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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녀가 대학에서 데모를 하러 다니고, 낮에.
밤에는 세미나를 하러 다닐 때. 학교를 벗어나서 알 수 없는 여러 대학의 여러 남녀들과 어울려 세미나를 하느라 그녀는 주로 밤에 모였다. 룸이 있는 카페들이나 아니면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그리고 지하철이 끊길 때쯤 막차를 탔고 여느 대학생들처럼 남자들은 여자들을 바래다주지 않았다. 물론 커플이 된 여자애들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몰라서 그렇지, 커플이 되어가는 중이었던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지도.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여자동기는 항상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집이 큰 길가에 있어서 자기는 위험한 골목길이라는 걸 잘 몰랐다고. 하지만 그 여자동기는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들이 많이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주택가에 집이 있었다고. 그렇게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여자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고. 운동을 하는 남녀 대학생들은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회가 만들어놓은 차별을 간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는데.
그런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가던 동기는 정말로 집 근처에서 성폭행을 당했었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녀는 뭐라 위로해야 할 지. 그냥 담담히, 그런 건 그냥 사고같은 거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라고. 우리들은 모두 그런 현실에 분노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다행히 친구는 많이 힘들었지만 많이 도와주었던 친구가 있어서 잘 극복할 수 있었다며. 그리고 그 친구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였었다.
그녀는 여자들은 위험해.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 힘으로는 남자들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까. 공정한 싸움이 안돼. 싸우면서 크는 아이들이라거나, 몸으로 한 판 붙고 나면 더 친해진다거나 그런 건 여자애들에겐 해당이 없지. "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한참 말이 없다. 여자를 향해 진심으로 완력을 사용하는 어떤 남자들의 무지함과 천박함을 생각하는 듯. 비참한 표정, 그늘이 이마에 드리웠다.
그녀는 남자들의 더 강한 완력을 싫어했다. 더 넓은 어깨도. 더 크고 굵은 가슴이나 팔뚝. 나중엔 오동통한 돌쟁이 사내아이의 더 무거운 체중조차. 무거우니까 더 힘들어. 하면서. 골목길을 뛰어노는 남자아이들의 빠른 달리기솜씨나 욕지기와 함께 거칠게 내뱉고 가는 남자아이들의 고함소리에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걸 남자다움이라고 말하는 혹은 말하고 싶어하는 아줌마들, 할머니나 할아버지, 빙그레 미소를 걸고 아들을 쳐다보는 퉁퉁한 뱃살의 사내들을 피해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고 걸었다. 알고 지내고 싶지 않으니 말 걸지 말라는 듯이.
그래서일까,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샤프했다. 마른 체형에. 순한 표정,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아무리 화가 나도 상욕을 하지 못 하고 혼자 툴툴 거리는 소심가들. 츱...오래 사귀지는 못 했다. 쪼잔해서들.
그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걸 좋아한다. 커피를 마시면 꼭 비스켓을 하나. 피아노연주가 들어있는 음악이 있으면 더 좋다. 튀는 음악,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가요, 비트가 있어 배경으로 깔기에는 부담스러운 곡이 나오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귀로 상대방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 해 표정은 점점 멍해져갔고 결국 빨리 헤어지기를 원하며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 다른 음악 없어? "
하고 그녀가 요청하는 일은 드물었다. 진은 그녀와 사귀며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또 연극을 보며 덕수궁이나 프랑스문화원을 돌아다녔으며 그러지 않는 더 많은 시간을 정독도서관의 잔디밭에서 보냈다. 나중에는 그녀가 다녔던 대학 캠퍼스의 호수 주변, 오래된 문과대의 허름한 외벽 아래 그리고 고전음악감상실에서 홀로 앉아 있는 그녀를 찾아내고는 했다. 그리고 학교 앞의 작은 찻집들을 찾아 전전했다. 주로 조용한 음악을 틀고 있는 곳으로.
그녀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하기보다는 빨리 헤어져 혼자가 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진은 그녀가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기에 집중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어린 왕자
이런 제목의 간판을 달고 있는 카페들이 대체로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크고 넓은 창과 함께, 테이블 구석엔 밤시간이 아니라도 곧잘 사용되는 낮은 촛대와 밝은 색깔의 초가 놓여있고.
그녀에게 가장 추천해서는 안되는 데이트코스는 스포츠경기 관람이었으며 두번째로는 액션영화였다. 그녀는 거의...고문을 견디는 표정으로 자리을 지키곤 했다. 그것도 꼭, 정말로 그 동행했던 사람과 헤어져서는 안되는 불가피한 목적성이 있었을 경우에만. 결국 그런 것들이 그녀를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너무나 어색하게 참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은 편하게 느끼지 못 했으므로. 티비 앞에서 그녀는 시선을 멀리 혹은 빗겨두고는 했고, 드라마 속의 배역들을 변별해 내지 못 했으며 주변사람들의 수다 중에 등장하는 이름이 극 중 인명이 아닌 연예인의 이름인 것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티비보기를 포기하고 노래방가기를 꺼려하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아닌 술자리를 기피하는 그녀는 학창시절 이후에도 편하게 알고 지내는 지인을 얻지 못했다. 거기다...남자의 완력과 여자의 순종, 돈 벌어오는 기계와 같은 남편과 하녀처럼 가사서비스에 몰입하는 부인들을 보면서는 결코 그네들과 말 나누기를 하지 못 했다. 그녀가 누구와 대화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집에서도. 결혼한 시댁의 사람들과도.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 공유하는 자신의 집에서도. 그녀는 항상 혼자 있고 싶어했다. 열 아홉살에도, 그 이후에도.
여성은 불안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에게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다고 했다던가.
그녀를 뒤에서 안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수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진이 그녀에게 다그쳐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불안증과 비명과도 같았던 그 외침이 자꾸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넋을 놓고 잠들지 못 하는 그 수면장애와 함께.
" 왜 그러니? "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면서 초딩 때부터의 동무인 양 물었다. 그녀의 친구, 기억하는 한 집에서 학교 가는 길 중간 어디쯤에 집이 있었다는 5학년 때의 친구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골목과 골목을 누벼 한 가운데, 다른 한 명은 큰 길 가까운 아담한 단독주택에. 골목 속의 집도 단독주택이었으나 가내공장을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엄마, 언니들, 그외에 한둘 더 있는 여공들 사이에서 그녀는 동무와 함께 부엌 위 다락방에서 놀았다고 했다. 열 두어살 먹은 계집아이들이니 소꿉놀이를 한 건 아니고 주로 만화책을 함께 봤었다던가. 그 친구와 무얼 더 했는 지는 기억에 없다고, 저에게는 좋아하는 만화책을 함께 읽고 얘기 나눌 수 있는 것이 좋았었다고, 같은 반에 또 다른 아이가 한 명 같은 만화를 즐겨 보며 다음 편이 언제 나오는지 출판사로 전화를 하기도 하던 여자애가 있었지만 그 애와는 친할 수가 없었다고. 부티나는 차림새와 사람을 깔보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는 그애와 저는 누가 더 공부를 잘 하나 하는 걸로 비교되긴 했으나 친하지는 못 했다면서. 만화 좋아하는 애들이 공부도 잘 해. 하는 말을 하던 그애보다 마당까지 평상과 지붕을 이어놓고 요꼬기계를 늘어놓은 사이로 만화방에서 빌려온 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통과하여 다락방으로 기어올라가 함께 배깔고 만화를 봤던 그 친구는 공부를 못 했는데, 친하기는 쉬웠다고.
아담한 쪽의 단독주택에 살던 친구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진은 자신과 중학시절 같은 반이었던 그 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그녀를 이해했다. 초등학교의 친구가 중학시절까지, 그래서 사춘기적 감성으로 계속 벗이 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그녀는 편하게 추억하지 못 했다.
" 중학교 때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급생이 우리 동네에 살았는데. "
그녀는 너도 보아서 알지 않느냐며 자신의 집은 시장통에 있는 상가건물이라고. 시장통을 조금 벗어나면 조용한 주택가가 있는데. 하면서.
거기 줄 지어있는 낮은 단독들 중의 한 집이 그애네 집이라고. 자신이 알게 된 건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이 그 집딸이랑 같은 학교라며? 하시더니 같은 반이라며? 하시더라고. 서로의 부모님들이 동네 이웃이지만 주택가의 회사원 혹은 전업주부와 시장통의 장삿꾼 내외와는 별로 왕래가 없었다고. 그 가게에 뭘 사러 혹은 왜 우리 가게에 안 오나. 하는 둥의 혼잣말을 하는 경우 외에는.
진은 이 애가 왜 그 친하지 않았던 중학시절의 동급생 이야기를 하나 싶었지만, 그냥 참고 들었다. 왜 그녀가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사람 그림자에 그렇게나 놀라는 지, 놀라고 나서 안전을 확인한 후에 그렇게나 슬퍼하는지.
" 그 집 앞에서 어떤 남자가 뒤에서 확 껴안는거야...."
" 그런 일이 있었어? "
진은 가슴을 꾹 누르며 짐짓 태연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 대문이, 왜 지붕이 있어 화분이나 뭐 채소같은 걸 심기도 하쟎아. 장독대랑 이어서. "
" 응, 그래. "
" 그래서 대문 앞에 구석진 곳으로 서 있으면 잘 안 보여. 거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어두워서...새벽이었거든. "
" 새벽에 왜? "
왜 새벽에 골목길을 돌아다니냐구...진은 머리가 아프다. 이 애가...다 자란 처녀 아이가.
" 새벽에 왜 그 집 앞을 지나갔는데? "
그녀는 아니 뭐. 하면서 주저주저하더니 생긋 웃어보인다. 밤산책이 이어져서. 라는 말이라도 할까 싶었으나.
" 신문배달 하느라. "
" 신문배달? 네가? "
그녀는 이젠 내어놓고 웃으며 어색함을 얼버무리려 한다. 왜? 내가 키가 작으니까? 하고 따질 것 같은 눈으로.
" 여자애들도 많이 해. 고등학생들이나, 뭐 남자애들은 중학생들도 하쟎아. "
" 그래, 그래서? "
진은 그녀가 왜 신문배달을 해야 했는지도 의아했으나 그 새벽에 더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침이 말랐다.
" 아냐, 별 일 없었어. "
" 그래? "
" 응, 내가 놀라서 소리를 빽 질렀더니 그...남학생도 놀랐는지 금방 도망가더라구. "
" 남학생이었어? "
" 응. 고수머리의, 고등학생이나 아님 재수생? 뭐 그런 것 같던데. 그냥..."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 신문배달은 되게 일찍 시작해. 거의 한밤중에 보급소에 가서 신문을 받아다 난 몇 부 안 되어서 다 돌릴 때 쯤에 겨우 새벽빛이 조금 대문들의 색깔을 알아보게 해 주거든. 그 남자애는..."
진은 말대답해 주는 걸 잊었다.
" 내가 모자도 쓰고 점퍼에 바지입고 긴 머리도 잘 안 보였는데, 키가 작아서 여자애라는 걸 눈치챘나 봐. 아마...미리 거기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는지..그냥, 여자애를 한 번 안아보고 싶었던 가 봐. 근데 소리를 지르니까 너무 놀랐나 보더라구."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비명지르면 좀 찢어지는 목소리지. 하면서.
진은 웃음이 안 나온다. 뭐라고 대답 치기도.
" 큰일날 뻔 했네. "
" 응. "
그녀는 바로 그 신문배달을 그만 두었다며. 여자애들은 너무 불안해. 하고 중얼거린다.
" 신문배달해서... 돈 벌어서 뭐 할라구? 학생이? "
" 글쎄... 유흥비 마련? 학생이니까? "
하면서 막 웃는 그녀.
그녀를 보내서는 안되었다.
진은 빗장뼈처럼 걸리는 그녀의 호흡을 느꼈다. 허리께에 머무는 그녀의 흐느낌과 함께.
"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구 !"
이수는 반드시 해명을 하여 누명을 벗겠다는 듯 변명을 계속했다.
진은 한숨이 나왔다. 화를 내다가 큰 소리도 나오게는 되었으나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수가 부러 방 안에 있으면서 집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러든 저러든 그녀가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 나두 조심스러워서 천천히 기척을 내려고 한 거라구..."
이수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사뭇 애원조다. 하기야 제가 멀대같이 키만 컸지, 조숙한 그녀에게 대면 초딩이나 다름없을 텐데 언감생심...치한 취급을 받는 것이 제가 더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 누가 그렇게 놀라 소리지를 줄 알았냐구, 내가 뭘 어쨌다구, 그냥 마루로 나가면서 발소리 내도 못 들은 것 같기에 인사할라구..."
진은 그래도 그냥 말로 하지, 어깨에 손은 왜 올리냐구!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로 내어놓는게 더 이상하다.
" 그래, 알았어. "
그냥 서서 쳐다보고 있는 이수.
" 괜찮대? "
" 그래, 혼자 딴 생각하다가 깜짝 놀란 것 뿐이라구. 너 때문 아니라구, 몇 번이나 얘기하더라. "
그래도 쳐다보는 이수, 망설이듯 하더니 결국.
"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놀랄 수 있어? "
하기야....진은 저도 황당했겠지 싶긴 하다. 단어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그 비명 소리는 그냥 외마디, 놀람의 방출이 아니었다. 최대한 크게 지르는, 길게 빼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늦은 귀가길의 구석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덮쳐드는 사내의 팔에 갇히기 직전, 입을 틀어막히리라는 예감 속에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위급함을 알리는 비명이었다. 대문 앞에 오기 전에 귀에 꽂히는 그 소리가 그녀의 것임을 직감하며, 열쇠를 돌려 대문을 따며 이걸 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확 스쳐지나갔었던 진은 순식간에 뛰어오른 현관 앞에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당장 눈에 들어온 그녀의 움추린 어깨. 떨고 있는 손과 터져나오는 울음소리와 그 뒤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두 손 쳐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굳어진 이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장 울기라도 할 것처럼 누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동생을 보면서는, 심장이 멈추는 듯 했었으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며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정말 괜찮대?"
이수는 얼마 전까지 누이와 그녀 사이를 걱정하며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맛살 찌푸리며 말을 아끼던 것과는 딴판이다.
" 응. "
하지만, 그녀는 진이 와서 말해 주기 전에 이미 눈으로 이수를 확인하였으면서도 터져나온 울음을 주체하지 못 하였다. 가슴의 떨림이 멈춰지고 손을 꼭 부여잡고 놓지 않고 있음에도 그녀는 통곡하듯 울음을 참지 못 했고 방에 혼자 있게 하면서 차를 가져다 주어서도 입으로는 괜찮다 하면서 눈으로는 차고 넘치기만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한심하다 하였다. 그리고 자기연민이라고 중얼거렸다.
" 근데, 왜 그렇게 오래 울었대? 원래 그렇게 눈물이 많아? "
이수는 남학교를 다니면서는 여자의 얌전함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하더니, 누이는 제쳐두고 그녀가 여성스럽다 여겨지는 가 보다.
" 감정선이 약해서 그래. 원래 소설이나 만화책 보면서도 잘 울어. "
" 그래? 뭐, 드라마 보다가도 아줌마들이 운다고는...근데, 그렇게 길게 우나? 한참이나 훌쩍훌쩍, 집에 갈 때도 보니깐..."
" 원래 그래! 라임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면서 읽었대. 테르미도른가 뭔가 하는 만화도 보고 또 보면서도 자꾸 눈물이 난다고. 그 얘기 하면서도 생각이 나는지 또 울고. "
이 자식이 뭘 자꾸 물어보구...진은 그녀를 다른 누군가가 들여다본다는 게 좋지 않다. 부러 길게 설명을 해 주었더니 그것도 짜증난다. 그녀를 또 누군가가 자세히 알게 되는 것도...별로군.
이수는 그래? 그런 성격이군. 하면서 뭐를 납득했다는 건지 물러나면서 누이를 한번 흘낏 건너다 본다.
" 왜? "
피곤함을 느끼면서 진은 동생을 쳐다봤다.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는데. 자꾸만 괜찮다고 혼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빨리, 혼자가 되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밀쳐졌다는 느낌.
" 아까...바래다 준다고 나갔을 때...현관 앞에 이게 떨어져 있더라구. "
이수는 슬쩍 주머니에서 봉지째 꾸짓꾸짓해진 무언가를 식탁 위로 내려놓고 휙 고개 돌리고 등을 보이며 제 방으로 사라진다.
진은 아! 하고 속으로 외치면서 얼른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였다. 젠장...이것 때문에.
그녀를 대문 안에 먼저 밀어넣고 진이 왔던 길을 돌아가서 약국에 들러 사 온 것.
애인을 꼬실 양이면 준비성이 철저해야지, 사전에.
진은 열 일곱이었다. 제가 12월 생이고 그녀가 8월 생이니...2년하고도 4개월...뒤에 태어난 셈이다. 흠...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진은 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에게, 그러나 나이로는 1년 하고도 몇 개월씩 차이나는 여드름 덕지덕지한 뚱보들을 내려다보며 씹듯이 뱉어내던 말을 거울 속의 저를 보면서 하고 있었다.
이수가 키가 훌쩍 커 버린 2학년 이후 사춘기에 내몰린 남자아이들은 패를 짓거나 혹은 은둔하면서 성적 호기심을 다 채우지 못 한 채, 저 보다 더 키가 큰 놈의 나이를 시비삼지 못 했고 못 하면서 코가 큰 놈은 거시기도 크다더라. 하는 말을 떠올리며 밥그릇 수는 적은데 어찌 그게 다 코로 갔나. 하면서 이수의 매부리코를 흘끔거렸다.
오히려 그 이수하고 나란히 서면 동급생처럼 보이는 게 그녀였는데.
진은 두 살 차이가 뭐 대수라고.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하였지만 그녀가 주민등록증 나오지 않았느냐고 지나가듯 물었을 때는 못 들은 척하며 넘겼다. 그녀도 재차 묻거나 하지 않았는데, 아마...제가 일찌기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달랠까봐 두려웠던 듯. 진은 나야말로 두렵다. 없는 걸 보자 하면 어쩔까 싶어서. 2학년 내내 교실에서는 가끔 주민등록증을 보이며 몇 달 언니네 동생이네 하는 동급생들의 수다가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귀를 파고드는...그 놈의 나이타령. 진은 속으로 곱씹었다. 그럼...내가 니를 언니라 부르리...하는 대사를 혼자 치면서.
언니라 부르며 안을 수는 없지 않은가...아마 그보다, 그녀가 결코 안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보다 동생에게. 한 살 차이로도 억수로 고뇌하는 그녀인데. 그래서 진은 더욱, 실제 나이같은게 무슨 소용이냐. 학령기 이후 교육기간이 얼마인데, 이미 사회화되는 만큼 성장의 속도는 비슷할 것이다...닥쳐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진은 그녀를 껴안았던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두번 째부터는 벌써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흠칫 놀랐었다. 뭐, 나중에는 찬탄해 마지 않았으나. 그녀의 흥분과 강도, 지속성 뭐...재발성? 아니 반복성? 까지 진은 그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솔직히 거울 속에서 자신 외에 듣는 이 없으니까 말하는 거지만, 진은 그녀에게서 거의 배우는 수준이었고 간신히 티 안 나게 따라해 보며 느끼는 상태였다. 물론 겪어보니 장난 아니게 좋았지만. 뭐...그렇게 하는 거구나 싶기도 했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았냐 하면 전혀. 진은 정말 열심히. 하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녀의 성감대 찾기에, 그리고 발현시켜주는데 온힘과 정성을 바쳤다. 물론...빨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제가 먼저였지만 엄지...하나에 그렇게 허리까지 출렁일 줄은 몰랐다....다음 순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 부딪껴 올 줄도.
진은 그런데, 대체 뭐가 부족했던가. 하는 고민에 잠을 못 이뤘다. 그녀는 왜 싸돌아다니나. 왜 고민이 많나. 왜 좋을 때 그냥 푹 빠지지 못 하고 늘 반쯤 정신이 딴데 가 있나...왜 조금만 내버려두면 좌절모드가 되어 뭔가를 결정짓지 못 해 고심에 찬 사람처럼. 마치 햄릿이라도 된 듯 번뇌하다가 황당한 결정을 내리는가...진은 그녀가 또래보다...는 아니라도 여느 예비 고 3처럼 입시에 몰두하지 못 하는 것도, 대학을 가벼이 여기면서 또 사회인이 되는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없이 무겁게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국어선생으로부터 빌려보는 여타의 사회과학 서적들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그녀가 끼고 있던 책들, 작은 거인인가 8억인의 나라인가 그런 것들이 엄마의 책장에도 꽂혀있었다. 순...운동권 책들이었다. 알고보니. 그녀가 학교의 민주화 뭔가 하는데에 섞여들었으면 아예 입시를 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운동할라구 대학을 갔을 지도. 아니면 아예 공장으로 직행했을려나. 나중에 보니 고등학생 운동권이라는 것도 있었더라니...
진은 요컨대 제가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어쩔 수 없이 화가 나고 대책이 안 섰다. 그리고 천추의 한이다 싶은 것이. 그녀가 고백을 하던 그 겨울에 바로 대답을 했으면. 그랬으면 우린 즐겁게 고교시절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 소위 철학적인 짝궁이나 보나마나 운동권이 틀림없는 노처녀 국어선생이나 뭐 기타등등에 별로...휩쓸리지 않았을까? ... 대학을 들어가고 그녀가 데모를 하러 가던 길에 마주쳤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동창생이 말하길, 넌 운동할 것 같았어. 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그 동창생이 중학시절의 아는 얼굴인지 고교시절인지, 솔직히 그녀는 너무 희미해서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지만 진은 그 동창생의 이름을 듣자 바로 기억이 났다. 그녀와 2학년 때 한 반이었던, 그리고 진과는 3학년 때 한 반이었던 그 동창생은 중학시절, 운동장을 돌면서 체력장 연습을 하다가 문득 저쪽 모둠을 바라보면서, 저 애, 너 좋아하나 봐. 작년에 맨날 창에 붙어서 너네반 체육하는 거 보고있더니, 지금도 네 쪽만 쳐다보쟎아. 하였었다. 그때 진이 뭐라 했던가. 씨익 웃으며 내가 워낙 한 인기 하쟎아. 했었다. 왜 기억이 생생할까. 얘들 속에서 그저 한 인기 하는 거에 맞춰 나이스하게 살았지만, 사실 뒤통수에 꽂히는 그녀의 시선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애가 나를 틈만 나면 쳐다보네. 하면서 휙 고개 돌리면 어느 틈에 딴데 쳐다보고 있는...여시같은 기집애. 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너무 이쁜가. 했었던가...진은 츱. 하고 거울 속의 자신을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흘겨봤다.
" 이 애를 어떻게 꼬시지..."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누가 조언 좀 해 줬으면. 연애초보자들은 다 어디가서 상담을 하나. 상담을 하면 반드시 사실대로 밝히고 도움을 구해야지. 실은 제가...두 살 연상의 여자를 사귀는 데요. 그 여자가 방년 열 아홉이라, 은근짜루다 아주 색기도 장난 아닌데다...뭔 고민은 또 그리 많은지...제가 아직 갓 열일곱이라 뭘 좀 모르거든요. 세상도 모르고 남의 사정 헤아릴 줄도 모르고 사실 알아도 미성년자니 돈도 못 버니깐 도와줄 수도 없지만, 그래서 울 엄마도 지금 직장 다니느라 고생이지만, 아 뭐 부모님이나 가정문제 고민하는 건 아니고...까놓고 말하면 일단 잠자리 문제가 젤루 큽니다. 나한테 푹 빠지면 그녀가 딴 생각 안 하구 의지해 줄 것 같은데. 나이 많아 봤자,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는 건 똑같아요. 혹시 재수 없어 재수라도 재수좋게 하게 되면, 금상첨화인데...예측컨대 대학생 되는 것도 같은 시기에 될 꺼구요. 보시다시피 전 남자도 아니니까 군대가서 뭐 사회진출이 더 늦어진다거나 하는 핸디캡도 없어여...그러니깐, 그녀를 먹여살리는데도 별 하자 없고....근데 그녀가 문제죠. 까탈스러워서는 경제적이던 뭐든 의존하는 거 댑따 싫어해요. 여성성이라는 게 싫대나 뭐래나...제 2의 성이라는 어느 프랑스 아줌마의 책이 끼친 영향이 대단한 거 같애요. 거기다 마가렛 미드인가 하는 여자가 뭔 원숭이 연구하면서 인류의 결혼제도가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는 둥. 저는 손톱 길이보다 더 두꺼운 책은 잘 못 읽어서, 뭐 발췌 읽기 하듯...도 아니고 딱 한 장 밖에 안 봤지만 대충 떠들어본 다른 장 들의 내용은 필시 그녀에게 매우 독립적이거나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휴...물론 제가 그녀를 남성적 입장에서 소유하고 싶다는 건 아니구요...하지만 그녀가 저렇게 고민하면서, 부모님과의 불화를 기성세대 전체와의 대적으로 몰고 가면서 현실을 부정, 거부하는 것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변강쇠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그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코드에 맞춘다고 맞췄지만 늘 한 발 앞서나가는 그녀 덕분에 진은 인식하기 이전에 행동을 해야했다. 입맞추려나 하면 빨아야 하고, 이제 감도 올라갔다 싶으면 허리 운동하느라 세빠질 지경이니...무아지경으로 헛손질하고 있는 자기 앞에서 그녀가...푸욱 적셔오는데 원...진은 자신이 오르가즘이 늦은게 문제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2년의 성숙도가 이렇게 차이 나나 하고 의구했다.
열 아홉살이었던 해의 겨울.
그녀는 어지간히도 힘들었던가.
조울증 환자처럼 기분을 자주 바꿨다.
" 아빠가 대학을 가지 않으려거든 취직을 하라고. 아님 시집을 가던가. "
그녀는 음울하게 말했다. 그간 듣기로 그녀의 아버지는 말을 가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깊이 생각하고 하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말 실수 속에 무의식적인 소망이 담긴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자처럼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생각한 듯, 고졸의 자격으로 취업을 하는 건 별문제가 아니나, 저의 친구 중엔 상고를 다니는 이가 있으니.
" 사회에 나가는 게 무서워. 나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못 했는데. "
물론 시집을 간다는 건 더 황당하다. 참...
진은 말을 잊은 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 저건...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같은 걸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은 그 국어선생님의 탓이다. 하는 생각을 진은 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소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긴 했으나, 보다 더 문학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물론 진이 그녀를 먼 눈으로 보고 있었던 중학시절에는 더우기나. 3년 내내 저만을 바라보면서 말 한 마디 못 붙이다 겨우 쵸컬릿 상자 하나를 건네기 위해 겨울 밤거리를 건너오던 그녀가 아니던가. 감성에 젖어 짝궁과 숱한 편지를 쓰며 밤을 지새다가 그 짝궁이 이과를 선택하자 저도 그래야 하나 하고 오래 고민하던 그녀였다. 저에게서 화이트데이의 꽃다발을 받고 당황하며 얼굴 붉히던, 미소 한 번 손길 한 번에 표정 바꾸며 그러면서도 마음 안 열고 오래 애먹이며 새초름하던 그녀였는데. 진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 안아보았던 여름 이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손을 꼽을 만하다. 물론 그 적은 회수의 넓은 간격 만큼이나 안을 때마다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며...아니 생각지 못했던 부면에서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그녀를 안다보니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츱...진은 성질이 날 것 같았다. 그 국어 선생 때문이다.
그녀가 자주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것은. 제가 전화하고 찾아가고 다음 약속 미리 잡고 하면서도 그 사이로는 연락 한 줄 없이 한 주고 두 주고 그냥 흘려보내며 침잠하던 것은.
생각해 보니 시월에는 아예 한 번도 못 만났다. 진이 혼자 열 받아서 연락 안 했더니, 이게 끝까지 전화 없는 것이...이러다간 그냥 인연 끊길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곁을 흘려 보낸 이가 한 둘...이다. 저까지 셋이 될 듯. 정 없어 그렇지는 않은 것이 그녀는 맘에 담았던 친구, 그 소수의 친구를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인데. 진은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만 하는 대상이었던 것을 자각하자 요 몇 개월 얼굴 맞대고 또 몸도 맞대었다 한들, 그녀에게 추억 속의 존재로 전락하기는 정말...몇 날밤을 공들여 써내린 장문의 편지를 보내지도 않고 서랍 속에 묵히는 그녀에게 있어...어느날 쓰레기통으로 내다버리는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하긴...
진은 혼자 침울한 그녀를 앞에 두고 공감을 표한다는 듯, 말없이 혼자 골똘하다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아, 상담을 시작하지 못 하고 있는 내담자를 기다리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진은 달을 넘겨 다시 만난 그녀가 먼저 안겨 오고, 그 안겨 오던 밤이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미소를 수습하기가 난감하다. 슬쩍 고개를 푹 숙여 같이 심각한 척.
" 아무래도 독서실을 끊어야겠어. "
별로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은 듯, 말 없는 진의 앞에서 그녀는 혼자 생각에 빠지고 있다.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 할텐데. 하는 듯.
기계적으로 그런 추측을 하며, 진은 그러나 국어선생에 대한 증오...까지는 아니라도 미움 내지는 불만과 뒤섞인 상념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녀의 육감적이었던 모습, 가녀린 허리를 두 손 안에 부여잡자 스스로 팔을 올리며 옷을 벗던, 그러면서 진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꼬박꼬박 강제하던 그 진지한 표정의 얼굴이 떠올라 불쑥 아랫배가 짜르르 해 온다. 그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던 것이...
" 뭐? 독서실? "
진은 신호가 늦게 가는 기계식 전화를 받았다는 듯, 한참 뜨는 말대답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 응. 하는데. 그래, 뭐 그녀야 기본 자세가 나는 게으른 나무늘보요 하는 식이니. 허나 진은 말대답 늦게 하면서 그녀가 혼자 마음을 다져먹으며 올 겨울엔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고 나름 생활계획을 다 세우는 것에 침묵으로 동조한 셈이 되었다.
" 독서실 가면 언제 올라구? "
" 아이...뭐 들었어. 수험공부하는 얘들은 그냥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다 한다니깐. 넌 예능계라 안 가 봤겠지만 독서실 총무가 이불 보관도 해 주고, 소등도 신경 써 주고. "
" ...춥지 않을까. 넌 추위 많이 타쟎아. "
진은 할 말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주워붙였다.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라니...총무가 어쩌고...이 얘가 정말...
" 실내인데, 뭐. 그보다 아빠가...허락해 주실지. "
그녀는 정말로, 자기는 집에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야 벼락치기 공부로 때워왔지만 입시를 정말로 통과하여 대학을 가겠다면 이렇게는 안될꺼라구. 쪽팔리게 후기 같은데 갈 수는 없고. 아빠는 재수같은 건 없다고 미리 말하고 있는데. 하면서.
" 아빤, 내가 공부 잘 하고 똑똑한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잘났으니까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면서 바락바락 대든다고. "
그녀는 잠깐 띠웠다가 이어 말했다.
" 후기 같은데 가면 등록금 아깝다고 하실꺼야. "
오빠는 삼수까지 시켰지만...딸자식에게 그렇게 투자할 순 없다고. 시집가면 그만인데, 무얼. 하는 말을 귀에 담고 있는 그녀는 결심이 확고한 듯하다.
" 친구들도 다 끊고 공부만 하려구. 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그녀는 수학 땜에. 하였다. 그렇게 걱정해도 1년 뒤 그녀의 수학점수는 한 자리 수였다. 국영수 비중이 압도적인 학력고사에서 수학점수를 그리 받고 전기 간 애는 그녀 밖에 없을 듯.
그런데, 뭐하러 독서실에 처박혀 겨울 삼동을 다 보내냐구!
한숨을 쉬며 불길해 했던 것처럼 그 겨울, 진은 그녀를 제대로...보긴 했으나 안지는 못 했다. 젠장...
그녀는 불쑥 전화를 해 와서는 집 근처 어디라는 둥, 배고프니까 컵라면 먹자는 둥, 공부하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하면서 음료수 하나만 사 달라면서 왔다가 사 주면 홀짝 먹고는 발길 돌려 총총히 사라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 한 술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독서실 갔다고 그녀의 엄마는 탄식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자정이 되도록 기다려도 그녀에게서 전화했었냐며 전화해 오는 일은 없고.
그래서, 그녀가 독서실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 두 달을 보내면서 공부를 열씸히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독서실에서도 친구끼리 소근대는 것에 귀를 쫑긋거렸고, 이불 덮어주며 징징거리는 애들의 시선을 느끼며 혼자 책상에 엎드려 있었으며, 낮이나 밤이나 참고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면서 지겨워져도, 허리가 아파도,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말 붙여 함께 할 동무가 없어 외로움만 새겼다. 그래선가 어째선가 밤거리, 반쯤 문닫은 가게 앞이나 골목 어귀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새로 표정을 만든 듯 웃는 얼굴임에도 하얗게 떠 보였고,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처럼 어색했으며 고개 돌리며 안녕. 하면서는 이내 침울함이 점령할 듯 짙게 그늘이 드리우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땐가는 독서실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차림새로 하염없이 뚝방을 향해 인적없는 차로변, 좁고 길다랗기만 인도를 따라 걷다가 네거리의 신호등을 기다려 건너더니 도로 턴 하여 언덕 위로 이어지는 인도를 걸어올라가기도 하였다. 한 밤에. 그 모습을 간판의 불을 끈 제과점 안에서 이수와 함께 빵을 먹으며 지켜보면서 진은 그제서야 그녀가...저를 만나고 사귄다 생각하고 나아가 연애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지난 1년 동안에도 혼자 산책하기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외로워하던 것에서도,슬픔을 내성화하던 것에서도 그녀를 덜어내올 수 없었다는 걸 진은 확인하였다. 옆에서 이수가 혀를 차며.
" 저 누나는 왜 저렇게 청승맞어? 저번에 놀러와서 떠드는 거 보니, 웃으면 귀엽고 이쁜데. "
흘낏 진을 쳐다본다.
" 잘 좀 해 주지? 쫌만 친절해도 디게 좋아하던데, 누나랑 친한 것 같더만 그렇지도 않은 가..."
말 없이 표정 굳어진 채 풀릴 줄 모르고 있는 진의 얼굴을 보면서 이수는 얼버무렸다.
" 아니 그런가...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지... "
고요히 어둠이 점령하고 있는 골목 안, 저 끝에서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는 이수의 모습이 보인다. 가방을 어깨 위로 둘러 맨. 스포츠형 머리의 얼굴은 멀쑥하나 표정이나 몸짓은 아직 어릿스러운 소년, 매부리코 때문에 나이가 들어보인다. 집 앞까지 못 와서 전신주 옆에 서 있는 누나를 보고 발걸음을 멈춘다. 놀라는 표정이 느릿한 이수는 어딘가 그녀를 닮은 듯도.
" 뭐야? "
감정 없이 물어보려 하나 쉽지 않다는 듯 애먹은 말투.
" 미안..."
진은 동생을 바라보며 담담히, 하지만 정말 미안하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 좀 이따 들어와라. "
이수는 왜? 하고 물을 듯 잠깐 쳐다보았다. 시선을 마주치며. 피하지도 어색함도 없는 누나의 얼굴이 다소 들떠있음에,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뭔가를 떠올린 듯, 곧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 ...알았어. "
묻지도, 탓하지도 않고 이수는 발길을 돌렸다. 바로 나오는 골목 모퉁이로 꺽어들며 가능한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주겠다는 듯.
잠깐 그대로 서 있다가 조용한 골목길, 버스에서 내려 집을 찾아드는 행인들이 느는 것을 보며 진은 집안으로 들어왔다. 고즈넉히 마당도, 거실도, 식탁 주위도 그리고 자신의 방문도 잠든 듯 하다. 그녀, 침대 속에 파묻힐 듯 누운 채 잠들어있다. 피로가 이마에 떠 있다. 조그마한 얼굴에서 가장 비중이 큰 넓은 이마, 앞머리를 반쯤 내리고 다니느라 눈에 띄지 않았으나 약간 짱구다. 실핏줄이 비쳐보이는 눈꺼풀, 힘없이 감겨져 있고 자그마한 코, 작은 입술, 거뭇하니 부르터 있어 더 붉어 보이는.
진은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만져보았다. 부르튼 주위를 둘러 입술 끝으로. 미끄러트리며 턱선을 따라 가 보며. 그녀가 흠칠. 하며 눈꺼플을 움직인다. 시야에 들어오는 손, 그 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들며. 작은 입술을 달짝이며.
" 몇 시야..."
" 아직 괜찮아. 8시 밖에 안 되었어. "
그녀,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만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 나 갈께. "
" 괜찮다니깐. 동생은 늦을 꺼라구 전화 왔어. "
그녀, 그래? 하더니 침대 위에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 티를 다시 입혀 놓았지만 브래지어는 하지 않고 있는 그녀, 스퀘어 네크라인 속으로 숨어드는 쇄골을 보고 있는 진은 그녀가 아쉽다. 가지 않았으면.
" 같이 저녁 먹자. "
그녀는 시계를 쳐다보며 글쎄. 한다.
" 같이 밥 먹고,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내며. "
그녀는 무슨 말인가 싶어 진을 쳐다본다. 집에 가야겠다하는 생각을 굳히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진은 말을 먹고 가만히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한길 건너 바래다 주고 저의 집과 그녀의 집 중간쯤이라 생각되는 놀이터 앞에서 혼자 가겠다는 그녀를 쉬이 보내주고 돌아오면서 마음이 다져진다.
" 혜정아, 나는... "
혼자 어두운 채 인적 끊어진 밤길을 걸으며 진은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로 내어 놓는다.
" 너와 한 집에서 살고 싶다. 이리 보내지 않고, 네게 다른 공간, 다른 접촉, 다른 생각을 하게 두고 싶지 않다. "
진은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자신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길과 말 속 에서 행복한 미소를 떠올린다는 것을. 그녀는 점점 더 말을 많이 하고 점점 더 속을 내어보이며 조금씩이나마 제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몸을 만지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처럼 내어놓는 면이 넓어질 수록 그녀의 웃음은 편해지고 또 생각은 창의성을 번뜩였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가 다시 밀어 닫으며 꾸욱 눌렀다, 라푼쩰의 성 문을 폐쇄하듯.
진은 입술에 묻은 뭐라도 닦는 것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돌아서다가 마루 건너, 제 방문을 열고 나오는 이수와 마주쳤다. 비는 그친 듯 했으나 밤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데 겉옷을 대충 꿰어 입으며 가방을 끌듯이 옆구리에 걸고 젖은 운동화를 그냥 꿰어신는다.
" 다 저녁에 어딜 가. "
대답은 커녕 돌아보지도 않고 성난 듯 홱 현관문을 밀어젖히고, 몸을 빼면서 툭 던지듯 말한다.
" 더 늦기 전에 집에나 ! ...데려다 주던가. "
신경질적으로 열어제꼈던 현관문을 손끝으로 떨구며 슬쩍 돌아보는 이수의 얼굴은 못 마땅하다는 듯 잔뜩 찌푸러져 있었으나, 눈길은 진의 방문 쪽을 스치듯 흝고 갔다.
맞대거리라도 할 듯 현관 앞으로 따라 나왔던 진은 하지만 그냥 마루끝에 걸터 앉은 채 속울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가슴에 한 쪽 손을 얹고. 음. 그녀가...근데, 저 자식이...
머리속에선 뭔가 상황을 좀 수습하여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되돌려야할텐데. 하고 고민이랍시고 떠오르지만. 진은 입가에서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수습하는 게 더 어려웠다. 그녀를 다 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자신의 속을 다 알게 된 것 같아 한껏 시원스러웠다. 이런 거였군. 하는 생각, 이런 느낌이군. 하면서 저의 사춘기도 이젠 졸업을 하게 되었다하는 맘에 마냥 기꺼웠다. 동생 뿐아니라 아이들, 여고이던 그녀의 남녀공학이던 십대의 청춘들이 애써 곁눈질하고 인내하고 숨고 싶어하며 또 좌충우돌하기도 하면서 겪고 있는 성과 사랑, 신비와 의혹, 불안과 자만, 이제 자신은 그런 혼란에서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진은 모든 것이 좋았고 밝게 느껴졌으며 그녀 또한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말로 안 한다고 그걸 모르리. 그 얼굴을 보면서. 그 몸짓에 함께 휘감기면서. 그녀의 감정이 피부 위로 새겨지는데, 그녀의 욕망이 데일 것처럼 스며오는데. 자신에게 있어선 아련하고 몽롱하며 부정확했던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구체화되었다. 분명해졌고 또 정직해졌다. 그녀는 그 얼마나 용맹스러운가. 눈으로 말하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 아..."
진은 욕실에서 나오며 아뿔싸. 하였다. 그녀는 현관의 안쪽 문을 열어둔 채 소리없이 빠져나갔다. 침대 위를 다소곳이 정리해 둔 채. 시트를...빼 갔다. 부러 장 문을 열어 새로 패드를 내어 깔아두는 그녀의 손길이 눈에 보이는 듯. 책상 근처를 살피다 식탁 위에 라면들을 얌전히 내어놓고는 그 슈퍼용 비닐봉지에 힘들게 시트를 접어 넣고는 누가 볼세라.
" 그걸...싸 들고 가냐...이 여자가 정말..."
이 애가 그걸 어떻게 세탁하겠나 싶어서? 아님 다른 뭔가가 아까운 듯. 음..츳. 하면서 진은 안타까웠다.
" 이름. "
그녀는 새로 하이얗게 티셔츠를 갈아입고, 커서 헐렁한 바지를 구겨 입은 채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젖은 머리가 수건 위에서 가지런히 놓여진 것이 손가락으로 애써 빗어내린 듯. 빗물에 씻긴 말갛고 하얀 얼굴, 입술 끝이 분홍빛으로 찢겨져 있다.
" 차 마셔. 둥글레차야. "
" 이름, 넌 이 진이고 동생은 윤 이수야? "
" 응, 나만 성 바꾸고 동생은 아직. 할아버지가 싫어하시니까 아마 갠 그대로 갈꺼야. "
언제부터인가 동생도 저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게 되었고, 같은 부모 아래 다른 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진은 그렇다고 부모의 이혼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외부인들의 시선이나 동정에 대해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부쩍 혼자 만의 시간과 생각이 많아지고 있던 진이었기에.
" 흐응. 그렇구나. "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더 묻지 않았다. 엄마의 뜻도, 할아버지의 생각도 알겠다는 듯. 그보다 동생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느냐면서 제 자신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 우산 빌려주려고 불렀대. 우리집 가는 건 줄 알았었다면서. "
" 으응... "
" 어디 가는 길이었어? "
진은 뜸을 두고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 그냥, 산책. 비가 오길래. 시원할 것 같애서. 걷다 보니 너무 많이 나와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
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더 캐어서 무엇 하리. 저리 상처받은 얼굴로, 저렇게 울 것같은 눈으로, 입술을 숨기고 싶어 달짝이며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그녀에게.
두어번 접어올린 바짓단 아래로 가로 잘려진 종아리, 티없이 하이얀 피부에 도드라진 복사뼈, 짧은 발등 위로도 붉그레하니 상채기가 있다. 생긴 지 얼마 안되는, 무언가에 주욱 긁힌 듯한 자국. 젠장...이건 뭐 아동학대센터에 신고할 수도 없고, 뭐 이딴 경우가...싶은 진은 커다란 머그컵을 두 손으로 부여쥐고 있는 그녀가 추운 듯, 입술을 꼬옥 붙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그 커다란 상가 건물의 2층 어딘가에 숨어있을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엄마가 끄질려 나와 다시 손찌검을 당하고 있는건 아닌가 걱정스러운 걸까. 내리 뜬 두 눈이 촛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하게. 도망나온 자신의 비겁을 자책하는 듯.
" 추우면 이불 쓰고 좀 누워 있어. 난 피아노 연습할 게 있는데. 낼모레 면접을 봐야 해서. "
" 응. 그래, 너 할 일 해. 난 조금만 있다가 갈께. "
" 아니, 그냥 쉬고 있으라구. 천천히. "
별 말이 없는 그녀를 두고 방을 나왔다. 흐음. 차라리 교실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수업시간이 더 편안하다던 그녀는 불안한 저희 집의 제 방이던, 남의 집의 남의 방이던 안락하게 한 숨 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예민하게 곤두서는 신경보다 잠이 부족한 채 함부로 넘어뜨려졌던 그녀의 몸은 쉬고 싶어 어쩌지 못 하겠다는 듯, 이내 침대 속으로 기어들듯 누여졌다. 동그마니 움추린 채, 얇은 눈꺼풀을 내리덮었으나 파르라니 떨고 있는 그녀, 얕은 잠 속에서 허우적대는 듯.
그녀의 누운 침대를 손잡이 돌려 스르륵 문 열어보고 확인하면서 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한 발을 문지방 위에 걸은 채. 끼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뒤에서 나지 않았으면.
휙 돌아본 마루 건너 이수가 서 있었다. 굳었던 이마에 조금씩 인상을 팍 쓰기 시작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저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도로 문 닫고 식탁 앞으로 오니 이수도 마주 걸어와 의자를 내어 앉는다. 누이도 앉으라는 듯.
" 나도 차 좀 줘. "
진은 네가 타 마셔. 라는 말이 머리에는 떠 올랐으나 입은 꾹 다문 채 찻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렸다. 엄마가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 진이 먹고 있는 상 위에 제 손으로 밥 한 그릇 더 떠 와서 후다닥 먹어치우고는 빈 밥그릇 개수대로 숨기면서 자리를 뜰 지언정 누이에게 식사시중 들어달란 적 없다고 말하던 이수였다. 끓은 물 찻잔에 부어 둥글레 티백 넣어 가져다 줄 때까지 식탁 앞에 자리보전하고 있던 이수는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킨다.
" 왜? "
" 뭘? "
진은 싱거운 놈. 하는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제 앞엔 반 남은 물컵 만이 놓여있는데.
" 차 마셔. "
" 됐어. "
" 그럼 냉수라도 마셔. "
" 뭐? "
네가 또 시비를 걸 양이면 상대해 주겠다는 태세로 자세를 고쳐 앉는 진에게 억양의 강세 없이 말한다, 이수는.
" 물도 씹어먹어야 한대. "
싸울 생각 없다는 듯, 긴장 없이 이어말하는 이수.
" 씹어 먹으라구. 서른 번씩. 그게 건강에 좋대. "
진은 댓거리하기 귀찮다는 듯, 가만 있다가 물컵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입 안에 넣고 가만 있으니 조금씩 목구멍을 흘러내려가는 물줄기가 느껴온다.
이수는 그냥 쳐다보며 차를 홀짝 거린다. 뜨거워서라기 보다, 오래 앉아 있겠다는 듯. 피아노 좀 쳐 보지? 하더니 진의 방문을 한번 흘낏 하면서 조용한 걸루다. 하고 뒤미친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장대같이 굵게 쏟아지는.
맞으면 아플 것 같았다. 저는 아니라도. 함께 비를 맞고 있던 동생 이수는 아니라도. 그렇게 작은 어깨와 작은 발을 가진 그녀는. 여름이라도 추울 것같은 반팔 티셔츠에 어울리지 않는 체크무늬 조끼를 걸치고 기장 긴 티셔츠 아래로 역시 체크무늬의 플리츠 스커트를 휘감고있는 그녀는 맨발에 굽낮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발등 위로 흙알갱이가 묻은 걸 떨어내고 싶은 듯, 그녀는 장대비가 내리는 처마밖으로 한 발을 슬쩍 내밀었다 얼른 집어넣었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수는 제가 얼마나 더 크냐는 듯 그녀의 어깨 위에서 턱을 한참 높게 치켜들고 한길 건너만 응시하고 있다.
빗길에도 홱 지나가는 버스와 뒤미처 따르는 자가용과 택시들 위로 진을 발견하자 턱을 옆으로 기울이며 눈짓을 하는 이수는 니 친구 꼴 좀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현관을 들어서기를 거부했다. 괜찮아.라는 말만 연발하며. 우산만 빌려주라며. 집에 가야 돼.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 감기 걸린다니까. 빨리 들어와. 집엔 나중에 천천히 가구. 한낮인데 왜 그래. "
말하면서 진은 흘낏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먹장구름이 낮게 내려앉은데다 천둥까지 칠 기세다. 번쩍.
그녀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입술을 딱 붙이고 있었으나 순간 부르르 떨리며 이빨까지 부딪히기 시작했다. 물 먹은 테가 잘 안 나는 조끼 안, 하얀 티셔츠가 몸에 딱 달라붙은 채 주르륵 흐르는 물방울을 밑단까지 안 가서도 후루룩 떨어뜨리고 있는 그녀, 오한이 나는 듯 했다.
손목을 잡아 끌다시피 하여 집안으로 들어왔다. 젠장...헨젤이 쥐어주는 뼈다귀도 이처럼 가늘지는 않으리, 뼈 모양을 본떠낼 것 같은 그 피부는 어린시절 처마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떼어 손 안에 쥐었던 때처럼 차갑게 미끌거렸다. 마룻바닥에 물 떨어지는 것을 수습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 제 방 안으로 넣고 커다란 수건을 가져다 머리에서부터 씌워 주었다. 서랍에서 새로 산 티셔츠와 예전에 입던 반바지를 한참 뒤적거려 찾아내어 침대 위로 던져주고 주전자에 물 끊여 따뜻한 차를 타오겠다. 말하고 방을 나왔다. 그녀에게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주기 위해.
" 어디서 만났어? "
이수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물어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이수는 바지 허리춤을 얼른 올리며 인상을 팍 쓴다.
" 노크 ! "
" 알았어. 근데 어디서 만났어? "
" 바로 거기지, 어디야. 횡단 보도 앞에 서 있길래, 우리집 가려나 했더니 우산도 안 받고 완전 생쥐꼴이 되어갖곤 저쪽 네거리로 가지 뭐야. 거긴 뚝방길 밖에 없는데. "
" 그래서? "
" 뭘 그래서. 그럼, 그냥 가라 그러구 냅둬? 뚝방 공사한다고 다 헤쳐놔갖구 비오면 미끄러워서 위험한거 몰라? 안 그래도 산책로 폐쇄된 뒤로 깡패들만 돌아다니는데 거길 왜 가? 이 비를 다 맞으면서. 누나 친구, 좀 이상한 거 아냐? "
하면서 이수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 이 자식이! 말 조심 안 해 . "
하고 말하는 진의 목소리는 바깥쪽을 돌아보면서 잦아들었다.
" 어디 가냐 그래도 말도 없고 보고도 못 본 척 하구 그냥 막 가더라구. 그 꼴을 해 갖군, 내가 아니라도 네거리에 서 있던 경찰이 잡으러 올 태세였다구. "
" 경찰이 왜? "
이수는 한심하다는 듯 누나를 쳐다보았다.
" 신발 짝짝이로 신은 거 못 봤어? 머리는 산발에, 입술은 터져서 피 흘리고. 흙탕물 뒤집어쓴 채 고개 푹 숙이고 뚝방길로 올라가는데, 그게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품이지, 정상이냐구. "
그리고 이수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쫄딱 젖어서 젖탱이, 방탱이 흔들고 가는데...
" 야, 임마 ! "
빽 소리치는 진에게 손을 내저으며 알았어, 누가 뭐래? 하고 일찌감치 항복한다.
" 내가 붙잡아 두지 않았으면 어느 깡패같은 놈들이 따라붙었을 지 모른다는 얘기야. 그래도 돼? "
" 아, 그래, 암튼 잘 했다. "
그녀가 방에서 나올까 싶어 얼른 나가려는 진의 뒤에서 한마디 더 해보는 이수.
" 그러면 안 되겠으면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
" 뭐? "
" 애인 구해줬는데, 고맙지 않냐? 아직 따 먹지도 못 했는데... "
" 야 ! "
그예 진은 동생의 멱살을 잡았다.
" 지가 찔리니까, 흥분하고 그래. 아니면 말지, 왜? "
" 너..."
진은 멱살 잡았던 손을 놓고 조용히 말했다.
" 너, 진짜 말 조심해라. 거실엔 아예 나오지도 마. "
" 누나야말로, 조심하라구. 방에만 있지 말구..."
쾅 닫고 나가는 진의 남은 그림자에 대고 마저 말하는 이수.
" 아주...사고 치기 딱 좋은 분위기라구. 그 여자... "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는 의자를 돌려놓고 창 앞에 앉아 있다. 타인의 책상을 살펴보고 있지 않았다는 듯? 창문을 조금 열어 둔 것을 보니 거리를 향해 있는 동생의 방과 달리 마당을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듯.
" 딸기 먹어. "
그녀는 응. 하고 간단히 답했지만 성겨하는 표정이다. 무척. 왜? 딸기 땜에?
거실의 한 쪽 벽에 놓인 피아노를 보고서도 그녀는 좋은 피아노네. 하였다. 윤기나는 밝은 갈색의 피아노는 진이 어렸을 때 엄마가 사 주신 것이었다. 비싼 건 줄은 알았지만 뭘 보고 좋다고 하는 건지 진은 몰랐다. 식탁 앞을 지나 진이 제 방으로 들어가자 하였을 때도 침대도 있네. 하였다. 별로 좋은 침대는 아닌데? 그녀는 창문에 커텐 대신 블라인드가 걸려있는 것에도 주의를 집중했다. 커텐 치렁이는 게 귀찮아서. 하였더니. 응, 아니. 가정집에서 보는 건 처음이어서. 하였다. 그녀 앞에 보여 보니 어쩐지 우리 집이 부자인 것처럼 느껴지는군. 하는 진이었다.
" 난 내 방을 갖게 된지 얼마 안 되어서. 별로 어떻게 꾸며야 할 지 모르겠더라구. "
남매였기 때문에 진에게 자기 방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어져 있었다. 물론, 남동생이 태어난 뒤 집안 형편이 좋아졌다는 조건이 기저에 있긴 하였으나. 그녀 또한 남매들 중의 딸이었을텐데. 진은 들어가보진 않았으나 그녀의 집을 알고 있었다. 어느 저녁에 헤어지면서 집 앞까지 바래다 준다 하였더니 시장이 보일 때 쯤 되어서 저기 보이는 상가건물의 2층이라 하면서 엄마아빠가 가게 앞에 나와계실지도 모르니 그만 안녕하자 하였다, 그녀가. 제가 몰래 사귀는 보이프렌드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나 싶었지만 그녀는 부모님에게 무슨 말이든 길게 설명하는게 귀찮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빠는 무슨 일이든 꼬치꼬치 캐어 물으시니 저의 친구들은 모다 학을 뗀다고. 굳이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러면서 이층의 연이어 있는 창문들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저기가 제 방이라 하였다. 그래. 하고 들어가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계속 서 있어 보니 아니나다를까, 창문들 중 하나에서 커텐이 살짝 걷히면서 미소를 지어보이는 얼굴이 나타난다. 손을 흔들며. 똑같은 모양의 창문들에 걸린 커텐은 모두 똑같이 뭔가 나뭇가지같은 무늬가 있는 연노랑색이었다.
" 좋겠다. 이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방이 있으니. 마당도 있고. "
" 자주 놀러와. 우리 집은 식구가 적어서 거의 비어있다 시피 하니까. "
그녀, 흠칫 놀라며 쳐다본다. 진은 왜? 하면서 마주 보았으나 곧 밖에서 문소리가 난 데 이어 마루 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녀석들이란...꼭 제 존재를 온 집안에 알리며 들어오곤 한다. 몸무게 좀 더 나가서 그런 건 아닐게다. 사춘기도 늦게 맞고 있는 주제에 키만 컸지 얼굴은 애 같은 녀석이.
" 웬일로 ! 동생이 일찍 왔네. "
하면서 진은 마루로 나갔다.
" 누가 왔어? "
동생은 식탁 위로 가방을 내려 놓으며 현관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 웬일이야. 일찍도 다 오고. "
" 누가 왔냐구? 여자지? "
" 그럼, 내가 남자애를 집에 오라 했겠냐? "
" 누난,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뭘. 요즘엔 아침운동하면서 도장 애들하고 안 어울려? "
문을 열고 뒤따라나온 그녀는 인사를 해야 하나. 하는 듯 어색한 표정,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오다 말고 섰다.
" 내 동생이야. 이수. 이름이 윤 이수야. "
" 안녕하세요. "
아...놔...깍듯하기도 하네, 이 아가씨가.
" 네에...안녕하세요. "
이수는 저도 같이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식탁 위에 올렸던 가방을 도로 줏어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쓱 한 번 돌아보면서.
뒤통수로 쳐다보듯, 눈을 사시로 뜨고 귀를 쫑긋거리던 그녀는 문 닫는 소리를 듣고서야 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 아, 배 고픈 것 같다. 빵 구울까? "
" 응. "
토스트에도 토스트기계에도 관심없는 듯한 그녀. 빤히 쳐다보면서 말한다.
" 몇 학년이야? "
" 중 2. 키만 컸지, 나이는 더 어려. 학교 일찍 들어가서. "
" 대따 잘 생겼네... 그럼 너랑 몇 살 차이야? 네 살? "
" 음...그렇지. "
진은 말을 먹었다. 그녀가 잘 생겼다고, 그것도 대따. 라고 말하는 것이 우스워선지, 아님 웃기지도 않아선지 알 수 없었다. 나이 차이를 굳이 묻는 것에도 순간 헷갈리고 있었다. 아, 세 살 차인데. 저도 학교를 일찍 들어갔으니. 근데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녀는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보통보다 한 살이 더 많았으니. 큰일날 뻔 했네. 진은 입안에 침이 말랐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는 식빵을 맛으로라기 보다 갓 구워낸 바삭한 질감으로 맛있게 먹고 갔다. 진이 잼을 더 바를 꺼냐고 물었으나 아니라면서. 단 걸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듯. 바래다 준다 했으나 어둡지도 않은데. 하면서 동생방을 흘낏 건너다 보며 그냥 가겠다며.
음...진은 뭔가 동생 때문에 제대로 안되었다는 생각에 울컥 짜증이 났다. 빵 잘라 담았던 접시를 덜컹거리며 개수대에 넣어두는데 기척도 없이 이수가 나와있었다.
" 씻어 두라고. 엄마 와서 저녁 차릴 때 귀찮쟎아. "
식빵 먹으면서 뭘 접시까지. 하더니 식탁 앞에 앉아 마저 중얼거린다.
" 버터 나이프에 포크까지. 아주 공주님이시구만. "
" 뭐라 그러냐, 너. "
" 걔 뭐야? 소꿉장난 해? 고등학생들끼리? "
" 야, 너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너하고 나이차가 몇 인데. "
" 얼씨구. 누나야말로 나하고 네살이나 차이나냐? 두살 반밖에 안되면서, 뭘 그렇게 늙은 척을 하고 싶어 해? 왜, 그 여자애가 한 살 어리다구 깔볼까봐 그래? "
" 그런 애 아니거든. 누가 다 저같은 상황인 줄 알아. "
인상 팍 쓰면서 내가 무슨 상황 ! 하면서 빽 소리를 지른다. 자식, 혼자 찔리기는.
나야말로 찔리네. 하는 진은 음, 두 살 차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생일이 몇 월인가. 담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2년하고 몇 개월이 더 나는 건 아니겠지...설마. 순진하게 기대하는 열 일곱의 진, 그러나 열 아홉의 그녀가 잔머리를 굴리는 만큼 얼마나 더 성숙할 지에 대해선 감도 못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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