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정진오기자]인천지역 주요 문인단체인 '인천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소설가 유채림씨가 한여름 '거리의 투사'로 변신했다고 해서 그 현장을 찾았다.

지난 7월 30일 오후 2시께 서울 홍대입구역 부근인 마포구 동교동 167의31,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현장과 맞닿은 곳에 유채림씨 부부의 싸움터라는 건물이 있다.

3층 건물인데, 공사장 펜스로 둘러쳐져 있다.

출입구 쪽 한 쪽만 겨우 뚫렸다. 칼국수와 보쌈이 전문이란 '두리반' 간판이 아직도 남아 이곳이 식당이었구나 하고 알려준다.

안에 들어서니 어두웠다. 작은 촛불이 여러 개 놓였고, 악기도 있고, 야전침대도 있고, 자전거도 있고, 난장판이 따로 없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속에서 몇몇 젊은이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한 젊은이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다행히 2층은 밝았다. 펜스에 가리지 않아 창문이 트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유채림씨가 있었다.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항의서한이라고 했다. 잠시 후 있을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 앞 시위 때 한전측에 전달하기 위한 것이란다. 전기가 끊긴 건물이라는 데, 노트북은 전선으로 연결돼 있었다. 하루 전날 설치한 태양발전 시스템으로 선풍기와 노트북 정도는 쓸 수 있다고 했다. 태양광 발전기는 환경단체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1층의 자전거 2대는 발전용이다.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 전구 몇 개를 몇 시간 켤 수 있다고 한다.

소설가 유채림(50) 씨가 전기도 없는 건물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족의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인 안종녀(52) 씨가 2005년 전재산을 털어 낸 식당 '두리반'에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거용역 30여 명이 들이닥쳤다. 모든 집기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른 키 높이가 넘는 철판이 빙 둘러쳐졌다. 사람도 들려나갔다. 분한 마음에 견디다 못한 부인 안씨는 26일 새벽에 절단기로 철판을 뜯어냈다. 그리고 해를 넘긴 지난 7월 30일, 딱 217일을 거기서 버텼다.

열흘 전에는 아예 전기도 끊겼다.

유채림씨 부부가 원하는 것은 많지 않다. 식당을 다시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뿐이다. 3년 동안 24시간 찜질방 식당을 하면서 번 8천여 만원에 은행 대출과 사채 등을 합쳐 1억3천여 만원이나 들었는데, 어떻게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하냐는 것이다. 주변의 세입자들은 모두 이사비용 명목으로 몇 백만원만 받고 나갔거나, 그냥 쫓겨났다. 개발이 없다던 건물 주인에 속았고, 사업주 측의 위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세입자 보호의무가 없는 '지구단위계획'에 의한 개발방식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유채림씨는 지적한다. 사업자와 건물·땅 소유주만 배를 불리게 한다는 것이다. 유채림씨는 이번 일을 계기로 관련 법이 세입자도 생각해 주는 쪽으로 바뀌길 바라고 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두리반 투쟁'의 이유이기도 하다.

   
 

식당 이름 '두리반'은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게 한 둥그런 밥상을 말한다.

유채림씨의 '투쟁'은 여러 측면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고 있다. 두리반 현장은 문화공연장으로 변신했다. 월요일마다 작은 공연이 펼쳐지고, 화요일에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목요일에는 촛불예배가 열린다. 금요일에는 칼국수 음악회가, 토요일에도 또 다른 음악회가 마련된다. 두리반은 이미 홍대 앞 '유명 문화공간'이 됐다.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유채림씨 부부의 손과 발이 되겠다는 자원봉사자들도 생겨났다. 이름하여 '두리반 손·발회'다. 이들은 두리반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뭉친 '두리반 지킴이'이다.

'사막의 우물'이란 이름으로 소식지도 낸다. 전기가 끊기자 며칠 전에는 소식지 호외까지 냈다. 작가다운 대응방식이다. '사막의 우물',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막'은 이 시대, 이 현장이고, '우물'은 두리반 식당을 비유한 것이다.

두리반 문제에는 독립다큐 감독도 따라붙었다. 정용택(42) 감독이다. '두리반 이야기'는 머지 않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로 일반에 소개될 예정이다.

부인 안씨는 5일째 마포구청에서 단전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안씨는 인천에서 옷수선을 하고, 24시간 식당을 하던 억척스런 '그냥 주부'였단다. 유채림씨는 대학 2학년이던 1985년, 서점 판매원이던 부인 안씨를 처음 만났다. 부평에 있던 '부평서점'에서였다. 둘은 1988년 결혼했다. 그 평범하던 주부가 모든 것을 건 투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부부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큰 아이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부모를 돕는 유일한 길이 군 입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고3이다. 혼자서도 학교에 잘 다니는 아들이 고맙기만 하다. 지난 봄에는 아들이 알아서 장학금 신청을 해서 70만원이나 받아왔다. 부부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오후 4시가 다 되자 항의서한 작성을 마친 유채림씨는 한전 서부지점으로 향했다. 시위에는 이골이 난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이 두리반을 돕기 위해 집회를 마련한단다.

100명이 넘게 참여한 집회에서는 오도엽 시인이 '학살, 2010년 두리반'이란 제목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시낭송, 철거민 관련 집회에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오후 6시가 넘어 집회는 끝났지만 태양발전으로 쓴 항의서한은 전달하지 못했다. 한전 책임자가 나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리반을 조그맣게라도 다시 열어 생활하고 싶어요. 저는 소설을 쓰고요. 다른 것은 없습니다."

유채림씨의 바람은 거창하지 않다. 웃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들어간 돈을 다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다. 식당을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뿐이다.

유채림씨는 인천 토박이이다. 남동구 간석동에서 태어나 광성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 공부를 하게 된다.

글을 쓰면서 생활하기 위해 여러 곳의 출판사에서 일했다. 최근에는 모교인 한신대 출판부에서 일했다. 이 일이 터진 지난 해 12월 휴직했다. 지난 4월에는 아예 사표를 냈다. 학교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돈이 더 필요했다.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이라도 받아 '싸움의 밑천'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살 때부터 5년을 다닌 직장이었다.

작가 유채림은 1989년 문예지 '녹두꽃'에 장시 '핵보라'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장편 서사시 '쑥대 설렁이는 해방산 저 기슭'(1990)을 내놨다. 이후 소설로 방향을 틀었다. 운율에 맞춰 짧게 쓰지는 못하고, 이야기 식으로 쓰는 것을 잘해 어쩔 수 없이 소설로 갔다는 것이다. 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 소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1993)를 썼다. 또 '그대 어디 있든지'(1996), '서쪽은 어둡다'(2000)를 잇따라 냈다. 그러나 반응은 차가웠다.

   
 

유채림이란 이름을 문단에 띄운 것은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2006)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 당시 금강산에 숨어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 한묵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평단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유채림씨는 하루라도 빨리 소설 쓰기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올 봄에 나왔어야 할 소설이 두리반 사태로 인해 중단된 상태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15년을 복역했다가 가석방된 뒤 진상이 밝혀져 무죄 판결을 다시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했다. 작가 본인의 억울함이 풀려야 억울한 옥살이의 한도 풀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유채림씨는 두리반 사태와 관련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매일 적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는 '두리반'이란 소설이 나올 것도 같다.

사진/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