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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
현지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돼지에게 걸어준 진주 목걸이?'
그에게 나는 그 '정도'의 존재일 것 같다. 그는 먹을 수도 없는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 한다. 더구나 목걸이라니, 자칫 비아냥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 당신이 해고될 줄 알고 내가 미리 취업했어. "
예년처럼 4박5일의 시골행을 다녀온 남편에게 자못 자랑스럽게 뇌까렸다. 결혼 7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가는 시골행에서 빠진 구정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삿짐을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실제로 혼자 짐정리를 하다보니 힘들기가 여간 아니었다. 너무 많은 옷가지들, 그 절반은 남편의 오래된 겨울코트들이었고 나머지는 시골형님이 보내준 아이들옷이었다. 아직 유치원을 다니는 딸들에겐 너무 크고 종류도 다양한, 친정엄마의 말에 의하면 쓰레기같은 헌옷들이었지만 버릴 순 없었다. 현지는 향후 오년내엔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형님네 4남매가 돌려입다 물린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세탁,건조,정리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커다란 리빙박스를 열 개나 구입하여 크기별, 계절별로 차곡차곡 넣어 새로 이사한 집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힘겨운 적재를 마쳤다. 그리고 남은 거대한 책더미. '더미'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열 개의 이사박스와 또 바구니 몇 개에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는 잡지와 서류뭉치들. 인근의 이삿짐센터에선 포장이사가 아니니 정리해 줄 순 없지만 박스와 이사용바구니는 나중에 따로 가지러 오겠다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고마운 사람들, 남편보다 현지에게 힘이 되는 써비스맨들이었다.
방 세 개를 합친 크기는 됨직한 넓은 거실에 가득 찬 박스와 박스 사이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현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새로 두시. 밤은 고즈넉하고 겨울 한기와 먼지가 함께 감도는 집 안엔 오직 현지와 널러진 짐더미 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는게 힘들지 않았다. 아니 힘든걸 몰랐던 것 같다. 몸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던 아직, 삼십대였다.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남편은 시골에 있는 연휴 중에 해고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재계약이었고 가끔 조건이 안 맞으면 다른 지점으로 옮겨가느라 보름씩 쉬게 되기도 했다. 남편은 비정규직이었다. 현지는 그가 좀더 나은 직장을 혹은 다른 직업을 갖기를 원하면서 맞벌이를 시작했다. 커가는 두 아이들을 위해 적어도 방 두 개는 있는 거실 넓은 집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현지는 벌써 오년 이상 육아를 위해 집에 들어앉아있는 생활을 더 유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학습지 교사생활은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자신의 빈한한 스펙에 비추어 가능한 몇 안 되는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남편은 처음엔 맘대로 하라 하였고 나중엔 그거, 힘들다던데...하면서 걱정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직업을 가진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은 그에게 집안일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왜 이렇게 집이 계속 어지러운 거지? 우린 쓸데없는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애. 그는 치운다고 치웠으며 매번 청소기를 들고 움직였지만 한번도 허리 굽혀 방을 닦지는 않았다. 현지는 바닥에 널려진 옷가지며 놀잇감이며 책들을 주워 제 자리를 찾아 한 시간에 수십번도 더 이 방 저 방, 이곳 저곳을 오락가락했다. 64제곱미터의 주택 내부에서 한 사람이 하룻동안에 걸을 수 있는 보행거리는 얼마큼일까? 1킬로미터? 2킬로미터? 현지는 발바닥이 뜨겁다. 이미 자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학습지교사로서 현지는 자신이 맡은 2 개 동의 구역을 넘어 다른 동료들이 선호하지 않는 산아랫동네의 몇 집까지 떠안게 되어 낮에도 십여키로미터의 도보행군을 하고 있었다. 방문한 집에서 학습지를 사이에 두고 아이와 마주 앉을 때가 바로 쉬는 시간이었다. 실제론 그게 업무의 주요한 부분이었는데도 말이다. 현지는 숨을 고르며 간절히 물 한 잔 줬으면 하고 아이엄마가 있는 방문 뒤나 부엌 쪽을 흘끔거렸다.
현지는 흘끔거렸다. 남편이 청소기를 끌고 지나간 씽크대 앞에는 과일 껍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있던 놀잇감들은 벽 쪽으로 밀어붙여져 있었고 널려있던 옷가지들은 빨래감들과 섞여 장롱 안에 처박여져 있었다. 그가 하는 집안일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현지는 건조대에 널어진 바지며 셔츠들이 구겨진 그대로 어깨선도 비뚤어진 채 말라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걸 다시 잘 펴서 각잡아 걸어야 하는데...다 마른 후엔 반듯하게 펴기가 더 힘들었다. 다림질을 하거나 아예 다시 세탁기에 넣는게 빠른 길이었다. 하얗게 더께 입은 검정색 옷가지들을 볼 때마다 현지는 화가 치받았다. 남편이 손 대는 모든 것이 제게 의미가 없었다. 상을 치운 것도 자기라고 주장하나 현지는 밥상 위에 말라붙은 김칫국물이며 개수대 안에서 기름기를 둥둥 띄운 채 그릇들을 섞어 담가놓은 것이며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진 접시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대체 뭘 했다는 거야? 하고 울화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나중에 우리가 살아온 십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한 해가 바로 당신이 맞벌이했을 때였어. 하고 말했다. 하지만 현지는 하고 싶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대출을 잇바이 끼고 마련한 집을 지키고 싶었다. 햇살 드는 넓은 방과 바람이 들고 나는 베란다, 현지가 굳이 요구해서 설치한 에코카라트의 아트월이 있는 거실, 시장도 가까웠지만 특히 아이들을 위해 학교 정문 앞에 새로 지은 이 집을 사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 하지만 남편은 지하철역이 멀어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집에 있는 식구들을 위해 출퇴근하는 자신이 희생한 것이라고 은근 강조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희생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맞벌이하는 동안 현지는 집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어린이집으로 늘 동동거리고 다녔으며 늦은 저녁의 바쁜 끼니를 챙겨내느라 힘에 부쳤다.
일 년 전의 메일을 확인하면서 현지는 전업주부로 돌아온 자신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 한 채 새집은 전세로 내주고 더 싼 집으로 다시 옮겼다. 남편은 좁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마땅해. 우리같은 처지에, 당신이 기백만원씩 버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다녀봤자 남는 것도 없쟎아. 하고 말했다. 현지는 그건...당신이 가사분담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야...그래서 매일 저녁을 사 먹으러 다니니깐...하고 중얼거렸지만 더이상 싸우기도 싫었다.
다시 이사한 좁은 집에는 그 많은 짐들을 둘 곳이 없었다. 현지는 아직 대체할 선생을 구하지 못 해 산동네의 집들을 미처 다 인계하지 못 한 상태였다. 이사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 데도 창고에는 정리되지 못 한 옷가지들과 그리고 책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남편이 말했다. 저거 다 버려도 되는 거 아냐? 내가 봤는데 당신, 그 책들 읽지도 않쟎아. 그냥 보관용이면 이제 그만 좀 치우지?
현지는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말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라 말한 사람에 대해서였다. 왜 우리는 결혼한 후 8년 동안 친해지지 못 했을까? 하긴 연애기간이 8년이었어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된다니까...현지는 남편과 성향이 맞지 않다는 것을 재차 재차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다. 창고의 쌓인 짐들 중 그가 우리 집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별로 없었던 듯 하다. 모든 걸 고물상으로 넘겼다고 했다. 나중에 현지는 그 속에 이태전에 짐을 쌌던 그대로, 십대 이후 계속 써 왔던 일기장들의 박스가 섞여 있었다는게 생각났다. 이십대의 장서들과 함께 노트들과 이런저런 페이퍼들의 뭉치가 모두 쓰레기로 간주되어 버려졌다. 그건 현지가 살아낸 삼십대까지의 기록들이었다. 현지 자신도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 하고 실제의 관계들은 다 연이 끊겼으나 그럼에도 늘 집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과거의 유물들이었다. 하지만 현지는 비난할 수 없었다. 읽지도 않는 책들보다 그 시절에 했던 회의들, 메모들, 편지들...그것들의 일부는 남편이 파업투쟁을 하던 시기의 자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둘다 그것들을 짐처럼 여겼고 나아가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는 버렸고 현지는 침묵했다.
" 어떻게 그 책들을 다 버릴 수가 있어? 그게 얼마나 비싼 책들인데, 연구소같은데 기증이라도 할 껄. "
" 지금 누가 그딴 걸 본다구? 사회과학 출판사나 서점들도 다 망하거나 아니면 방향을 전환했다구, 안 봐! "
안 봐!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에게 먹물들의 이념같은 건 쓰레기보다 더 가증스럽게 여겨진다. 그래, 대의를 얘기했던 사람들이 대공장의 배신을 오히려 조장했었지. 그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는게 중요했던 시대는 갔어. 현지는 눈물이 났지만 그의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대신 뱉듯이 쏘아주었다.
" 평생 책이라곤 볼 줄 모르니, 집에 서재가 필요하지도 소장하고 싶은 책이라는 걸 느껴본 적도 없지? 돼지에게 진주목걸이가 가당키나 하겠어? "
그는 뻘쭘하게 쳐다보더니 맞대거리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듯 팽하고 돌아앉았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대서양을 바라보는 곳에 식당을 차리는 거야, 거기서 매일밤 일을 끝내고 의자를 가져와 문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싶어. 그때쯤 너도 떠나겠지."
하고 '뱃머리'가 말하자 '제니퍼'는 " 내가 안 떠나면?" 하고 묻는다. 그러자 '뱃머리'가 답했다.
" 그럼 같이 바다를 보겠지."
이건 영화 <가을날의 동화>에서 담담하게 일상을 같이 하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이다. 영화-드라마 속 프로포즈 명대사 1위라는데 내가 영화를 보지 못 해선지 그리 와닿진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건 <번지 점프를 하다> 에서, 영화 속 명대사 3위였다. 전생의 인연이라는 설정으로 스윽-가린 운명적 사랑?
“...밤에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너이기 때문에 널 사랑해.”
이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16위.
“매일 눈을 떴을 때 너를 볼 수 있길 바래.”
< 첨밀밀> 에서, 17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기회를 주세요.”
< 101한번째 프로포즈>에서 나온 대사로 드라마 속 명대사 1위라고 한다.
“우리 가족 할래요?”
<카인과 아벨> 에서, 18위.
어째 주로 집에서 같이 놀자는 느낌이다. '화려한 수식어'는 필요 없지만 뭔가 빠진 느낌, 그래도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나?
"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딱 한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지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사랑해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주름투성이로 여전히 멋진 남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매부리코의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에게 한 대사다. 가슴에 콱 박혔었다.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시다며 대답을 재촉하는 남친 때문에 목하 고민 중인 서른세살 친구에게 위의 대사를 인용해주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었다. 나는 진지한 태도와 어조를 유지했지만 설마 지가 '평생에 딱 한 번 올까 말까하는 확실한 감정'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어? 하고 내심 코웃음을 쳤었다.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신주의자들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는 '연애 따위'에 신경쓸 시기도 상황도 아니었다.
친구의 결혼과 신혼여행 때문에 생긴 공백을 메꾸느라 나는 두배로 바빠졌고 그의 부재가 눈에 띄지 않도록 몇 배 더 신경을 써야 했다. 한달 쯤 후엔 정상복귀하겠지 하고 기대했으나 결혼은 친구를 '가정 있는 여자'로 만들었다. 독신이 아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에게 집은 중요하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장소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는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또 마시다 못 가면 어딘가에서 더 마시고 다음날 함께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결혼이란 이런 것인가? 돌아가야 할 집을 만드는?
" 동지! "
하고 나중에 남편이 된 사람이 나를 불렀다.
" 나, 밥 좀 해 줘라. "
그가 말했고 나는 대답을 안 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불쌍하다...쯔쯧. 스물다섯부터 서른 다섯까지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정규직이 될 날을 기다렸지만 그는 해고되었고 1년 8개월을 길바닥에서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다. 다니고 있는 회사 이름을 대면서 떳떳할 수 없어 맞선자리도 피해왔던 그는 빨간줄이 그인 노총각이 되었고 여전히 그 회사의 소속만 다른 비정규직이었다. 나는 밥 해주는게 뭐 어렵다고,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근데 이게 지금 프로포즈인거야?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영화 <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프로포즈 받으면서 들은 말이라고 나는 기억하지만 정확한진 모르겠다.
"나와 함께 아침을 먹어주겠소? "
이 말이 " 나 밥 좀 해 줘라. "하고 구분이 되나? 당연히!
근데 나는 헷갈렸다.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면서 나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이상 더 하진 않을꺼야...라고 되뇌이긴 했다.
남편이 되기 전부터 그는 나와 함께 밥을 먹을 때 상차림을 같이 하지 않았다. 나는 화를 냈고 내가 '그의 집'에 온 '손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시부모가 될 사람들을 만나러 가서는 함께 김치를 담그라고 부엌으로 들여보내는 그의 손길을 밀쳐냈다. 그리고 이유 없는 슬픔에 북받쳐 울었다. 결혼 후에도 그의 가족들 눈에 나는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서울 며느리였다. 그나마 설겆이는 열심히 해서 단지 요리를 못 하는 것으로 애써 이해되기는 했다. 잘 모르겠다. 그의 가족들은 늘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있었고 어머니나 혹은 며느리가 그 시중을 드느라 엉덩이 붙일 새가 없었다. 나는 입이 짧아 시골음식 먹는 걸 즐겨하지 않는 서울 깍쟁이로 치부된 것도 같다. 한 번 가면 내리 사흘은 기본이고 일년에 네 번 이상 되는 시댁행을 결혼 십년 차에 이르러선 "나 빼고 가." 라는 말로 거절했다. 아이들이 밥을 혼자 떠 먹는 나이가 되어서나 가능해진 일이었다.
애엄마가 안 오면 애들 밥은 누가 먹이냐고 말하던 시어머니의 속뜻은 다 큰 어른이지만 '남자'인 아들의 밥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을테다. 남편은 아침을 꼭 밥으로 챙겨먹는 사람이었다. 하루 두끼의 상차림, 그것도 아이들과는 결코 국과 찬을 공유할 수 없는 맵고 짜고 맛갈스러운 식성의 소유자. 함께 집밥을 먹은지 십년 동안 그가 변한 거라곤 하얀 이밥만 고집하다가 이젠 약간의 혼식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나는 그와 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 한번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 했다. 하지만 나는 본시 먹는걸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결혼 전 십년의 자취생활 동안 전기밥솥을 가져본 적도 없지만 가스렌지도 구비한 적도 없었다. 나는 가끔 냄비밥과 카레를 만들고 한 사흘 계속 먹었다. 그 이상 내리 먹을 일도 없는 것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건 그리 흔한 일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일요일에 집에 아무것도 없을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렇다고 장보기는 성가시니 분식점에서 혼자 김밥을 먹거나 빌려온 비디오를 보면서 과자부스러기를 주워먹거나 하였었다. 요리, 해 봤지만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즐거움은 짧고 뒷설거지는 많은 별 효용성 없는 분야였다. 함께 정찬을 나누고 싶은 애인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래도 혼자 싱글의 룸을 가지고 있을 때는 행복했던 것 같다. 물론 상대적일 것이다. 추억을 새기는 자는 현재가 불행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래봤자 딱히 행, 불행을 논할 만한 사안은 아닐 지도 모른다. 집에 있다는 것과 집에서 밥을 한다는 것과 그 밥을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류의 가사노동의 전담이라는 가족내 성별 분업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소외를 분기어린 목소리로 주장하는 것이 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가사노동은 커녕 제 아이도 유모의 손길로 키우면서 '흑인은 집 밖의 화장실을 이용할 것' 을 요구하는 백인 부르조아 여성이라고 해서 불평등한 성의 역사에서 빗겨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집에서 일을 한다는 것과 집에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서로 뜻이 통하는 대사는 아니다. 하지만 집에서 원하는 일을 하고 지낼 수 있다면 행복은 집 안에도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꼭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술을 마시기 위해 약속을 잡지 않아도, 혼자 사는 친구의 집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로 나와 가족들의 집이 떠올려지진 않을 수 있다.
남편과 공동의 주거공간으로 집은 늘 존재했지만 거기서 쉬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바로 가장이라는, 누가 부여했고 또 배타적으로 향유하게 했는지 모를 이상한 권력의 소유자.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아이들과는 다른 존재, 자조능력을 가지고 있는 성인이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오체불만족의 장애인처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몰라야 한다고 강요되는 아버지라는 사람들. 나는 한때 동지였던 관계를 힙겹게 상기시키며 그에게 공동주거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의 순환노동들을 역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평범한 가장이 하는 역할도 잘 하지 못 하는 막내아들이었고 그걸 즐기는 편이기도 했지만 특히, 그러기 위해 집에서는 가만히 있을 것을 물심양면으로 지지, 격려하는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결혼 십주년을 기념하여 이혼할 것을 사전에 협의, 준비, 다짐하고 실행의 시점에 막 이르렀다. 지난 겨울, 1월의 어느날이었다.
" 하지만 사실...솔직히 나는 왜 이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
" 우리가 사랑 없이 결혼했다는 걸 알쟎아. 그리고 노력했지만 사랑이 생기지 않았고, 서로가 맞지 않다는 걸 확인했쟎아. "
" 그렇다고 내가 집을 나가야 하는 건 부당해. "
" 먼저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
" 나는 나갈 수 없어. "
" 그럼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
"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있지만 그간의 경험치로 안다. 그는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살아가는 집이 싫은 것이다. 아이들과 헤어질 수도 없다. 그는 아이들이 내게 있는 한 자신을 내어쫓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같다. 우리들은 모종의 합의를 하고 상호 양해하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지 않기로 했고 나는 그를 위한 국과 찬을 따로 준비하지 않고 있다. 나는 최근 카레라이스를 자주 해 먹는다. 학령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이전에 비해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많이 줄었다. 장보기는 고기, 달걀, 생선에서 과일, 야채 그리고 도토리묵 같은 것으로 품목과 비중이 많이 달라졌다. 그는 혼자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고 대강 치우고 간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토스트에 사과 혹은 떡과 매실쥬스 그리고 가끔 주먹밥이나 고구마같은 걸 먹는다. 식구들이 다 함께 밥을 먹는 날은 일요일 점심과 저녁 정도이다. 그 정도야, 뭐 이혼하고 별거하는 부부라도 요즘은 아이들을 위해 함께 식사를 하고 공원을 거닐거나 하니까. 단지? 성격차이가 동거의 불편을 가중시켰던 우리에겐 합리적인 방안인 것 같다.
사실 저변에는 아이들이 매일 손을 타는 유아기를 다 벗어났다는 커다란 조건의 변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넓은 집에서 상호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우리가 하우스메이트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나는 작은 방에서 문을 닫고 글을 쓴다. 우리는 서로의 취미를 인정하고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또한 "이혼하면 안돼!" 하고 외치며 품에 안기는 아이들과 같은 집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밥을 같이 앉아 먹지는 않지만 각자 알아서 취향대로 차려먹고, 같은 집에서 살고는 있지만 분리된 공간에서 자기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서로 잘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있어서 즐거운 '가족의 신화'를 재생산하지는 않지만 쉐어링하는 집에서 공동공간과 개인공간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가족들, 우리는 현재 잠정적 이혼상태의 부부이다.
1. 여보, 당신에게.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여보라던가 당신이라고 지칭하는거. 우린 그런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가끔 나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당신은-하고 말 속에 섞어넣은 적이 있었죠. 하지만 나는 누구아빠라는 것 이상으로 더 가깝게는 당신을 여길 수가 없었어요. 그조차도 부담스러웠는데 그건 아마 내 아이의 아빠라는 것 때문에 내게 당신이 실제보다 더 규정적이 되는게 아닌가 염려했던 탓일거에요.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부터 당신과의 대화에서 말끝을 놓았었죠. 지금 이렇게 하요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결혼초기의 다소 어색하고 좀더 긴장감있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긴 해요.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린, 사는 동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것을 당신도 인정할꺼에요. 그게 누군가의 탓인 건 아니죠. 그저 "다름"이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미안해 할 필욘 없어요. 당신도 또 나도.
그래도 미안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고려하지도 이후 펼쳐질 관계의 양상에 대해서도 크게 별나게 다를 것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 했었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우리의 결혼은 매우 모험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너무 가벼운 맘으로 하는 결행이며 결국 자신에 대해서도 방임에 가까운 경솔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내가 특히 그랬기 때문에 그 방황의 늪으로 당신을 동반한 것에 대해 늘, 언제나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고백하고 싶어요. 당신은 그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래선 안되는 것이었거든요. 당신은 결혼을 하고 싶어했고 나를 선택하는 게 동료들의 만류처럼 그렇게 크게 실수하는 거라곤 판단되지 않았을 꺼에요. 난 당신이 말했듯이 착실하고 타인을 돌봄에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많이 힘들었었죠, 내가 아니라 당신이. 주변사람에게 대하듯 동거하는 자에겐 결코 그러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 그것도 한참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깨닫고 확신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나는 당신이 말하듯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게으른 인간이 맞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많이 화나고 당황스럽고 그래서 결혼을 물르고 싶었던 당신이 무척 힘들게 깊은 고민을 하고 여러가지 상황을 가늠해보고 또 나를 이해해보려 애쓰기도 했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의 그 타고난 부드러움과 선량함, 아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보루가 되어 나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가정이 끝내 지켜졌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이혼을 반대하고 그러는 와중에 우리가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내었던 것, 그건 대부분 당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죠. 내가 당신의 친절에 힘입어 조금더 마음이 넓어졌고 성숙해졌으며 그렇게 행복을 영위하였어요.
하지만 때로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것으로 참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는 걸 알아줬음 하네요. 이제는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좀, 아니 많이 특이하쟎아요. 생각하는 방식도 내용도 많이 그리고 자주 평범한 양태를 벗어나곤 하니까요. 사람에 대해 넉넉한 품도 없어 성격도 까칠 그 자체이기만 하니 그런 나 자신을 스스로도 피곤해할 때가 있었어요. 그럴땐 당신이 왜 나보다 더 품이 넓지 않냐고 비난하고 서운해하기도 했었죠. 스스로를 추스리고 위로하기 버거울 때는 누구든 손 내밀어 도와줬으면 하는 의타심이 생기니까요. 물론 우린 타입이 많이 다른 사람들이라 서로가 상대의 고통에 대해선 쉽게 냉정해지곤 했었죠. 당신 뿐아니라 나도 말이에요. 알면서도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무안해하는 데도 못 본 체 돌아서기도 했었어요. 내가 그정도의 인간인지라...이젠 서로 퉁치기로 해요. 우리 별로 친하지 않으면서 그 정도 유지한 것도 잘 한 거쟎아요. 안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나요? 결혼하고 이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건사하며 한 집에서 살아온 거,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았쟎아요. 그정도면 무난했다고 생각해요. 상상 속의 스위트홈은 아니었어도 경제적으로나 관계에 있어서나 일상의 므흣함을 느끼기도 하면서 여느 부부, 가정 못지 않게 잘해왔다고 생각해요. 수는 못 되도 우는 되어요. 굳이 흠을 잡자면 부부관계가 매우 희박했다는 건데 그건 다른 멀쩡한 부부들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니까. 그리고 우린 둘 다 그렇게 열정적인 타입은 아니었쟎아요? 대강 참을만 했죠? 이해해줘요. 내가 좀 아니 많이 까칠하쟎아요. 맛있기만 한 갈비침도 즐겨 먹기를 꺼려하는 성격이니까요. 즐거운걸 즐기지 못 하는 이 자의식과잉의 내가 정말이지 나도 지겨웠답니다.
당신보다 내가 더 지겨웠어요. 그런 내 자신이. 한번도 자신을 맘 편하게 긍정해보지 못 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지금 가는게 속이 시원할 정도에요. 죽음 이후를 바라보지도 않으니 삶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가 너무 많지만 않다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막연히 기대했던 것처럼 훌륭히 살아내진 못 했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가끔 게으르게 자신을 방치한 적이 없지 않으나 대체적인 성의는 보였다고 자평해요. 그러니 이만 끝내도 될꺼에요. 당신과의 사이가 너무 격화되지 않았던 것도 다행스런 일이에요. 우린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나보다 당신이 더욱 그래요. 그러니 내가 가는 것에 대해 너무 마음 아파 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자책하지도 마세요. 자책할 것도 없긴 하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 잘못은 아니쟎아요. 그런 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요? 여보, 당신. 가능하면 당신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또 만나서 조금 더 행복해지세요. 룰라도 말했쟎아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말라고. 당신은 더 많이 누리고 더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구가해도 될 만큼 충분히 훌륭한 분이세요. 열심히 일했고 정직하고 순수하며 인간에 대한 예의와 자신에 대한 존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어서 다행이에요. 당신이 나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받으니까요.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지 못 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은...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행복했을꺼에요. 아마 그럴꺼라는 생각을 지금 이순간까지도 버릴 수가 없답니다. 물론 조금은 내가 피곤하게 굴어서 좋은 점도 있었을꺼에요. 다른 각도에서의 생각을 해 볼 계기를 주었다던가 하는?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라도 조금은 나라서 당신에게 좋은 점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그랬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더 좋아졌으면 해요. 당신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또 내가 두고 가는 아이들과 항상 행복하기를 바래요. 진심으로요. 내 걱정은 마세요. 이제야말로 나는 절대적인 자유를 향해 드높이 날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는 이런게 행복해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장자의 다른 꿈속으로 가고 있어요. 안녕, 이편에서의 꿈이여, 사랑이여. 모두들 굿바이.
나는 좋아하고 싫어하는게 분명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직선적으로 다 표현하고 사는건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가 평탄하진 않았다. 결국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겠지. 좋으면 헤벌레해지고 싫으면 어쨌든 어색해지니까. 왜 그럴까? 좀더 둥글어질 순 없는 걸까.
라고 속말을 하는순간 또다른 내가 반박한다. 지금도 충분히 둥글어!
그래, 이해한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나르시스트같으니라구, 나는 뇌까려주었다. 그는 자기학대에 익숙하다.
동시에 어떻게든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찾는 데에도 능수능란하다. 예를들면 비교적 어릴 때에는 자기합리화를 많이 했다. 좀 크니 선배들이 넌 너무 자의적이야!라고 충고했다. 그건 넌 자뻑이 심해!라는 뜻이었을까? 나중에는 그들의 눈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드는 이런걸 동일시라고 했다던가. 하지만 이렇게 억압된 호,불호의 감정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금욕과 몰입으로 전이되었던 것같다.
아무도 혼전성교를 문제시하지 않는데도 대세와 상관없이 "그건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 라고 말했었다. 제도로서의 결혼과는 별개로 섹스에 임할 때는 그 정도로 진지해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상대는 그저 '해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었다. 해서 상처받았다. 하지만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수는 없었다. 이후 금욕주의는 보다 강화발전되어 프리지디티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뭐 별로...
안나 프로이드는 청년기의 본능적 욕구와 불안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신적 파멸을 초래한다고 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해 금욕주의와 함께 자주 사용되는 방어기제로 지성화를 들었다. 지성화는 고통스럽고 불편한 사건이나 생각에 관련되는 감정들을 해명하여 없애기 위해 단어, 정의, 이론적 개념 등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주지화라고도 번역되는 그것은 예를들면 지적 토론을 벌임으로써 그 문제에 대한 불안을 중화하거나 회피하려는 행동으로 표출된다...바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조금 더 감정적이 되고 싶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가능한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려면 말이다. 정직, 그것은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금언도 있지만 특히, 빌리조엘의 honest를 좋아하던 소년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패가망신했던 소녀의 이야기 "17세의 나레이션"을 되새겨봐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누구인가, 또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내 사랑을 고백하고자 하나, 그전에 해결해야할 게 있다, 그것은 문제제기를 하기 앞서 전제적 정의가 올바른가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지겨운 논문형 어투...가 나도 지겹다는 것을 고백한다.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꼭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게 의도성 여부와 상관없이 작용한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일정 성향이라는게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화책을 읽기보다 백과사전 보기를 더 좋아했다. 소설보다 역사책을, 드라마보다 사극을 더 흥미롭게 보기도 하고 지금도 만화책 보는 것처럼 논문을 읽곤 한다. 그건 뭘 하거나 보든 사상(事象)은 분절된 사물이나 현상으로 존재해선 안되고 하나의 사상(思想) 으로, 통일된 체계 속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즉 눈 앞의 세계는 그 과거를 포함하여 해석되고 통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래를 조망할 수 있을 테니까, 단지 그 때문이었다.
예를들면 집에 누군가 손님이 와서 자고 가게될 경우가 있다. 그때 아이들은 묻곤 한다. " 삼촌은 언제 가실껀가요?" 그걸 빨리 가버리라는 식으로 곡해하여 조카를 괘씸히 여긴다면 아직도 매우 미성숙한 어른일 것이다. 아이는 단지 자신에게 있어 세계의 전부인 거나 마찬가지인 "집" 안에 누군가가 숙박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변화된 환경이 얼마나 지속적인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인지를 파악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이미 적응하고 있는 일상이 파괴되는 것은 불안을 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선 우선 내 자신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반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게 합리성을 부여받지 못 한다면 사랑은 시작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나 욕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 나는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사랑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평온하고 안정적인 가운데 조용히 일어나는 열망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마음 속으로만 존재하고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예는 우리가 흔히 읽어내는 19세기 고전 소설과 이후 여성해방의 담론이 만연한 현대의 중성문학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더 부연하는 것은 그야말로 글의 쟝르를 변질시킬만한 주지주의의 패악이 될 것이니 각설하겠다. 벌써 사랑을 고백하겠다는 화두를 던져놓고 각론에 가지치기를 이어 삼천포로 빠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일찌기 이 주제로 약 2년 반전에 두달 반에 걸쳐 고뇌를 거듭한 적이 있다. 그때에 나름 친밀한 벗들을 방문하여 평소보다 더욱 친숙한 양을 하며 물었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혼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벗들은 왜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하고 어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다른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니까...그들은 대뜸 그래서 재혼할 꺼냐고 물었는데 그런건 아니라고, 그렇게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론은 무척 단아했는데 즉 재혼할 상대도 아닌데 왜 이혼을 하느냐구, 비록 남편과 소원해져있다 해도 아이의 양육이라는 게 걸려있는데 그리 아무 대안 없이 혼인관계를 단절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여타 군더더기 변명들도 있으나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부각시키면 요컨대, 경제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법정 양육비의 지급규정도 있고 재산분할에서의 유리한 점, 어차피 한쪽 부모로서의 자기 경제력이란 것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면서 나의 사랑없는 결혼의 종식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랑없는 결혼을 시작하면서 상담을 요청했을 때는 그리도 쉽게 동의했던 그들이 말이다. 물론 친구였기 때문이겠지, 그래 드디어 하는구나! 축하한다. 라고 했던 벗들은 아니, 이혼은 그리 쉽게 생각해선 안돼. 라고 말하면서 더욱 신실한 우정의 포옹을 하며 속삭였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닌데 왜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이혼사유가 되니?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내 갈등의 문제제기에 대해 메피스토펠세스와도 같은 미소로 응답했다. 양다리 걸치기,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쟎아?
나는 호, 불호가 심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러한 위치에 두고 그래서 더 좋아지지 않는 사람 앞에서 번연한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늘 과장하여 불만을 토로했고 다소 그럴만하다고 생각되는 항의를 묵살했으며 조금만 억압적 태도를 보여도 심하게 격앙되어 남편과의 관계를 극단으로 몰아갔다. 그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선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둘 다 아니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침묵으로 버티기로 한 것 같다. 내 사랑은 진전되지 않았다. 아니, 시작되지 못 했다.
가설을 세웠으나 검증결과는 부정적이었으니 실험실을 나가 현실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내 사랑은 상념의 공간으로 돌아와서 이제 망상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살게 되었다. 말하자면 양다리걸치기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니었고 나는 결혼관계를 서류상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 정식으로 해소하지 못 한 이상 바람피우는 상대로 만들 수는 없었다. 뭐, 이리 말해봤자 별로 현장감은 없다. 나는 고백 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는 속담도 있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랑에 고백이라는 모험을 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다. 노화가 뭐 어쩄다는게 아니라 살아온 연륜이란게 있고 경험치라는 게 있는거니까 하는 말이다. 극적인 대사란 해서 관계를 깨는 걸 목표로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걸 반드시 경유함으로써 질적인 변화,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그걸 말로 내어 감정을 밝히 보이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다. 그 정도는 그냥 필로 아는 것이다. 말은 필요할 때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그래서 섹스를 해야겠다라든가 뭐 그런.
날이 갈수록 나는 둥글어지고 싶다. 양다리 걸치기, 그게 왜 안되는가? 남편과는 정리만 안했다뿐이지 이미 갈데까지 간 사이다. 나는 그에게 인생의 끝까지 갈 수 있는 애인을 구하라고 충고했다. 이에 그는 걸리지말고 바람피우라고 대답했는데, 나로서는 그것으론 좀 부족하다...
나의 호,불호는 이제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내 이렇게 오래고 세밀한 고뇌 - "머리카락에 골을 팔 듯이 치밀한"이라는 표현을 오늘 찾아냈는데 바로 여기에 적절히 사용하고 싶다-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자는 오늘도 처연히 웃으며 안부전화를 해왔다. 고백을 하지 않았으니 시작되지 않은 사랑에게 탓을 할 수도 없으니 나는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이젠 싫어지려고 한다. 무딘 인간 같으니라구! 이렇게 지쳐가다가 없어지고 말 사랑이라면 2년쯤 전에 확 당겼을 때 넘어져나 볼 걸 그랬다고 후회의 쓴웃음이 지어진다.
내가 과연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을까? 나는 단지 이유가 많은 사랑, 조건을 보고 하는 사랑에 대한 반발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사랑에 관한 열정에 단지, 지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가장 순수한 사랑, 그것을 하고 싶어서 그를 오래, 지루하리만치 오래도록 상념해왔던 것이다. 나는 호, 불호가 분명하나 거의,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살고 있다.
당신의 앞에 오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만 노년의 자유를 갖고 싶다. 늙고 싶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 퇴임하고 싶은 갈망의 오후
당신이 보이고 또 가르친대로 살기 위해 애써왔다. 밀어내진 채의 가슴에 식은 열정을 안고.
아무 소득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
가슴은 식은 열정 마저 없이 텅 비었다.
빈 껍데기의 골뱅이처럼 당신의 무릎 아래 꿇어앉는다. 발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이윽고 손을 내밀어 내
단단한 껍질을 벗겨주길... 나는 언제나 속을 털어 내보일 준비가 되어있다.
손가락을 밀어넣어보라 나는 반대편의 구멍으로 빠져나오는 당신의 손가락을 보게 할 것이다.
당신이 보이고 또 가르치는 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당신의 피그마리온,
하지만 숨을 불어넣진 말아주길, 다시한번 삶을 살아낼 자신은 없으니.
마흔, 마흔 하나, 마흔 둘, 마흔 셋, 마흔 넷, 마흔 다섯! 사사오입으로 오십. 다시 사사오입하여 백.
이제 생의 뒤켠에서 있고 싶다.
무릎 관절염이 도져요, 선생님. 당신이 옆에서 늙고 싶다는 게 내 유일한 소망이에요.
당신의 앞으로 돌아오기 위해 살아왔다.
이젠 함께 죽고 싶다. 죽은 듯이 살터이니 제발,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번엔 진짜로 죽어버릴테야요.
그가 나를 죽였다.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왔다. 나의 사랑하는 그가 위령의 손을 든 6월 이후 잘려진 머리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군중을 향해 내보여지는 것을. 공포로 확장된 동공에서 흐르는 피는 희고 가는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죽은 자의 공포는 죽이는 자들을 향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9월의 학살은 복수의 칼을 가는 죄수들을 향해 행해졌다. 그들이 외적을 불러들였다! 조국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대담해져야 한다!! 크고 퉁퉁한 얼굴의 집정관이 부르짖었고 나의 사랑하는 그도 동의했다. 마르고 피삽한 얼굴로 그의 왼편에 서 있던 벗의 죽음에 의해 그것은 더욱 합당함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아는가 나의 벗 나의 사랑하는 친우여, 그대의 순결한 영혼이 또한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대의 죽음을 보고 있다. 제발 그 전에 나를 죽여주길!
- 데믈랭, 1793년 4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로 보내지다. 이후 3개월이 지나지 않아 같은 곳에서 까미유의 루이루그랑 학원시절의 동급생이었던 그, 나의 막심은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다.
" 뭐라고? "
팀장은 일시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흡사 바베큐 통구이를 하는 화로통의 뚫린 창으로 보여지던 붉은 고깃덩이와 같다. 데믈랭은 속으로 젠장.하면서 45도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빠르고 정중하게 나름 정당성을 갖춘 설명을 시도했다.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맡은 쟝이 결근한 것은 무단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얼마전부터 휴가신청을 했음에도 직속상관인 자신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처리를 못 한 것으로...
" 프리젠테이션 발표자가 휴가라니? 지금 이번 창립총회에서 우리 과의 발표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몰라서 그러나! 쟝, 그 친구는 그만한 분별력과 판단력도 없는 자인가? 그래갖구 내가 자네를 믿고 TFT 팀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나? 아니,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 줄 몰라! "
오십에 막 들어섰을 뿐인데 유난히 배가 나오고 목에서 턱에 이르는 겹살의 수조차 헤아리기 어렵게 뚱뚱한 팀장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데믈랭은 사선으로 내리깔은 눈 바로 앞으로 유성처럼 날아드는 침의 꼬리를 보면서 귓전에도 머리카락 속으로도 어깨 위로도 화학전에나 나올듯 싶은 악취의 발생원이 투척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 끝이 하얗게 떠가는 것 같았다.
" 죄송합니다. "
팀장을 진정시켜 내 보내기까지 족히 한시간은 걸린 것 같다. 데믈랭은 과연 창립총회에서의 발표를 팀장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제 겨우 삼십분이 남았을 뿐이다.
" 자네가 발표를 맡겠다니까 말이야... 좀 안심이 되네만 정말 사회를 보면서 괜찮겠나? 팀에서 다른 사람이 사회를 보거나 도와줄 수 있을꺼라곤 기대하지 말게, 우린 우리대로 따로 할 일이 있단 말일세,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우리 팀의 생사가 걸린 일이지... "
데믈랭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 걱정마십시오. TFT 팀의 사소로운 일은 제가 다 소화하겠습니다. 팀장님이 준비하신 코드네임 "열월"에는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믈랭은 팀장의 불타는 듯한 눈을 마주 보면서 바로 이어 말했다.
" 형식적인 위선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창립총회에서 신임이사들이 TFT 팀의 기획력에 주목할 때 팀장님은 바로 그들의 지척에서 뉴리더의 얼굴을 확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정하신대로 2차 회동의 일정을 확인하실 때쯤 총회의 마무리잔치는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
팀장은 크고 두터운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데믈랭을 향해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더이상 그는 쟝의 무단결근을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것 때문에 데믈랭은 본의아니게 과장된 충성과 우정어린 태도를 저 뚱보에게 보인 것이다. 데믈랭은 팀원들을 돌아보며 자, 빠르게! 확실하게! 보여주자구, 팀의 1년 예산이 걸려있다구! 설마 취업시즌도 다 지난 춘삼월에 새로운 이력서를 만들고 싶진 않겠지? 데믈랭은 인턴을 갓 벗어난 팀원들에게 뭐가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기획? 그건 새로 구성될 이사진들 중 어디에 선을 댈 것인가와 관련된 팀장의 기획에 비하면 사소한 각론에 불과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데믈랭에게 중요한 건 지금 쟝이 없다는 걸 무화시키는 것이다.
쟝은 전에 없이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해 왔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데물랭은 입었던 침실 가운을 벗고 다시 와이셔츠와 통바지를 입었다. 단추는 두 개 이상 풀지 않았다. 피아노 위의 시계는 큐빅이 박힌 시침을 10과 11 사이에 놓고 있었다.
" 어서 와. "
" 미안해. "
" 아니, 괜찮아. 잠이 안 와서 와인이라도 한 잔 할까 하던 참이었어. "
" ... "
데믈랭은 그가 내일 총회 준비 때문에? 하고 되물을 줄 알고 쳐다보았으나 쟝은 그럴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한 뭐라고! 내가 그깟 사소한 일에 흥분이라도 할 줄 알았어? 라는 대답은 필요가 없어졌다. 데믈랭은 흠흠.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피스텔 주방 쪽의 식탁을 겸한 바의 뒤로 돌아갔다. 미리 내어놓은 와인잔 옆으로 쟝 쟝 카베르네 쇼비뇽을 올렸다. 왕의 와인이자 와인의 왕이라는...비싼 술에 전혀 주의가 안 가는 쟝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라고 차분하고도 살갑게 질문을 내리까는 데믈랭은 역시 신입사원 연수시절로부터의 오랜 벗이었다. 그의 굴참나무같이 폭신하고 부드러운 두께감에 의지하며 쟝은 붉은 좌판의 바의자를 당겨앉았다.
" 휴가를 써야겠어. "
" 어제 끝난 얘기쟎아. 내일 총회를 마치고 쓰라구...근데 대체 뭣 때문에 그래?"
데믈랭은 어제와 오늘 낮 그리고 다시 오늘밤으로 이어지는 쟝의 휴가 타령에 결국 불길함을 느꼈다. 쟝 쟝 카베르네 쇼비뇽은 이런 맛이 아니다. 본시 스위트한 주종으로 새콤달콤하니...근데 신 맛만 나고 있다.
" 마리가 결혼한대. "
" 아...그래? "
그렇군. 하고 담담히 말끝을 더 길게 늘이고 싶었다. 하지만 쟝은 들을 생각도 짬을 가질 여유도 없어 보였다.
"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
" ... "
데믈랭은 우리가 아무리 사회초년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절친이지만 그렇게 사적으로만 중요한 문제에 의문형 질문을 던지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어떻게? 뭘 어떻게? 왜 내가 그렇게 추상적인 거대담론에 멘토의 역할을 해야 하냐구, 좀더 미시적으로 구체적으로 물어주면 안되겠나? 그녀를 잊어야겠지? 하면 예스노로 대답해 줄텐데, 가볍게 더욱 가볍게.
" 어떻게 하고 싶은데? "
" 넌 어떻게 생각해? "
what? 정말로 내게 A부터 Z까지의 설명을 기대하는거야? 내가 해석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면 너는 납득할꺼야? 인정하고 그걸 규준으로 행동할꺼야? 맙소사, 이런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데믈랭은 머릿속의 방백은 상대역의 배우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헷갈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화의 맥락을 바로 잡았다.
" 네가 사랑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거지. "
" 사랑해. "
저런! 짤없는 답변하고는! 하지만 쟝은 바로 덧붙였다.
그것만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어. 하고 말이다. 옛쓰!!
" 네가 뭘 고민하는지는 알아. "
" 결혼이 우리들의 일정에 올라온 적은 없었어. "
잠깐, 여기서 "우리들"이란 적어도 다섯명은 넘는 신입사원 연수시절의 동기동창생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린 서른을 코 앞에 두고 있으나 아무도 결혼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심지어 가족으로부터의 압박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앞서 왜 결혼해야 하지?하는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이 한 가지도 나오지 않고 있는 모태싱글, 출산율의 국가주의적 계산법에 전혀 맘이 흔들리지 않는 코스모폴리탄, 새로움을 더해가는 미래에 생물학적 가족은 오년 마다 바꾸는 자동차가 메이드 인 코리아인지를 살피는 수준의 주의도 끌지 못 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신인류가 바로 우리였다. 우리, 독신자클럽의 맹원들. 하지만 데믈랭은 다정다감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연설보다 시를 좋아하는...주장을 펴서 설득하기보다 밀담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게다가 무엇보다 쟝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 마리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깊은 감정인지, 놓칠 수 없는 여자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연애는 스물에도 서른에도 진하게 한 번씩 왔다가 또 갈 수 있지만 결국 생애의 끝에 가서 함께 하지 못 한 것을 통탄해 할 것 같으면 말야, 친구들을 걱정할 필욘 없어. 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
데믈랭은 진지한 얼굴로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고 생각하면서 낮게 조용히 그리고 정말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쟝은 와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가 전날밤 얼마동안이나 있다가 갔는지는 모르겠다. 데믈랭은 새로 두시를 넘어가는 시침을 보면서 침대 속에 있었으나 와이셔츠에 통바지를 입은 채 그저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쟝은 중요한 총회가 있는날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의 발표를 맡고 있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데믈랭은 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쟝에 대해선 그 이상을 알고 있었다. 쟝이 준비한 자료를 페이지수만 보고도 발표자의 단상에 바로 오를 수 있었다. 다음 순서는 이번 연도의 사업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밑그림이 될만한 프리젠테이션입니다. TFT 팀의 야심찬 기획! 바로 제가 준비했습니다. 하고 명랑하게 말끝을 늘이자 관중들의 환호가 터졌다. 데믈랭은 무대의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재빨리 이동하면서 모노드라마의 유일한 화자역할을 능숙하게 해냈다. 총회는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태스크 포스 팀(특별기동대)의 프리젠테이션은 이사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총회에 참석한 투자가들의 신뢰를 굳건히 하는데도 일조했다. 팀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이사들의 테이블에 동석하고있었다. 이젠 마무리할 시간이다. 저들이 2차를 가는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더욱 흥취를 돋우어 3차를 가고 또 밀담의 공간을 찾게 하기 위해서 데믈랭은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누가 쟝의 부재를 떠올리겠는가? 팀의 예산은 확보되었고 이것으로 인턴딱지를 떼고 정규직 월급을 받기 시작했으나 대학시절부터 누적되어오기만 한 부채를 갚기엔 실로 인생이 암담하기만 한, 우리들의 88만원은 적어도 세자리수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데믈랭은 러닝타임 두시간의 막판에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나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관객을 보면서 임계점을 넘어섰다. 파이널무대의 제목을 쓴 무대 휘장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우아한 자주색 비로도의 휘장에 형광색종이로 너덜너덜 붙인 낱자들의 게슈탈트를 관객들이 눈치채기 시작하자, 너무나 익숙하고 애절한 트로트 가요의 반주가 홀의 모든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죽도록 사랑하면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해~
그날 데믈랭의 와이셔츠 단추는 세 개 이상 풀어졌다.
십년 전 신입사원 연수시절 데믈랭의 별명은 독고다이였다. 그건 나름대로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며 동고동락해온 친구들, 즉 독신자클럽의 맹원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지금 다시 그와 동고동락하고 있는 TFT 팀의 성원들은 불안한 회사생활 중에 빠릿한 선배로서, 능글한 아첨꾼으로서 그리고 또 망가지는 춤꾼으로서 1인다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데믈랭에게 이런 별명을 붙였다. 가증의 꽃다발! 대체 당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쟝은 모든 일이 끝난 후 돌아왔다. 옆에는 마리가 있었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1년 후 TFT 팀이 해체될 때쯤엔 쟝은 회사를 떠났다. 새로운 기획은 실패했고 회사는 인수합병되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데블랭은 독신자 클럽의 맹원이었지만 결국 외로움을 버티지 못 하고 결혼했다. 합병된 회사에서 만난 쥴리와의 결혼이 과연 데믈랭에게 생애의 마지막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한 사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질문 따위 아무에게도 데믈랭에게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데믈랭은 쥴리와 결혼한 다음해에 쟝이 마리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머릿속의 누군가가 방백을 하는 것을 들었다. 대체, 넌 왜 결혼이라는 무덤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거야? 봐, 쟝은 다시 나갔쟎아! 데믈랭은 자신의 귀로 직접 듣기 위해서 혼자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 우리들의 일정에 이혼은 있었던가? "
윤은 아까부터 열람실의 6인용 탁자와 개가식 서고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한 남자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춘삼월에 털달린 외투를 입은 채 시야를 가리며 지나가더니 좀 있다 다시 와서 건너 탁자 위로 책 몇 권을 더 쌓았다. 베이지색 파카의 소맷부리엔 800이라 쓰여있는 것이 돈푼 들었음직한 거위털 파카였고 좁은 어깨 위로 풍성한 토끼털이 늘어져있어선지 흡사 여자들이 래빗 퍼 패딩을 입고 도심을 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윤이 그나마 착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신학대에 들어있는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대학원생들이고 사제복을 입은 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경건 그 자체인 예배당에 고행과 구도의 수도원을 믹스해놓은 듯한 이 성스러운 면학의 공간 속에서 토끼털 파카의 남자는 왠지 무척 어설퍼보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머리칼이 하얀 이마 위에 흘러내리는 데도 두 손 가득히 무거운 책들을 들어나르고 있는 남자에겐 주변의 공기를 떠받치고 있는 것도 힘겨운 듯 가끔 얇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것도 탁자 위에 쌓아놓은 책 뒤로 고개를 숙인 채 가벼운 날숨처럼 살짝 쉬고는 곧 두 눈을 들어 주변을 무심한 척 한 번 둘러보는 것이었다. 뭔가 자신이 실수를 해서 주의를 끄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우나 새학기를 막 시작한 여기서 낯익은 자는 없을테지하는 안도가 엿보이기도 했다.
윤은 저도모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이상한 오버랩은. 많아야 스물 한두살이나 되어보이는 남자의 감출 수 없는 온순함이 애써 만들고 있는 무표정 속에서도 느껴졌다. 대부분 검정 양장본의 전집도서들 옆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제본노트와 만년필을 보면서는 더욱 학자연하는 태도로 앳된 이미지를 감해보려는 새내기들의 치기가 느껴져 속으로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칠년 전 시골에서 올라온 첫해, 고아였던 자신을 거둬주신 신부님의 추천서 한 장을 들고 입학한 신학대학의 장엄함에 눌려 몇 개월을 허둥지둥하며 보냈던 때가 생각나자 더욱 웅숭깊은 미소가 배어져나왔다. 학부의 신입생이야, 저건. 독실한 중산층 가정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다가 이제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생을 독대하게 되니 아주 기가 질린 게지. 뭘 저리 많은 책을 쌓아놓나. 윤은 남자가 책더미 뒤에 숨듯이 고개를 박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을 무슨 진풍경이라도 되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형순의 고향은 경상도 하고도 낙동강 이남의 두메산골이었다. 경사 45도로 비탈진 땅 위의 문설주는 왼쪽이 오른쪽에 비해 반토막으로 짧았다. 딸 많은 집안의 둘째였던 당신에게 한번도 입성 발릴 새 옷 하나 걸리지 않았던 것에 옹이지듯 한이 남았던가, 맏아들에 쏟는 정성만큼 둘째인 딸에게 드는 편역도 보통 아니었다. 그에 비해 철딱서니 없고 이기적이기만 한 막내아들에겐 미처 신경을 쓰지 못 했다. 아니 아마도 그것은 모질고 패악스러운 남자에게 함부로 넘어뜨려진 자신의 위로 몸을 엎디어 준 것이 오직 이 여리고 작은 딸아이였기 때문이겠지...순하고 유약한 오래비와 아직 어리고 세상분간을 못 하는 남동생을 차마 비난도 못 하고 둘째는 늘 엄마의 앞을 막아서며 아비의 손찌검을 대신 받곤 하였다. 그 보들한 뺨에 붉게 도드라지는 핏줄기를 목도하고선 더이상 널부러져있을 수가 없었다. 형순은 더욱 표독스러이 입술끝으로 저주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고 정신을 놓았다.
그때문일까, 형순은 딸이 둘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서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한 번 두 번 병원을 내왕하고 검사도 받고 수술도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남편은 그제서야 혼이 나간 듯 두 눈을 희번득 거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형순은 그의 불안과 초조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았다. 남편은 혼자 남겨질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입 속으로 웅얼거리듯 불평을 끊이지 않으나 분명히 힘을 다하여 제 허리를 부축해주는 남편의 손길을 느끼면서 형순은 한이불을 덮은 지 오십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우위에 서게 되었음을 자각하였다. 속을 끓이다 무심코 욕지기를 내고 마는 아비에게 딸은 그 어느때보다 더 표독스럽게 질타하였다. 당신이 내 엄마를 이리 만든 것이다라며, 형순은 그 말이 과하다 생각했으나 침묵했다. 남편은 두려움에 눌린 눈으로 딸과 아내를 둘러보며 입술을 옴짝거릴 뿐 말을 만들지 못 했다. 벌써 삼년이 넘어섰다. 이 새로운 구도에 형순은 휠체어에 기댄 채 속으로 고솜함을 삼키고 있다. 때로 허리의 통증은 심해지기도 하여 문 안에서의 생활을 며칠씩 길게 늘이기도 하였다. 바깥바람을 쏘이지 못 한채 어깃거리며 일상을 영위하다 보니 감기도 자주 걸렸다. 남편은 우울한 낯빛을 몇 달간 계속하더니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도, 선산도 없으니 하고 우물거리며 공원묘지를 사 두는 게 어떻겠나 말을 내었다. 형순은 맘대로 하라 하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이리저리 묻기만 하더니 어느 햇살 바른 날 형순이 그럼 구경이나 해 보자, 미리 준비해두면 맘이야 편할 테지하고 쫓아오는 눈빛에 답을 해주니 바로 채비를 하고 나서 납골당 답사를 다녀왔다.
본시 저런 위인이니, 형순은 속으로 혀를 차며 남편의 공원묘지 구입에 힘을 실어준 후 보이는 대로 권하는 대로 다 좋다 하였다. 그런데도 달포를 두고 이리재고 저리재는 남편에게 하마 아무따나 싼 걸로 하나 사두고 말어라고 내뱉듯 말했다. 순간 분기를 참지 못 하고 또 달려들 듯 하였으나 남편은 차마 손을 올리지 못 하고 팽하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는 아비를 보며 이리저리 밀담을 나누는 듯 하더니 딸이 저만치 아비를 남겨두고 다가와 형순에게 웃어보였다.
" 엄마 좋아하는 볕 바르고 바람 잘 드는 곳으로 정하였어. 나중에 우리 딸들도 소풍 오듯 와서 놀다갈 수 있을테야. 돈이야 좀 들지만, 어차피 엄마아빠 고생해서 모은 돈인데 남길 게 뭐 있어, 저기가 아주 풍광도 좋지 뭐야. "
형순은 괜시리 눈물이 맺혔다. 딸의 딸들은 어찌나 작고 어여쁜가, 형순이 서울살이 첫해에 행상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맹물로 목만 축이고 있을 때 저 둘째는 품에 안긴 채 젖배를 곯았었다. 그래 저리 키도 안 크고 매사에 힘아리가 없는게지, 그저 눈만 크게 뜨며 앙칼지게 대어들 줄이나 알았지...형순은 딸의 손을 잡고 속삭이듯 말을 뇌었다.
" 내가 니게 부탁 하나 하자. "
" 응, 뭐? "
딸은 몇 시간을 헤매이고 있는 공원묘지 안에 아늑한 자리를 골라 어미를 앉히고 곁을 지키며 애잔하게 되물었다.
"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서...내 부모가 묻힌 산자락에 뿌려다고..."
"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여기를 선산 삼자고 사고 있는데. "
" 나는 니 애비 옆은 싫다...내가 나고 자란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
별로 오래지 않아 딸은 나직히 뇌이듯 대답해 주었다.
" 걱정 마셔, 엄마 원대로 해 드릴 터이니. 나도 외갓집이 좋아. "
그리곤 빙긋 웃으며 뒤미쳤다.
" 저거 샀다가도 나중에 오빠가 받아안게 되면 아무때고 되팔 수 있어. 아님 아빠만 저기 두고 가지, 뭐. 호호호. "
재준은 짧고 굵은 손가락을 펼쳐 새로 산 중절모의 양옆을 쓸어내렸다. 먼지 하나 없었지만 정성스레 폭좁은 챙을 빙 둘러 모양을 다시 잡아보기도 했다. 검정빛 펠트의 감촉은 우단처럼 부드럽다. 하여 십수년 전에 구입했으나 아직도 충분히 태깔 좋고 뜨슷하며 품위있어 보이는 갈색 무스탕 위에 점잖게 어울려든다. 비록 공들여 빗어넘겨도 한 올 한 올 셀듯이 솎아지고 있는 염색한 검은 머리카락 사이 사이를 가려보고자 쓰기 시작한 것이나, 재준은 흡족하다. 돈 값을 하는 게지, 자신은 70 평생에 비로소 동리의 있는 집 자식같은 테를 내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궐처럼 넓은 마루를 열 걸음이나 걸어나가 현관에 다다른다. 전날 닦아놓은 검정색 에나멜 구두가 현관 위에도 달아놓은 삼파장 전구의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하다. 조심스레 발을 넣고 기다란 구두주걱을 사용해 뒤꿈치에 흠이 잡히지 않는 지 살핀다. 삼십년 전 빚을 지고 사들인 후 오년 뒤에 입주하면서 새로 깔아놓은 현관 바닥의 붉은 타일은 역시 훌륭한 선택이었다. 재준은 왕처럼 어깨를 펴고 대문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 한참을 기다려도 여편네가 나오질 않는다. 연거푸 내 쉰 한숨이 십수번은 되었음직한데 말이다. 재준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두번쯤 내다가 결국 소리를 내고 만다. 허 참, 뭐 하느라 아직도 꾸물거린단 말이가! 이어 평소 맘에 차지 않았던 지집이며 자슥새키들의 행동거지들이 기억에 솟구치며 동시에 입으로도 내뱉어진다. 이리 중요한 일을 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 종자들인가 말이다! 아침 열시에는 출발해야 점심 전에 대인다고 몇 번을 떠들었는데! 재준은 더 무슨 말로 제 속을 쏟아내며 분을 참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 했다. 쉴 새 없이 주절거리며 운전석에 앉았다가 도로 나왔다가 차문을 열고 또 다시 닫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종자들을 한 구디기에 쓸어넣고 확 불을 싸 질러버릴라...고 또 내뱉고 있는데 처와 자식들이 지척지척 다가오고 있었다. 승질 드러운 딸년이 들었으면 또 한 마디 할까 싶어 재준은 얼른 입을 다문다. 삼년 전 아내가 혼자서는 걷지 못 하는 몸이 된 이후 재준은 딸년의 비난과 공격적인 언사에 입술 끝만 다실 뿐 제대로 받아치질 못 하고 있었다. 오늘도 친정아비의 부름에 제 집의 일들을 미뤄놓고 달려온 것은 큰 아들도 작은 아들도 아닌 저 딸이었다. 와서는 오빠도 채근을 하고 아픈 어미에게도 차로 가니 바람 쏘일 겸 같이 가자 권하였다. 재준으로서는 맘에 차는 일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내는 이 몸을 끌고 어델 간다고 안 갈라요. 하고 얼굴을 돌리곤 했다. 허나 지 죽을 자린데, 아니 지나 내나 죽으면 들어가 누울 자리를 보러 가는 건데 어찌 안 본다 말인가. 재준은 항시 그니의 동의와 지지가 필요했다. 장사를 시작할 때도, 집을 살 때도 자식들을 이울때도 셋집에 들어올 오십의 날품팔이 노무자를 만나고 와서도 재준은 아내에게 어찌하면 좋겠는가를 묻곤 했었다. 그리고 제 마음이 기울고 있던 대로 답을 해주면 자신있게, 한구석 불안감을 집어 안된다 하면 왜 안 되냐구 되물으며 화를 내다가도 결국 아내의 뜻대로 끌려가곤 했다. 그후에 잘되면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 하였고 삐끄러지면 그리 조언한 아내에게 탓을 하니 그럭저럭 제 속은 편했다. 허니 오늘 이 중요한 결정에 아내의 동참은 꼭 필요했다. 그걸 알고 거들어주는 딸이 속으론 맘에 찼다. 비록 저나 내나 서로를 칭찬하는 적은 없었지만서도 말이다.
차는 씽씽 내달렸다. 엊그제 카센타를 가서 이것저것 손을 보고 새로 기름도 꽉 채워놓았다. 돈을 들이니 역시, 십년 넘어 탄 차가 평소엔 삭은 쭈구렁탱이마냥 쉭쉭 거렸는데 오늘은 열아홉 처녀 모냥 착착 감겨든다. 재준은 흥이 난다. 공원묘지이니 구경할 겸 가는게지 하였으나 딸자식은 제 오래비와 틀려 벌써 가족추모공원을 소개하는 안내문이며 지도 속에 표시된 구역들과 납골당의 가격까지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얼라들마냥 제 어미가 건네주는 빵이나 씹어먹으며 헤실거리고 있는 맏자식을 보자니 울화가 치밀지만 말해 무엇하리, 재준은 니 보기에 어떠냐? 이쪽 방면 공원묘지가 괜찮겠나? 하고 조수석에 앉은 딸에게 물었다. 경기도라지만 서울에서 가깝고 시설도 좋고 풍수로도 이름났다고 하더라는 딸은 이미 인터넷으로 한바꾸 검색해보고 온 듯 하였다. 어릴적에는 그저 대들기만 하더니 결혼하여 지 살림을 꾸리고 나선 제법 세상을 안다는 듯 아비에게 들어내버리기 어려운 충고도 하며 마뜩하니 의논상대가 되어주었다. 재준은 어쨌든 맏이와 딸과 아내가 함께 가게 된 오늘 납골당 가는길이 맘에 찼다.
공원문을 들어서고도 한참 걸려 지난 번에 보아둔 묘역에 다다랐다. 재준은 이 자리하고...또 저쪽 구역의 32위 봉안묘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걸어갈 만한 위치에 휴게실도 있고 꽃밭도 있고 여가 좋겠다고 대뜸 말하는 아내와 맏자식은 도대체 생각의 깊이라곤 없는 듯 하였다. 재준은 딸에게 여는 18위이고 저쪽은 32위이나 돈가격은 400만원 밖에 차질 나지 않는다고 설명을 보태었다. 딸은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쪽은 양지이고 위치가 훨 나으니 그렇지요하면서 저쪽은 길이 가파라 나중에 손주들이 따라와 보기 어렵고 그러면 성묘를 왔다가 서둘러 떠나게 될 테니...하며 말끝을 흐렸다. 재준은 입을 꾹 다물고 딸을 쳐다보았다. 절로 이마가 찡그러졌다. 그러니 니는 어떻다는 게냐고 확 내지르고 싶으나 한틈 참고 있었다. 딸은 아비를 마주 보더니 32위를 꼭 하고 싶으시면 이쪽에서 다시 골라보라고 안을 내놓는다. 지금 기천만원을 들이는 것도 재준은 몇 달을 고심하다가 몸을 일으킨 것인데 딸년은 제가 번 돈 아니라고 저리 아까운 줄을 모른다...허나 재준은 욕심이 났다. 양지쪽에도 하고 싶고 검은 빛의 대리석이 널찍하니 32위 정도는 되어야 마음이 찰 것도 같았다. 집으로 치면 이 자그만한 석판 하나로 지붕을 덮은 납골당은 열여덟평 구옥에 불과하나 바로 윗줄의 상석에 자리한 32위의 대리석으로 된 납골당은 앞쪽에 제단도 있고 돗자리 하나 깔고 앉아 쉴만치 마당도 있으니 32평 신옥주택과도 같이 보였다. 재준은 입맛을 다시며 이쪽저쪽 납골당을 둘러보고 안내문의 가격표도 다시 보고 처와 자식들을 향해 이말저말 좀더 늘어놓아도 보았다. 어찌하면 좋을 지 당췌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점심 때를 훨 넘어가는 시각에 여편네는 몸과 마음이 지쳐 그리 궁냥할끼면 내게 뭘 더 물어보느냐고 짜증을 내었다. 나중에는 아무따나 싼 거 하라고까지 말하니 확 부아가 치민다. 내가 지금 돈이 아까바서 그런 줄 아나, 이모저모 따져보고... 성질을 부리니 아들놈은 벌써 저만치 몸을 피해 달아나고 없다. 재준은 한숨을 수십번도 더 내쉬었다. 예상한 돈이 훨씬 초과되는데...그래도 확실히 양지쪽의 32위가...
" 돈이 좋긴 좋네요, 저기 1억원짜리는 비석도 아주 크고 멋있구...앞자리도 저리 넓으니 차일을 치고 한나절을 있다가 가도 좋겠어요. 아부지, 나중에 손주들이 자기 얘들 델구 와도 편하게 놀다도 가고 그 아니래도 엄마든 아버지든 뒤에 계신 분이랑 우리 딸들이랑 소풍 삼아 자주 와 볼 수도 있고, 저쪽으로 하시는게 어때요? "
" 치아라, 마. 저건 돈지랄 하는기지! "
딸년이 저리 속을 긁으니...허나 제 속을 가장 잘 밟아보는 것은 저 승질 드러운 딸자식이었다. 볕바른 양지쪽의 32위를 보면서 딸은 애들 아빠를 데릴사위 삼아주면 우리도 부모 밑으로 들어가 누울텐데요? 하며 눙치듯 말을 던졌다. 에끼...그러면야 얼마나 좋겠냐...니 딸들도 다 내 핏줄인데....재준은 눈 앞이 얼룽거렸다. 그 순간 재준은 마음의 결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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