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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앞에 오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만 노년의 자유를 갖고 싶다. 늙고 싶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 퇴임하고 싶은 갈망의 오후
당신이 보이고 또 가르친대로 살기 위해 애써왔다. 밀어내진 채의 가슴에 식은 열정을 안고.
아무 소득없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
가슴은 식은 열정 마저 없이 텅 비었다.
빈 껍데기의 골뱅이처럼 당신의 무릎 아래 꿇어앉는다. 발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이윽고 손을 내밀어 내
단단한 껍질을 벗겨주길... 나는 언제나 속을 털어 내보일 준비가 되어있다.
손가락을 밀어넣어보라 나는 반대편의 구멍으로 빠져나오는 당신의 손가락을 보게 할 것이다.
당신이 보이고 또 가르치는 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당신의 피그마리온,
하지만 숨을 불어넣진 말아주길, 다시한번 삶을 살아낼 자신은 없으니.
마흔, 마흔 하나, 마흔 둘, 마흔 셋, 마흔 넷, 마흔 다섯! 사사오입으로 오십. 다시 사사오입하여 백.
이제 생의 뒤켠에서 있고 싶다.
무릎 관절염이 도져요, 선생님. 당신이 옆에서 늙고 싶다는 게 내 유일한 소망이에요.
당신의 앞으로 돌아오기 위해 살아왔다.
이젠 함께 죽고 싶다. 죽은 듯이 살터이니 제발,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번엔 진짜로 죽어버릴테야요.
십천간을 돌고 돌아 육십갑자를 다 살아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나날보다 많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하여 날숨이 내쉬어졌다. 뭘 더 하지 않아도 좋으리, 애쓰지 않아도 되쟎을까. 이젠 쫓기듯 애태워하지 않고 세상에 붙들리지 않아도, 이젠 그래도 되는 "노년"이 된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들에 힘들이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야, 그럴 것이다. 현성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제 속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가슴 속에 꿍쳤으나 오래도록 밀어두었던 면포의 속적삼 한자락을 내어본들 흉된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그리한들 또 무에 거슬릴 것이냐.
현성은 제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64평의 이층집에서 밥과 옷을 지으며 가족을 만들었던 1층과 사색과 소통을 시도하며 사회를 준비했던 2층의 서재와 발코니방 외에 자신을 온전히 모두었던 곳이 바로 이 작은 침실이었다. 세 평이 되지 않는 쪽방, 여기 놓인 침대와 협탁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수납하는 마호가니의 뷰로, 소박한 입본장 하나에는 외출용의 옷가지들이 다른 하나에는 편안한 실내복 몇 벌이 걸려있다. 현성은 이 작은 방을 여행가방 하나에 추려넣어 떠나고자 하였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묵든 갈아입을 속옷 하나와 발을 덥힐 양말, 목 언저리를 가릴 스카프 한 장이면 충분하였다. 낮은 목소리로 차 한 잔을 내어줄 남편 없는 여인들이 쉬이 만나질 것이고 대합실 의자의 팔걸이에 머리를 두어도 무릎담요를 덮어줄 고운 손길에 은혜 입을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은 뷰로의 서랍들 중 가장 아랫단을 열었다. 그저 보관하기만 할 뿐 다시 들춰보지 않는 잡동사니들, 어린시절의 스냅사진을 넣어둔 봉투와 학창시절의 앨범, 졸업장과 언젠가부턴 받아서 부모에게 보여주지도 못 했던 상장 따위가 차곡이 쌓여있었다. 한두권의 드로잉북도 있다. 그건 90년대 말인가 2000년대 초인가 그 즈음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은둔하고 싶었던 때 동네의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그렸던 수채화 습작들이었다. 완성된 것도 있고 완성되지 않은 것도 있다. 자신은 예술적인 재능도 향유할만한 감성도 변변히 없다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은 그저 도화지 앞에 앉아있고 싶었다. 마음이 형해화되어 천천히 녹아내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길 바라며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세상을 향해 말 걸기를 그만 두고 있으니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현성은 속 깊은 어딘가에서 작은 아이가 눈을 들고 자신을 향해 입술을 움직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지난 십년간 그 것을 보며 지탱해 왔다.
드로잉북의 중간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여행 가방 속으로 빨려들듯 챙겨넣었다.
현성은 방을 나왔다. 아니 집을 나왔다.
집을 만들 때에 함께 늙을 사람을 골랐으면 좋았을 걸.
기차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탔다. 대구 경산 어드메 쯤 버스정류장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음력 설날 아침인데. 남편 없는 여인과 그니의 딸이 번갈아 카페를 보고 있었고 현성은 몇 번인가 그네들의 공간을 웹진에 연재되는 칼럼 속에서 사진으로 보았었다. 볼 때마다 가 보고 싶었다. 안면 없는 그들의 "집"이자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공간"으로 한 발 들이자 깜짝 놀랐지만 곧 괜찮다는 표정으로 반가이 맞아준다.
" 어서 오세요. "
" 문 열은 거 맞죠? "
" 네, 영업해요. 앉으세요. "
그들은 영업품목이 아닌 떡만두국을 대접해주었다. 밤 늦도록 동네사람들이 마실을 나와 떠들면서 갈 줄을 몰랐다. 현성은 집시들처럼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한 사람이 민박집을 소개해 주었고 거기서 여장을 풀었다.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둔 방에서 요를 깔고 이불을 덥고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어린 여자애처럼 엎드려 누웠다. 새로 산 작은 노트 속에서 편지를 끄집어내었다. 열 일곱이었을까 아니면 열 여덟이 된 해였을까? 그 애가 고등학교 2학년을 두 번 다니는 바람에 기억의 페이지 수가 헷갈리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시절을 추억해도 마음이 애잔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현성은 시간의 벽이 사방에서 허물어지고 경계 지울 수 없는 어떤 공간 속에 들어있었다. 오래된 노트의 갱지 속에 그려넣은 삽화처럼 현성은 기억 속에 스며든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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