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진의 노래

꿈없이 자고 일어난 아침.

하늘거리는 창가, 아사의 면커텐이 사랑스럽다. 잔꽃무늬 은사의 수가 테두리에 한줄로 박혀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햇빛은 부드럽게 덩쿨담장을 기듯이 넘어 호두나무색깔의 창틀 위를 물들이고 있다. 눈부신 빛의 폭포처럼 창문 프레임을 녹이고 있는 역광 아래에서 부신 눈을 깜빡이다 진은 안온히 미소지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진은 오랫동안 뒤척이며 궁량해온 난제의 답을 찾은 듯 장담하고 마음에 품었다. 누구나 좋아해서 결혼하고 함께 하지만 때로 서로의 행복을 위해 따로따로가 되기도 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엄마처럼 아빠를 인정했다. 그렇다해도 다 알 수는 없었다. 마음은 늘 허공에 뜬 듯 안정감이 없었고 눈과 귀는 열렸으나 입으로 손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부레없는 물고기처럼 심해에 가라앉아 꿈벅꿈벅 살폈으나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누가 있어 꼬리없는 상어의 깊은 잠을 지켜줄 것인가? 이승을 살듯 꿈속을 살고 잠에서 깨듯 저승을 보는 신내림의 애기무당처럼 제 삶을 내다볼 수 없어 괴로웠다.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른되기가 두렵기만 한걸까.

그애가 큰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좋아. 라고 입술은 말하는 듯 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애의 울림없는 말은 가슴을 적시고 깊고 푸른 너머를 가진 눈은 심장에 불을 붙이는 걸까. 너를 위해 내가 산다. 이것이 사랑이다. 진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붓다처럼 가슴에 사랑을 품었다.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듯 자신을 구제할 것이다, 사랑이란.

 

그애는 보자기를 돌려주러 왔다. 곱게 접어 손바닥 만해진 것을 쪽지편지처럼 매듭지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속에 이야기라도 둘둘 말아온 듯 진을 보고는 한번 눈을 들었다가 내리고 입술모양을 응. 하는 것처럼 가벼이 붙였다.  알지 않느냐는 듯, 나쁘지 않았다는 듯? 부끄러우니 더 길게 잇대지는 말라는 듯. 그애는 패스트푸드점의 메뉴판을 찾는 듯 주위를 휘 둘러보며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저기...뭐라고 써 있는거야? 천연스레 묻는다.

" 치즈버거, 아니 치킨버건가? "

" 배고파? 너는? "

그애가 양상추샐러드와 치킨버거를 먹는 동안 진은 오렌지쥬스를 마셨다. 포장지를 옥수수껍질처럼 벗겨내어 꽃모양으로 만드는 그애의 손놀림을 보고있자니, 넌 왜 안 먹어? 하면서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 폼 잡을라구. "

그애가 웃는다. 그럼, 와인잔을 들어야지. 하면서 눈을 마주친다. 어젯밤 있었던 일 이후 처음이다. 진의 눈길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애는 상긋 엷은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비꼈다.

진은 보자기를 매듭지은 그대로 책상 아래쪽 서랍에 넣었다. 편지와 선물상자 위에 살폿이 올려둔 채 닫았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향을 낼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내가 너의 향취를 잊지 못하니 다시 찾아 안은 녘에는 필히. 하고 진은 마음 속에 음각을 하듯 깊이 새겼다. 너와 결혼할 것이다, 이혜정.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