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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게 변하지도 않는 작자

나는 좋아하고 싫어하는게 분명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직선적으로 다 표현하고 사는건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가 평탄하진 않았다. 결국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겠지. 좋으면 헤벌레해지고 싫으면 어쨌든 어색해지니까. 왜 그럴까? 좀더 둥글어질 순 없는 걸까.

라고 속말을 하는순간  또다른 내가 반박한다. 지금도 충분히 둥글어!

그래, 이해한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나르시스트같으니라구, 나는 뇌까려주었다. 그는 자기학대에 익숙하다.

동시에 어떻게든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찾는 데에도 능수능란하다. 예를들면 비교적 어릴 때에는 자기합리화를 많이 했다. 좀 크니 선배들이 넌 너무 자의적이야!라고 충고했다. 그건 넌 자뻑이 심해!라는 뜻이었을까? 나중에는 그들의 눈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드는 이런걸 동일시라고 했다던가. 하지만 이렇게 억압된 호,불호의 감정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금욕과 몰입으로 전이되었던 것같다.

아무도 혼전성교를 문제시하지 않는데도 대세와 상관없이 "그건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 라고 말했었다.  제도로서의 결혼과는 별개로 섹스에 임할 때는 그 정도로 진지해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상대는 그저 '해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었다. 해서 상처받았다. 하지만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수는 없었다. 이후 금욕주의는 보다 강화발전되어 프리지디티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뭐 별로...

안나 프로이드는  청년기의 본능적 욕구와 불안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신적 파멸을 초래한다고 했는데 그러지 않기 위해 금욕주의와 함께 자주 사용되는 방어기제로  지성화를 들었다. 지성화는 고통스럽고 불편한 사건이나 생각에 관련되는 감정들을 해명하여 없애기 위해 단어, 정의, 이론적 개념 등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주지화라고도 번역되는 그것은 예를들면 지적 토론을 벌임으로써 그 문제에 대한 불안을 중화하거나 회피하려는 행동으로 표출된다...바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조금 더 감정적이 되고 싶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가능한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려면 말이다. 정직, 그것은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금언도 있지만 특히, 빌리조엘의 honest를 좋아하던 소년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패가망신했던 소녀의 이야기  "17세의 나레이션"을 되새겨봐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누구인가, 또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내 사랑을 고백하고자 하나, 그전에 해결해야할 게 있다, 그것은 문제제기를 하기 앞서 전제적 정의가 올바른가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지겨운 논문형 어투...가 나도 지겹다는 것을 고백한다.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꼭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게 의도성 여부와 상관없이 작용한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일정 성향이라는게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화책을 읽기보다 백과사전 보기를 더 좋아했다. 소설보다 역사책을, 드라마보다 사극을 더 흥미롭게 보기도 하고 지금도 만화책 보는 것처럼 논문을 읽곤 한다. 그건 뭘 하거나 보든 사상()은 분절된 사물이나 현상으로 존재해선 안되고 하나의 사상() 으로, 통일된 체계 속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즉 눈 앞의 세계는 그 과거를 포함하여 해석되고 통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래를 조망할 수 있을 테니까, 단지 그 때문이었다.

예를들면 집에 누군가 손님이 와서 자고 가게될 경우가 있다. 그때 아이들은 묻곤 한다. " 삼촌은 언제 가실껀가요?" 그걸 빨리 가버리라는 식으로 곡해하여 조카를 괘씸히 여긴다면 아직도 매우 미성숙한 어른일 것이다. 아이는 단지 자신에게 있어 세계의 전부인 거나 마찬가지인 "집" 안에 누군가가 숙박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변화된 환경이 얼마나 지속적인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인지를 파악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이미 적응하고 있는 일상이 파괴되는 것은 불안을 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선 우선 내 자신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반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게 합리성을 부여받지 못 한다면 사랑은 시작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나 욕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 나는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사랑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평온하고 안정적인 가운데 조용히 일어나는 열망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마음 속으로만 존재하고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예는 우리가 흔히 읽어내는 19세기 고전 소설과 이후 여성해방의 담론이 만연한 현대의 중성문학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더 부연하는 것은 그야말로 글의 쟝르를 변질시킬만한 주지주의의 패악이 될 것이니 각설하겠다. 벌써 사랑을 고백하겠다는 화두를 던져놓고 각론에 가지치기를 이어 삼천포로 빠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일찌기 이 주제로 약 2년 반전에 두달 반에 걸쳐 고뇌를 거듭한 적이 있다. 그때에 나름 친밀한 벗들을 방문하여 평소보다 더욱 친숙한 양을 하며 물었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혼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벗들은 왜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하고 어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다른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니까...그들은 대뜸 그래서 재혼할 꺼냐고 물었는데 그런건 아니라고, 그렇게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론은 무척 단아했는데 즉 재혼할 상대도 아닌데 왜 이혼을 하느냐구, 비록 남편과 소원해져있다 해도 아이의 양육이라는 게 걸려있는데 그리 아무 대안 없이 혼인관계를 단절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여타 군더더기 변명들도 있으나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부각시키면 요컨대, 경제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법정 양육비의 지급규정도 있고 재산분할에서의 유리한 점, 어차피 한쪽 부모로서의 자기 경제력이란 것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면서 나의 사랑없는 결혼의 종식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랑없는 결혼을 시작하면서 상담을 요청했을 때는 그리도 쉽게 동의했던 그들이 말이다. 물론 친구였기 때문이겠지, 그래 드디어 하는구나! 축하한다. 라고 했던 벗들은 아니, 이혼은 그리 쉽게 생각해선 안돼. 라고 말하면서 더욱 신실한 우정의 포옹을 하며 속삭였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닌데 왜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이혼사유가 되니?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내 갈등의 문제제기에 대해 메피스토펠세스와도 같은 미소로 응답했다. 양다리 걸치기,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쟎아?

 

나는 호, 불호가 심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러한 위치에 두고 그래서 더 좋아지지 않는 사람 앞에서 번연한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늘 과장하여 불만을 토로했고 다소 그럴만하다고 생각되는 항의를 묵살했으며 조금만 억압적 태도를 보여도 심하게 격앙되어 남편과의 관계를 극단으로 몰아갔다. 그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선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둘 다 아니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침묵으로 버티기로 한 것 같다. 내 사랑은 진전되지 않았다. 아니, 시작되지 못 했다.

가설을 세웠으나 검증결과는 부정적이었으니 실험실을 나가 현실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내 사랑은 상념의 공간으로  돌아와서 이제 망상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살게 되었다. 말하자면 양다리걸치기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니었고 나는 결혼관계를 서류상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 정식으로 해소하지 못 한 이상 바람피우는 상대로 만들 수는 없었다. 뭐, 이리 말해봤자 별로 현장감은 없다. 나는 고백 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는 속담도 있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랑에 고백이라는 모험을 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다. 노화가 뭐 어쩄다는게 아니라 살아온 연륜이란게 있고 경험치라는 게 있는거니까 하는 말이다. 극적인 대사란 해서 관계를 깨는 걸 목표로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걸 반드시 경유함으로써 질적인 변화,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그걸 말로 내어 감정을 밝히 보이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다. 그 정도는 그냥 필로 아는 것이다. 말은 필요할 때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그래서 섹스를 해야겠다라든가 뭐 그런.

 

날이 갈수록 나는 둥글어지고 싶다. 양다리 걸치기, 그게 왜 안되는가? 남편과는 정리만 안했다뿐이지 이미 갈데까지 간 사이다. 나는 그에게 인생의 끝까지 갈 수 있는 애인을 구하라고 충고했다. 이에 그는 걸리지말고 바람피우라고 대답했는데, 나로서는 그것으론 좀 부족하다...

나의 호,불호는 이제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내 이렇게 오래고 세밀한 고뇌 - "머리카락에 골을 팔 듯이 치밀한"이라는 표현을 오늘 찾아냈는데 바로 여기에 적절히 사용하고 싶다-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자는 오늘도 처연히 웃으며 안부전화를 해왔다. 고백을 하지 않았으니 시작되지 않은 사랑에게 탓을 할 수도 없으니 나는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이젠 싫어지려고 한다. 무딘 인간 같으니라구! 이렇게 지쳐가다가 없어지고 말 사랑이라면 2년쯤 전에 확 당겼을 때 넘어져나 볼 걸 그랬다고 후회의 쓴웃음이 지어진다.

내가 과연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을까? 나는 단지 이유가 많은 사랑, 조건을 보고 하는 사랑에 대한 반발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사랑에 관한 열정에 단지, 지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가장 순수한 사랑, 그것을 하고 싶어서 그를 오래, 지루하리만치 오래도록 상념해왔던 것이다. 나는 호, 불호가 분명하나 거의,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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