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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묘사

윤은 아까부터 열람실의 6인용 탁자와 개가식 서고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한 남자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춘삼월에 털달린 외투를 입은 채 시야를 가리며 지나가더니 좀 있다 다시 와서 건너 탁자 위로 책 몇 권을 더 쌓았다. 베이지색 파카의 소맷부리엔 800이라 쓰여있는 것이 돈푼 들었음직한 거위털 파카였고 좁은 어깨 위로 풍성한 토끼털이 늘어져있어선지  흡사 여자들이 래빗 퍼 패딩을 입고 도심을 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윤이 그나마 착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신학대에 들어있는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대학원생들이고 사제복을 입은 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경건 그 자체인 예배당에 고행과 구도의 수도원을 믹스해놓은 듯한 이  성스러운 면학의 공간 속에서 토끼털 파카의 남자는 왠지 무척 어설퍼보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머리칼이 하얀 이마 위에 흘러내리는 데도 두 손 가득히 무거운 책들을 들어나르고 있는 남자에겐 주변의 공기를 떠받치고 있는 것도 힘겨운 듯 가끔 얇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것도 탁자 위에 쌓아놓은 책 뒤로 고개를 숙인 채 가벼운 날숨처럼 살짝 쉬고는 곧 두 눈을 들어 주변을 무심한 척 한 번 둘러보는 것이었다. 뭔가 자신이 실수를 해서 주의를 끄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우나 새학기를 막 시작한 여기서 낯익은 자는 없을테지하는  안도가 엿보이기도 했다.

윤은 저도모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이상한 오버랩은. 많아야 스물 한두살이나 되어보이는 남자의 감출 수 없는 온순함이 애써 만들고 있는 무표정 속에서도 느껴졌다. 대부분 검정 양장본의 전집도서들 옆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제본노트와 만년필을 보면서는 더욱 학자연하는 태도로 앳된 이미지를 감해보려는 새내기들의 치기가 느껴져 속으로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칠년 전 시골에서 올라온 첫해, 고아였던 자신을 거둬주신 신부님의 추천서 한 장을 들고 입학한 신학대학의 장엄함에 눌려 몇 개월을 허둥지둥하며 보냈던 때가 생각나자 더욱 웅숭깊은 미소가 배어져나왔다. 학부의 신입생이야, 저건. 독실한 중산층 가정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다가 이제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생을 독대하게 되니 아주 기가 질린 게지. 뭘 저리 많은 책을 쌓아놓나. 윤은 남자가 책더미 뒤에 숨듯이 고개를 박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을 무슨 진풍경이라도 되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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