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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밥과 사랑에 대한 소고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대서양을 바라보는 곳에 식당을 차리는 거야, 거기서 매일밤 일을 끝내고 의자를 가져와 문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싶어. 그때쯤 너도 떠나겠지."

하고 '뱃머리'가 말하자 '제니퍼'는 " 내가 안 떠나면?" 하고 묻는다. 그러자 '뱃머리'가 답했다.

" 그럼 같이 바다를 보겠지."

 

이건 영화 <가을날의 동화>에서 담담하게 일상을 같이 하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이다. 영화-드라마 속 프로포즈 명대사 1위라는데 내가 영화를 보지 못 해선지 그리 와닿진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건 <번지 점프를 하다> 에서, 영화 속 명대사 3위였다. 전생의 인연이라는 설정으로 스윽-가린 운명적 사랑?

 

 “...밤에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너이기 때문에 널 사랑해.”

이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16위.

 

 “매일 눈을 떴을 때 너를 볼 수 있길 바래.”

< 첨밀밀> 에서, 17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기회를 주세요.”

 < 101한번째 프로포즈>에서 나온 대사로 드라마 속 명대사 1위라고 한다.

 

 “우리 가족 할래요?”

<카인과 아벨> 에서, 18위. 

 

어째 주로 집에서 같이 놀자는 느낌이다. '화려한 수식어'는 필요 없지만 뭔가 빠진 느낌, 그래도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나?

 

"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딱 한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지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사랑해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주름투성이로 여전히 멋진 남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매부리코의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에게 한 대사다. 가슴에 콱 박혔었다.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시다며 대답을 재촉하는 남친 때문에 목하 고민 중인 서른세살 친구에게 위의 대사를 인용해주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었다. 나는 진지한 태도와 어조를 유지했지만 설마 지가  '평생에 딱 한 번 올까 말까하는 확실한 감정'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어? 하고 내심 코웃음을 쳤었다.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신주의자들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는  '연애 따위'에 신경쓸 시기도 상황도 아니었다.

친구의 결혼과 신혼여행 때문에 생긴 공백을 메꾸느라 나는 두배로 바빠졌고 그의 부재가 눈에 띄지 않도록 몇 배 더 신경을 써야 했다. 한달 쯤 후엔 정상복귀하겠지 하고 기대했으나 결혼은 친구를 '가정 있는 여자'로 만들었다. 독신이 아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에게 집은 중요하게, 반드시 돌아가야 할 장소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는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또 마시다 못 가면 어딘가에서 더 마시고 다음날 함께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결혼이란 이런 것인가? 돌아가야 할 집을 만드는?

 

 

 

" 동지! "

 

하고 나중에 남편이 된 사람이 나를 불렀다.

 

" 나, 밥 좀 해 줘라. "

 

그가 말했고 나는 대답을 안 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불쌍하다...쯔쯧. 스물다섯부터 서른 다섯까지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정규직이 될 날을 기다렸지만 그는 해고되었고 1년 8개월을 길바닥에서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다. 다니고 있는 회사 이름을 대면서 떳떳할 수 없어 맞선자리도 피해왔던 그는 빨간줄이 그인 노총각이 되었고 여전히 그 회사의 소속만 다른 비정규직이었다. 나는 밥 해주는게 뭐 어렵다고,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근데 이게 지금 프로포즈인거야?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영화 <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프로포즈 받으면서 들은 말이라고 나는 기억하지만 정확한진 모르겠다.

 

"나와 함께 아침을 먹어주겠소? "

 

이 말이 " 나 밥 좀 해 줘라. "하고 구분이 되나? 당연히!

근데 나는 헷갈렸다.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면서 나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이상 더 하진 않을꺼야...라고 되뇌이긴 했다.

 

남편이 되기 전부터 그는 나와 함께 밥을 먹을 때 상차림을 같이 하지 않았다. 나는 화를 냈고 내가 '그의 집'에 온 '손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시부모가 될 사람들을 만나러 가서는 함께 김치를 담그라고 부엌으로 들여보내는 그의 손길을 밀쳐냈다. 그리고 이유 없는 슬픔에 북받쳐 울었다. 결혼 후에도 그의 가족들 눈에 나는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서울 며느리였다. 그나마 설겆이는 열심히 해서 단지 요리를 못 하는 것으로 애써 이해되기는 했다. 잘 모르겠다. 그의 가족들은 늘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있었고 어머니나 혹은 며느리가 그 시중을 드느라 엉덩이 붙일 새가 없었다. 나는 입이 짧아 시골음식 먹는 걸 즐겨하지 않는 서울 깍쟁이로 치부된 것도 같다. 한 번 가면 내리 사흘은 기본이고 일년에 네 번 이상 되는 시댁행을 결혼 십년 차에 이르러선 "나 빼고 가." 라는 말로 거절했다. 아이들이 밥을 혼자 떠 먹는 나이가 되어서나 가능해진 일이었다.

 

애엄마가 안 오면 애들 밥은 누가 먹이냐고 말하던 시어머니의  속뜻은 다 큰 어른이지만 '남자'인 아들의 밥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을테다. 남편은 아침을 꼭 밥으로  챙겨먹는 사람이었다. 하루 두끼의 상차림, 그것도 아이들과는 결코 국과 찬을 공유할 수 없는 맵고 짜고 맛갈스러운 식성의 소유자. 함께 집밥을 먹은지 십년 동안 그가 변한 거라곤 하얀 이밥만 고집하다가 이젠 약간의 혼식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나는 그와 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 한번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 했다. 하지만 나는 본시 먹는걸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결혼 전 십년의 자취생활 동안 전기밥솥을 가져본 적도 없지만 가스렌지도 구비한 적도 없었다. 나는 가끔 냄비밥과 카레를 만들고 한 사흘 계속 먹었다. 그 이상 내리 먹을 일도 없는 것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건  그리 흔한 일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일요일에 집에 아무것도 없을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렇다고 장보기는 성가시니 분식점에서 혼자 김밥을 먹거나 빌려온 비디오를 보면서 과자부스러기를 주워먹거나 하였었다. 요리, 해 봤지만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즐거움은 짧고 뒷설거지는 많은 별 효용성 없는 분야였다. 함께 정찬을 나누고 싶은 애인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래도 혼자 싱글의 룸을 가지고 있을 때는 행복했던 것 같다. 물론 상대적일 것이다. 추억을 새기는 자는 현재가 불행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래봤자 딱히 행, 불행을 논할 만한 사안은 아닐 지도 모른다. 집에 있다는 것과 집에서 밥을 한다는 것과 그 밥을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류의 가사노동의 전담이라는 가족내 성별 분업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소외를 분기어린 목소리로 주장하는 것이 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가사노동은 커녕 제 아이도 유모의 손길로 키우면서 '흑인은 집 밖의 화장실을 이용할 것' 을 요구하는 백인 부르조아 여성이라고 해서  불평등한 성의 역사에서 빗겨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집에서 일을 한다는 것과 집에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서로 뜻이 통하는 대사는 아니다. 하지만 집에서 원하는 일을 하고 지낼 수 있다면 행복은 집 안에도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꼭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술을 마시기 위해 약속을 잡지 않아도, 혼자 사는 친구의 집에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로 나와 가족들의 집이 떠올려지진 않을 수 있다.

 

남편과 공동의 주거공간으로 집은 늘 존재했지만 거기서 쉬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바로 가장이라는, 누가 부여했고 또 배타적으로 향유하게 했는지 모를 이상한 권력의 소유자.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서의 아이들과는 다른 존재, 자조능력을 가지고 있는 성인이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오체불만족의 장애인처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몰라야 한다고 강요되는 아버지라는 사람들. 나는 한때 동지였던 관계를 힙겹게 상기시키며 그에게 공동주거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의 순환노동들을 역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평범한 가장이 하는 역할도 잘 하지 못 하는 막내아들이었고 그걸 즐기는 편이기도 했지만 특히, 그러기 위해 집에서는 가만히 있을 것을 물심양면으로 지지, 격려하는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결혼 십주년을 기념하여 이혼할 것을 사전에 협의, 준비, 다짐하고 실행의 시점에 막 이르렀다. 지난 겨울, 1월의 어느날이었다.

 

" 하지만 사실...솔직히 나는 왜 이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

" 우리가 사랑 없이 결혼했다는 걸 알쟎아. 그리고 노력했지만 사랑이 생기지 않았고, 서로가 맞지 않다는 걸 확인했쟎아. "

" 그렇다고 내가 집을 나가야 하는 건 부당해. "

" 먼저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

" 나는 나갈 수 없어. "

" 그럼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

"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있지만 그간의 경험치로 안다. 그는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살아가는 집이 싫은 것이다. 아이들과 헤어질 수도 없다. 그는 아이들이 내게 있는 한 자신을 내어쫓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같다. 우리들은 모종의 합의를 하고  상호 양해하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지 않기로 했고 나는 그를 위한 국과 찬을 따로 준비하지 않고 있다. 나는 최근 카레라이스를 자주 해 먹는다. 학령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이전에 비해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많이 줄었다. 장보기는 고기, 달걀, 생선에서 과일, 야채 그리고 도토리묵 같은 것으로 품목과 비중이 많이 달라졌다. 그는 혼자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고 대강 치우고 간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토스트에 사과 혹은 떡과 매실쥬스 그리고 가끔 주먹밥이나 고구마같은 걸 먹는다. 식구들이 다 함께 밥을 먹는 날은 일요일 점심과 저녁 정도이다. 그 정도야, 뭐 이혼하고 별거하는 부부라도 요즘은 아이들을 위해 함께 식사를 하고 공원을 거닐거나 하니까. 단지? 성격차이가 동거의 불편을 가중시켰던 우리에겐 합리적인 방안인 것 같다.

 

사실 저변에는 아이들이 매일 손을 타는 유아기를 다 벗어났다는 커다란 조건의 변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넓은 집에서 상호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우리가 하우스메이트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나는 작은 방에서 문을 닫고 글을 쓴다. 우리는 서로의 취미를 인정하고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또한 "이혼하면 안돼!" 하고 외치며 품에 안기는 아이들과 같은 집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밥을 같이 앉아 먹지는 않지만 각자 알아서 취향대로 차려먹고, 같은 집에서 살고는 있지만 분리된 공간에서 자기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서로 잘 이해하고 사랑하고 함께 있어서 즐거운 '가족의 신화'를 재생산하지는 않지만 쉐어링하는 집에서 공동공간과 개인공간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가족들, 우리는 현재 잠정적 이혼상태의 부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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