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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천간을 돌고 돌아 육십갑자를 다 살아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나날보다 많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하여 날숨이 내쉬어졌다. 뭘 더 하지 않아도 좋으리, 애쓰지 않아도 되쟎을까. 이젠 쫓기듯 애태워하지 않고 세상에 붙들리지 않아도, 이젠 그래도 되는 "노년"이 된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들에 힘들이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야, 그럴 것이다. 현성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제 속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가슴 속에 꿍쳤으나 오래도록 밀어두었던 면포의 속적삼 한자락을 내어본들 흉된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그리한들 또 무에 거슬릴 것이냐.
현성은 제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64평의 이층집에서 밥과 옷을 지으며 가족을 만들었던 1층과 사색과 소통을 시도하며 사회를 준비했던 2층의 서재와 발코니방 외에 자신을 온전히 모두었던 곳이 바로 이 작은 침실이었다. 세 평이 되지 않는 쪽방, 여기 놓인 침대와 협탁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수납하는 마호가니의 뷰로, 소박한 입본장 하나에는 외출용의 옷가지들이 다른 하나에는 편안한 실내복 몇 벌이 걸려있다. 현성은 이 작은 방을 여행가방 하나에 추려넣어 떠나고자 하였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묵든 갈아입을 속옷 하나와 발을 덥힐 양말, 목 언저리를 가릴 스카프 한 장이면 충분하였다. 낮은 목소리로 차 한 잔을 내어줄 남편 없는 여인들이 쉬이 만나질 것이고 대합실 의자의 팔걸이에 머리를 두어도 무릎담요를 덮어줄 고운 손길에 은혜 입을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은 뷰로의 서랍들 중 가장 아랫단을 열었다. 그저 보관하기만 할 뿐 다시 들춰보지 않는 잡동사니들, 어린시절의 스냅사진을 넣어둔 봉투와 학창시절의 앨범, 졸업장과 언젠가부턴 받아서 부모에게 보여주지도 못 했던 상장 따위가 차곡이 쌓여있었다. 한두권의 드로잉북도 있다. 그건 90년대 말인가 2000년대 초인가 그 즈음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은둔하고 싶었던 때 동네의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그렸던 수채화 습작들이었다. 완성된 것도 있고 완성되지 않은 것도 있다. 자신은 예술적인 재능도 향유할만한 감성도 변변히 없다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은 그저 도화지 앞에 앉아있고 싶었다. 마음이 형해화되어 천천히 녹아내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길 바라며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세상을 향해 말 걸기를 그만 두고 있으니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현성은 속 깊은 어딘가에서 작은 아이가 눈을 들고 자신을 향해 입술을 움직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지난 십년간 그 것을 보며 지탱해 왔다.
드로잉북의 중간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여행 가방 속으로 빨려들듯 챙겨넣었다.
현성은 방을 나왔다. 아니 집을 나왔다.
집을 만들 때에 함께 늙을 사람을 골랐으면 좋았을 걸.
기차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탔다. 대구 경산 어드메 쯤 버스정류장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음력 설날 아침인데. 남편 없는 여인과 그니의 딸이 번갈아 카페를 보고 있었고 현성은 몇 번인가 그네들의 공간을 웹진에 연재되는 칼럼 속에서 사진으로 보았었다. 볼 때마다 가 보고 싶었다. 안면 없는 그들의 "집"이자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공간"으로 한 발 들이자 깜짝 놀랐지만 곧 괜찮다는 표정으로 반가이 맞아준다.
" 어서 오세요. "
" 문 열은 거 맞죠? "
" 네, 영업해요. 앉으세요. "
그들은 영업품목이 아닌 떡만두국을 대접해주었다. 밤 늦도록 동네사람들이 마실을 나와 떠들면서 갈 줄을 몰랐다. 현성은 집시들처럼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한 사람이 민박집을 소개해 주었고 거기서 여장을 풀었다.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둔 방에서 요를 깔고 이불을 덥고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어린 여자애처럼 엎드려 누웠다. 새로 산 작은 노트 속에서 편지를 끄집어내었다. 열 일곱이었을까 아니면 열 여덟이 된 해였을까? 그 애가 고등학교 2학년을 두 번 다니는 바람에 기억의 페이지 수가 헷갈리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시절을 추억해도 마음이 애잔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현성은 시간의 벽이 사방에서 허물어지고 경계 지울 수 없는 어떤 공간 속에 들어있었다. 오래된 노트의 갱지 속에 그려넣은 삽화처럼 현성은 기억 속에 스며든 존재가 되고 있었다.
모름지기 나는 "절대 평범해선 안된다"는 전혜린의 명제를 모토로 불꽃같은 한 생을 살고자 하였다. 31세에 자살한 그니가 아니라도 스물여덟에 요절한 윤동주, 이상 그리고 마야코프스키와 W.A. 모짜르트도 삼십대에 죽었으니 나는 가히 서른에는 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십대를 보냈다. 그렇게는 안되었다. 입시의 압박감과 가정적 불행함에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염세주의에 푹 빠져있던 사춘기시절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연습삼아' 손목을 그어보거나 약을 먹어보기도 했으나 서른을 넘기고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90년대 말이었다.
김남주가 암으로 죽었다. 출옥하고 살아낸 기간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보다 짧았다. 그가 옥중에서 써낸 "나의칼 나의피" 를 읽으며 사춘기를 우격다짐으로 넘겨왔던 내게 시대는 그렇게 읽어졌다. 죽을래도 죽을 이유가 없는!
"배반당한 혁명적 로맨티스트"가 되기에도 참 더러운 "환멸과 저주의" 시대였던 것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떠드는 거리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다가 불쑥, 결혼을 했다.
결혼, 국가와 결혼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처럼 계급과 결혼하여 독신으로 살면서 세계를 제패하고자 했던 내가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 시대에 직면하여 그걸 해치운 것이다. 서른 다섯이었다, 죽지도 못하고 해치운 결혼이라니. 갑자기 소시민이 되었다. 그 물에 가야 잘난 놈을 만난다는 대입관을 조소하고 낭만의 학생운동을 하면서 졸업은 한다라는 선배들도 엿먹이고 가열찬 현장투쟁과 견결한 조직활동으로 한 몸 불사르고자 했던 내가, 그저 역사의 한 점으로 살다 가리라던 내가, 설령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는 로자룩셈부르크의 연인처럼 " 당신의 발전을 위해 청혼하지 않겠다"고 말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결혼을 했다. 그래도 한 놈은 내가 선택한 "그"에게 로자의 연인처럼 행동하라고 권유하기는 했다. " 그녀의 발전을 가로막지는 마세요. " 하고. 완전 폐쇄자(the Closer)였다.
오, 결혼!
일찌기 그것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말해졌던 것이다. 하여 나는 이상향의 남자를 묻는 질문에 "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남자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내 결혼은 가장 극악한 형태의 이율배반이고 상호모순이며 양날의 칼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아무리 친절하고 헌신적인 연대활동을 하는 여성동지라도 운동권인데, 평탄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만류했다. 나의 친구들은 오, 언니, 노조활동을 했다고 다 우리같이 생각이나 품성이 깨어있다고는 볼 수 없어요.라며 우려했다. 그게 아니라도 이미 운동권커플들도 이른바 아는 놈이 더하다는 말을 실증시키며 열에 아홉은 파경에 이르고 있었다. 근데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그 자세한 연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재미진 구성을 갖추었을 때의 먼 후일로 미루어놓겠다. 중요한 건 그렇게 " 불쑥 해 치운 " 결혼이 내게 아무러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마음에 있어서만. 마음과 현실은 헤겔의 관념과 실재 만큼이나 분리되어 있었으며 "결혼한 현실세계"에 대한 나의 태도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현실에 대한 윤리적 신뢰만큼이나 공허한 것이었다. 그러한 마음의 관념성과 무력함은 시댁식구들의 태도나 강압이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커다란 충격과 공포로 폭발했다. 예를들면 처음 인사차 간 시댁에서 나는 김치를 담그기 위해 부엌(주방이 아님, 씽크대 따위가 없는 수도꼭지와 맨바닥의 헛간같은 추운 곳)으로 내몰려졌다. 나는...울었음. 왜?라고 묻는 남편될 사람에게 내 마음을 설명했으나 그는 이해하지 못 했다는. 그후에도 내가 그와 합일할 수 없으리라는 미래를 예견케하는 사건들이 잇달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굳건한 마음은 초연하게 유지되었다. 세상의 질서와 주류의 이데올로기에 반역해 온 내가 그까짓 가족주의에 굴종하겠는가? 그러나 가부장제의 역사가 현존하는 방식은 계급사회의 그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강력하고 단단하며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오죽하면 계급해방 자체만으로는 여성해방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겠는가?
결혼을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 정도로 치부했던 내게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대상들이었으나 아이는 달랐다. "그의 동의를 얻지 않고" 세상에 내어놓은 아이에 대한 책임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정말로 "태어나버린" 아이를 보았을 때 나는 하늘이 주신 모성의 기쁨 따위는 단지 학습된 감성의 수준으로만 느꼈으며 보다 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를 마주하면서 그 내던지는 행위에 일조했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공포와 전율을 체감하고 있었다. 오직 무력하고 자기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부모만이 " 아이는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거나 " 결국 지 타고난 팔자이다"라고 자식에 대해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식의 무거운 책임의식이 아니라도 "양육"을 위한 모든 노동은 내게 전담되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나의 실제적인 결혼, 그 뒤의 스트레스는 본격화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백일파티에서 남편과 이혼말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7년 뒤 유치원을 졸업할 때 쯤에는 잠정적 이혼상태로 불쑥 결혼했던 두 남녀는 합의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런 합의나 결혼,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성인들의 인생 이야기가 본 글의 주제는 아니며 또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지도 않는다.
아이는 학령기에 들어섰으며 학교를 가고 공부방을 가고 때로 저녁식사도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많이 늦어지긴 했으나 바야흐로 나는 간이역을 떠나 다시 사회생활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럴 것 같았다. 이미 십년 간의 투쟁과 연습 속에서 가족 혹은 가정을 재생산하는 노동은 상당히 축소되고 간소화되었다. 예를들면 자조능력은 갖추고 있는 비장애인으로서 남편은 자신의 밥과 의복 그리고 제 누울 자리정도는 혼자 챙기며 출퇴근을 하고 있다. ( 맞벌이생활 중의 가사분담은 커녕 하루 40분의 외벌이 남편의 평균가사노동시간도 달성하지 못 하는 그와의 공동생활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이 집에 사는 한 지 앞가림은 스스로 해라.라는 것) 아이들은 빵과 우유로 지나가는 아침식사에 익숙해져있었고 ( 엄마가 길들였다고 오해하지 말 것, 기상과 등교 사이의 짧은 삼십분에 밥을 먹는 것은 신체리듬상 무리임, 고구마와 미숫가루 등 충분히 곡류를 통한 조식을 제공하고 있슴) 학교 생활이 끝나면 지역공동체의 더불어 함께사는 아이들이라는 모토를 충실히 실천하는 공부방에서 유기농식단의 간식과 저녁식사를 하며 알차고 재미있게 지내다가 7시에 귀가한다. 고로 나는 아침 9시부터 오후 6,7시까지의 개인가처분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단, 주 5일 동안만.
아이들이 집에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의 주 2일은 온전히, 거의 온전히 집에 있어야 한다. 아이들끼리 집에 둘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안전 문제이다. 하지만 못지 않게 하루 세끼의 식사 또는 간식과 주변 정리 등 아이들이 집에서 쾌적하게 놀고 공부하고(는 물론 희망사항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배려와 돌봄 그리고 감정노동을 수행해해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서술에 모성의 기쁨이라던가 아이돌봄이 고역이기만 한가라는 류의 반론은 제기하지 말아 달라, 논점은 그런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만일 선택해야 한다면 아이들의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위해 안방에서의 매춘을 감행할 의사까지도 있다. 물론 가설이다.
주 7일 중에 단지 2일의 전일노동은 기존의 가사노동에 비해 확실히 줄어든 것이다. 아이들의 5세 이전까진 혼자서 집 밖을 나간 적이 없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싣고 마트나들이를 가게 해 준 적도 있다. 내 경우, 아이를 맘편히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친인척보다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폐가 되니 늘 망설여진다. 그러니 안전이 보장된 학교와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지내는 평일의 낮시간과 남편이 쉬는 일요일 만큼은 내가 가장 맘편히 외출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 나는 주 5일의 전일제 근무를 하는 곳에 취업을 할 수도 있다. 그리 녹록친 않다. 아이를 낳기 전의 맞벌이생활과 아이들이 4세,6세였던 1년간의 맞벌이생활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볼때 나는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지 못 했다. 그건 순전히 내가 워킹맘의 자기규칙인 " 씽크대의 얼룩을 보더라도 눈을 감고 지나가라"는 테제를 실행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예를들면 나는 냉장고 안을 늘 깔끔히 정리해두고 냉장고용 김치항아리를 한 번 꺼내고 들일 때마다 행주로 주변을 싹 닦는다. 나의 냉장고는 늘 정리컨설턴트의 우수등급을 받을 상태로 유지된다. 이불을 개고 펼 때도 마찬가지다. 각 잡고 개켜올리는 내게 직업군인 출신의 남편은 내무반에서도 그렇게는 안 한다고 핀잔을 준다. 핀잔만. 그 무거운 라텍스 요를 한 번씩 털고 정돈할 때도 손을 보태지 않으며 그럴 필요가 뭐 있냐고 나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청소의 기준을 달리하는 인간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요컨대 나는 집안을 건사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다. 극단적으로 빨래를 널고 걷고 개는 것도 할머니처럼 한다, 다림질한 것처럼 반듯하게.
워킹맘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건조대에서 걷어 바로 옷을 갈아입는달고 말하며 집안에 행주나 걸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한다. 실제 나는 그들의 집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그들은 집을 숙박업소처럼 이용한다, 온 가족이 모두 다.
내게 집은 쉴 곳이며 노는 곳이며 정신이 성장하는 곳이다. 그건 그럴 수 있을 만큼 쾌적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맘처럼 성격을 바꾸면 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 나는 맞벌이 시기 늦은 퇴근과 늦은 저녁식사와 모든 단도리를 마치고도 혼자 거실을 청소하곤 했다. 새벽 세시에.
청소 만큼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청소처럼 바쁘면 안 할 수도 있는 종류의 가사노동이 아닌 것이 바로 취사 혹은 요리이다. 그건 정말 중요하다. 오죽하면 68혁명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취사였겠는가.
평일의 저녁식사는 없어졌지만 귀가 후 야식을 챙겨야 했다. 그건 과일이나 주전부리로 후식을 내놓던 것보다는 좀더 양과 질에서 강화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낸 아이들은 집에서 안정적인 기분으로 고구마와 쥬스, 과일샐러드 정돈 먹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급식체제가 제공하기 어려웠던 포만감, 안정감, 여유로운 대화와 자기표현 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먹으면서 즐겁게 떠든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특히 어린 시절에 중요하다. 한번도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남편은 아무리 편안하게 늘어지는 휴가가 주어져도 밥을 천천히 먹지 못 한다. 늘 오분 만에 고봉을 비우고 밥상머리에서의 식량쟁탈전에 승리한 후에야 뒤로 물러나 승자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그는 오징어를 씹는 정도나 되야 한, 두마디 농담을 한다. 뭐 남편의 궁핍한 어린시절과 삶을 즐길줄 모르는 태도의 연관성을 논구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평일의 저녁시간을 돌보는 엄마의 임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나는 평일 저녁엔 외출할 수 없다. 강조해서 말하면 직장에서의 칼퇴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많은 경우 워킹맘들이 그러지 못 하는 실제적인 직장메카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보고 있다. 그들은 마흔 이상의 승진가능성이 있는 여성직장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퇴근하지 못 한다. 직장이란 하다못해 회식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매번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집에서의 부재는 월 1, 2회라 할 지라도 무척 곤란한 상황이 연출된다. 내 남편된 자가 아이들과 집을 대신하여 돌보지 않기 때문이기는 하다. 나는 열 한시 쯤 귀가하면 나 없이 뭔가를 먹고난 식구들의 뒷설거지를 해야 하고 아무렇게나 널려진 옷가지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늦게 들어왔어도 다음날 아침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미처 가방에서 꺼내어지지 않은 아이들의 수저통과 물병을 꺼내 다시 씻어 담아야 하고 미처 챙기지 못 했던 가정통신문의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담임에게 전화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저런 일들이 워킹맘들이 못 해 내는 일들이 아니고 다들 해 내고 있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며 말이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 아니 처음부터 싫어한 건 아니다 해 보니, 못 해 먹겠다는 것이다. 내게 가사도우미를 부르라는 말을 조언이라고 하지는 말라. 이 나라에서 대졸여성의 취업률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워킹맘의 대졸비율이 20%이다. 취업하고 있는 주부들의 80%는 고졸이하이며 또 100인 이하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파 한 단을 사더라도 까지 않은 흙대파를 사서 가사노동을 더 할 지언정 생활비용을 줄여야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다. 집안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직장생활도 지가 해 내야 하는 일이다. 분담할 사람은 없다. 한부모가정처럼 생활을 꾸리고 집을 건사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내게 필요한 것은 직장이 아니라 돈이다. 그 돈이 내 월급이든 남편의 월급이든, 보내주는 양육비든 상관없다. 생활비가 있으면 직장을 다닐 이유는 없는 것이다. 자기실현이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혹은 자존감을 위해서라는 건 특히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겐 가당치 않은 언설이다. 남편이 집에 있으나 별거하고 있으나 이혼한 상태이나 별로 다르지 않게 이 나라의 엄마된 자들은 혼자 아이를 키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전업주부가 되기를 결혼하고 십년이 넘어서야 결의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토록 견고하고 완강하며 틈없이 강요되는 여성에게 주부됨을 요구하는 현실이라니, 하다못해 정신의 고양과 사교를 위해 어딘가의 강좌나 세미나를 갈래도 그것들은 평일 저녁 아니면 주말에만 있다. 주중의 낮에 있는 프로그램들은 거개 요가나 스포츠, 음악감사, 취미미술 뭐 그런 식의 온건한 교양수준의 모임들 뿐이다. 마치 평일의 저녁식사와 주말의 안락함을 위해 수고하는 전업주부들에겐 딱 그 정도가 어울린다는 식으로 말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늘 마음에 되뇌어지던 구절이다.
십대후반에 늘 이런 정서였다. 그리고 이십대에 그 부끄러움을 못 이겨 운동을 했지.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무얼 바라 홀로 침전하는지.
지금도 문셈을 가면서 다시 맑셈을 가면서 때때로 미친듯 독서에 열중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다.
시를 쓰는 것처럼, 사상(事象/思想)을 글줄로 나열해 놓은것을 '이해'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린 것이 하 분해서
마음을 잡지 못해 벌인 일들 투성이다, 산다는 것이.
나는 왜 아무도 안 보는 소설을 쓸까...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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