든 현실적 사실들이 사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근본적으로 우연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실은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철저하게 합리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인간이 선천적인 지적 한계로 논증적이며 경험적 방식으로 단편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밖에 없지만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사건은 합리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다.

 

충족이유율과 경험과학

이성의 진리=모순율에 근거=논리학, 수학등의 순수과학 성립

 

한계-관념적 구성에 근거한 가능성의 과학/실재하는 물리적 존재자인 자연을 인식하는데 있어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음. 우리 삶의 사실은 논리적 가능성을 넘어 존재자의 사실적 근거가 되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인식되어야 함=충족이유율은 주어진 현상을 원인에 따라 설명하는 자연과학의 인과율

 

사실의 진리=충족이유율에 근거=경험과학

 

라이프니츠의 경험과학에 대한 인과율적 요구는 근본적으로 양상논리적 사고(model logic)에 근거-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논리적으로 수많은 세계가 성립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특정한 하나의 세계만이 물리적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며 왜 하필 이 세계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자연과학의 과제이다.

라이프니츠는 최적의 원리, 조화의 원리, 단순성의 원리등을 인과율적 인식의 보편적 척도로 규정한다. 예를 들자면 공간의 형태에 관한 다양한 기하학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논리적 모순이 없다면 모두가 진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체계들중 물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의 문제는 과학자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 선택의 기준은 인식의 경제성, 단순성, 미적통일성등이 통용된다.

 

라이프니츠가 충족이유율의 기준으로 규정하는 최적, 조화, 단순성의 원리들은 ‘생산적 자연의 건축술적 원리’라는 표현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통용되어온 자연철학적 가설들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근대과학의 실증적 전개과정에서 경험론자들이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요인으로 배격한 것이다.

◎베이컨은 전통의 모든 목적론적 관점에서 유래하는 개념들-목적인-을 과학적 사고에서 배제하고 오직 현상의 인과적 진행방식을 나타내는 운동인과적 개념-작용인-만을 과학적 인식의 목표로 규정했다.

◎뉴튼 역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이 보여주듯이 형이상학적 가설의 배격을 물리학적 탐구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와 반대로 라이프니츠는 경험과학은 선험적 원리에 근거해야 하며,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합목적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기계론과 실증주의적 방법론의 한계는 여전하다는 것으로 라이프니츠의 유효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존재론과 자연철학

 

모나드 형이상학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실체관을 기본관점으로 하고, 거기다 자신의 논리주의적 합리론적인 방법론에 따라 형이상학을 재창출함으로써 근대적 차원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이것은 모나드론에서 실체개념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개진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 즉 실체를 모나드라 칭하는데 이는 그리스어중 하나 혹은 단위를 의미하는 monas에서 유래한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단순함과 분할 불가능함을 기본특성으로 한다.

모나드가 단순해야 하는 이유는 물리적 성질이 아니라 정신적 활동성에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 정신적인 활동성을 표상 또는 지각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의식적인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 부르는 수준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의식활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모나드는 정신적 실재이다.

원자론과의 차이=원자는 무한히 작은 물리적 원소

→원자론으로 자연을 설명할 경우 제논과 같은 패러독스에 봉착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의 활동=의식=지각

→존재론적 의미; 다른존재와 관계하는 동시에 자신을 세계내적 존재로 가져오는 실체의 역동적인 자기 정립적 행위

→인식론적 의미: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의미

 

즉, 모나드는 무엇을 구성하는 원자적 요소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역동적인 정신적 존재자이다. 또한 모나드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자이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모나드론의 의의

①정신적 자족성=모나드는 존재근거를 스스로 가진다. →다른 존재자로부터의 영향이나 도 움을 필요로 하지 않음/예를 들어 모나드들은 상호인과적 관계를 맺거나 정보교환을 위한 어떤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예정조화설

②지향성, 합목적성

모나드=전체(무한성)와 완전성을 지향한다. 여기서 완전성이란 시공간적 무한성, 인식적, 도덕적 가치를 모두 포괄하는 요어로 사용된다. 즉 모나드는 진선미의 이데아이거 나 혹은 순수형상적인 최고의 가치를 지향하며 변화발전하는 존재자이다.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존재자의 위상? 모나드의 실천, 즉 지각은 그것이 얼마나 명료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모든 모나드는 지각활동에서 완전성을 지향하지만 지각활동은 선천적으로 부여된 한계안에서 이루어지므로 그들이 도달하는 명료성은 제한됨. 각 모나드들이 도달하는 명료성의 정도에 따라 세계에 대한 모나드의 존재방식과 인식내용이 구분된다.

③모나드의 신체성=정신의 현상형태로 신체를 수반

모나드는 인간의 의식에 명료한만큼 정신으로 나타나고

의식에 불명료한만큼 신체에 종속된 형태로 현상한다.

 

인간정신=논리적, 인과적 사고로 과학을 창출하고 반성을 통해 최고존재자에 대한 사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식=통각apperception↔지각perception

통각이 바로 이성이며 인간의식도 완전하지는 못한 것이다.

 

라이프니츠 논의에서 주목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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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보면 신경질낼만한 데카르트정리

1.데카르트의 방법론과 과학철학

 

데카르트는 올바른 판단능력인 이성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당시의 학문적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았지만 그럼에도 회의론으로 빠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보편적 인식능력으로서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학문적 위기상황을 겪고 있는 당시 상황을 이성에 대한 결함, 즉 이성은 진리를 담보해주는 기원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사용에 대한 방법적 결함으로 보았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는 방법론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신의 방법론적 규칙을 네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1. 명증하게 참이라고 인식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2. 검토할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각각의 대상을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3.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 단순한 인식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의 인식

4.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정도로 완벽하게 열거하고 전반적으로 검토할 것.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이 너무추상적이라 실제로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진리 획득과정은 철저한 시행착오의 과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데카르트가 스스로 지적했듯이 위의 규칙들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실질적 탐구활동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론을 통해 형식적 추론 규칙 때문에 초래될 위험성을 피하고자 했다. 이것은 삼단논법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펴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비판의 핵심은 삼단논법이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삼단논법의 본래적 기능은 이미 획득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도구이다. 문제는 삼단논법을 미지의 진리에 대한 발견의 도구로 보고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대전제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는 삼단논법은 새로운 진리 즉, 대전제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는 무력하다.

 

데카르트는 당시 현존하는 학문들 중 기하학과 대수학만을 신뢰했다. 그리고 어떤 지식체계가 성립하려면 모든 학문이 수학적 형태를 띠어야 하며 나아가 수학적 지식만큼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수학을 성립시키는 방법론이 모든 인식대상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의 영역밖에 있는 대상들에도 수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수학에서만큼 확실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확신은 어떻게 정당화 될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데카르트는 우리의 인식조건들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물음에 답한다. 여기서 분석의 출발점은 수학적 지식과는 다른 기원에서 유래한 지식의 획득과정이다. 수학과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지식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 어떻게 획득가능한가? 그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일단 물질적 대상이 주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인식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동물로 간주하며 우리의 인식능력을 각각의 기능에 따라 감각 상상력 기억 이성으로 나눈다.

여기서 유의한 것은 본래적 인식능력을 지니는 것은 이성이 유일하다. 나머지 감각 상상력 기억은 이성의 인식활동을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물질적 대상인 경우 이성은 이러한 보조수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대상이 비물질적 대상일 경우 이성은 혼자 활동해야 한다.

 

이제 데카르트가 어떻게 수학과 다른 영역에서도 수학만큼 확실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수학을 자연과학에 적용하는데 방해물이 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견해에 의하면 사물들은 종류마다 성질이 다르며 유적으로 다른 대상들은 서로 다른 방법에 따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고의 혁명성은 이런 생각을 뒤집는데서 출발한다. 데카르트의 관점에 의하면 모든 학문들이 탐구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대상들의 순서와 척도이다. 수학과 다른 학문간의 차이는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닫. 즉 모든 학문은 하나이다. 이러한 학문간의 통일성은 방법론적 통일성에, 그리고 이 방법론적 통일성은 정신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규칙1: 인식대상이 아무리 달라지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의 방법적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자연과학을 확실한 방법으로 세우기 위한 데카르트의 첫걸음-

◎1성질과 2성질의 구분

1성질-수학적으로 해석되는 양적성질-대상에 내재하는 객관적 성질

2성질-대상이 신체에 작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가지 감각적 성질-인간의 표상에만 있는 주관적 성질

◎새로운 지각(표상)이론의 고안

이런 구분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의 지각이론은 단순히 지각과정을 설명하는데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대상이 제1성질만을 지닌다고 전제할 때 지각의 개념을 어찌 설정할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뭣보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제2성질에 대한 지각을 인간의 신체적 조건들과 물리적 대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성질과 2성질의 구분은 물리적 대상들을 탐구하는데 있어 단순히 1성질만 고려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는 단지 제1성질만이 대상이 갖는 고유한 성질임을 역설하려는데 있다. 물리적 대상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를 통해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적 증명이 수학적 증명과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즉 자연과학과 수학은 모두 양적인 대상에 대한 탐구이므로 양자는 같은 종류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2. 데카르트 형이상학-이원론의 의미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17세기 등장한 새로운 과학의 탐구계획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정당화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한다.

① 새로운 과학을 규정하는 범주들의 정의, 새로운 과학의 인식론적 전제와 존재론적 토대 마련

②새로운 과학과 당대의 종교적 믿음 사이의 갈등을 제거하고 양자의 화해와 일치를 모색

 

이런 동기에서 시작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세 가지 존재증명을 내용으로 한다.

1. 자아(영혼)의 존재증명

2. 영혼을 전제로 한 신의 존재증명

3. 신을 전제로 한 자연적 사물의 존재증명

 

이 세가지 존재증명은 영혼, 신, 자연 사물의 본성을 새롭게 정의한다.

자아= 물질적 요소가 없는 사유로 정의

사물= 심리적 요소가 없는 순수한 물질, 물질의 본성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의미로 삼차 원적 연장으로 정의

신= 영혼과 자연세계의 존재론적 기원인 동시에 정신 안에 있는 특정한 관념의 원인으로 정의되는데, 그것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자 무한한 권능의 소유자를 표상하는 관념

 

이러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성찰의 내용은 ‘제1철학에 대한 성찰: 신의 존재 그리고 인간영혼과 신체의 구분에 대한 증명’으로 요약된다.

 

신의 존재 증명은 학문적 진리의 항구적 견고성을 보증하는 궁극적 근거에 대한 발견과정이다. 수학을 모델로 하는 데카르트적 의미의 이론적 인식은 명석,판명하게 직관되는 전제와 그에 따른 추론과 연역에 의해서 성립한다. 학문적 진리는 어떤 증명을 통해 그 참이 확인된 논증적 진리이므로 언제나 어떤 연역의 결론이다. 그러나 명증한 것은 왜 참인가?등등

 

데카르트가 신의존재를 증명하게 된 이유는 명증한 것을 참된 것으로 판단하는 정신의 본성과 그 존재론적 기원을 검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석판명한 것은 왜 참인가? 정신이 참되다고 확신하는 것은 왜 참인가? 연역의 확실성은 전제와 추론과정의 명증성을 보존하는 기억에 의존한다면, 그 기억속의 명증성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의 확실한 연역적 증명의 결론이 다른 증명의 전제나 원리로 사용되기 위해 자신의 전제와 증명의 문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자신의 근거로부터 떨어져나온 결론은 매번 재검토되어야 하는가? 한 번 성취된 명증성은 나중에 기억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데카르트가 자아와 사물의 존재증명을 한 것은 궁극적으로 정신과 신체를 포함하는 물질이 서로 다른 종류임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중세 스콜라 자연학과 17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자연과학간의 갈등관계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스콜라 자연학: 자연적 사물은 모두가 실체이며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실체적 운동의 원리는 식물과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하지만 17세기 자연과학에서는 자연적 사물은 수학적 언어로 번역되는 양적 성질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표상된다. -기계론적 운동관

데카르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기계적 운동이며 이 운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결국 데카르트가 영혼과 물체사이의 실체적 구분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기계론적 자연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연장이 없음으로 파괴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는 영혼의 불멸성을 보장함으로써 종교와 과학의 화해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3. 데카르트적 회의의 의미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회의는 형이상학적 성찰의 입구이자 형이상학적 체계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이다.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중세적 세계관은 치명적으로 붕괴되었다.

 

회의가 형이상학의 출발점인 이유

1. 상식과 이론 사이의 괴리 때문에(예를 들자면 중세때는 천동설이 대세였죠)

근대 과학의 세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감각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이성사용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더욱이 신이나 영혼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은 감각적으로 표상할수록 애매하고 혼잡해진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었다. 초감성적 대상을 주제로 한 형이상학적 성찰은 그 어떤 경우보다도 감각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을 요구한다. 형이상학적 성찰이 회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이를 통해 이성을 중세적 상식과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견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여기에 회의의 최대 유용성이 있다.

 

2. 회의의 과정이 자세하고 엄밀할수록 형이상학적 증명도 상세하고 엄격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논증은 회의의 근거에 대한 반대논증이며 형이상학적 사유의 여정은 회의가 열어놓은 길의 재정복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회의를 방법적 회의라고 하거나 또는 과장법적 회의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최소한의 근거로 최대범위의 부정으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4. 코기토와 신

체계적 회의를 통해 데카르트는 회의할 수 없는 진리로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코기토, 즉 자아가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데카르트는 이 회의 불가능성을 확실성 혹은 명증성으로 표현한다. 명석판명⇔애매혼잡

 

새로운 의문

한번 명증하다고 하면 언제나 명증한 것인가? 왜냐하면 명증성은 대상이나 명제 자체가 갖는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고 새로운 사태로 나아가려고 하므로 하나의 사태에 집중할 수 없다. 정신의 이러한 시간적 한계 때문에 명증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해야할 필요가 생긴다.

만약 이성이 한 번 명증한 것으로 파악한 것이 지속적으로 참됨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이성은 매번 그 명증성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가? 데카르트는 정신의 존재론적 기원인 신의 존재와 그의 선한 본성을 논증함으로써 이 물음을 해결한다. -명증성의 항구적 타당성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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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4일 수요일 스터디

스터디가 스터디 다워야 할터인데.....걱정이 크다.....맨날 딴 이바구만하다가.....술먹으러 가는 모임이 되고 있군하.....

본말전도.....뷁......

 

 

욕구, 생산과 분업

 

 

맑스는 사회주의에서의 욕구와 국민경제학 아래서 만들어지는 욕구가 다르다고 본다.

각각의 사람은 타인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데 이는 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해서이고...

-생산관계가 착취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나의 욕구 충족은 즉 타자의 희생이 전제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의 욕망은 정말 맑스가 예상한대로 자아실현의 욕구, 창조의 욕구, 그야말로 생산적인 욕구일 것인가......

 

라캉은 생존에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키는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구분한다.

그가 보기에 욕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인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타자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여기서 굳이 논거를 제시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모델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라캉의 사유에 대한 동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trend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라캉의 논의에서 드는 의문점은 타자의 욕망이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순간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의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의 정체도 사실 명석판명하지 않고 애매하고 혼잡스러운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욕망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해답을 내리는 것은 사양......사실 잘 모르겠으니깐......패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맑스의 논의대로 사회주의체제라는 목가적 상태에서 욕망이 과연 타인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가에 대한

타당성의 확보가 아니라,  맑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라는 이윤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는 나의 욕망의 실현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그 자체의 확인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사유체계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조급함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욕망을 올바르게 실현하기 위한 지난한 단계의 실현을 가능케 하기 위한 충분조건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1단계일지도......

 

사유재산은 조야한 욕구를 인간적 욕구로 만들줄 모른다.

-왜겠니?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화폐의 지배를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가? 사람들의 생활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삶으로 바뀐지 오래가 아닌가......

 

국민경제학은 금욕적이지만 폭리를 취하는 구두쇠이자 동시에 금욕적인 그러나 생산하는 노예이다.....

 

국민경제학은 도덕적인 학문이다. 자기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대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화폐는 할 수 있다. 화폐는 먹고 마실수 있으며 극장에 갈수 있고, 화폐는 예술, 학식, 역사적 진품, 정치권력을 알고 있으며, 화폐는 여행할 수 있으며 화폐는 그대가 모든 것을 갖게 할 수 있다.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다. 화폐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인 화폐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것도 창조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구매하고 싶어하지 않거니와, 다른 모든 것은 결국 화폐의 종이기 때문이며 내가 주인을 갖고 있다면 나는 종을 가지게 되고 그의 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모든 열정과 모든 활동이 탐욕 속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멜더스는 사치를 장려하고 절약을 저주한다. 결국 절약하기 위해서

리카아도는 절약을 장려하고 사치를 저주한다. 결국 사치하기 위해서

 

 

 

 

쉽하.....알바갈 시간이군하.....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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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4탄 감성과 오성의 형식

서양근대철학 - 서양근대철학회엮음-

 

감성형식과 오성형식

 

 

일단 지난 시간까지 경험론과 합리론의 맹점을 벗어나기 위한 칸트 옹의 외로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씨발점을 맛보았당.....오홋..

인식의 기원을 이제 우리는 인식주체의 틀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칸트 옹의 세계로 다시 떠나봄세...

우리의 인식은 직관(감성)과 사유(오성)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합리론이나 경험론 모두 동의해 마지 않는 바이다.

직관=감성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감각기관에 따라 발생하는 감각 또는 지각의 활동

사유=오성

감각기관에 의해 획득된 표상들을 비교 종합하여 개념을 형성하거나 개념에 따라 판단하는 사유작용을 뜻한다..

 

물론 칸트의 비판철학도 이것을 전제함과 동시에 이것들간의 구분을 중요시한다. 왜냐믄 전제된 주관적 형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거시기 왜 유명한 그림중에 빛에 의한 효과를 중요시한 그림있자녀...

밀짚더미 그림인데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그림....

워낙 그림에 문외한이라 자세한건 이너넷에 물어보구.....

 

즉 하고 싶은 이바구는 우리의 인식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직관을 하게 된다는 거임...외부적으로 감각한 것을 정리할 때 우리는 공간을 통해서 하게 되고, 내적인 감각내용을 정리할 때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은 객관적 사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경험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인식주관의 직관형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공을 초월한 사물직관을 할 수는 없는 법인게야.....

직관을 하려면 직관의 대상이 있어야 하기에 시간과 공간은 대상화를 위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외적인 직관도 내적으로 의식되어야 하니깐 내적직관을 위한 틀인 시간은 내적, 외적 직관모두의 보편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사유에 대해서 공부해 봄세....

우리는 대상이 현재 안보여도 그거를 생각 할 수 있다. 비록 고인이 되셨지만 이은주양이나 장진영양을 우리는 여전히 떠올리고 생각할 수 있자녀??

이렇게 능동적으로 표상을 떠올려 연결시키는 것을 우리는 사유라고 할 수 있는겨....

이렇게 사유를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감??

 

우리는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떠한 범위, 즉 범주를 가지고 그 대상들을 사유한다.

양으로 파악하던지, 질로 파악하든지, 속성으로 파악하던지, 인과로 파악하던지,,,,,,

 

그렇다...우리는 대상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그 대상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공통의 범주를 가지고 사유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유의 틀이 되는 개념을 우리는 범주라 부르는 것이고 칸트옹이 생각하시기에 그 범주는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실재성, 부정성, 무한성, 실체성, 인과성, 상호작용성,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12가지 범주이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지각되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우리에게는 ‘하나’라는 단일성의 범주가 있기 때문이며, 서로 구분되는 두 가지 경험을 인과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인과성의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주적 사유형식은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우리가 임의적으로 택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사유의 12가지 범주형식 역시도 인간이라면 따라야 하는 보편적 사유의 틀인 것이다. 즉, 칸트가 제시하는 기본적 사유틀로서 범주는 어떠한 경험적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단지 우리에 의해 사유된 세계의 순수형식을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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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3탄

『서양 근대철학』-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칸트의 비판철학(by한자경 선생님)

 

 

인간 인식의 기원은 무엇인가?

 

순수이성비판 서론: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식의 기원이 모두 경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론이 자체로 가지고 있는 한계인 귀납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칸트 작업의 시발점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칸트는 전제하게 된다.

Ⅰ.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여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적 인식이면서,

Ⅱ. 그 기원이 경험에 있지 않은 선험적(경험 이전)인식

즉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제에 의하여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대철학의 질문은 칸트에 의해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선험적 판단

vs

경험적 판단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얻을 수 없는 판단

종합 판단

vs

분석 판단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즉 주어개념을 분석한 것이 아닌 판단

술어가 단순히 주어개념을 분석한 것.

ex)아빠는 아들이 있는 남자이다.

 

 

그렇다면 선험적 종합판단은?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식이면서 단지 경험적으로 귀납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설정된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것도 아닌 판단이 되시겠다.

그러믄 신도 아니고 세계를 통해 얻은 경험도 아니라면 인식의 보편타당한 기원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감??

 

칸트 왈= 선험적 종합인식은 바로 인식의 주체인 인간자신에게서 구할 수 있느니라...

합리론의 사고-신도 아니믄서 세계의 질서를 한낱 미물인 인간이 어찌 아느뇨?

경험론의 사고-백지상태에서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세계를 알아가는게 인간이여

 

칸트 옹의 사고- 인간은 바로 인식주체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틀(형식)에 따라 세계를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느뇨..... 그리고 인식대상으로서 세계는 바로 그 형식에 따라 보여지고 이해되고 해석되기에 그 형식은 인식된 대상세계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제기-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감?

그게 없다면 사람 수만큼 다양한 세계가 존재할 것 아닌감??

 

그래서 칸트의 비판철학은 ‘상호주관적 보편성’을 강조한다. 즉 나의 주관과 너의 주관이 합치되는, ‘객관으로서의 주관’을 강조하게 되는거여....즉 공통된 세계로 읽혀지는 것이 있다면 세계를 읽는 공통적 틀이 존재할 것이란 말이여.....미분화된 차이들은 존재하겠지만 그에 앞서 공통점도 있는 것이지....예를 들어 동해의 일출을 보고 눈이 조낸 좋아 태양의 흑점까지 보는 사람도 있을거구, 눈이 조낸 나빠서 그냥 불그스름한 동그라미로 보는 사람도 있을거구....하지만 모두가 그 불그스름한 뭔가를 본다는 공통의 인식은 있다는 거쥐.....

 

자 그런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인식의 보편적 틀,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계를 그렇게 보고 그렇게 사유할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기본적 틀을 밝혀내고자 하는 거임...

그 틀 자체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의 형식인 것이다. 즉 바로 선험적 형식의 인식은 인간의 주관 자체에 기원을 둔 선험적인 것 되시겠다...

 

그렇다면 그 틀의 정체는 뭥미??

순수이성비판은 우리의 경험적 세계인식이 이미 그러한 틀에 기반한다는 통찰 위헤서 우리의 경험적 세계인식을 분석함으로써 그 안에 내재된 선험적 형식을 밝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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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2

 

칸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

①합리론의 한계: 독단론에 빠짐

②경험론의 한계: 회의론에 빠짐

③제 3의길에 대한 모색⇉ 비판철학

 

 

서양근대 철학의 과제는 어떻게 인식이 가능한가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자연에는 객관적 법칙성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객관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연법칙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등의 경험이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인식의 가능 근거 및 필연관계와 보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찰과 같은 경험만으로는 불충분함을 알게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이 인식주관이 객관세계에 대한 보편타당한 필연적 인식을 갖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는 인식의 연결고리는 초월자로서의 신이다.신은 주관체인 인간과 객관체인 자연을 창조한 공통 근거이고, 여기에 기반해 인간의 영혼은 신의 창조이념을 신에 의해 획득하게 됨으로써 세계의 원리를 알게 된다. 신은 인간이 파악하는 진리의 확실성을 담보해주는 확실한 근거로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 데카르트의 회의를 통해 그 확고한 기반은 흔들리게 되고 다시금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물음과 그의 근거 확보에 대한 것이 근대철학의 1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회의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는데 있어 스콜라 철학에서 해왔던 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이 가지고 있는 본유관념의 근거는 신의 창조이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신이 부여한 본유관념을 통해 파악되는 이성적 진리는 세계 자체에 필연적인 신적 진리이며, 따라서 그 인식은 선천적으로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사이에서도 논의가 엇갈리는 지점이다. 설사 신의 존재가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신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본유관념을 부여했는지는 어떻게 확인되는가? 수많은 피조물들 중 왜 하필 인간에게만 본유관념이 주어지는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경험론자들의 비판은 시작된다. 이러한 합리론의 독단은 경험론자들이 볼때 중세신학의 답습에 불과한 것이다. 경험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영혼은 본유관념이 없는 백지상태에 불과하며, 인간의 인식은 감각적 경험과 그로부터의 귀납적 추론에 의해 얻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회의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귀납추론은 예외적 사실이 발견되는 순간 그 논거가 상실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아직 예외가 발견되지 않은 지식이라 하더라도 언제 예외가 발견될지 모르는 상황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발견되기 전에 뉴턴역학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결국 경험과 귀납논리의 한계에 의해 인간의 이성은 필연성이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경험적 인식은 우연적이고 개연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경험론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연과학적 명제는 개연성만 있을 뿐 필연성을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확실성을 가진 수학적 명제 또한 세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분석명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학이나 물리학등에서 가지고 있는 근본명제들은 각 분야에 있어 철학적 정당화없이도 이미 세계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런 인식의 가능근거를 설명하지 못하는 경험론의 회의론은 개별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철학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수학적 진리가 세계의 존재질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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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근대철학-칸트편 BY한자경 샘-

이 공부는 한자경 선생님이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낸 책의 칸트 파트(한자경 샘이 쓰셨다.)를 공부하면서

내맘대로 정리하는 파트.....

 

1. 칸트 생애와 저작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이론적 인식능력에 관한 이성에 관한 비판서

 실천이성비판은 도덕적 실천적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지를 고찰하는 비판서

 

 그렇다면 판단력비판은??

  -순수이성비판이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루고 실천이성비판이  도덕의 실천문제를 다룬다면 남은 문제는?? - 이론과 실천의 문제, 현상과 이념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는 예술에서의 미적판단과 자연의 합목적성 문제로 집약해서 판단력비판에서 논의한다.....

 

즉 정리하자면

진-인식-순수이성비판

선-도덕=의지-실천이성비판

미-감정-판단력비판

 

이렇게 되시것다....

 

일단 여기까지....2장인 비판철학의 전체적 구도는 다음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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