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습작 - 너에게 3

산은 너울지고 길은 이어진다, 구비구비.

아직 덜 여운 꽃망울이 소슬한 바람 속에서도 고개 내어민다.

흐뭇한 미소를 스리슬쩍 접어두고 혜정은 저만치 앞서가는 일행과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음, 한 스무 발짝 정도? 땡기면 금세 어깨를 부딪끼겠으나 걸음을 재게 놓아 이 흥을 깨고 싶지 않다.  

- 네게 말 붙이고 답을 들으려니 자연 목청이 커지는 구나.

혜정은 몇 마디를 소리 높여 말하여 보고 가는 귀가 먹었는 지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 하는 귀로 대답을 알아먹지 못 하는 몇 번의 텀을 놓치고 나서는 더 말 나누기를 포기하였다.

- 제가 둘레길을 걷자 하여 이리 나섰건만...

혜정은 서운함이 가슴 안쪽으로 슬며시 자리잡고 있었으나 채 자각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위안하였다.

- 네가 곁에 없어도 이 산이 내게 말을 거는 구나.

들과 차고 마른 흙이 발바닥 아래에서 반갑다 하고 있으니.

하늘과 처연히 낮게 내려앉은 구름들이 점점 잿빛을 띠어가니.

- 내 마음을 닮았구나. 아니, 내 마음을 담았구나.

혜정은 초봄의 물색으로는 너무나 채도가 낮은 암벽들의 솟을문을 바라보며  북한산 자락을 둘레둘레 따라 걸었다.

- 저 이가 내 걸음 늦은 것을 알던가 모르던가 아예 생각조차 놓았는가.

원망의 념이 꾸물거리나 동하지는 않는다. 감정을 만드는 것은 피곤한 일이려니.

미리 걱정했던 것보다 코스는 짧았고 한 구간을 다 가지 않고 중간치기로 내려오자 하는 대로 따라보니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들이 텃밭 농사를 했던 곳이 아닌가.

" 여기서 분양을 받아 1년 농사를 지어 보게. "

익숙한 표정과 이미 어깨 디밀어 고랑이라도 패어볼 품새인 쟝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다.

금방 다시 고개 돌리고 저만치 밭 두덕과 두덕 사이에 앉혀진 작은 오막집을 살피는 쟝이 중얼거린다.

" 작년에 비해 밭을 넓혔네.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값은 안 올렸나 이거..."

팻말 꽂힌 웃자락에서 한길 가의 공터까지 텃밭의 경계를 물려놓은 것을 보면서 빈 자리가 별로 없다. 하는 쟝.

서둘러 오막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간에 손님을 세워 둔 채 장부를 뒤적이는 여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고는 돌아나온다. 한 손에 팻말 하나와 매직을 들고.

" 자리 좀 찾아 봐. 이 쪽으로 들어 와서. "

앞장 서서 텃밭의 큰 울타리를 돌아 문으로 터 놓은 곳으로 찾아들어가는 쟝의 뒤를 시원스럽게는 아니나 짜증내지도 않고 곧장 따라들어갔다, 혜정은.

- 음...내겐 힘든 일인데.

혜정은 텃밭 농사가 아니라 이 비탈지고 울퉁불퉁한 밭둑길을 걷는 것에 대해 그리 생각하며 그래도 테 안내고 어정어정 따라들어갔다. 길고 좁다란 밭두덕을 지나 굳이 언덕배기 아래까지 쑤욱 들어가는 쟝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 나는 문외한이나 저이는 베테랑이니 무슨 이유가...

" 여기 어때? "

쟝이 가리키는 곳은 언덕배기 바로 앞의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텃밭을 만든 이 곳의 지형 자체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기는 하였으나...

" 이 앞에 평상도 넓게 있으니 쉬기도 좋지 않아? "

그러고 보니 텃밭이 끝나는 언덕배기 밑으로 채 한 평의 경계를 지우지 못 한 세모꼴의 땅이 남아있었고 거기에 외부수도 하나와 함께 평상 두개가 나란히 앉혀져 있었다.

" 어, 그래. 그러네. "

혜정은 비탈진 곳이라도 햇볕이 잘 들어서 안쪽까지 들어왔냐고 묻다가 말고 금방 희색을 보였다. 보아하니 새로 텃밭을 넓히느라 주인장이 경계만 지웠을 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비죽비죽 내밀어진 밭뙈기들에 당장 가래질부터 해야할 판이나, 혜정은 손에 흙 묻힐 생각은 전혀 해 보지도 않은 채, 평상에 앉아 언덕의 그늘이 있는 동안 시원한 참외를 깍아먹을 생각을 먼저 떠올리며 반색을 하였다.

" 아니, 햇볕은 뭐 저 아래 쪽도 충분히 들어오는데. 이 밭둑길 걸어들어오기도  만만챦네. 저 한길 가까운 쪽으로 해야 할까? "

쟝의 농사인데, 제가 이리 두던 저리 두던 내가 뭔 상관이냐. 하는 맘이 들었으나 친구된 도리로 함께 고민을 해 주었다, 혜정은.

" 아, 그래? 글쎄, 일하다가 평상에 앉아 쉬기도 하고 그럼 좋을 것 같은데. "

" 음, 그렇긴 한데, 쉬는 거야 뭐 이쪽에서 일하다가 저쪽으로 모이자 해서 가 쉬면 되는 거고. 그 정도  쉬어가며 할 것도 없는데, 길에서 쉬이 들어와 얼른 풀 좀 뽑고 하다가 금방 내려가곤 할 것 같아서. "

쟝은 다시 길을 돌아 내려가 아랫쪽 밭을 살피더니 팻말을 꽂아 넣고 아이들 이름을 적어 둔다.

" 주인한테 정했다고 해야지. 또 다른 사람들이 자꾸 팻말 꽂으려 든다구 얼른 찍어두라 하더라구. "

결국 농사지을 땅을 결정하면서는 혜정에게 의견은 구하지도, 다 듣지도 않고 쟝은 또 앞장 서서 달려 나갔다.

- 그래, 저의 아이들과 함께 지을 텃밭 농사이니.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혜정에게도 한 평 임차하여 애들 데리고 와서 텃밭 가꾸기를 하라고 재차 권하는 쟝을 바라보면서 혜정은 글쎄. 하면서 자꾸 말끝을 흐렸다.

" 자신 없어. 집에서 화초 하나도 못 가꾸는데, 언제 여기까지 애들 끌고 와서 농사를 짓겠어. 내가..."

" 내가 왔을 때 같이 물도 주고 다 할께. 이런 게 있어야 자꾸 오게 된다니까. "

쟝은 얼마 전부터 자꾸 말하고 있다.

- 이 동네로 다시 돌아 와. 지척에 있어야 오가며 들여다 볼게 아니야. 너 하나 보러 매일 택시 타고 오락가락 할 수도, 할 시간도 없다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