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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1. 여보, 당신에게.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여보라던가 당신이라고 지칭하는거. 우린 그런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가끔 나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당신은-하고 말 속에 섞어넣은 적이 있었죠. 하지만 나는 누구아빠라는 것 이상으로 더 가깝게는 당신을 여길 수가 없었어요. 그조차도 부담스러웠는데 그건 아마 내 아이의 아빠라는 것 때문에 내게 당신이 실제보다 더 규정적이 되는게 아닌가 염려했던 탓일거에요.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부터 당신과의 대화에서 말끝을 놓았었죠. 지금 이렇게 하요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결혼초기의 다소 어색하고 좀더 긴장감있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긴 해요.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린, 사는 동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것을 당신도 인정할꺼에요. 그게 누군가의 탓인 건 아니죠. 그저 "다름"이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미안해 할 필욘 없어요. 당신도 또 나도. 

그래도 미안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고려하지도 이후 펼쳐질 관계의 양상에 대해서도 크게 별나게 다를 것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 했었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우리의 결혼은 매우 모험적이라는 것을. 그래서 너무 가벼운 맘으로 하는 결행이며 결국 자신에 대해서도 방임에 가까운 경솔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내가 특히 그랬기 때문에 그 방황의 늪으로 당신을 동반한 것에 대해 늘, 언제나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고백하고 싶어요. 당신은 그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래선 안되는 것이었거든요. 당신은 결혼을 하고 싶어했고 나를 선택하는 게 동료들의 만류처럼 그렇게 크게 실수하는 거라곤 판단되지 않았을 꺼에요. 난 당신이 말했듯이 착실하고 타인을 돌봄에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많이 힘들었었죠, 내가 아니라 당신이. 주변사람에게 대하듯 동거하는 자에겐 결코 그러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 그것도 한참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깨닫고 확신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나는 당신이 말하듯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게으른 인간이 맞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많이 화나고 당황스럽고 그래서 결혼을 물르고 싶었던 당신이 무척 힘들게 깊은 고민을 하고 여러가지 상황을 가늠해보고 또 나를 이해해보려 애쓰기도 했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의 그 타고난 부드러움과 선량함, 아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보루가 되어 나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가정이 끝내 지켜졌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이혼을 반대하고 그러는 와중에 우리가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내었던 것, 그건 대부분 당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죠. 내가 당신의 친절에 힘입어 조금더 마음이 넓어졌고 성숙해졌으며 그렇게 행복을 영위하였어요.

하지만 때로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것으로 참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는 걸 알아줬음 하네요. 이제는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좀, 아니 많이 특이하쟎아요. 생각하는 방식도 내용도 많이 그리고 자주 평범한 양태를 벗어나곤 하니까요. 사람에 대해 넉넉한 품도 없어 성격도 까칠 그 자체이기만 하니 그런 나 자신을 스스로도 피곤해할 때가 있었어요. 그럴땐 당신이 왜 나보다 더 품이 넓지 않냐고 비난하고 서운해하기도 했었죠. 스스로를 추스리고 위로하기 버거울 때는 누구든 손 내밀어 도와줬으면 하는 의타심이 생기니까요. 물론 우린 타입이 많이 다른 사람들이라 서로가 상대의 고통에 대해선 쉽게 냉정해지곤 했었죠. 당신 뿐아니라 나도 말이에요. 알면서도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무안해하는 데도 못 본 체 돌아서기도 했었어요. 내가 그정도의 인간인지라...이젠 서로 퉁치기로 해요. 우리 별로 친하지 않으면서 그 정도 유지한 것도 잘 한 거쟎아요. 안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나요? 결혼하고 이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건사하며 한 집에서 살아온 거,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았쟎아요. 그정도면 무난했다고 생각해요. 상상 속의 스위트홈은 아니었어도 경제적으로나 관계에 있어서나 일상의 므흣함을 느끼기도 하면서 여느 부부, 가정 못지 않게 잘해왔다고 생각해요.  수는 못 되도 우는 되어요. 굳이 흠을 잡자면 부부관계가 매우 희박했다는 건데 그건 다른 멀쩡한 부부들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니까. 그리고 우린 둘 다 그렇게 열정적인 타입은 아니었쟎아요? 대강 참을만 했죠? 이해해줘요. 내가 좀 아니 많이 까칠하쟎아요. 맛있기만 한 갈비침도 즐겨 먹기를 꺼려하는 성격이니까요. 즐거운걸 즐기지 못 하는 이 자의식과잉의 내가 정말이지 나도 지겨웠답니다.

당신보다 내가 더 지겨웠어요. 그런 내 자신이. 한번도 자신을 맘 편하게 긍정해보지 못 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지금 가는게 속이 시원할 정도에요. 죽음 이후를 바라보지도 않으니 삶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가 너무 많지만 않다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막연히 기대했던 것처럼 훌륭히 살아내진 못 했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가끔 게으르게 자신을 방치한 적이 없지 않으나 대체적인 성의는 보였다고 자평해요. 그러니 이만 끝내도 될꺼에요. 당신과의 사이가 너무 격화되지 않았던 것도 다행스런 일이에요. 우린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나보다 당신이 더욱 그래요. 그러니 내가 가는 것에 대해 너무 마음 아파 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자책하지도 마세요. 자책할 것도 없긴 하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 잘못은 아니쟎아요. 그런 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요? 여보, 당신. 가능하면 당신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또 만나서 조금 더 행복해지세요. 룰라도 말했쟎아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말라고. 당신은 더 많이 누리고 더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구가해도 될 만큼 충분히 훌륭한 분이세요. 열심히 일했고 정직하고 순수하며 인간에 대한 예의와 자신에 대한 존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어서 다행이에요. 당신이 나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받으니까요.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지 못 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은...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행복했을꺼에요. 아마 그럴꺼라는 생각을 지금 이순간까지도 버릴 수가 없답니다. 물론 조금은 내가 피곤하게 굴어서 좋은 점도 있었을꺼에요. 다른 각도에서의 생각을 해 볼 계기를 주었다던가 하는?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라도 조금은 나라서 당신에게 좋은 점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그랬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더 좋아졌으면 해요. 당신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또 내가 두고 가는 아이들과 항상 행복하기를  바래요. 진심으로요. 내 걱정은 마세요. 이제야말로 나는 절대적인 자유를 향해 드높이 날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는 이런게 행복해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장자의 다른 꿈속으로 가고 있어요. 안녕, 이편에서의 꿈이여, 사랑이여. 모두들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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