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집에 관한 두번째 소고
- 외딴방
- 2013
-
- 집과 밥과 사랑에 대한 소고
- 외딴방
- 2013
-
- 유서
- 외딴방
- 2013
-
- 지겹게 변하지도 않는 작자
- 외딴방
- 2013
-
- 혜정의 모놀로그
- 외딴방
- 2013
나는 과거를 쓰고 있다.
불러내어 오늘을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쓰고 싶다.
그건 아마도.
묻지 못 한 한 마디를 가슴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왜 내 사랑은 실패했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랑의 서사를 재현하고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 각각의 진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사실, 그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한번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에겐 자신이 목도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알아낸 진리를 실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정 같은 거 말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얼굴로는 이미 결별을 선언하는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자기는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녀를 버린 자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누구를? 두고 갔는가. 떠난 것은 항상 그녀 쪽이었고 우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현성도 말했다. 나를 비난한다 한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 못 한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교직사회의 퇴임자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생들이라고 달랐겠는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던 동시대의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에서 정직했다. 그래서 비난한다 해도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도 그녀의 주변에서 대작을 해 주고 있다. 외로워진 그녀는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표정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비난이라는 것도 뭔가 대안을 갖고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판이란 힘이 없는 것이 - 그녀가 전투적?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현장을 버티고 있을 때에도 - 그녀에게 동조한다는 것은 곧, 그녀를 껴안고 고난의 연대를 건너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공감을 구하면서 의존하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자들은 노심초사한다. 그녀가 이제 펜을 놓겠다 하면 그 때에는 현실을 살고있는 자신의 도우너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때, 왜 나를 두고 갔어? "
" 누가 두고 가?"
" 나를 떠났쟎아, 공장거리에 혼자 두고."
" 누구나 그들 각자의 생이 있는 거야. 너는 너의 생을, 나는 나의 생을."
" 너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
" 그래,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지. "
" 너는 레즈비언도 아니지. "
" 맞아, 나는 그렇게 위험한 소수가 될 생각은 없어. "
"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무엇이지? "
" 친구쟎아, 바보, 그때 그런 것처럼 지금도. 우린 향후 오십년을 함께 지내기로 했쟎아. "
그녀는 뭐 어차피. 하면서 정리했다.
- 향후 오십년은 맑시스트가 탁상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을 꺼야.
- 레즈라는 것도 뭐, 성관계를 안 하면 친구나 다름 없지. 어차피 그는 프리지디티(frigidity)이야.
그녀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 했다.
마치 갈 곳이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깔끔한 성격이 누구의 것이었냐는 듯 겨울을 핑계로 잘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밥을 지어 먹는 것 외에 청소도 가끔 누울자리를 만드는 정도로만 했다. 빨래도 한참을 두었다가 피치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한 번씩 해서 널고 걷고 개는 일을 분절하여 하루 걸러 하나씩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가족들의 일상을 챙기는 외에 다른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살림을 전업하여 거기서 자신의 주체됨을 찾고 능란할 뿐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자존감조차 세울 만큼 생활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대체로 일을, 그것이 육체노동이라는 뜻의 생산직이든 다소 정신적이라는 풍의 사무직이든 상관없이 그녀는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 했다. 보람이라던가 흥미나 적성의 문제도 아닌 것이 그저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자체를 소외된 노동으로 "느꼈다. " 따라서 댓가없는 일을 하기 싫어했고 이 말이 남들과 달리 그녀에게 의미했던 것은 원하는 댓가가 없으므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돈 벌고 싶지도 필요도 없었으므로 일할 이유를 찾지 못 했다. 그건 이전에 가졌던 직업이라 할 만한 모든 일들이 또한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맞벌이를 했던 것도 사무직에 취직했던 것도 그전의 공장생활이나 아르바이트 조차도 그녀는 그때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갖지 못 하게 되자 집 밖을 나갈 이유를 찾지 못 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의탁할까?
그건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이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믿지 못 해도 할 수 없다면서 웃었지만 다른 이유를 찾기도 어려워보이긴 했다. 그녀에게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아이들이죠. 하고 대답하는 그녀는 이제 아이들이 열 살이 되었으니 한 십년 쯤이면 삶의 이유를 찾기 어려워질텐데, 걱정이다. 하는 것이었다. 살 이유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나?
아프리카로 갈 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는 그녀에게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면 지금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는 틈틈이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혼자 사는 집을 건사하는 자잔한 일을 하면서 쓰고 또 쓰고 또 쓰다가 쓰러질지도.
무엇을 쓸 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소설가들은 방에 콕 쳐 박혀서 대하서사를 써내기도 한답니다. 아세요? 박경리는 평사리에 가 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평사리가 바로 그 곳에 그대로 있더래요.
그녀는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있다.
글을 읽지 못 했던 어린 날부터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림이 있쟎아요하면서. 만화를 보다가 글을 깨친 방콕소녀가 바로 그녀였다.
사실 지금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나 조차 그녀의 상상이 빚어낸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 당신은 내 사랑이 되지 마요. "
그녀가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음원을 끄고 디스플레이만 하고 있으면 좋았을 껄, 예인은 방글방글 웃고있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 뭘 할꺼에요? "
" 맛있는 밥, 카레랑 두부부침, 계란말이도. "
그녀는 밥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내일이 원고마감인데 더이상 손 볼 것 없다며 며칠 전에 닫았던 파일을 다시 열지 않고 있던 그녀였다. 그 상태 그대로 메일로 보내줄 모양이다. 예인은 어떻게 해야 수정과 가필을 독려할지 궁량했지만 아무래도 난망해 보인다.
" 카레, 진짜 좋아하네. 어제도 먹었다면서요."
" 오늘은 양상추샐러드를 곁들일 꺼에요. 난 양식조리사 과정을 등록할까봐요. "
현미밥, 달코롬한 소스를 첨가한 카레, 양상추샐러드에 아삭김치, 새콤달콤 무절임과 핫한 두부 위의 양념소스까지.
그녀는 쉡-처럼 허리앞치마를 두르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노동을 시작한다.
" 내가 준비하는 식탁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꺼에요, 크루프스카야처럼. "
" 크루프스카야?"
" 레닌의 동지였어요. 이스크라의 유일한 여자 편집자. "
" 혁명가군요. 요리를 좋아했나? "
" 동지들을 좋아했죠. "
" 당신처럼. "
그녀가 웃어보였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되기 보다 크루프스카야가 되기를 꿈꿨어요. 이상하죠? 러시아혁명사를 읽으면서 집밥을 먹었던 기억이 없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을 맘편히 받아먹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아이들의 밥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 아이들은 밥을, 돌아다니면서 먹는다.
앗!
뜨거워.
비명마저 속으로 외치는 혜정은 철도 레일 위에서 얼른 내려왔다. 다들 맨발로 올라 걷고 있었지만 한 발도 더 내딛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의아히 쳐다보았다. 동기들, 이 두 명의 남자동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제 말에 우쩍 일어나 양 손에 슬리퍼를 벗어든 채 외줄타듯 레일 위를 걷고 있는 걸까. 박통시절에는 더 그랬지만 전통시절에도 유격훈련 중 죽어나가는 군인들이 가끔 카더라통신를 타고 흘러나왔었다. 외줄을 타는 두려움이 어느정도일진 모르겠으나 여름 땡볕에 달궈질대로 달궈진 철로 위에 맨살의 발바닥을 대고 걷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이게 무슨 일제시대 고문장치도 아니고... 쟤들 왜 저러니... 혜정은 의뭉스레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 야, 누가 더 오래 걸어가나 해 봐라, 니들 중 난 놈 좀 골라보게. "
혜정이 말하자 영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사회과학써클에서 여자애들의 인기를 얻기는 난해해서, 1학년 신입부원으로 들어와 몇 달이 지났지만 썸씽은 남의 동아리 얘기였다. 상철과 종철은 냅다 철로 위로 올라섰다. 순식간에 불붙는 이 경쟁심, 저 놈을 제쳐야 내가 난 놈이 되어 세상을 제패할 것이다. 하는 듯. 남자애들이란.
신촌기차역에서 한시간에 한 번 정도 오는 기차를 타고 능곡을 지나 백마역에서 내리면 이쁘고 분위기있는 카페, 레스토랑이 있고 통기타로 라이브를 하는 화사랑도 있고 혜정의 써클이 어제부터 엠티를 와있는 민박집도 있다. 도착하고부터 선배들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러고도 아침에는 피티체조에 조깅에...이제 겨우 한숨 돌리며 동기들과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중이었다.
영혜는 세미나를 할 때도 조용했지만 동기들과 어울려서도 말 수가 적다. 원래 저런 성격인가? 혜정은 동기들과 친하고 싶었다. 남자애들과도 친구로 훌륭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근데 여자친구와도 이리 잘 사귀어지지 않는다. 내가 문젠가? 어릴때부터 반친구 사귀기가 힘들어 하교길이며 쉬는 시간이며 손잡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부럽게 혹은 고깝게 보곤 했던 혜정이었다. 대학은 좀 다르지 않을까. 더구나 사회과학 써클인데.
결국 뜨거운 레일 위를 맨발로 걷는 것에 승리한 것은 종철이었다. 아니 상철이었나? 기억에 숨은 의도가 있는지, 편견이 있는 지 모르겠으나 엠티 이후 여름방학 동안에 자취를 감춘 영혜를 찾아다니던 상철에게 한참 망설이다가 말해주었었다.
" 영혜, 선배랑 사귄대. 좀...됐나 보더라구. "
혜정은 일그러지는 상철의 표정을 보면서 짐짓 의연하게 사회과학도답게 일침을 가했다.
" 그 선배, 정말 웃기지 않냐. 저는 운동해도 되지만 지 애인은 운동하면 안 된대. 써클 그만두라고 강요했다더라구. 영혜도 뭐, 자기 걱정해서 그런거니까. 하면서 갈팡질팡하더니 과에도 안 나와. 여자애들은 대학도 다닐 필요 없다는 건지! "
1980년대, 우연히 들어간 운동권써클에서 발을 빼기 위해선 휴학도 불사해야 했다. 그러는게 나았을까. 혜정을 죽자고 쫓아다니던 종철은 2학년이 되자 마자 군대를 갔다. 안 가고 싶었지만 갈 수 밖에 없다는 군대에서 줄기차게 보내온 편지들엔 지방에선 알아주는 제일고 우등생답게 흘려쓴 궁체로 저의 애환을 늘어놓고 여친의 안부묻기를 잊지 않았지만 제대 후엔 다 잊었다. 혜정과 함께 한 세미나도, 밤새 불렀던 동지가도, 백마의 철길에서 있었던 동기들과의 추억도.
여름 한 밤, 술을 마시다가 없어진 종철을 기다려 새벽을 볼 때쯤 혜정은 주머니 가득 채 크지도 않은 조막사과를 서리해 온 동기를 면박주면서 어찌 이 조그만 게 사과맛이 난다냐? 했었다. 헤실하게 웃던 그 놈, 난 놈이 되고자했던 종철도 상철도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고 5공청문회를 끝으로 80년대가 이울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한 넘들 중 한 명을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 어디 가니? 이 시간에. "
" 영업맨이라서. "
" 그래, 살긴 어디 살구? "
" 쩌기..광릉쪽에. "
" 영업한다면서 왜 그리 멀리 살아? "
" 애들이랑 마누라가 공기 좋은 데서 살고 싶대서. "
" 그래. 그럼, 잘 가라. "
혜정은 대학생들이 그렇지, 뭐. 하면서 전철을 내려 바삐 걸었다. 동지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시간약속에 칼인 노동자들이 아닌가. 약해보여서도 느슨해보여서도 안된다. 여자라고 봐 주지 않을 터이니.
ps. 나두 참...문센글쓰기샘이 이비에스 대국민사연공모 주제가 여름이야기래서 함 내 볼까하구 썼지만...이런 글이 걸리겠냐...난 왜 여름 추억이 이렇게밖에 안 떠오르냐...쩝.
그래도 또 전화했다.
예인은 멘트를 다 준비했다.
기획회의 전에 작품에 대한 플랜을 알아두고 싶고...
전화를 안 받는다. 벨은 울리는데. 열 번쯤 울리는거 듣고 있으면 기분 참...
한 시간 쯤 있다가 다시 해 봤다. 바빠야 하는데, 그래야 전화를 다시 할 텀이 길텐데.
또 안 받는다.
계속 안 받았다. 벨 울리던 것도 멈췄다.
예인은 혈압이 오른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혼자만의 속앓이.
" 선배. "
" 응. 왜? "
" 그냥, 뭐하나 싶어서. 연짱 쉬는날이쟎아. "
" 원래 주5일제 하는 사람들은 다 쉬고 있어. "
" 누가 뭐라나. 뭐했어? 밥 먹을까? "
" 너 회사니? "
" 응. "
" 일욜에 회살 뭐하러? "
" 선배가 회사 위에 사니까 습관적으로 나오는 거야. "
농담처럼 얘기 안 했는데. 예인은 왜 선배가 웃는거지? 하고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 "
" 난 밖이야. 밥은 혼자 먹든지, 얼른 집에 가서 먹든지. "
" 선배, 나 집에서도 혼자거든. 밖이면 어딘데? 내가 갈테니 밥 좀 사 줘 봐. "
" 쫓아다니는 사람이 밥 사 줄께. 하고 쫓아다니는 거지. 누가 사 달래냐? "
" 그래서 맨날 많이 사 줬쟎아. "
" 근데 왜 이젠 안 할라 그래? 사 주는거 딴 사람한테 해야 하니깐? "
이건 또 무슨...오늘 왜 이렇게 안 먹히냐. 예인은 짜증이 날 것 같다. 작업 들어가기 전의 정지작업이 이렇게 안 되서야 뭘...
" 선배, 왜 이래? 후배 밥 사 주는게 그렇게 힘들어? "
" 나 밥 먹고 있어. "
가슴이 덜컹. 한다. 예인, 침착해.
" 누구랑? "
" 몰라도 돼. "
" 이작가님? "
" 아니야. "
" 그럼 누군데? "
" 그만 끊는다. "
" 잠깐만, 선배. 근데 이작가님은 만났어? 연락 돼? "
" ... "
" 선배? "
" 이예인, 신경 꺼라. 끊을께. "
어쨌거나, 예인은 정보를 종합했다, 선배는 이작가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구 연락도 안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답을 못 하지. 그리구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거다. 라고 추측이 된다.
누구? 예인은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그 전화기 너머의...친구. 이작가님의 친구인듯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생각은 많으나 할 일이 없다. 예인은 사장실 책상 앞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일어나서 가야하지만 아니 가고 싶지만, 어떻게 이작가의 주소지를 찾아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린단 말인가. 뭐라구, 무슨 명분이 있어야.
절로 전화기에 손이 갔다. 이틀전부터 수차례나 누른 번호를 눌렀다. 자동인식, 즐겨찾기에 링크되어있는 번호.
벨이 울렸다. 안 받는다. 열 번쯤 울리는 건 기본으로 듣고 있게 되었다. 근데.
받았다.
" 네. "
다른 사람이 대신 받은 건 아닐까? 예인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 기운없는 음성이나 이작가다.
" 안녕하세요? "
" 네..."
" 아, 저에요. 이 예인. "
" 아, 네. 사장님. "
그녀는 왜 전번을 저장해 두지 않는 걸까. 지속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 어디 아프신가 해서요."
" 네. 그냥 좀...몸살끼가 있어서. "
" 피곤하셨구나. "
" 아뇨...꽃샘추위 땜에. "
" 맞아요. 너무 추워졌어요. 바람이 많이 차더라구요. 어디 나갔다 오셨어요? "
" 아...니요. 추워서 안 나갔어요. "
"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병원에라도 가신 줄 알았어요. "
" 집에 있을땐 핸폰을 그냥 던져놓고 있어서. 미처 확인을 못 했네요. 무슨 일이라도..."
" 아, 그게 뭐 별일은 아니구..."
예인은 무슨 스토리를 준비했었는지 까먹었다.
" 네... "
" ... "
말이 끊어졌다. 어쩌지. 예인은 긴장감이 와짝 올라왔다. 그녀가 말을 안 한다.
" 아, 저기...작품계획이 어떠신가 들어볼려구... "
" 네...그것이..."
" 네? "
" 계획 없는데...지금은 좀...."
" 네, 뭐 지금은 작업 중이시니까 뭐.. "
" 아니...그보다...지금은 좀 제가 피곤해서..."
" 이작가님? "
그녀의 목소리는 느리고 점점 잦아든다.
" 미안해요. 제가 지금 너무 졸려서...요. 나중에...전화 드릴께...요. "
예인은 기다려 연결음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말 할 기분도, 기운도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정말로 바로 잠든 것 같다. 잠 속에서 몸을 녹이고 마음을 재우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죽어 없어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다시 눈 뜨고 바라보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말을 만드는 것, 이젠 하고 싶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귀찮다. 무얼 더 바라...눈 들고 하늘을 볼 것인가.
예인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수필에서 이런 분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뭐라고 했던가, 아무도 없는 곳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혼자 있다 보면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그런 말을 왜 했지? 예인은 그녀의 주소를 핸폰에 찍었다. 차를 빼서 거치대에 올리고 네비를 작동시켰다.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리라.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시계를 보더니 아직 아이들이 올 시간은 아니라고.
무슨 일이 있냐구, 말을 주워섬기긴 하나 물어보는 데에도 의욕이 없다.
" 계획하는 거 없는데...어쩌죠? "
그녀는 그말을 하더니 소파 옆에 쌓아둔 베개들에 어깨를 기대인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다 덮는다. 추워서...하고 중얼거리며.
" 주무시는데 깨웠나봐요. 그냥 계세요. 전 갈께요. "
" 아...네...문....닫고...안녕히 가세...요. "
예인은 현관에 선 채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이미 눈을 감았다. 아니 감기는 것 같았다. 파리한 낯빛, 표정 없이 감은 눈. 입술도 다물고 있다. 숨을 쉬고는 있는 걸까....
bar 는 작고 좁다랗다. 카운터 옆으로 내츄럴풍의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다. 이층엔 더 많은 테이블이 있다지만 예인은 올라가 본 적 없다.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본 적 없는 이층이 왠지 음흉해 보인다고 예인은 생각하며 땅값 비싼 동네에서 혼자 술 장사하기 힘들어. 야. 하면서 투정부리는 친구를 좋게 볼려고 애썼다.
" 우리가 친했나요? "
" 말 놓지. "
" 선배, 웃겨. 내가 먼저 말 놓으라고 해야 하는 거였는데? "
" 내 맘대로 놓아서 화나면 너도 놓으라구. 대학때 한두학번 차이가 뭐 대수라고. "
" 하긴 나이로 치면 내가 더 빠르지 않나? 선배,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
" 사주 보니..."
예인은 어쨌든 서류를 검토하게 되는 사장 입장이었다. 당연 선배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한살 연하였다. 황당하게시리...그럼 그녀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냐....예인은 연상연하커플이네. 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어쩐지 선배가 맨날 잡혀있는 것 같더라니. 하면서. 질투와 시샘으로 스무살의 연정을 끌고 가기에 우리들의 사십대는 너무 무겁다.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결혼하여 가정사에 지친 그녀가 열정을 잃고 있기 때문일까. 여전히 싱글이 선배도, 예인도 새삼 연애를 하기엔 뭔가 홀가분하지 않은 것이다. 왜...
" 유 선생님, 시나리오 작업하시는 거 귀찮아하셔. "
선배는 뜽금없이 말한다. 아니, 아까 하다 만 얘기인가 보다.
" 그래? "
예인은 더 해 보라는 듯 가볍게 받으면서 병맥주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병도 작은데 따라 먹긴 좀 우습구만. 우리 선배, 갈수록 멋대가리 없어지는 구나. 하는 생각을 예인은 떠올리고 있었다.
" 혜정...이 작가한테 소설 넘기시면서 작업해달라고 하셨어. "
" 그래? 언제부터? 촬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쟎아. 대본 다 된 거 저번에 확인했는데? "
" 반년 전부터. "
예인은 어이가 없다. 이런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거다.
" 그럼 울회사랑 계약하기 전부터 작업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왜 말 안했어. 누가 유 선생님 각본 아니면 안 찍을까봐? 유선생님 그렇게 인지도 없어. 특히 영화판에선. 아님 조금이라도 작가료 더 받을라구? 이작가님, 유선생님하구 그정도로 세밀한 각본 짜긴 그림이 좀 안 나오는데... "
선배는 맥주잔을 안 비운다. 심각한 상황인가, 지금이...예인은 주
선배가 작가들을 싫어한다는 걸 예인은 처음 알았다. 그럼 여지껏 드라마는 어떻게 찍었나...
" 유선생님, 혜정이 고등학교때 선생님이야. 담임도 했던...국어선생. "
" 그래요? 대단한 인연이네? 고교시절 선생님이랑 지금까지? "
" 유선생님이 문단 데뷔해서 알게 된거야. 것도 한참 뒤에. "
" 그렇구나. 근데 왜 선배는 불만스러워 보이지? "
그렇다. 불만스러워보인다. 선배는 유현경 선생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에 처음부터 반대였다. 작품에 대해 실컷 토론 다 해놓고 막상 영화화한다니깐.
"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 "
" 무슨 소리야. 선배. 당근 각본 새로 짜지. 편집 감독도 붙고. 지금껏 소설..."
" 유선생, 그딴 거 안 해. "
" 선배? "
예인은 감독이 작가들 인맥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선배가 누군가를 그토록 싫어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 왜 그래? "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그 여자를 싫어할까. 이혜정의 고등학교때 선생이라서? 왜 그래서?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도 딸려오게 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오죽하며 끼워팔기로 내는 순익이 본품의 그것보다 더 많다는 말이 있을까.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인은 그래서 딸려온 원두커피 박스 안의 비스켓을 튿어 금장 접시에 담아 내어놓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손님들은 대접받는 다는 기분을 더욱 한껏 느끼며 잘 차려입은 양장 위로 과자가루가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비싸 보이는 비스켓 하나를 꼭 집어들곤 하였다. 그리고 어지간해도 협상이 인연끊을 만큼의 결렬로 끝나는 일도 없게 되었다. 회사 입장으로선...하면서 예인을 향해 호감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는 영업팀장들은 꼭 다음 약속을 남기곤 했다. 그래 그러니까...
예인은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도 이혜정 작가 자체로 예인엔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긴 그런 타산이 다 무엇일까. 오직 냉정한 비즈니스로 이 감독을 영입한 것도, 아니 기획사 자체를 차려낸 것도 아니었으니 세세한 자기합리화까진 필요 없을 것이다. 결국 인생은 제가 원하는 대로 틀어가게 되는 법이다. 그녀가...
본 건물은 금연건물입니다. 라는 표지가 입구와 계단 층마다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주로 촬영현장으로 쓰이는 스튜디오들 안에서 금연을 지키게 하기는 어렵다. 카메라에 냄새가 담기지는 않으니...자고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스모킹이라는 영화제목까지 나왔겠는가. 그렇다 해도 예인은 하얀 빵모자와 돗트프린트의 쉬폰스카프가 어울리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잘 연상이 되지 않았다. 저기, 복도의 끝에 화재대비용으로 설치된 발코니에 한쪽 어깨가 보이는 것이 분명 그녀일 것이라고 확신을 해도 말이다. 그녀를 지키듯 발코니로 나가는 문 한 가운데 서서 역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선배이다. 그녀의 어깨 높이에 머리가 있는 것을 보니 발코니 바닥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피스텔 안에도 작지만 베란다가 있는데. 예인은 왜 그들이 굳이 저기 나와 있는 지를 모르겠어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복도의 반대쪽으로 갈까. 아님 주거용 오피만 있는 탑층에 제가 올 일이 없는데 마주치면 난처하니 얼른 도로 내려갈까....하지만 발코니에 나와 앉은 그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금방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으니, 그건 일부러 집 안에서 들고 나왔다는 것일테니...
예인은 항상 그녀를 볼 때마다 뭔가 속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낯빛이 비교적 희거나 화색이 돌때도 그녀는 표정이 가볍지 않았다. 이십대의 그 거리에서도 그늘없이 쨍한 여름태양 아래서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거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사십대의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것처럼 웃어도 다 웃지 않은 채 입꼬리를 내리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담배도 끊지 않은 것이다. 이십여년을 계속한 흡연으로 안색은 늘 산화아연의 파우더를 칠한 듯 창백하다. 담배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민 손톱, 반이 잘려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부식하듯 떨어져나가고 있는 손톱, 얇고 하얀 핏기라곤 찾을 수 없는. 그 얼굴, 귓볼, 목덜미 어디 한 곳에서도 불그레한 생기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헤어용 오일을 사용한 듯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조차 윤기없이 바삭해 보였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하다. 혹은 영양결핍이다. 푸석해 보이는 피부. 그렇게나 건조해 보이는 입술. 예인은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감독의 시선을 되짚어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 눈, 고정된 시선의 강한 눈빛. 그 속에 담겨있는 게 무얼까. 욕망? 글쎄.
이십년 전보다 훨씬 불건강해보이는 애인을 바라보는 눈길 속에 담긴 것이 연민인지 애틋함인지, 조금은 변질된 분노나 고통어린 애증인지 알 수 없다. 따로이 가정을 갖고 있는 그녀를 소위 직장을 매개로 하여 다시 만나고 있으면서 불붙을 지도 모르는 애욕을 경계하기에 선배의 눈빛엔 너무나 열정이 없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예인은 선배가 피아노를 칠 때도, 노래를 할 때도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거나 작품을 다시 해석하면서 연인에 대한 감정을 새로 돋는 신록처럼 화면 가득 펼쳐 보일 때도 항상 열정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찾던, 그리하여 갈구하던 애인을 다시 만났으면 상황과 조건이 어떻든 기뻐하거나 적어도 생기가 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예인은 선배가 날이 갈수록 처지고 또 느려지고 있는 것엔 그녀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발코니에서 나와 복도로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찌나 느리고 기운이 없는지. 불현듯 그녀가 지체장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힘없는 시선, 시계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을 나중에 인식하는 듯 표정이 느리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제야 함께 시선을 드는 선배, 똑같이 힘아리 하나 없는 얼굴에 활기없는 몸짓, 저게 감독의 얼굴인가? 선배의 사랑은 선배에게 독이 아닌가.
그런 문장을 만들어놓고 흠칫 하고 있는 예인에게 그녀가 손짓을 한다.
" 여기 오신 거죠? 저 가는 참인데, 감독님도 잡아 줘요. 배웅나온다 해서 말리는 중이거든요. "
" 이 작가님, 왜 벌써 가요. 아직 한 낮인데. 애들 올 때 안 되었쟎아요? "
" 금요일이라 장 봐야 해요. 나중에 애들만 두고 나갔다 오기 뭐 해서. 감독님, 쓸데없이 따라온다해서 떼는 중이에요. 요즘은 동네마트도 다 배달해 주거든요. 우리가 뭐 자취하는 대학동기들도 아니궁. "
" 아, 그거 저번에 대본에서 본 거 같은데. 이번 작품 하시는 유선생님이랑 같이 작업하세요? 대본 바뀐대서 유선생님 댁에 가신 줄 알았더니. "
" 예인이 너, 나 만나러 온거야? 그럼 좀 안에서 기다리구. 밑에까지만 내려갔다 올테니. "
그녀를 대신해 말을 친 선배는 그껀은 나중에. 라고 흘리며 그녀와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러 간다.
" 어, 아냐. 그럼 같이 내려가서 커피숖 가지 뭐. 그냥 딴 생각하다가 올라와버려서 짐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
그녀는 연신 한 쪽 손을 내 저으며 따라오지 말라 한다. 커피숖 가라구. 저는 엘리베이터 더 타구 내려가서 지하철 연결통로로 나갈 꺼라구.
" 작가님은 왜 차 안 갖구 다니세요? "
" 글쎄요. 워낙 잡념이 많아서랄까..."
얼버무리듯 말하는 그녀. 운전하면서 신경 곤두세우는게 싫다고. 공주님 체질이라 기사대동하지 않으면 자가용 못 탄다고 농담하면서 떠난다. 아쉬운 듯 그녀를 보내는 선배. 하지만 표정은 왠지 더 어둡다. 다른 걱정이 있는듯.
" 커피 안 마셔? "
예인은 후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좌석을 메우고 있는 고급 커피전문점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 계속 마셔서. 너 괜찮으면 맥주 마실래? "
" 웬일이야? 선배가 나한테? 맨날 문전박대하더니. "
벌써 몸을 일으키며 예인은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한다.
" 여기 호프집은 분위기 쫌 그런데. 선배, 그냥 바로 가자. 내 친구 하는 데 가까이 있거든. 근데 배도 고프고..."
그러고 보니. 하면서 선배도 맞장구를 친다.
" 계속 커피하고 담배만 해서. 요기 될 만 한거하구...병맥주 먹자. "
예인은 이게 선배의 대산가 싶어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 왜 그러니? "
" 선배, 좀 이상하네. "
" 뭐가? "
" 날 너무 가깝게 대하네. "
"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대표 대접해달라구? "
" 학교 때부터 쫓아다녔는데 그렇게 곁을 안 주더니, 요즘 왜 이래. 늙었나? "
병맥주를 컵을 달래서 따라 마신다. 선배, 폼 안 나는데..
" 폼 잡고 사는 거 힘들어서 늙는다. 너라도 나 좀 쉬게 해 주라. "
예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예 묻고 있었다.
" 애인 만나서 즐거운 줄로 알고 있는데. 의외의 대사네? 오늘도 땡땡이 치구 오피에 쳐 박혀 놓구선. "
조감독을 붙잡고 뭐라고 하소연하는 이윤정을 뒤로 하고 예인은 맥이 풀린 채 촬영장을 나왔다.
하얗게 새로 지은 건물, 건물 중앙에 전망용 엘리베이터를로 만들고 로비를 이층까지 높였다. 외장에 씨블랙을 입히겠다는 예인의 말에 설계사무소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았었다. 수지타산 안 맞춰도 되면 맘대로 하라면서. 안그래도 주상복합으로 빼면서 타산이 안 맞고 있는데 부채비율이 위험수윈데 하고싶은 거 다 하려다가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다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지라 예인은 더 주장할 수가 없었다.
모 아니면 도라구...예인은 블랙을 포기할테니 크리스탈로 바꿔달라고 해서 겨우 확보한 것이 지상 2층까지의 전면유리창이었다. 투명한 큐브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 예인은 이층에 내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칠 것없이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차들, 인도의 행상들...그 어디 쯤에 선배와 그녀가 걷고 있을 것 같았다.
훌쩍 큰 선배의 팔꿈치에 어깨를 스치며 종종 거릴 것 같은 그녀. 무릅을 덮는 폭넓은 치마를 입고 앵글부츠로 한껏 키를 늘이곤 갈색머리칼을 삐죽이 내민 채 회색 베레모를 쓰고 물방울무늬의 쉬폰 목도리를 여왕의 러플칼라처럼 칭칭 감고 나타나곤 했었다. 예인엔터빌딩의 준공식 이후 바로 입주한 선배의 오피스텔을 찾아서. 12월 초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땐가 예인은 이층의 지금 이자리에서 거리 쪽이 아닌 로비 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익숙한 그림자의 선배가 코데즈컴바인의 야상을 반쯤 어깨에서 흘러내린 채 그녀의 팔꿈치를 부축하느라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러게, 굽 높은 거 신지 마라니깐. "
" 그럼 마중 나오지 마 ! 너랑 길 가는 거 힘들단 말야. "
" 누가 쳐다 본다구 그래? "
" 힘들다구...쪽 팔린게 아니라... "
엘레베이터를 타도 될텐데 그들은 굳이 이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한 계단, 아니 두 계단 쯤 올라갔나보다. 180을 육박하는 선배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해사하게.
" 내가 더 올라가면 너두 목 아플 껄. "
" 앞이나 봐..."
선배는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생생한 표정으로.
예인을 알아보지 못 한채 선배는 시종일관 그녀의 옆구리를 낀 채, 발끝이나 손끝 아니면 그녀의 이마 쪽을 쳐다보면서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피스텔이 있는 탑층까지.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그녀를 위해 한쪽 팔을 뻗어 가드를 해 주는게 보였다.
예인은 선배의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보다 주로 캠퍼스의 어느 나무 그늘이나 벤치 근처, 혹은 정문을 빠져나가 직선거리 100미터면 도달하는 타 대학교로 가는 은행나무 많은 인도의 어디쯤에서. 선배는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그럴꺼면 뭐하러 이쪽 학교에 입학했담. 예인은 선배를 몰라도 되었을 것이라며 그녀의 대학에 음대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무슨 학과인지 그 학과가 자신과 선배가 다니는 우리 학교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배는 예인의 존재 조차 모르고 있는데. 선배는 다른 사람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는 듯 했다. 학과의 동기들이나 동문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창문에 물이 흐르도록 장치해 놓은 호프집 안쪽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을 예인은 어쩌지 못했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었고 피아노를 칠 때도 치지 않을 때도 음악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우쭐해 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의 곁에서 지나가는 길이 아닌 동행으로 함께 걷거나 말 나누거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물론. 언제나 그 녀 뿐이었다. 어느 여름엔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시한 셔츠에 발목이 넓은 카고 팬츠를 입어 더욱 작아보이는 그녀와 마주쳤었다. 혼자 서 있는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예인은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피부가 어린애처럼 말갛고 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한창 화장에 열을 올리던 대학 신입생들 속의 예인으로선 뭐 저런 촌스런...하는 말을 속으로 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대학생이란 걸 알고 있지 않았다면 중학생으로 오해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낮의 캠퍼스 앞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중고생들은 모다 날라리일 것인데...
" 혜정아 ! "
뒤에서 휙 앞으로 내달리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역시 선배였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든 채로 뒷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쑥스러운듯 미소를 흘렸다.
" 머리 잘랐어? 왜 이케 짧게 ! 시원하긴 하겠네? "
" 어려 보여서 완전 망했어. "
" 그럴 줄 몰랐어? "
" 멋일어 보일라 그랬는데. "
예인은 선배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도, 시종 웃음을 흘리면서 농담처럼 떠드는 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정하니 흔들면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는 신발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키높이구두나 운동화, 힐이나 샌들 뭐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뭐였지. 암튼 굽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유난히 하체가 짧아 보였으니까. 키가 큰 선배와 같이 있어서 더 그래 보였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시선을 아래로 까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가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는 사람은 불편하다. 저렇게 키 차이 나는 커플..
그 때도, 그 이후에도 또 지금도 선배는 변함없이 그녀를 가드하듯 몸을 기울인 채 옆에서 걷곤 한다. 마치 그녀의 호위기사라도 된 듯. 왜...선배는 그 자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직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길러 찰랑거리게 하지 않는 걸까. 넓은 어깨 만큼 풍부한 바스트와 쭉 뻗은 허리, 8등신의 몸매에서 월등히 높은 하체 비중을 가졌음에도 항상 루즈하게 걸치고 다니는 사파리, 점퍼, 롱셔츠 뭐 그런것들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질 않곤 했다. 그녀를 신경쓰는지 신발은 늘 굽낮은 플랫슈즈 아니면 스니커즈, 어떨땐 슬리퍼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뭐...그런...
그렇게 멋있는 선배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녀는, 그녀도 옆사람이 자랑스러운 듯 흘낏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곤 했다. 마주친 시선에서 부러움을 발견했을까? 얼른 시선을 비키는 그녀. 예인보다 그녀가 더 무안해하는 듯 표정이 긴장했다.
" 왜? "
" 응, 아니. "
" 뭐 불편해? 어디 들어갈까? "
" 아냐, 더운데. "
" 그러니까 시원한데 들어가면 되지. "
" 추워, 에어컨은. 저 위에 가서 떡볶이 먹을까... "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팔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끼고 있다. 표지의 제목이 잘 안 보이는 양장본의 홑껍데기 책. 중간에 책갈피가 끼어 있다. 그녀는 항상 촌스러운 고시생같은 분위기다. 그녀의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선배는.
예인은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용인 값을 하느라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게 해 준다. 탑층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끝까지 갔다. 선배의 오피스텔은 중간 쯤에 있다. 골라도 된다구 했는데 번잡스럽게 엘레베이터 가까운 쪽을 선택했다. 왠지 그것도 이제는 나이 들어 산책하기 보다 한 곳에 자리잡아 앉아있기를 더 선호하는 그녀를 위해서인 것 같이 느껴졌다. 장엔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주거용 오피를 구입해 들어온 것도 그녀가 입사한다는 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서였으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예인은 선배를 설득하기 위해 떠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무엇이 주효했는지를 또한 전혀 객관성없는 이유로써 알고 있다. 방송국보다 영화가 낫다, 월급감독보다 자기꺼만들면서도 더 많은 연수익을 보장하겠다. 홍보나 흥행 모든 것은 회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작가 선택권도 주겠다 등등...예인은 소속 작가들을 나열하다가 결국 덧붙였다.
" 드라마작가하시다가 오신 분들도 많아요. 이윤정 작가 뿐 아니라 아직 신인이지만 이혜정 작가, 그리고 또... "
" 이혜정 작가가 왜? "
형식적으로 문답만 하고 있던 선배가 먼저 물어오는 순간이었다.
" 왜라뇨? 당연히 데뷰했으니 차기작을 내야죠. 드라마국에서 그 경력, 그 스펙으론 힘들어요. 나이도 있고. 이윤정 작가랑 팀 짜기로 했어요. 베테랑들은 대본 작업 혼자 안 하는 거 알쟎아요. 이혜정 작가도 혼자 작업해서 완성도 맞추기는 힘드니까. "
그리고 또 뭐라고 예인은 설명을 덧붙였었다. 이어서 감독대우의 세세한 프로모션까지.
" 들어갈께. "
" 정말 ! 선배, 그럼 계약하는 거에요!! "
예인은 계획대로 되는 것에 기뻐해야 할 것인데 꼭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젠 이혜정 작가를 섭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알바라니깐 ! 하고 황당해하는 이윤정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붙였다. 울 회사에 하청, 비정규직 이런 건 없다. 작가팀 소속으로 일단 이름 올려라. 뭐 그런...
염색을 했지만 금방 자라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희어지고 있는 뿌리부분을 내보였다. 귀밑을 훔쳐보다가 문득 야릇한 생각에 예인은 혼자 얼굴이 붉어지는 듯 했다. 유난히 길고 가는 목이 쇄골의 끝을 보인 채 라운딩프릴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속 어딘가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 오늘 촬영 왜 접는 거야? 조감독은 일정변동 없을 꺼라구 했는데. "
이윤정은 촬영장으로 들어가며 묻고 있다.
" 조감독에게 물을 껄, 왜 나한테 물어? "
로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계단 쪽을 살펴도 보이지 않았던 선배와 그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예인은 흘려말하고 있었다.
" 아까 너두 봤쟎아. 갑자기 혼자 결정한 것 같지 않았어? 마치 우리가 뭘 잘못 한 것처럼...누가 어쨌다구 갤 그렇게 챙겨 달아나냐구 ! "
예인은 발걸음을 멈추며 이윤정을 돌아봤다.
" 왜 과장하구 그래? 스케쥴 변동이 있으니까 그런거지, 아무리 감독님이 공사구분 않구 그랬을라구. 현장에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
" 어머머...너 화내니? 감독님 챙기느냐구우? "
말끝에 콧소리를 넣으며 한 발 떨어지는 이윤정은 어쨌든 예인의 눈치를 살피고는 보겠다는 품이다.
" 오늘 중지났어요. 오후 씬은 대본이 바뀔 것 같다구. "
조감독은 멀리서 예인을 보자 마자 달려와서 일러준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의 예인은 그래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준다.
" 대본이 왜? 촬영 중에 바뀌는 게 어딨어. 작업일정 다 잡혀있는데, 우리 하루 제작비가 얼마씩인지 몰라 그래? "
" 감독님은 어차피 제작사 요청으로 인터뷰 일정 빼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로 대치하라던데요.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차이 없을꺼라구. "
예인은 뒤미처 온 이윤정을 슬쩍 돌아보았다.
" 그거야 뭐 베테랑 작가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이윤정 작가님. 인터뷰 준비 해 오셨죠? "
" 어머, 진짜 오늘 하라구? 아, 뭐 물론 하면 되지, 준비랄께 뭐 있나..."
" 오늘 배우들, 주연이랑 준주연이랑 다 있는 날이니까 어지간한 내용은 다 수집할 수 있을꺼에요. 말씀 주시면 제가 코디랑 스탭들도 주선할께요. 야외촬영할 때 하는 것보다 여기서 인터뷰하시는 게 훨 편하실꺼구요. "
" 친절한 조감독님, 근데 정작 중요한 감독님 인터뷰는 어케 하나요. 현장 안 들어오신 것 같은데..."
" 대본 땜에 작가님 만나러 가셨어요. 안 들어오실텐데. 글구..."
조감독은 이윤정과 예인을 번갈아 보며 실쭉 웃는다.
" 감독님, 인터뷰 안 하시는 거 알쟎아요. 지난 십년 동안 조그만 사진 하나 나가는 거도 허락 안 하셨어요. "
" 어머, 우리끼리 하는 건데 뭘 그래. 자료수집용인 거 알쟎아. 사진 안 찍어두 돼. 그냥 미팅 한 번이면 된다구! "
" 금방... "
조감독은 예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 감독님이랑 같이 식사하고 오신 거 아네요? "
" 그게 무슨 미팅이야, 인터뷰 미팅, 단독 대담해야 한다구 ! "
마지못한 듯 이윤정을 쳐다보며 조감독, 웃지 않으려 애쓰듯 묘한 표정으로 말한다.
" 이혜정작가님이랑 하고 있다는데요...이윤정작가님이랑은 저보구 하라구..."
예인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할 수 없지. 머릿속에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라는 문장이 떠 올랐다.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하구...
그녀는 선배의 애인이다.
두루뭉실하니 산발한 머리가 보였다. 가까이 갈수록 갈색으로 보인다. 염색했나. 얼굴을 들고 쳐다본다. 빛에 반사되어서일까 은빛으로 희끗희끗하다. 뒤로 손을 돌려 머리를 동여묶으며 일어서는 여자. 키도 작네.
누구? 하는 얼굴로 인사를 할까 말까하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소심한 에이형이군.
시선을 맞추는 것에 응하며 눈인사를 한다. 먼저 입을 떼지는 않을 품새.
" 안녕하세요? 작가님이시죠? "
" 아, 네...안녕하세요. 별루 작가는..."
수줍게 웃으며 슬쩍 몸을 돌린다. 자긴 별로 잘난 사람 아니라는 듯?
" 취재중이시라구요? "
" 네에...저기 같이 하는 분 있는데, 이 윤정 작가님이라구...그 분이 다음 작품 기획하시는 거구요. 전 참고로요. "
" 같은 팀 아니세요? "
" 아, 그렇긴 해요. 근데 전 아직 보조 수준이라. "
" 데뷔하셨쟎아요. "
" 네? "
그녀는 깜짝 놀라며 쳐다본다. 자기 작품을 봤다는 거에?
" 작년 연말에 청소년 프로그램 하신 걸로 아는데요? 제목이....뭔지 모르겠네. 직접 본건 아니라서. "
" 아, 네에. 뭐...그냥... "
스스로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완전...내성적인 성격이구만.
예인은 이 여자가 선배의...하는 문장으로 머릿속이 꽉 찬 채, 자신의 표정이나 말투를 인식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선배의 발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 어, 선배. 작가님, 소개 좀 시켜 줘. "
그녀의 표정이 변했을까? 뒤통수가 쭈볏쭈볏...그녀의 얼굴이 선배의 눈 속에 담겼다.
" 혜정아, 쉬는 시간이야. 밥 먹게. "
" 응...아니. 저기.. "
하면서 예인과 이감독을 번갈아보는 여자. 예인은 소개시켜주기를 기다리는 청부업자같다.
" 선배, 작가님이랑 친하다며? 나두 같이 가. 나, 작가님들하구두 친해야 한다구. "
" 알쟎아. 이혜정작가님, 그리구 여긴 예인 엔터의 장예인사장님. 밥은 저기 오시는 이윤정작가님이랑 해. "
" 왜? 다 같이 가지. "
그녀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가는 이감독의 뒤에서 예인은 차마 졸졸 따라갈 수가 없어 명랑하게 말했다.
" 응? 뭐야, 장 대표? 점심 먹으러 가는거야? "
해죽해죽 웃으며 다가와 팔짱을 끼는 이윤정, 예인은 이작가와 대학동창이라는게 별루다. 선배와 함께 다닌 대학이 아닌, 나중에 편입한 예전이었기에.
테라스가 넓은 이태리 레스토랑이었다. 창가로 자리잡았다. 이감독이 그녀를 에스코트한다. 의자를 빼주며. 돌아와서 마주 앉는다. 뒤따라 들어오고 있는 예인과 이윤정작가를 신경쓰고 있는 건 물론 그녀이다. 선배작가를 쳐다보며 합석을 권유해도 될지, 그냥 눈인사만 할지 방황하고 있다.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예인의 걸음걸이에 표정이 정리되는듯.
" 이작가님,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 대표님랑. "
" 감독님. 우리 같이 앉아도 되죠? "
" 선배, 이런데 좋아했어? 언제는 맨날 국밥만 먹더니. "
예인이 옆에 와 앉자 이감독은 할 수 없이 건너편으로 앉는 이윤정감독에게 어서 오세요. 한다.
" 뭐 시켜? 파스타? 스파게티? 선배, 느끼한 거 잘 못 먹지 않아? "
그녀가 옆으로 메뉴판을 밀어준다.
" 비프스테이크도 있어요. "
" 아냐, 나는 점심 간단한게 좋아. 파스타 어때? 감독님은 뭐 좋아하세요? "
" 혜정아, 뭐 먹을꺼야? "
" 응..."
이윤정은 슬쩍 메뉴판을 다시 밀어준다. 슬쩍 사시를 뜨며.
" 아뇨, 이윤정 작가님, 보세요. 전 맨날 먹는거 있어요. "
" 이혜정 작가님이 맨날 먹는게 뭔데요? 나두 그거 먹을까 봐. "
" 에, 그냥 파스탄데요. "
그녀는 이윤정 작가가 까르보나리를 시키자 오늘은 저도 그걸로 하겠단다.
" 왜? "
" 이윤정작가님 따라 하고 싶으니까? "
웃으며 애교떨 듯 선배작가를 쳐다보는 그녀. 점점 수선을 피우며 말이 많아지는 이윤정 옆에서 그녀는 희미해진다. 그녀를 따라 까르보나리를 시키는 선배, 그녀처럼 해물을 추가한다. 예인은 똑같이? 아님 이윤정처럼 그냥 크림으루?
" 전 비프 줘요. 많~이. 느끼하신분들 한 점씩 뺏어먹어야 하니깐. "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이 피는 점심자리인데 선배는 별로 웃지 않는다. 불청객이 싫다는 듯.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먹는다. 느끼함을 덜려는 지 중간 중간 해물을 먹으며. 선배가 조개에서 살만 꺼내어 그녀의 접시 위에 놓아준다. 짐짓, 못 본체 했지만 이윤정 작가는 너스레를 떨며 어머! 애지중지한다더니 정말이네...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애써 웃음을 지어보인다. 선배의 눈길이 그제야 이윤정에게고 가 꽂힌다.
" 우린 식사 오래 하는데, 다 먹었으면 먼저 가지? "
" 커피 마실꺼니깐 괜찮아. 누가 뭐랬다 그래. 천천히 드셔들. "
이윤정은 혜정을 돌아보며 감독의 눈치를 보듯 흘끗거리며 여전히 너스레 떨듯 떠들어댄다.
그녀는 식사를 다 하지 않고 밀어둔다.
" 빵이랑 같이 먹게 우리도 커피 시키자. "
선배는 말은 안 하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예인은 애써 무시했다. 우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함께 밥 먹고 있는 거라구...누가 누구랑 데이트하는데 끼어든게 아니구...
빵도 조금씩 먹는 그녀. 커피도 홀짝 거린다. 아...저거 성격인가. 예인은 궁싯궁싯 심술이 난다.
" 진짜 오래 드시네. 말씀도 별로 안 하시면서. "
예인은 시계를 쳐다보며 현장 들어갈 때 되지 않았냐구 걱정스레 이감독을 쳐다보았다.
그래. 하는 선배. 이윤정을 향해 그만 떠들고 일어서죠. 한다. 농담으로 받아야지한는 얼굴로 마주 보는 이윤정.
" 응, 그래. 오늘 또 촬영이 많은 편이죠? 오늘 내일쯤엔 인터뷰 들어갈까 했는데... " 표정이 일그러지며 감독을 바라본다. " 감독님, 인터뷰도..."
" 오늘 촬영 끝이에요. 배우들이랑 스탭들 시간 많으니깐 인터뷰 하세요. "
벌떡 일어나더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 예인과 이윤정을 지나쳐 그녀의 뒤로 간다. 의자 빼 주러.
" 가자. "
" 응. 같이 가야지. "
" 촬영 끝이라니깐. 인터뷰하는데 방해하지 말구 퇴근해. "
" 왜에에? "
예인은 이윤정과 함께 식당을 나오며 저만치 앞서 걷는 이감독과 그 애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야, 장사장 ! 저거 뭐니? 이감독이랑 재, 애인사이라더니 정말 그런거야?
" 언닌, 재...가 뭐야... "
" 어머, 재, 나한텐 까마득한 후배야. 겨우 작년에 데뷔해서 울 회사 들어온지 한 달 밖에 안 되었어. 내가 델구 다녀주는 거나 마찬가진데...근데 앤, 묻는 말엔 대답 안 하구? 이 감독 태도 봤지, 삐져서 계산도 안 하구 가는거. "
" 원래, 계산은 사장이 하는 거야. "
" 애 좀 봐? 넌 질투도 안 나? 너 이감독 쫓아다녔잖아. 아니 지금도 쫓아다니구 있지. 근데 이감독은 맨날 재만 챙긴다, 애... "
" 언니, 그만 해. 언니네 팀인데, 호칭이 그게 뭐야. 나이도 있는 사람을. "
이윤정은 갑자기 멈춰선다. 이미 저만치 가서 행인들 사이에서 뒷모습도 찾기 힘들어진 이감독 옆의 그녀를 가리키며.
" 너보다 나이 많지? 얼굴도 네가 훨씬 더 젊고 예쁘다. 키도 작고, 화장은 저게 뭐 하다 말았냐...볼꺼 없는데..."
예인을 곁눈질하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게 뭘까.
" 근데 너하고는 딴판으로 귀염성있지? 친절하구. 착하구. 예쁘구. "
" 언니...재...좋아했어? "
" 아이, 뭐, 사람 괜찮다구. 누가 이감독처럼..."
황급히 입을 다무는 이윤정. 잽싸게 예인을 훔쳐본다. 못 본 척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예인. 그들이 간 거리 속으로 시선을 둔 채 속으로 되뇌었다.
알 놈은 다 아는군. 그녀는 선배의 애인이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