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의 노래

' 가을 바람 소슬하다. '

이 진은 고개를 약간 기우뚱. 이건 아니구...

' 가을바람 솔솔분다.' 

다시 머리를 곧추 세우고 생각을 해 본다. 솔솔 부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음.

신음처럼 꾸웅 하다가 공책을 밀어놓고 펜도 던져놓고 일어난다. 이나저나!

문득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열씸히 쓰던, 아니 써야해서 애먹으며 숙제검사용으로 두 줄씩 채웠던, 일기장을 책꽂이 구석에서 발견하고 한 줄 써 보던 참이었다. 역시나.

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대문 안쪽 마당의 가으로 보이는 건 들장미처럼 우직스러운 덩쿨나무의 가시 돋친 줄거리들이 여기저기 엉켜있는 담장이다. 여전히 엄마는 화단손질을 소홀히 하고 있다...하고 생각하지만 스테레오테이프의 이중 트랙처럼 머릿 속의 다른 구석에선 커다랗게 뜬 눈을, 흘낏하듯, 잽싸게 보였다가 고개를 돌려 뒷머리만 보인 채 체육시간을 마감하던 그애에 대한 생각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그애가 훔쳐보는 걸 처음 안 것이 아니다. 봄부터 여름내, 방학 지나고도 변함없이 같은 반도 아닌 윤진을 오랜 벗이라도 되듯 익숙하게 찾아내서 언제부터? 라고 느낄 만큼 시선을 꽂고 있었다, 그애는. 뒤통수가 따가워...하고 느끼면서 윤진이 휙 돌아보면 벌써 재빨리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그 애는 또, 쉬이 낮은 목소리로 말 건네기 어려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었다. 그 애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서, 또 실상 알지도 못 하는 복도 저쪽 끝반의 여자애에게 큰 소리로 불러 할 말은 없으니, 윤진은 결근한 체육선생을 대신해서 합동수업을 진행하는 그 애네 반의 담임, 키 쪼꼬만 늙다리 여자체육의 시야를 벗어난 양팔벌려 4줄 횡대의 끝줄에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뭐, 말 그대로 히히덕. 이었다. 앞 줄에 선 아이가 어제 본 개콘을 얘기하자 옆엣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슬쩍 몸개그를 흉내내기도 해서...좀, 웃었다. 킬킬 거리고. 저만치 앞에서 지도하는 체육꼰대의 하얀 모자 끝만 가끔 들썩거리니 뒷줄 170센티 그룹의 딴 짓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헌데...

 윤진은 다시한번 으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절로 이마가 찡그러졌다. 쿨하고 싱겁기로 이름난 1반의 꺽다리인 윤진이 어쩌다 합동수업하게 된 저 앞줄의 범생이 소심녀 땜에.

'승질 나네!'

맨 뒤에서 킬킬거리는 일단의 꺽다리들을 슬쩍 돌아보더니, 한번 더 돌아보더니 눈 마주치자 얼른 고개 돌리고 교실 들어가는 길에서도 저 앞에서 혼자 척척척척 가 버렸다. 평소엔 흘낏흘깃 잘만 보더니.

그냥 딱 보기에도 조용하고 얌전하고 애들하고 어울려 수다같은 거 안 떨것 같더니, 아닌게 아니라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해서 체육담임이 좋아한다더라구, 그애와 초등 동창이며 죽마고우라는 중간줄 앞에 앉던 애가 말했었다. 그래 그런가, 저의 죽마고우와도 별 알은 체를 안 하더니 시종 조용히 수업에만 열중하고 4열 횡대로 서서 옆엣 아이와 말 한 마디 않고 앞엣줄 아이의 뒤꿈치만 보더니 슬쩍, 운동장 바닥에 떨어져있던 휴지조각이나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킬킬거리며 소음을 더해가던 뒷줄의 무리들을 돌아보다가 윤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표정 하고는!

한순간 윤진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도무지 생각이라곤 없어 강건너 마을이 수해로 초토화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도 건성으로 넘기며 대학가요제의 웨이브에만 신경쓰는 꺽다리 수다꾼들 속에 서 있는 자신을 그애가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니...대체 열 서넛의 중학생 여자애가 뭐 그따위로 사람을...얼마나 한심하게 보던지, 츱!!

윤진이 얼마전 주니어콩쿨 대회에서 1등하고 월요일의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과 트로피를 받으며 돌아나오면서 흘낏 그애의 얼굴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질 노릇이었다. 인어공주가 바다 위로 처음 나들이 나와 뱃전에 선 왕자님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감동과 환희, 동경과 열망에 가득찬 시선이었다. 보통, 동급생이 상을 타거나 하면 부럽다거나 고깝다거나 아님, 맨숭맨숭 딴나라 사람이려니 하고 쳐다보곤 하는데, 윤진은 그애의 시선 땜에 한껏 가슴이 뿌듯이 차 올랐었다. 근데...괜히 운동장에서 킬킬대 가지군...완전 이미지 배렸다.

또 바로 지난 주 가을백일장에서 뭐...윤진은 할 말이 없어 대중가요를 베낀 시를 한 편 내고 말았지만, 그 공부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 한다는 그애는 산문 부문에서 금상을 받아서 단상에 섰었다. 산문이라 시 부문의 입상작처럼 액자에 넣어져 걸리지는 않았지만 학교신문에는 실려서 함 읽어보았다. 시험범위 외에 교과서 정독도 해 본 적 없는 윤진이었지만.

징검다리 놓여있던 개천가를 넘어 산으로 들로 풀따고 꽃따고 잠자리도 잡으러다녔었는데, 그 산을 깍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천을 복개하여 물도, 징검다리도 없어졌다며 슬퍼하는 얘기였다. 내 산아, 어디 있니...하고 끝나는. 뭐, 그애가 쓸 법한 글이었다. 쌩하고 말도 없이 운동장을 가으로 돌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맨날 쉬는 시간마다 독서중이던 그애는, 흠.

윤진도 한 번 써 볼까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오늘처럼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기분 더럽고 마음 착찹한 날에는. 가을 바람 쓸쓸히 휘익 부는 데, 거...곁눈 한 번 없이 지나가던 그 애 땜에, 완전 가을 타는 사춘기다, 이 윤진님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