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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내게 돌아보기가 가능할까?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쓰여진 플랭카드가 다시 생각하니 참 수세적이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건 농성하던 천막이 강제철거당하고 그 와중에서 투쟁주체들이 전부 구속이 되면서 소강되었던, 아니 그리 말하기엔 연투위의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한 노릇이다. 왜 상관없는 사람들이 와서 출투를 하냐고 소리치는 구사대들에 맞서 매일의 선전전을 지켜주었던 그 연대의 정신으로 두 달을 버텨준 사람들에게.

그런데 소강되었던 투쟁을 구치소에서 나와 계속할 때에 내걸었던 그 슬로건은 방향이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체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일뿐.

그렇게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와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외화하는 이상 동력을 부여하거나 전선을 일보전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은, 투쟁의 원주체였던 세력 중 다수가 정리를 결의하고 소수파였던 정말 소수가 우리는 정리할 수 없다고 회의장소였던 대표의 단식투쟁천막을 나와 처음 낸 유인물의 헤드라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었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건....아주 추상적으로, 계급해방을 완성하는 혁명의 시대에서도 그냥 쓰여질 수 있는 자기 규정이다.

반대로 아주 미시적으로, 운동을 완성하지 못하는 개인의 인생에서도 그대로 의미부여되는 자기 규정이다.

끝나진 않았지만, 계속 하고 있지도 않다.

삶을 역사 속에서 위치시킬 수 있을 때, 사는 이유를 그냥은 아니라고 그래서 돈, 권력, 명예로 대표되는 속물적 가치관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의 명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십대, 그렇지 않았으면 시작할 수 없었던 염세주의가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운동을 계속하고 있지 않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존경할 만한 사람을 갖고 있지 않음을 슬퍼하면서 십대를 졸업했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가치있음을, 그래서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함께 찾아야 한다고 그렇게

이십대의 운동을 시작했다.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투쟁과 절멸을 반복하는 순환주의도, 모순이 무르익으면 어쨌든 올 수 밖에 없다며 그날을 기다리는 대기주의로 인생을 끼워넣어도 되는 그런 남의 것은 아니기에.

진보를 향해 나선형의 발전을 이어나가는 수레바퀴 아래서 한 개의 미는 힘으로 자신을 위치지워야 한다고, 그러니 힘써 투쟁해야 한다고, 조직해야 한다고, 대자적 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셀과 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나름 뚜렷한 자기 규정과 지침을 갖고 살아내고 있었다. 이십대에는.

그러나 함께 할 동지가 없었다.

우리들이 비판했던 엔엘도, 피디도, 사노맹도 그리고 여타의 계급주의적 정파들을 기회주의와 사회개량주의로 비판의 날을 세워, 꼬투리를 잡아 흠집내고, 쫓아내고 코드가 안 맞는 치들과 할 말은 없다고 치부하기에 바빴던 우리들의 조직, 그리고 나는 노동자들 속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었다.

그 속에서 정치투쟁의 싹을 도출하여 조직과 전선을 계급적으로 격상시켜내야했던 경제투쟁에서 패배한 것도 노동조합주의와 쁘띠부르조아의 정치적 욕망 때문이라고 자평했지만, 함께 했던 우리들의 노동자동지들은 이길 수 없는 투쟁에 인생을 계속 붙박아둘 수는 없다고 정리했고 단지 차마 그럴 수는 없었던 소수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 해서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 나는 더이상 못 하겠다. 빠질테니 맘대로 해라. "

내가 그리 말하자, 다음 회의에서 다시 얘기하자는 만류는 커녕, 자기고민의 시간도 필요치 않다는 듯 남은 자들은 언니가 그러하면 자신도 그만두겠다 한다. 다만, 순서의 차가 있을뿐 자신들도 그만두는 것이니 비판하지는 않겠다면서.

3년 간의 투쟁, 7년 간의 현장 생활에서 가장 크게 배신감을 느낀 것은 그 때였을 것이다.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어이없게 투쟁을 접었다.

그들은 그리고 나서 할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 있고 함께 할 동지나 친구가 있었을 지도.

나는 없었다.

정리되지 않는 마음, 의미를 부여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내 이십대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아무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 홀홀 떠있는 것처럼 서른 이후를 살아내기는 너무 힘겨웠다.

내가 왜 염세주의를 떨치고 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왔던가?

서른이면 죽어야지 하고 사춘기시절 다 먹지 못한 타이밍을 병원에서 뱉어내며 만지작거리던 카터칼로 동맥을 끊지 못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한 번 살아보고 결정해야지, 설마 생이 그렇게 의미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되뇌이며, 맑스주의가 그 답을 줄 것이라고 가지 않은 길을 가 보면 뭔가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서른 넘어,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득권도 집도 젊음도 다 버리고 소진하였는데 내 옆엔 남은 것이 없었다. 버린 것은 아깝지 않으나 얻은 것이 없다면 이후의 생을 어찌 해야 하나? 사춘기 시절의 염세주의에서 달라진 것이 없는 이제, 서른이면 잔치도 끝났다는데 뭐 얻어먹을 게 있겠나... 그렇다고 죽자니 여전히 용기가 안 난다.

2002년, 나는 패배했어도 그들은 성공할 지도 모른다고, 설령 요구안을 쟁취하지 못 한다 해도 그들의 끈끈함과 용기와 젊음에 기대하며 지원 혹은 연대의 이름으로 지켜보았던 어쩌면 구조조정 국면의 마지막 계투로의 전환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그들의 투쟁이 자진해산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목놓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내 상처 때문에.

더 이상 눈 들어 바라볼 곳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후 바로 이어진 결혼과 육아와 가사노동에 치여 집에서 사십대를 보내고 있다.

오늘도 아이들을 두고 집 밖을 나갈 수 없어 자잘한 행복, 도서관에서의 글쓰기 강좌같은 거, 한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내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생활에 굴레지어 있으면서 그래도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현재를 유지하고 있다.

사고, 생의 의미, 움직이는 역사 속에 자신을 위치짓기? 그런 생각은 2002년에 멈춰진 채 잇대어지지 않는다. 8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기나긴 침체기에 있다고, 운동의 침체기는 한 오십년 쯤 계속 될 수도 있다고 그런 암흑기를 거쳐 1917년도 온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위안하기에 내 현재는 너무 초라하다. 파파 할머니가 되어 혁명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갈 날만 바라보고 살아낸다는 것이 어찌 가당켔는가.....

현재가 정리되지 않으니 과거를 돌아볼 수가 없다. 미래를 세울 수가 없는데 어찌 자신을 긍정할 수가 있겠나...

쇼펜하우어에서 싸르트로로, 거기서 마르크스로 비약했지만 200년 전의 기억으로 현재를 사는 것은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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