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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여자 대 여자

그 애를 다시 보았다.

그 애가 나를 보지 못 했으므로 만났다라곤 할 수 없다.

 

고등학생들 때론 중학생들이 인근에서 모이는 작은 대학로, 외대 앞에서였다.

가을 축제의 끄트머리,  그 순진하다 못 해 아기자기한 시화전이며 그림전시회, 작은 찻집 같은 걸 낭만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은 낙엽 떨어지는 교정을 남자 아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몇 안 되는 남녀공학의 여자아이들까지 일일찻집의 티켓을 방패막이 삼아 한껏 멋을 부리고 서툰 화장발에 앳띤 웃음을 흩날리며 가을날의 까페거리로 원정을 나왔다.

윤 진은 유난히 달라붙는 정원과 또 다른 두 여자애들과 함께 미팅을 나온 참이었다. 그 애의 학교와 가까운 곳이라는 게 윤 진의 작은 이유였지만 스스로도 마음 속에서 드러내지 못 했다. 정원은 자기가 끈덕지게 졸라대어 인근 남학교 애들과 주선한 소개팅이었으면서 윤 진의 마지못해 하는 승락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았다. 뭔가 껄적지근했다. 그러나 윤 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막상 거리로 나와 보니 생각보다 차가운 10월의 바람에 성큼 다가온 겨울의 초대장을 받은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일일찻집은 외대 정문에서 바로 건너편 버스정류장 앞의 작은 점포에서 있었다. 평소에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인지도 없는 분식체인점인 듯 내부엔 테이블도 몇 안 되었다. 거리로 내다보이는 창유리엔 유치한 형광색종이에 몇 가지 메뉴와 가격을 매직으로 적어 붙여놓았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금색은색 띠종이로 체인을 만들어 여기저기 걸어놓은 폼이 여자애들이 별로 참여하지 않은 일일찻집의 주관처를 알려주고 있었다.

" 진아, 여기 ! 여기야, 일루 와서 앉아 ! "

정원이 소리쳐 부르는 통에 작은 찻집, 몇 모이지 않은 아이들의 주목을 받은 김에  윤 진은 슬쩍 그 네들의 얼굴을 슥 둘러보았다. ' 여기 올 리가 없지. ' 그 수줍음 많던 애가 이런 데 오겠냐, 나두 참 바보같다....

" 남자애들은 벌써 와 있어. 이제 민희랑 정자만 오면 돼. "

" 어, 그래......"

이렇게나 어색한......윤 진은 점퍼를 걸치지 말고 마이라도 입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만그만한 남자애들 넷이 검정색, 남색, 카키색 그리고 베이지색의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나름 신경쓴 듯 브랜드 로고가 내비치는 티셔츠를 대조적인 화사한 색깔로 골라입고 짧은 고수머리를 귀 뒤로 빗어넘기고 이마를 확 들어낸 앞머리에는 힘껏 후까시를 주고 있다.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정원이를 넷이서 상대하면서 실컷 분내를 즐기고 있던 그들은 윤 진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창 자라는 중에 있는 그들은 학교에서 가장 키가 큰 윤 진에게 아직 못 미쳤고 돋았다 잦았다를 반복하며 벌건 여드름자국을 가리지 못 한 얼굴은 윤 진의 희고 멀쑥한 낯빛에 기가 눌려 채 벌어지지 못 한 어깨를 움추리게 하는 듯 했다.

" 아...저기...윤 진이 저...그...윤 진이었냐..."

남학교의 뚜였던 듯 미팅을 주선한 후까시 하나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버벅거렸다. 정희여고의 윤 진이라면 알 만한 애들은 다 알았다. 키 크고 훤칠한 맨리, 공부도 피아노도 영어도 잘 한다는 자이언트, 타학교까지 여학생들의 팬클럽, 아니 팬덤이 형성된 나이트, 가끔 수상한 소문까지 따라 다니는 키 큰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일대의 남학교에선 걸프렌드 만드는데 엄청 애를 먹고 있었다. 대체 왜 이 보이쉬한 여자애가 미팅 같은데를 !  사춘기의 꽃몽우리들이 한층 붉게 부풀어오르며 남자애들은 낭패한 빛을 역력히 드러냈다.

민희와 정자가 오기 전에 남자애들은 자리를 일어섰다. 정원이 소지품 뽑기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짝을 짓지 않고 다 함께 몰려다닐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 재네들, 저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냐? "

" 글쎄? "

" 민희랑 오면 뭐라구 하냐? 잔뜩 기대했을 텐데..."

" 글쎄? 어디 가서 헌팅이라도 하던지..."

정원의 걱정없다는 듯 태평한 말에 윤 진도 이게 별 일 아닌 건가? 하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하기야 짝짓기하고 나가게 되었으면, 그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개중 가장 키가 크다던 남자애도 자신과 엇비슷해보였는데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남자애들이 저와 함께 걷는 걸 견디겠나 싶기도 하고... 자신으로서도 더 볼일이 없는데 걍 싱겁게 집에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진아, 안되겠다. 토껴야겠어 ! "

" 뭐? "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더니 정원이 팔을 잡아끌며 나가자고 했다. 떴어 ! 어멋 ! 어떡해 ! 사방이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삽시간에 일일찻집은 파장하는 폼이었다. 학생지도부 선생들이 학생들이 주관하는 일일찻집을 단속한다는 것이었다. 아, 이럴꺼면 티켓은 왜 팔아먹은 거냐구? 윤 진은 자기가 낸 돈은 아니지만 억울해하는 학생들의 심정에 함께 했다.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조장하는 모임이나 회합을 금한다는 교칙을 강조하던 담임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건전하구만, 내 참.

시내로 나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정원은 방금 떠나온 길 건너의 일일찻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와 지긋이 살펴보는 학생지도부 선생의 찌푸린 미간을 정면으로 쳐다보다 생긋 웃기까지 했다. 남잔지 여잔지 원...츱... 뭐라 한 마디 더 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던 학생지도부 선생은 등 뒤로 휙 지나가는 남녀의 풋내를 감지한 듯 이내 발길을 돌렸다. 이런 젠장... 윤 진은 확 스트레스가 올라왔다. 뭐가 즐거운지 생글거리는 정원이 아니었으면 꽥 소리라도 한 번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 근처에 좀 전에 헤어진 남자애들이 주루룩 서서 불쾌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쌍한 것들...민희와 정자는 일일찻집이 취소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결국 오지 않았다. 교보문고에 가자는 정원의 말에 따라나서기는 했으나 윤진은 이렇게 될 것을 정원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별로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이 근처에서 햄버거나 먹자고 할까 고민하며 건너편 가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눈 속으로 그 애의 작은 어깨가 파고 들었다. 초가을엔 일러보이는 체크무늬의 머플러를 촌스럽게 두르고도 곁에 선 남자애들에 비해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어깨, 변함없이 뻗쳐대는 반곱슬의 중단발머리카락 속에  목덜미를 감춘 채 곤색 마이 아래로 같은 계열의 체크무늬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치마는 잘 안 입더니? 윤 진은 어떻게 길 건너로 가서 아는 체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며 그 애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 애가 곁에 서 있던 남자애들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금방 그 개중 키 크다던 후까시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게 건너편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저의들 패거리에게 뭐라 속닥인다. 다 같이 고개를 돌려 그 애를 훑어본다. 그 애가 돌아보는 뒤편 롯데리아의 창 안으로 비치는 여자애들을 함께 돌아본다. 곧 남자애들이 그 애를 따라 롯데리아로 들어간다. 저것들이?

윤 진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재가 길거리 헌팅을 한거냐? 저 애가? 기가 막히는 구만....많이 컸다, 이 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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