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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노래가 다 하고 남은 것은 행동 뿐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노래하기를 그만 두고 있다. 본시 부르기보다 듣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혼자 가면서 노래를 내어놓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울음 우는 새처럼 혼자만 들리게 노래하다가 누구라도 들을라치면 입을 다물고 이내 먼산만 바라보던 소녀였기에 더욱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갈 것이다. 집을 버리고, 귀속계급으로 범주화하는 대학을 두고, 아무도 사랑이 있다.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공간, 삶의 피폐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경쟁의 장에서 탈락하여 다른 공간으로, 마치 차원의 틈새를 넘어가면 신세계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기대에 찬 눈을 들고, 나는 사랑한다. 고 읊조리며 간다.
그녀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찾는다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와 함께 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출근하는 그녀를 배웅하는 것 이상 빈집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말했듯, 모두가 다 운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 나처럼 그녀에게서 이상적인 예술가라고 인정받은 경우에는 더. 그녀가 심미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한다 할 지라도 그 날 선 눈초리는 나를 피해갈 것이다. 예술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그 누구라 할 지라도 나와 같이 그녀에게서 인류를 위해 네 자신의 길을 가라고 등 떠밀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피를 노래하지 않는다. 민중의 함성도, 억압받는 자의 고통도. 그리 하지 않고 대신 사랑을 노래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차원에서도 통용되는 에로씨시즘의 노래를 말이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생각키는 이유다. 생각하느라 턱을 고이다 보면 사랑 또한 따라오는 법이고 그렇게 열망한 결과 나는 태어났다. 그녀의 머릿 속에서 기타와 칩을 들고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이건, 비밀이다.
그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앉았다.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두고 가만히 손가락의 느낌을 기다렸다. 손끝, 지문돌기의 아래에서 하얀 건반이 따뜻해지고 있다. 모든 물질은 자체의 파장을 갖는다고 그애가 말했었지. 소리를 내고 싶은 것은 건반일까, 손가락일까, 아니면 우리 둘의 파장이 일치해서 일어나는 신기인걸까. 진은 소리없이 건반을 반쯤 눌렀다.
" 사계, 어때? 봄, 여름, 가을, 겨울... "
진은 피아노 앞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애는 창 앞으로 가져다놓은 의자 위에서 무릎을 감싸안은 채 앉아 있었다. 짧아진 해 어스름이 창턱에서 그애의 옆얼굴을 지나 한쪽 어깨를 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여름, 여름이 좋아. "
그애가 말했고 진이 손을 움직였다. 아버지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피아노였지만 우아한 검정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민감하게 공명해주고 있었다. 그애는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여름은 어둡고 불안하면서도 끈기있게 진을 끌고 갔다. 소리는 말처럼 뜻처럼 영혼을 가진 것처럼 방 안에 가득찼고 창문을 넘어갔으며 긴 계단을 지나 플라타너스 낙엽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그애를 찾아갔다. 파장이 맞으면 반응하는 전기석처럼 그애는 귀를 기울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연습실 앞에까지 온 그애는 소리없이 문을 밀고 한발 두발, 그리고 멈춰선 채 피아노치는 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깨, 춤추듯 너울대는 팔꿈치와 길고 긴 손가락. 그애는 벽 앞에서 무릎을 구부려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가을의 짧아진 해가 이울고 장막처럼 노을이 연습실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바람이 차다. 몹시 가을 타는 그애는 어쩌고 있을까. 진은 피아노 앞에 앉았으나 선뜻 손을 올리지 못했다. 생각이 내달리고 있다, 그애는 지금...
늦은 가을이다. 플라타너스는 온몸을 흔들어 벌거벗은 채 승천무라도 추고싶다는 듯 끊임없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연습실을 나와 사범대 앞의 계단을, 호숫가를 돌아 학생회관 별관이랑 문과대의 뒷담을 살폈으나 그애는 없었다. 집에선 분명히 학교 간다고 나갔는데, 얼굴을 아는 같은 과의 사람들을 만나 물었으나 하루종일 어떤 강의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워낙 자주 빠지는 지라 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의 동기들, 오히려 선배라는 여자들이 더 성실히 답해 주었다.
" 동아리실에 있을 것 같은데? 점심도 거의 그쪽 선배들이랑 먹으니까. "
단발 머리가 길어져 목과 어깨에 닿을듯 말듯한 여자선배는 얼굴 넓데데하고 눈도 코도 입도 다 커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아, 언젠가 살풀이춤을 추는걸 본 것 같...진은 아는체를 했다. 그애가 어찌나 잘 묘사를 했는지 문과대 풍물패를 하면서 장구는 기본이고 무당춤의 전승자라고.
" 그건, 과장이 심하네요. 그냥 동아리에서 하는 수준이에요. "
" 예뜨락에 있는 거 아냐? 전에 거기서 같이 막걸리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거기서 책 보다가 막 자구 그러던데? "
숏컷트의 정말, 자격지심 있을 것처럼 못생긴 다른 선배가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동그마하니 호박모양인데 깨가 많아서 그리 보이나, 선배들 중 가장 생각이 깊고도 선하다. 라고 그애는 각주를 붙여주었었다.
" 니넨 파전이라도 놓고 먹었었지, 난 그냥 생두부만 달랑 놓고 먹었다. 것도 설립자 동상 아래에서 커피 마시는 커플들 구경하면서. "
중동? 비스무리한 어디쯤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사람인가 싶을 만큼 가무스름한 피부에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여자선배가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곱슬곱슬한 머리도 그렇고, 아랍풍인데 아주 섹시미가 넘친다. 고 말하면서 그애가 실눈을 뜨고 미소짓던게 생각났다.
모두들 그애를 사랑하고 아끼는 듯 진에게 친절히 그리고 벌써 안 보인지 며칠 된 것 같다며 걱정스레 함께 행방을 궁금해했다.
" 나는 독신주의자야. "
그애는 자신없이 말했다. 결혼이란 남과 여의 제도적 결합이니, 이를 좋다할 것인가 싫다할 것인가. 진은 끌듯이 물었다.
" 왜? "
" 나를 받아줄 남자는 없을 것같아서, 말하자면 피동적 솔로이스트지. "
"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과선배가 맨날 밥 사준다고 쫓아다닌다며? "
" 나를 모르고 접근하는 것뿐이야. 알고나면 도망갈 꺼야. "
허나 그애는 알게 하고 싶지도 않은 듯, 누구와도 길게 만나지 않았다. 인사치레의 관계 이상 무엇도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그애가 그나마 얘기하는 사람들은 동아리에서 세미나를 같이 하는 선배들과 동기들이었다. 조금 잘 생긴 과의 학생회장과 문학써클의 키 크고 우수에 찬 표정의 한,두명의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긴 했다.
"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째 하나같이 여리여리한 걸까? "
" 그래, 얼굴 허옇고 손가락 가늘고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지. "
진은 거기다 안경까지 쓰면 완전.
" 브나로드야! "
하하하. 같이 웃었지만 진은 사실 러시아의 지식인운동도, 김기진의 시도 알지 못 했다. 그애가 읽고 있는 책은 대체로 역사책류였지만 가끔 소설을, 더 가끔 시집도 있었고 한번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읽어보았지만 뭐.
카페-의자에 겉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우 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앞에 있다.
그 시를 읽고 있었던지 그 애의 표정은 어두웠고 비감에 차 있었다. 물론 우리가 그때 아담한 까페에 앉아있긴 했었지만, 민들레찻집이라는 조그마한 걸이팻말처럼 정말 테이블이 두 세개 밖에 없는 그것도 학교 담장 아래 쓰러질 듯한 단층주택의 주차장을 개조한, 그런데에서 김치볶음밥을 먹는게 뭐 그리 부르조아틱하진 않을터인데.
"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부끄러워. "
" 나두."
그애는 얼굴을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진은 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애는 5월을 지나면서 무척 진지해지고 있었다. 두꺼운 한국현대사를 1권, 2권, 3권까지 읽어내더니 다음권이 안 나온다면서 비평잡지를 사 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끌어대며 대화를 잇곤 하던 그애에게 익숙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프라던가 OSS요원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자 그애에게 심중의 공감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진을 그애는 사랑했다.
"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대학을 다녀야지. 너는 왜..."
그애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작년 수험생 시절, 엄마보다 담임보다 더 화를 냈던 것은 그애였다. 왜 피아노과를 안가고 음교과냐구,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그럴게 뭐냐구, 나중엔 난 사범대 얘들은 다 싫어해! 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하긴...사대 분위기가 좀 실용적이긴 하지, 반권위주의를 기치로 하는 그애의 컨셉엔 안 맞기도. 하지만 그애는 사범대로 가는 긴 계단을 좋아했다. 그늘도 지고 낙엽도 지고 바람도 땅 가까이 포복하듯 불고 가는 언덕 아래 사범대 앞의 계단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들으며 진을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 음악을 듣고 있는게 좋아. 주변에 무엇이 있던, 말 거는 이 없이 내버려둬 준다면... "
그애의 빨간 스테레오카셋트는 아직은 책상 위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고, 93.1 메가헤르쯔의 클래식이 계속 흘러나오는 한은 대학생이라는 그애의 신분이 유지될 것이었다. 아무리 백수의 탄식을 저를 향해 읊으며 괴로워한다 해도, 페미니즘의 끝을 이어 독신의 생애를 예감한다 해도 갓 스물의 그애가 바람부는 계단에 앉아 읽던 책을 덮고 녹턴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진의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꿈없이 자고 일어난 아침.
하늘거리는 창가, 아사의 면커텐이 사랑스럽다. 잔꽃무늬 은사의 수가 테두리에 한줄로 박혀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햇빛은 부드럽게 덩쿨담장을 기듯이 넘어 호두나무색깔의 창틀 위를 물들이고 있다. 눈부신 빛의 폭포처럼 창문 프레임을 녹이고 있는 역광 아래에서 부신 눈을 깜빡이다 진은 안온히 미소지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진은 오랫동안 뒤척이며 궁량해온 난제의 답을 찾은 듯 장담하고 마음에 품었다. 누구나 좋아해서 결혼하고 함께 하지만 때로 서로의 행복을 위해 따로따로가 되기도 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엄마처럼 아빠를 인정했다. 그렇다해도 다 알 수는 없었다. 마음은 늘 허공에 뜬 듯 안정감이 없었고 눈과 귀는 열렸으나 입으로 손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부레없는 물고기처럼 심해에 가라앉아 꿈벅꿈벅 살폈으나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누가 있어 꼬리없는 상어의 깊은 잠을 지켜줄 것인가? 이승을 살듯 꿈속을 살고 잠에서 깨듯 저승을 보는 신내림의 애기무당처럼 제 삶을 내다볼 수 없어 괴로웠다.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른되기가 두렵기만 한걸까.
그애가 큰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좋아. 라고 입술은 말하는 듯 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애의 울림없는 말은 가슴을 적시고 깊고 푸른 너머를 가진 눈은 심장에 불을 붙이는 걸까. 너를 위해 내가 산다. 이것이 사랑이다. 진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붓다처럼 가슴에 사랑을 품었다.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듯 자신을 구제할 것이다, 사랑이란.
그애는 보자기를 돌려주러 왔다. 곱게 접어 손바닥 만해진 것을 쪽지편지처럼 매듭지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속에 이야기라도 둘둘 말아온 듯 진을 보고는 한번 눈을 들었다가 내리고 입술모양을 응. 하는 것처럼 가벼이 붙였다. 알지 않느냐는 듯, 나쁘지 않았다는 듯? 부끄러우니 더 길게 잇대지는 말라는 듯. 그애는 패스트푸드점의 메뉴판을 찾는 듯 주위를 휘 둘러보며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저기...뭐라고 써 있는거야? 천연스레 묻는다.
" 치즈버거, 아니 치킨버건가? "
" 배고파? 너는? "
그애가 양상추샐러드와 치킨버거를 먹는 동안 진은 오렌지쥬스를 마셨다. 포장지를 옥수수껍질처럼 벗겨내어 꽃모양으로 만드는 그애의 손놀림을 보고있자니, 넌 왜 안 먹어? 하면서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 폼 잡을라구. "
그애가 웃는다. 그럼, 와인잔을 들어야지. 하면서 눈을 마주친다. 어젯밤 있었던 일 이후 처음이다. 진의 눈길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애는 상긋 엷은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비꼈다.
진은 보자기를 매듭지은 그대로 책상 아래쪽 서랍에 넣었다. 편지와 선물상자 위에 살폿이 올려둔 채 닫았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향을 낼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내가 너의 향취를 잊지 못하니 다시 찾아 안은 녘에는 필히. 하고 진은 마음 속에 음각을 하듯 깊이 새겼다. 너와 결혼할 것이다, 이혜정.
그애가 품에 안겼다.
진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듯이 포근하다, 피아노의 음율이 천사의 날개처럼 감싸는 듯 그애와, 그애를. 안은 진을 안온하게 한다. 음악은, 노래는, 가슴을 저미고 마음을 띄우는 천상의 가락은 그들을 위해 있는 듯하다. 원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 너도 음대 지망이니? "
차랑하고 새로 한 매직스트레이트의 단발을 흔들며 정원은 최대한 순수한 낯빛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애는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 응, 그래? 그럼 피아노를 같이 배우는가 보구나? 윤진이랑은 친한가 봐? "
지나가는 말처럼, 의례히 묻고 받는 대화처럼 정원은 콕콕 집어 물었다. 그애는 아니. 아닌데. 별로. 하고 또 짧게 대답했다.
" 어머? 그럼, 어떻게 아는 사인데? 그냥 울 학교 아니라니깐 궁금해서? 중학 동창이야? 초등 동창에 같은 동네? 난 지금 같은 반이거든, 근데... "
" 같은 중학교 나왔어. "
목소리도 곱다. 정원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갔다. 여인천하의 중전이 희빈을 보듯? 아님 억울하게 무수리를 잡다가 헛다리인 걸 알고 놀라는? 지금은 상감도 잘 모르나 이 여인의 매력을 알게되면...하고 속을 태우는.
" 정말이야? 나도 윤진이랑 같은 중학 나왔는데 ! "
" 응. 알어... "
넌 나를 몰라도 괜찮아. 하는 평범한 상민의 얼굴로 그애는 잠깐 건너다 보았다. 미소를 띄며, 미워하지 말라는 듯이.
" 너, 나를 알아? "
" 피아노 치쟎아. 반주 하느라고 우리반에도 왔었으니까. 중학교 합창대회, 해마다 달반을 두고 연습했으니까..."
" 아, 그렇지, 윤진도 너네반에 반주하러 갔었구나, 나처럼. "
정원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애와 선약이 있다던 윤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토요일 두 시 이후 브레이크타임의 패스트푸드점에서 고등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예대지망의 한갓진 놀이. 그애는 피아노도 못 치면서 왜 윤진을 만나러 왔을까.
" 왜? "
정원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목과 함께 눈물도 터지고 있었다.
" 왜 그애를 좋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는데! "
정원이 울고 어깨를 떨며 무너지듯 무릎을 껴안고 주저 앉았다. 그 앞에 선 채 까딱도 않는 윤진은 참...어쩌지. 하는 표정이었으나 동정의 빛은 전혀 없다, 공감의 얼굴도 연민의 느낌도 미안함조차 없는 그저 낭패한 표정.
" 정원아, 그만 해. 이러다 소문나겠다. "
" 무슨 소문! "
정원은 한 쾌 걸렸다는 듯 물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그 한 마디를 가지고 너를 옭아 나의 사랑을 온천하에 알리고 함께 죽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를 품으며, 눈빛 매섭게 윤진을 쏘아보았다.
" 내가 너 좋아하는게 뭐 잘못 되었는데? 난 그딴 거 하나도 겁 안나. 넌 그런 기만과 허식이 좋아? 그딴게 뭐가 중요해? 남의 시선이나 뒷담화가 두려워? 자신이 당당하면 되는거 아냐? 사랑하는게 뭐... "
감흥없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화를 내고 성난 목소리를 높이고 속엣말을 끄집어 감정 실어 소리치나 정원, 그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진은 한숨 한번 쉬면서 속말을 감추고 이어 말했다.
" 동성연애하는 거 말구, 너...바람 맞았다구 소문난다구. 이 정원, 이제 그만 목소리 좀 낮춰. "
내가 네 맘 모르는 거 아니니. 하고 윤진은 사려깊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부드럽게, 포근히, 반쯤 눈꺼플을 내리고 말하는 걸 정원은 목격하고 말았다. 그애와 있을때, 그애를 향해서, 그애가 어찌 하는지를 조바심치며 그리도 조심스럽게 윤진은 대하는 것이었다. 왜, 그애에게?
" 내가 왜 바람맞아야 해? 너, 나랑 입학하고부터 계속 친했쟎아. 우리 중학시절부터도 인연 있었고 그래서 서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쟎아. 우리가 어떤 사이야? "
" 친구 사이지. 중학동창이고, 같이 피아노치고 그러다 보니 친해진. "
윤진은 아까부터 울고 눈물 범벅이 되어 속쌍까플 아래 칠한 속심 두꺼운 아이펜슬 자욱으로 까매진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 한 뼘 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허벅지를 짚고 일어나는 정원은 새빨개진 콧잔등 아래 더욱 붉게 부푼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그럼! 그애는?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도 아니고 피아노를 친 것도 아니고 말 한 마디 나눈 적도 없는 그애가 왜 지금 너한테 ! "
정원은 무릎 위에서 한참 올라오는 스커트 끝단을 잡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윤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따져, 논쟁하여 할 말 없게 만들고, 그도 안되면 추궁하고 비난하고 따를 시키고 싶었으나 그러면 내 사랑이 될 것인가? 싶어 감히 어깨가 들어올려지진 않았다. 키가 큰 윤진은 그래도 정원에게 마음을 주겠다 거짓표정 만들지 않을 것이며 누가 뭐라 하든 제 사랑을 숨겨 쉬쉬하며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자였던가, 윤 진이? 사춘기 소녀들의 히어로였고 속내 동쳐 맨 처녀들의 선망이었고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신사였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응대하던 아이돌이었다. 결코 한사람을 위해 시선 고정하는 이가 아니었다. 스타라면 당연히, 매니저 외에 어느 한 개인을 곁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난 너를 위해 피아노를 버릴 각오도 되어 있어. 네가 치는 연주곡을 위해 모든 걸 다할 꺼야. 내가 너의 발판이 되어도 좋다구, 나야말로 널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어! "
정원은 말했다. 말이 안 되어도 문장을 만들었다. 비문이 되더라도 마음은 내비쳐질 것이다. 열정을 갖고 노력하고 간절히, 간절히 소망하는 자에게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현실에서 성취하게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추구해 온 자에게, 열과 성을 다 한자에게 선택권을 쥔 자가 무어라 말하는가? 뭐라고 하는 건가?
" 네가 사랑한 나를 가져가? 그리고 남은 나는 내 사랑을 만나러 갈테니. "
" 야! 윤진! "
많이 기다리지도 더 보아주지도 않고 윤진은 가 버렸다. 정원을 학교 뒷뜰의 우거진 잡목 사이에 남겨두고. 바람난 애인을 불러 훈계하여 계도하려던 건 실패했고 뼈저린 후회, 낙담, 분노와 탄식만이 남아 정원을 괴롭혔다.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어째서 노력하고 원하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는가, 사랑은 또한 사람의 심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던가? 한눈에 보아도 그애가 무얼 말하는지, 바라는지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게 숨은 계략 위에 떳씌워진 아마포라면 더욱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무릇 자연의 섭리가 아닐 것이다. 그애가 그리 내숭을 떠는데 어찌 사랑은 그리로 기우는가. 내가!
정원은 홀로 엎디어 울었다. 누가 허리 아래 숨은 상처가 없으랴, 심장의 이면에 눌린 자욱이 없겠는가, 이 땅에서 어린아이로 천대받고 어깨 위 견장으로 가린 청춘의 숨소리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법이다, 그것도 사랑한다 점찍은 자에게서.
봐라, 저 애가 어떻게 가녀린 손목을 들어 입과 턱을 가리고 아니다, 싫다. 하면서 품에 안기는 지를. 저런 내숭과 저런 안일과 한번 알은 체를 하지 않고 표표히 군중 속을 뚫고 나가는 저 애의 기능을.
' 가을 바람 소슬하다. '
이 진은 고개를 약간 기우뚱. 이건 아니구...
' 가을바람 솔솔분다.'
다시 머리를 곧추 세우고 생각을 해 본다. 솔솔 부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음.
신음처럼 꾸웅 하다가 공책을 밀어놓고 펜도 던져놓고 일어난다. 이나저나!
문득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열씸히 쓰던, 아니 써야해서 애먹으며 숙제검사용으로 두 줄씩 채웠던, 일기장을 책꽂이 구석에서 발견하고 한 줄 써 보던 참이었다. 역시나.
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대문 안쪽 마당의 가으로 보이는 건 들장미처럼 우직스러운 덩쿨나무의 가시 돋친 줄거리들이 여기저기 엉켜있는 담장이다. 여전히 엄마는 화단손질을 소홀히 하고 있다...하고 생각하지만 스테레오테이프의 이중 트랙처럼 머릿 속의 다른 구석에선 커다랗게 뜬 눈을, 흘낏하듯, 잽싸게 보였다가 고개를 돌려 뒷머리만 보인 채 체육시간을 마감하던 그애에 대한 생각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그애가 훔쳐보는 걸 처음 안 것이 아니다. 봄부터 여름내, 방학 지나고도 변함없이 같은 반도 아닌 윤진을 오랜 벗이라도 되듯 익숙하게 찾아내서 언제부터? 라고 느낄 만큼 시선을 꽂고 있었다, 그애는. 뒤통수가 따가워...하고 느끼면서 윤진이 휙 돌아보면 벌써 재빨리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그 애는 또, 쉬이 낮은 목소리로 말 건네기 어려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었다. 그 애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서, 또 실상 알지도 못 하는 복도 저쪽 끝반의 여자애에게 큰 소리로 불러 할 말은 없으니, 윤진은 결근한 체육선생을 대신해서 합동수업을 진행하는 그 애네 반의 담임, 키 쪼꼬만 늙다리 여자체육의 시야를 벗어난 양팔벌려 4줄 횡대의 끝줄에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뭐, 말 그대로 히히덕. 이었다. 앞 줄에 선 아이가 어제 본 개콘을 얘기하자 옆엣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슬쩍 몸개그를 흉내내기도 해서...좀, 웃었다. 킬킬 거리고. 저만치 앞에서 지도하는 체육꼰대의 하얀 모자 끝만 가끔 들썩거리니 뒷줄 170센티 그룹의 딴 짓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헌데...
윤진은 다시한번 으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절로 이마가 찡그러졌다. 쿨하고 싱겁기로 이름난 1반의 꺽다리인 윤진이 어쩌다 합동수업하게 된 저 앞줄의 범생이 소심녀 땜에.
'승질 나네!'
맨 뒤에서 킬킬거리는 일단의 꺽다리들을 슬쩍 돌아보더니, 한번 더 돌아보더니 눈 마주치자 얼른 고개 돌리고 교실 들어가는 길에서도 저 앞에서 혼자 척척척척 가 버렸다. 평소엔 흘낏흘깃 잘만 보더니.
그냥 딱 보기에도 조용하고 얌전하고 애들하고 어울려 수다같은 거 안 떨것 같더니, 아닌게 아니라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해서 체육담임이 좋아한다더라구, 그애와 초등 동창이며 죽마고우라는 중간줄 앞에 앉던 애가 말했었다. 그래 그런가, 저의 죽마고우와도 별 알은 체를 안 하더니 시종 조용히 수업에만 열중하고 4열 횡대로 서서 옆엣 아이와 말 한 마디 않고 앞엣줄 아이의 뒤꿈치만 보더니 슬쩍, 운동장 바닥에 떨어져있던 휴지조각이나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킬킬거리며 소음을 더해가던 뒷줄의 무리들을 돌아보다가 윤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표정 하고는!
한순간 윤진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도무지 생각이라곤 없어 강건너 마을이 수해로 초토화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도 건성으로 넘기며 대학가요제의 웨이브에만 신경쓰는 꺽다리 수다꾼들 속에 서 있는 자신을 그애가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니...대체 열 서넛의 중학생 여자애가 뭐 그따위로 사람을...얼마나 한심하게 보던지, 츱!!
윤진이 얼마전 주니어콩쿨 대회에서 1등하고 월요일의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과 트로피를 받으며 돌아나오면서 흘낏 그애의 얼굴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질 노릇이었다. 인어공주가 바다 위로 처음 나들이 나와 뱃전에 선 왕자님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감동과 환희, 동경과 열망에 가득찬 시선이었다. 보통, 동급생이 상을 타거나 하면 부럽다거나 고깝다거나 아님, 맨숭맨숭 딴나라 사람이려니 하고 쳐다보곤 하는데, 윤진은 그애의 시선 땜에 한껏 가슴이 뿌듯이 차 올랐었다. 근데...괜히 운동장에서 킬킬대 가지군...완전 이미지 배렸다.
또 바로 지난 주 가을백일장에서 뭐...윤진은 할 말이 없어 대중가요를 베낀 시를 한 편 내고 말았지만, 그 공부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 한다는 그애는 산문 부문에서 금상을 받아서 단상에 섰었다. 산문이라 시 부문의 입상작처럼 액자에 넣어져 걸리지는 않았지만 학교신문에는 실려서 함 읽어보았다. 시험범위 외에 교과서 정독도 해 본 적 없는 윤진이었지만.
징검다리 놓여있던 개천가를 넘어 산으로 들로 풀따고 꽃따고 잠자리도 잡으러다녔었는데, 그 산을 깍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천을 복개하여 물도, 징검다리도 없어졌다며 슬퍼하는 얘기였다. 내 산아, 어디 있니...하고 끝나는. 뭐, 그애가 쓸 법한 글이었다. 쌩하고 말도 없이 운동장을 가으로 돌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맨날 쉬는 시간마다 독서중이던 그애는, 흠.
윤진도 한 번 써 볼까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오늘처럼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기분 더럽고 마음 착찹한 날에는. 가을 바람 쓸쓸히 휘익 부는 데, 거...곁눈 한 번 없이 지나가던 그 애 땜에, 완전 가을 타는 사춘기다, 이 윤진님이.
이사하고 발끝도 내어놓지 않고 하루내 집안에만 있다.
그녀도, 아이들도.
- 넓으니까.
그녀는 아이들이 거실에서, 안방으로 다시 작은방으로 옮겨다니며 놀고 있다고 한다. 지붕카를 타고 놀이집을 꾸미고 미끄럼틀에서 내려와 주방놀이용 씽크대 안에서 오색가지 한복들을 꺼내기도 한다.
- 어쩌자고.
그녀의 집이 아이들의 놀잇감과 약간의 동화책들로 온통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하하. 웃고 말았다. 여기서.
여전히 커텐을 달지 못 하고 있는 그녀의 창들은 유난히 크고 많다. 상가주택이라. 하면서 그녀는 웃풍이 심해 춥다고 중얼거린다. 그 어조에 불만도 실망도 저며있지 않는 것에 유심히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의 네 변 중 하나가 주욱 창으로 이어져있었다. 길게 이어진 창턱 위로 그녀는 작은 소품들을 줄지어 올려 두었다. 카페처럼. 시선의 대부분을 창 쪽으로 두면서 정작,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있다. 바깥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여기서 그녀의 공간은 어디인걸까.
고등학교 시절, 자그마한 제 방의 창가에 50*70의 책상 위에 빨간 스테레오카셋트를 하나 두고 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안온했던 그녀에게 스무살 이후, 밖으로 떠돌기에 바빴던 그녀는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이 없었다. 도망치듯 감행했던 결혼 이후에도 그녀의 공간은 책상 하나, 걸상 하나를 그토록 원했건만 아직까지도 갖지 못 하고 이제는 별로 필요치도 않다는 듯 익숙해하고 있었다.
- 뭐...별로.
무엇이든 욕구하는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법.
그러하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망. disire. 이다.
그녀는 더이상 원하지 않는다. 생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도. 가치로운 것. 실존적인 의미, 노동이나 마르크스도.
- 맑스주의 이상의 답을 얻지 못 했어.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대학을 떠났었다.
다른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길을 가는 것에 힘들고 지쳐했던 그녀는 어느날 문득, 손을 놓았다. 그때, 투쟁의 어느 즈음에 문득 포기를 입에 담았던 것처럼.
말이 되어 나온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되었었다. 투쟁의 끝도. 결혼의 시작도.
어느 선배가 충고하기를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면서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침묵으로 긍정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아이도 낳았다. 아이.
아이를 낳았다. 라는 말은 좀처럼 쉬이 끝나지 않는 현실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그녀의 방황, 절망, 화내고 혼자 울고 누군가를 향해 요구하는 것을 보고 지켜왔던 것은 그녀의 벗이었다. 이제 그녀가 남편에게 가졌던 작은 소망을 걷어내고 벗에게 요구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한 지금,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나 외에는. 언제나 열외였던 배제가 이제는 특권이 되어 표정 없어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자가 되었다.
그녀의 집에는 여전히 걸려지지 못한 커텐과 부러진 커텐봉, 그리고 짝이 맞지 않는 커텐고리들이 남아있지만 더이상 그녀는 창을 꾸미고 싶어하지 않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먼지를 그대로 놓아두면서 시선의 높이로만 바깥쪽을 바라볼 뿐, 찬바람 들어온다면서 창문 열기에도 인색하다.
혜정은 얼른 보기에 귀엽고 예쁜 여자애였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론 컸고 피곤할 수록 가는 쌍꺼풀이 겹으로 지곤 했다. 서양인처럼 높지 않지만 동양인처럼 낮지도 않은 코보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작은 입술, 세필로 그린 듯 정교한 입술이 참 예뻤다. 그 애의 대학교는 여느 대학들처럼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많았고 다른 단대보다 문과대에는 그보다 좀더 많은 여자애들이 있었지만 그 애가 택한 독어독문학과에 여자들은 압도적으로 귀한 편이었다. 그 애가 학과의 남학생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건 기우였다. 오리엔테이션과 신입생 엠티, 그리고 학기초의 강의실에서 그 애는 말수가 적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슴에도. 그 애의 학과에는 독어나 혹은 문학에는 더욱이나 관심이 없는 남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그들은 손가락에 꼽을 만할 과의 여학생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집적대고 있었다.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가능한 안정적인 커트라인을 염두에 두고 지원해서 합격의 영광을 얻은 남학생들이 태반인데 비해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되었다. 그 녀들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 싶은 학력을 소지하게 되었고 언어와 문학에 강하다고 생각되는 여성들의 특성에 따라 졸업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예상되었다. 이제 그 녀들에게 남은 것은 좋은 신랑감을 같은 학과나 문과대 근처가 아닌, 가능한 좀 더 레벨이 높은 대학의 남학생들과의 인연을 구축하는 것을 통해 건져내는 것이 과제인 것처럼 보였다. 혜정은 소수의 여학생 동기들 중 재수를 하고 들어온 한 명과 친해질 듯 싶었다. 아마도 나이가 같아서 친근감을 가졌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재수생의 전력을 가지고 있어선지 다소 우울하고 어딘지 과의 여학생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가 어느 전문대학의 유아교육과를 다니다가 예의 " 그 물에서는 그 정도의 남자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는 식으로 전과를 했다는 동기를 말하는 그 동기에게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정은 한, 두번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고는 코드가 안 맞는다고 치부하기를 곧잘 했다. 그렇게 친하고 싶지 않은 동기들의 명단을 확장해갈수록 그 애는 사귈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점심식사, 그것이 또 혜정의 커다란 난관이었다. 끼리끼리 혹은 비슷한 부류의 삼삼오오 식사를 하는 학생식당에서 혼자 줄을 서는 것이 처량해보였지만, 학교 바깥으로 혼자 점심을 때울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애가 혼자 있지 않을 때는 과학생회일을 보고 있는 선배들과 얘기를 할 때, 아니면 동아실에 있을 때였다. 동아리실엔 거의 항상 누군가가 있었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갖는 동질감으로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혜정을 빼놓지 않았고 그냥 사회과학 써클보다 자체의 업무를 갖고 있는 ***였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할 일꺼리도 많았다. 다른 1학년들에 비해 더 자주 동아리실을 들르는 혜정에게 선배들은 심부름을 시켰고 운동적으로 연관된 타대학이나 사회단체를 방문하는데 자주 혜정을 데리고다녔다. 덕분에 혜정이 운동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속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그 애는 2학년 선배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들에게 지지 않는 데모참가와 연대투쟁을 비롯한 활동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써클이나 학생회를 외곽으로 하고 있던 물밑조직에서의 접근도 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애가 지하조직의 조직원이 되었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 애는 **의 소리를 청취하는 선배를 이해할 수 없어했고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끝내 철회하지 않는 자신의 알피와의 논쟁에서 합리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다. 인식의 왜곡 혹은 몰이해를 감수하고 그 애가 선배들의 노선에 동의하는 말도, 행동도 하지 않자 87년의 후폭풍 속에서 잘 조직화되지 않는 후배들 속에서 유독 돋보였던 그애를 인입하고자 했던 선배들은 혜정을 준조직원 정도에서 대기시켜두기로 했다. 대세화되고 주류화되어있는 대학의 운동권분위기에서 골수우익이 아닌 한 과학생회의 임원들이 격려하는 학내집회를 경원시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혜정은 대부분의 87학번 선배들로부터 운동에 대한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읽어냈고 과학생회의 주도세력이고 동아리의 핵심멤버였던 선배들 중 가까웠던 몇 명에게서 조직원이 되었던 과정, 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렇게 과에는 즉 강의실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혜정은 동아리실에서도 소외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서 그 애가 왜 남자선배와 썸싱이 일어났는지,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실연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혜정의 써클에서 후배들의 학습을 담당하던 알피는 남자, 여자 각각 한 명씩이었다. 무척 친해진 듯 여자알피의 자취방을 드나들던 어느날 대판 싸웠다는 얘기를 흘리더니 입을 싹 닫았다. 그리고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기타 이야기를 했다. 노래, 남 앞에서 부르는 걸 꺼렸다 뿐이지 노래를 좋아했다, 혜정은. 그리고 기타를 치며 감미롭게 노래를 부르는 선배가 써클에 있다고. 알피이고 세미나할 때 후배들의 질문에 대답도 잘 한다고. 이 승만의 ....중략..... 조직원이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고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2학기에 그 선배가 휴학을 하고 나오지 않는다며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점점 차가워지는 가을 바람 속에서 슬프고 초조한 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시월 어느날부터인가 입을 꼭 다물고 교정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혜정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다. 너무 많이.
고즈넉한 옥탑방, 새로 두시가 넘어간 시각, 주위는 길고양이도 잠든 듯 조용했다. 진은 주방쪽 씽크대에서부터 출입구로 꺽어지기 전까지의 벽면의 이분의 일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느 살림집이었으면 가스대를 포함한 씽크대 옆으로 냉장고와 잡다한 주방살림을 놓느라 남는 공간이 없겠지만, 200미리의 작고 아담한 냉장고만 놓고 대신 출입구 앞까지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라탄의자와 테이블이었다. 손으로 슬쩍 밀어도 쉽게 제 자리를 바꾸는 가볍디 가벼운 이 가구들을 혜정은 좋아해서 침대 옆으로 난 반대편 창문 쪽으로 번쩍 라탄의자를 들고가 안락한 사색을 즐기기도 했다. 조금 전에는 그 라탄의자에 중상을 입은 병사처럼 걸쳐져 있던 혜정, 뭐라고 주절거렸지만 만취를 못 이겨 꼬부라지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 한 잔을 간신히 먹여 침대에 뉘일랬더니 까탈스럽게 예민한 부잣집 외동딸의 입덧처럼 욱 ! 하고 올린다. 몸을 가누지 못 하는 그 애을 부축해 욕실을 왔다갔다 하기를 서너번 하고나니 흐느적거리며 머리가 아프다고 울먹거리는 혜정, 침대에 쓰러져 시체처럼 널부러진다.
혜정을 데리고 온 두 명의 남자들은 같은 동아리 선배라며 혜정이 1차에서 너무 들이붓더니 정신을 못 차린다고, 가까운 친구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바래다주러 왔다고 한다. 그들은 한명은 퉁퉁한 고수머리였고 다른 한명은 대조적으로 뻣뻣한 짧은 머리가 스포츠형 머리에서부터 자라고 있는 중인듯한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중년의 뻔뻔한 매춘남를 연상시키는 퉁퉁이는 재수하고 들어왔다는 그 말끝마다 " 이 형은 말이야 , " 하고 자신을 상대보다 연장자라는 위치를 부각시키며 지칭한다는 작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체질적으로 빼빼마른 길쭉한 얼굴은 조기입학한 초등학교 저학년시절부터 동급생들에 치여 자라 누나같은 여자들만 좋아할 것 같은 또 볼 때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는 그 공대생이 틀림없어보인다. 뭐, 맞을 것이다. 혜정의 동아리에 남자선배는 3명 밖에 없었고 그 중 한 명이 군대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지라. 그들이 혜정을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겠다는 화양리의 술집 골목, 그 < 밤 10시 이후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합니다 > 라는 표지판을 전신주에 매달고 있는 그 골목을 혜정은 싫어했다. 선배들이 그 거리의 5000씨씨 혹은 일만씨씨하는 한잔을 빙 둘러앉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마신다는 호프집으로 2차를 가는 것도, 그 길 안쪽의 감자탕집으로 3차를 가는 것도 혜정은 그 쯤에서 어김없이 눈에 넣을 수 밖에 없는 집창촌의 쇼윈도우를 보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문 앞에 나와있는 닳아보이는 여자들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두려웠고, 웨딩숖의 마네킹처럼 무심한 얼굴로 가슴까지 푹 파인 붉은 드레스를 걸치고 애견가게의 전면유리안 작은 칸막이 안에서 움직이는 상품처럼 진열되어있는 소녀들을 훔쳐볼 때마다 자신이 성을 사러온 남자들과 진배없이 뻔뻔스럽게 느껴진다는 혜정은 선배들의 못 본 척 하는 그 얼굴에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물론 혜정의 선배들이 그 거리에서의 3차를 끝내고 여관을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늘 패거리의 잔당들과 함께 널부러질 곳을 찾아서였고 그럼에도 혼숙단속을 귀찮아하는 주인들의 거절에 방황하다가 후미진 여인숙에 겨우 구겨질 뿐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가기 전 딱지떼기를 숨기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그 남자 대학생들 속에서 혜정이 이질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정이 이토록 야위어 그 작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만큼 초췌해 진것이 그 군대간 선배 때문임을 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딱지 떼러 다녀왔다는 사실을 줏어듣기라도 했을까? 진의 순진한 짐작은 그러나 대학가에서 학년초에 눈 맞아 씨씨커플의 염문을 뿌리는 남녀대학생들이 학년말에 이르기전에 이미 숱하게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평범한 예측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는 것에 당황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울부짖는 고딩시절의 촌스런 보이프렌드의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을 얻었다.
엄마는 굳이 그럴 필요 있냐고 하셨지만, 굳이 그러겠다는 딸에게 길게 말하지 않았다.
" 생활비는 용돈 이상 더 줄 수 없다. "
" 괜찮아요. 집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옥탑방 공과금이 얼마나 된다구, 용돈도 알바로 충당할 수 있다니까. "
레슨비로 여느 부잣집의 고액과외비 만큼은 아니라도 동생 이수의 학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는 가정경제에 타격을 주었기에 진은 대학에서는 가능한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 네 방은 세를 줄 생각이니 집에 왔을 때 불편한 건 감수해야 한다. 대신 매달 받은 월세를 통장으로 부쳐줄테니. "
"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피아노 과외해도 되고 다른 알바꺼리도 천지라니까. "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다.
" 대학을 만만히 보지 마라, 더구나 요즘 같은 시국에. 나는 네가 강의실과 맥주집만 오가면서 낭만 운운하는 대학 생활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 알았어요, 열심히 할께요. 학과공부도 세상공부도 "
엄마의 불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항상, 아주 어렸을 때부터도 엄마는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불안해 했다. 세대차이가 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는 맘도 없지 않았지만 엄마의 인생에서 사회는, 특히 한국사회는 아주 느리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68년의 격변을 한국사회를 넘어 유럽의 소식을 통해 조망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유럽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져있는 한국사회를 불행하게 직시하면서도 전태일 이후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인생에 관대하지 못했다. 어쩌고 저쩌고 중략...
혜정의 학교에서 진의 학교를 지나 뒤편 주택가에 얻은 옥탑방은 넓은 창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혜정의 학교에 가까운 곳으로, 혜정의 학교와 자신의 학교 사이에 집을 얻고자 하였으나 창에서 바라보이는 대공원의 숲 때문에 복덕방에서 보여준 마지막 집으로 결정하였다. 또 옥상 위에 마련되어 있는 평상과 옥상의 출입구를 개방하지 않는 다는 조건이 맘에 들기도 했다. 반지하층을 포함하여 3층 위 옥상에 작은 창고 하나 크기의 옥탑에 집주인은 샌드위치판넬을 이어붙여 욕실과 기다란 부엌을 만들었다. 본디 창고방과 욕실과 부엌은 각각의 벽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지난 겨울, 오랫동안 혼자 살던 늙은 택시운전수의 실수로 화재가 난 후 올수리를 했다고, 방과 부엌을 하나로 트고 보일러도 도시가스로 교체했으며 천정이며 샷시도 새로 하느라 먼저 살던 사람의 보증금 말고도 돈이 많이 들었다며, 완전 새집이라고 같은 동네에서 철물점을 한다는 할아버지는 큰 소리를 쳤다.
" 이만한 집을 그 돈에 얻는 걸 아주 복 받은 걸로 생각해야 할께야. 보게, 이렇게 훤히 트여 밝고 너르고 저기 씽크대며 문짝이며 다 새것 아닌가, 뭐시냐 그 오삐스텔이나 한가질세 ! "
그러고도 할아버지는 진이 한 말은 아니었지만, 옥탑이라구 시비하지 말라면서 그것만 아니면 훨씬 더 쳐 주는 방이라고, 그것도 머스마들 아니고 여대생이니까 양보한 거라고 한참을 더 떠든다. 아마도 복덕방 아저씨가 의뢰를 받으면서 어쨌든 옥탑이니 가격을 조정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진이 얌전하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돌아서면서 주인은, 흘낏 천정을 올려다본다. 새로 올린 천정의 석고보드를 뚫고 새 형광등이 은색 날개를 펼치고 달려있는 것이 불안해 보였나? 진도 따라서 흘낏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아, 완전 새집이라니까, 신혼살림 차려도 되는 집이여! 하면서 주인은 또 너스레를 떤다. 진은 네! 깨끗이 쓸께요. 하고 주인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수도세는 꼭 받으러오기 전에 챙겨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혜정에게 집주인 얘기를 하다가 보니 천정 속이 좀 불안하게 생각된다. 올수리를 했다지만, 욕실은 오래된 양변기에 세면대도 없고 벽도 기존의 빨간 벽돌과 새로운 샌드위치 판넬의 접합이 부자연스러워보인다. 욕실은 화재에 피해가 없었던 듯, 그럼 새로 친 천정 속은 어떠할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안 보이는 것을 두고 신경쓸 게 무언가 싶다. 혜정이 그런 눈치를 챘는가 한숨을 쉰다. " 그럼 택시 아저씨는 보증금도 못 받고 나갔다는 거네? 세 살던 집에 불 나면 살던 사람이 물어야 하는거야? 집 주인이 관리 의무 있는 거 아닌가? " " 글쎄? 화재 원인에 따라...다르지 않을까? " 불 났던 집이 어떻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자꾸 이런 화제로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진은 창문을 열었다. " 근데, 이 창문 진짜 크다. 공원 숲이 저 끝까지 보이쟎아. 시원해서 좋겠지? "
" 응, 근데 겨울엔 춥지 않을까? " " 하하하, 너 하나 춥지 않게 할 능력은 있으니까 걱정마셔. " 진은 이렇게 말하니 진짜 신혼부부가 첫 둥지를 틀며 하는 대사 같아 괜히 웃음이 더 크게 나왔다. 옥탑방의 문 밖에는 마당처럼 쓸 수 있는 옥상도 있고 반지하층이 있어 계단도 2층 반만 올라오면 되는 이 집이 맘에 들었다. 게다가 혜정은 계단 쪽의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유리로 된 반원형의 벽이 멋있다는 말도 했다. 설마 혜정이 없어 자신이 더 추위를 느끼게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진은 여기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따스한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 끝에 " 내년에도 재계약하고 쭉 살아도 좋을 것 같지? " 하고 말했다.혜정이 " 계약을 해마다 다시 하는가 보지? " 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 그러는 것 같던데? " 하고 자신없는 대답을 하면서.
결국 침대는 새로 샀다. 더블로. 엄마에게 넓은데서 자고 싶다고 말하니 그래, 집의 네 방보다 훨씬 크니 그래도 되겠구나 하시며 침대는 좋은 걸로 해야 한다는 말에 대신 입학선물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이며 책장, 옷장 같은 건 이삿짐 차로 옮겨오고 거실 한 쪽에 있던 오래된 윈저 의자 하나를 더 얹어왔다. 별 말이 없는 엄마, 식탁은? 하시다가 피아노 땜에 안되겠구나 하신다. 물론 충분한 공간은 안되겠지만, 진은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작은 티테이블 셋트를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혜정의 취향을 존중할 예정이었으므로 아무 말도 안 했다. 혜정은 함께 가자는 말에 신나하며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커다란 창에 어울릴 만한 커다란 커튼을 골랐다. 진은 취미가 없어 잘 몰랐지만 하얀 레이스의 속커텐과 겨울에도 지장없을 만한 제법 두터운 감의 겉커텐, 커텐집게며 타슬을 만지작거리는 혜정을 보고 집 꾸미기나 홈패션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대문을 나와 을지로의 가구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에도 혜정은 즐거워했다. 예쁜 의자를 유심히 보고 사무용 책상 중에서넓고 디자인 잘 빠진 책상을 보면서 만져보고 싶어했다. 살까? 했더니 막 웃는다. " 엇다 놓을라구? 이런 건 전원주택이나 적어도 마당 넓은 단독주택은 되야 어울리는 가구들이라구. " 한다. 하지만 엄마는 신당동에 살 때도, 별거 후 이사온 집도 단독주택이지만 이리 예쁜 가구들 놓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었다. 마당도 꽤 되었는데...하고 생각하며 진은 의외로 혜정이 공주님 취향을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전혀 티도 안 내더니? 결국 혜정은 공주님 취향을 여지없이 증명하며 하얀색 라탄의자, 테이블셋트를 고른다. 네 생각은 어때? 하고 혜정은 남의 집 살림 준비하는 걸 따라온 것 뿐이라는 자세로 물어봤다. 진은 상관없다고 말하려다가 정말 멋질 것 같다라고 고쳐 말했다. 옥탑방에 두기는 분명 부담스러운 크기이고 컨셉도 안 맞을 것 같았지만, 햇살 좋은 가을날 옥상 마당에 내어 놓으면 그럴 듯 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혜정의 분위기에 전염된 것 같았다. 갈수록 낭만적이 되어가고 있는 진이었다.
혜정과 함께 밥을 해 먹었다. 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카레라이스였다. 그리고 라면끓이기 정도? 혜정은...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애는 오빠와 남동생 사이의 유일한 딸이었고 엄마가 전업주부도 아니었지만 보통의 여자애들보다 부엌일을 할 줄 몰랐다. 아빠가 힘에 부쳐 짜증내는 엄마에게 " 가시나 뒀다 뭐할끼고, 좀 시키라 ! " 하고 말했지만 그 때마다 엄마는 " 시집가면 다 할텐데, 지겹도록....놔 둬라, 내 좀 쉬었다 밥 차려 줄테니. " 하셨고 가끔 너무 난장판인 집안 꼴을 보며 " 손 뭉뎅이 뿔라짔나, 청소 좀 하그라 " 하는 정도셨다 한다. 그래서 청소했어? 아니, 내가 막 빗자루 들을 라고 헀는데 기분나쁘게 말을 내시니깐 성질나서 걍 던져두고 나왔지. 하는 혜정, 아주 착한 딸이다. 그래도 청소는 자주, 아침이면 내내 온 집안을 하느라 땀범벅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요리를 못 하는 건 순전히 엄마, 아빠가 경상도출신이기 때문이라며, 원래 경상도음식이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런 말이 있나? 하고 넘어갔다.
함께 먹는 밥을 위해 우리는 시장을 봤다. 감자와 양파와 당근, 그리고 계란은 기본으로 항상 비치하는 식재료들이다. 여기에 햄을 넣거나 없으면 없는 채로 잘 해 먹는 것은 카레라이스였다. 서로 하기 싫은 날이면, 많이 해 뒀던 카레라이스를 3일 동안 계속 먹기도 했다. 혜정, 질리지도 않고 먹을 때마다 맛있단다. 밥과 김치 외에 자주 할 수 있는 반찬은 계란후라이였다. 몇 달 동안 계란후라이는 그보다 난이도 높은 계란말이로 진전되지 않았다. 술집에서 안주로 나오는 계란말이는 두텁고 잘 말아져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두어 쪽 주는 계란말이도 좀 얇고 물컹하긴 했지만 비단두루마리처럼 잘만 말아져있었다. 근데, 우리가 후라이팬에 잘 저은 계란물을 붓고 좀 있다 말을라치면 다 깨지고 부서져 얼른 두번 연속 뒤집지만 말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형상을 하곤 했다. 거기서 일보전진한 것은 순전히 혜정의 공이었다. 어느날, 계란말이하는 법을 자취하는 선배언니한테 물었다며, 정답은 바로 " 익기 전에 돌리라 " 는 것이란다. 과연, 이론만으로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지 혜정은 잘 달군 후라이팬에 잘 저은 계란물을 붓더니 끈기있게 기다린다. 제법 요리사처럼 후라이팬 손잡이를 들고 한쪽으로 기울여 펼쳐진 계란부침의 한쪽만 먼저 익는 걸 확인하더니 양 손에 숟가락과 뒤집개를 각각 들고 드럼 주자가 첫음을 잡는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계란말기를 시작한다. 돌돌돌, 제법 3회전, 4회전까지 겹으로 만다. 와! 대단하다! 진은 정말 감탄하며 혜정의 손놀림을 보고 환호를 했다. 그 후로 우리들의 밥상에 계란후라이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작게 채썰은 당근과 양파를 넣은 계란말이처럼 영양가높고 맛좋고 보기에도 예쁜 밥반찬도 별로 없다.
하지만 혜정의 요리솜씨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식재료의 다듬기부터 시작되는 요리의 마지막 단계인 간 맞추기에 이르러 혜정은 씽크대 앞에 서서 왔다갔다 하는 것에 지쳐했고 입맛을 잃어 정작 다 차린 밥을 먹는 것에 의욕없어 했다. 그 애는 매사에 강단이 있어 술을 마셔도 마지막까지 버텼고 3학년 남자선배와 소주로 내기를 하여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체구에서 비롯되는 체력의 한계는 단기전으로 승부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일에선 금방 바닥을 드러내며 항복을 하거나 미리 포기를 하곤 했다. 그 애는 한 자리에 오래 서서 하는 요리하기가 맞지 않았다. 보다 더 테이블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셋팅을 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고 보람을 느꼈다. 가능한 모든 접시와 컵과 수저받침대나 내프킨까지 동원하여 예쁘게 상차림을 하고 그 앞에 앉아 오래 식사하는 것을 좋아헀다. " 넌 식사를 눈으로 하냐? " 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쁘지 않은 것은 먹지도 못 했다. 통째 올라온 생선을 싫어했고 가능한 시선 조차 두지 않으려 애쓰곤 했다. 그 애에게 시장통의 뼈다구찜이나 순대국 속의 간, 내장탕 따위는 너무 힘든 시험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노동자들과의 식사에서 그런 메뉴를 참아 넘기는 것이 자신이 대중성을 갖는데 실패하게 한 핸디캡이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 애를 위해 요리의 대부분을 담당했지만, 정말로 그 이외의 것에선 완벽한 써비스를 받았다. 깨끗함의 기준이 다른 혜정은 창틀에 먼지가 오래 묵는 것도 싫어했고 티비의 검정부분에 자꾸만 쌓이는 먼지를 어케 없애나 하는 것 따위를 갖고 오래 고민했다. 설겆이를 다 하고 나서도 뜨거운 물을 한번 더 끼얹기 위해 가스비 아까워하지 않으며 한 솥의 물을 끓여내기도 했다. 덕분에 집은 항상 전담청소부가 있는 부잣집도련짐의 방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있었고 기분이 내킬때면 쉽게 카페테리아의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시장 한가운데를 뚫고 유일하게 그 애가 사 들고 온 것은 한 단의 프리지어 혹은 안개꽃이었고 가끔 해바라기 한 송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팔걸이가 있는 하얀색 라탄의자는 금방 먹고 일어나는 식탁의자보다 훨씬 편안해서 우리는 자주 거기서 식사 외에 커피나 얼음쥬스를 마시며 독서를 했고 음악을 들으며 맥주와 계란말이를 앞에 놓고 늦은 밤까지 분위기를 잡곤 했다.
더블침대의 패드는 아니었지만 이불, 특히 홑겹의 여름이불 외에 다른 것들은 혜정이 혼자 들고 털고 개어놓기엔 힘에 부쳤다. 더구나 그 애는 왜 먼지를 이불 속에 돌돌 말아넣느냐며 꼭 마당까지 들고 나가 몇 번이고 털고서도 햇빛에 비치는 먼지들이 떠도는 것을 보며 직성이 안 풀려 볕 좋은 날이면 옷장안 맨 아래에 깔려있는 이불까지 안고 나와 말리곤 했다. 깨끗한 환경과 정리정돈된 상태에 대한 욕구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지만 진은, 다른 어떤 일보다 그 애가 이불을 터는 것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곤 했다. 그 애와 마주 서서 이불을 털고 그 커다랗고 다소 무겁기까지 한 이불을 널어 말리고, 그걸 걷기 위해 저녁에 귀찮은 몸을 일으키는 것에 기꺼워하면서 진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함께 이불을 터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어느 책에선가 보았다며 혜정은 그렇게 가사분업을 한다면 여자에게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말을 누가 하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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