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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그녀에겐 너무 힘들다.
마음 약한 그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어 제 몸 힘든 걸 무릅쓰나니.
" 안 가져왔다고 미주가 뭐라 할텐데. "
큰 아이, 제가 잊고 안 가져왔으니 어찌 하자 말은 못 하고 얼굴이 굳었다. 8시 40분인데.
그녀, 머리를 굴린다.
집에 돌아가는 건 비효율적이고. 9시부터 수업 시작이지만 학교는 20분 일찍 오도록 하고 있다. 10분 독서운동을 하고 있으니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 아이들 가운데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 아침 시간에 먼저 얘기 나누고 있는 사이에 들어가기는 어색할 수 있으니 늦지 않게 오는게 좋죠.
담임은 학부모 면담시간에 큰 아이가 친구들을 잘 사귈지를 걱정하는 그녀에게 말했었다. 매일 40분 턱걸이하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맨날 꼴찌로 들어가도 괜찮아? 하고 물었더니 그럴 수도 있지~하고 웃는 딸을 보니 뭐 그럭저럭.
" 문방구 가서 사 가지고 가자. "
하고 말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그녀였다. 수업 준비물도 아니고, 쉬는 시간에만 꺼내놓을 수 있는 장난감을 엄마가, 그것도 어제 사 주었는 데 안 챙겨 온 것을 그녀는 다시 사 가지고 가라 한다. 친구들과 약속을 했으니. 친구들 앞에서 그걸 꺼내 보이며 자신에게 스티커를 준 민서나 노승현이나 강민수에게 나눠주고 싶어하는 딸의 마음을 알기에. 게다가 미주는 딸아이에게서 받은 장난감을 노승현에게 뺏겼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노므 자식, 저도 딸아이에게서 같은 걸 받아놓고서. 혼자 많이 가지고 싶어한다. 근데 왜 미주는 딸아이에게 그러니까 또 다시 달라고 하는 거람...
그녀는 그런 식이다.
아이가 십분의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스티커나 유행하고 있는 장난감을 서로 나누며 웃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렇게 아이들과 친교하는데 무리가 없기를 소망한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런 매개들이 없어서 무리 지은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것을. 테두리 밖에 혼자 있기 뻘쭘하여 책상을 떠나지 않고 책을 읽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섞여들지 못 한 채 이후의 학창시절에 늘 혼자 있었던 것을.
딸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은 2개 들이 500원 짜리이고 며칠 전부터 아이는 제 주머니 안의 500원짜리 동전을 소중히 간직했었다. 엄마가 1000원 짜리를 들어보였지만 그건 필요없다 하는 아이.
" 1000원짜리로 그 장난감 두 개 살 수 있어. "
하고 말하는 엄마를 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
그녀는 아이에게 그 장난감을 사 주고 싶었고, 아침나절 아이들에게 평소보다 많은 것을 채근하느라 전날 저녁 아이가 제 장난감 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그 장난감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은 것은 결국 제 탓이라 생각하였다. 하교 후에 아이들을 삼촌 집에 맡길지 할아버지 집에 맡길지를 고민하며 아이들에게 삼촌집에 가져갈 장난감들을 미리 다른 가방에 챙겨놓으라고 수선을 떨었던 것이 미안하다. 동생과 함께 장난감 가방을 따로 챙기느라 바빴던 큰 아이는 저의 학교가방도 직접 챙기라는 엄마 말씀을 따르느라 더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 집에 어디다 뒀는데? "
" 으응, 내 하트장 있쟎아. 그 위에. "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하트장 위에 손수건을 깔고 가지런히 모두어져 있다. 작은 병 안의 색색가지 구슬들.
그녀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다시 사 준 것을 기꺼워한다. 교실에는 8시 50분쯤에 입실했겠지.
교문을 나오는데 본 듯한 남자아이가 같은 장난감을 꺼내 보이며 지나간다.
" 어...너, 3반이지? "
" 네. "
" 너, 이름이 뭐야? "
" 박 현욱이요. "
" 너두 그 장난감 샀어? "
" 네. 아줌마가 사는 것도 봤어요. "
" 하하하...늦었어. 빨리 뛰어가. "
남자아이는 거의 9시 다 되어 입실했을 것이다.
아이들.
그녀의 하는 양을 보더니 술 먹고 자고 가던 친구 왈
" 아주 시녀구만, 시녀. 왜 이러구 살아? "
혜정은 내가 뭘. 하면서도 좀 쑥스러운 듯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었다.
" 애들이 왜 이러냐구, 이건 다 네가 잘 못 키운거야. "
그런가? 그런가 보다. 하는 그녀.
- 내가 다. 는 아니고 반만. 아니야? 아빠에게도 반분의 책임이 있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결혼 십년차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여자의 본분을 깨닫고 있었다.
-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으니 살림과 육아를 내가 다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애. 기왕 하는 것이니 잘 해야 하고.
뭐라 더 따지고 싶은 마음이 울컥 울컥 들었지만 논구할 시간도, 기력도,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또한 떠올랐다.
아침이면 등교하는 딸아이를 위해 밥상을 차려내었고 하는 김에 출근하는 남편의 수저도 같이 올렸으나 그러면서 청양고추 썰어넣고 따로 간 맞춘 찌개 하나를 더하지 않을 수 없다며 결국 이른 아침의 노동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남편은 채 불리지 못 한 현미밥을 두번 째로 먹으면서 자기에게는 흰밥을 달라 한다. 감히.
딸 아이 밥상에 마지못한 겸상으로 얻어먹는 것을 한 달 이상 하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하고 웃는 그녀.
" 발아현미라서 많이 안 불려도 되는 줄 알았더니, 흰쌀 푸기 전에 미리 물에 담가놓아야 겠더라구. "
" 바라현미라구? "
그녀, 너는 무얼 먹고 사는가고 관심을 보일 듯한 눈길로 쳐다보며 웃는다.
" 발. 아. 싹을 티운 현미라구. 비타민 비이투가 많다고 현미나 오분도미 같은 거 많이 먹쟎아. 식감이 거칠어서 싹을 조금 틔우면 부드럽고 소화도 잘 된다고 해서, 발아시켜서 팔아. 직접 집에서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던데. "
그녀는 냉장보관이긴 한데, 압축포장도 아닌 것이 유기농제품하고 좀 틀리네. 하면서 마트세일에서 샀더니 음...하면서 불만스럽다 한다. 역시 싼것은...하면서.
반찬 하나 하기도 힘들어하던 그녀가 콩나물이며 시금치며 나중에는 부추까지 정갈이 다듬어내며 버리는 시간을 별로 아까워하지 않는다. 시간 반을 들여 겨우 한 접시의 나물무침을 만들어 내놓고는 큰 아이가 잘 먹어서. 하면서 또 미소를 지어 보인다.
"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엄마 최고~ 한다니까. 어디서 그런 제스츄어를 배워와서는. "
산을 보고 온 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녀와 그녀의 오랜 친우가 다투었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랬을까.
그다지 추측하기 어렵지는 않으나 상황이야 어찌됐든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듯.
" 내가 왜 ! "
그녀는 모질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안다는 것을 쟝은 처음 알았다. 정말로.
바닥 깊이 감정이 깔려 있는. 불만? 비난? 원망?
그런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그걸 풀어내기보다 이미 덮었다는 감이 확연한, 이미 거절과 거부로 의사화된... 결론?
" 한번 하자고. "
쟝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다시 한번 확인사살이 필요하다는 듯, 천천히 또박또박.
" 싫어. "
귀로 듣기 전에 입모양만으로도 벌써 다 들은 양 기다렸다는 듯, 바로 치고 들어오는 대답.
" ... ... "
그녀와 싸워야 할까? 쟝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는 섭섭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는 게지. 알지만.
" 오랜 만에 만나서 왜 우리가. "
" 왜 이런 얘기 밖에 할 말이 없어? "
뭔 소리냐...아침부터 점심 지나 오후 세시가 넘어가는 지금까지 계속...
" 난 둘이서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구. 따로...낮에 말고, 밤에 술 마시면서. "
그래...밤에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넌 나올 수 있다 했는데, 내가 그럴 수 없었지. 매일 매일을 내버려둔 아이들을 또 밤에까지 방치할 수 가 없어서. 쟝은 변명을 했다, 속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표정에는 판정패를 인정한다는 듯 비애가 서려있다.
" 나도 그러고 싶지만. "
" 네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이해하고 또 인정해. "
쟝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여기서 한마디 더 하면, 정말 끝장이다. 쟝은 재빨리 판단했다.
그녀가 마주 바라보고 있지 않으므로 쟝은 태연을 가장하고 몸을 돌렸다. 잠시 텀을 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 어디 두었지. 쇼핑백 안에 담아 두었는데. "
굳이 집까지 데리고 들어온 표면상의 이유였던 아이들의 작아진 신발과 옷가지, 놀잇감들을 챙기는, 그녀가 혼자 따라 들어온 본래의 이유였던 둘째에게 물려줄 아이용품들을 가지고 가는 일쪽으로 쟝은 주의를 전환했다.
" 여기 있다. 들고 갈 수 있겠어? "
" 무거워? "
" 무겁지는 않지만 좀 부피가. "
" 괜찮네, 뭐. "
혜정은 별로 크지도 않은 쇼핑백을 가지고 왜 그러나. 하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쟝의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얼굴과 마주치자 미끄러지듯 시선을 피했다.
안면근육이 굳어져있다는 것이 쟝,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 그럼 갈께. 오늘 즐거웠어. "
" 그래. 잘 가. "
그녀는 큰 길을 향해 걸어가며 반쯤 돌아보며 또 인사했다.
" 다음에도 이런 스케쥴로. 둘레길 다음 코스, 응? "
" 응, 그래. "
안녕. 하며 손을 들어보이는 그녀. 마주 손을 들고 인사할 수 밖에 없었다. 쟝은 이게 뭐람. 하고 혀를 찼다.
산은 너울지고 길은 이어진다, 구비구비.
아직 덜 여운 꽃망울이 소슬한 바람 속에서도 고개 내어민다.
흐뭇한 미소를 스리슬쩍 접어두고 혜정은 저만치 앞서가는 일행과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음, 한 스무 발짝 정도? 땡기면 금세 어깨를 부딪끼겠으나 걸음을 재게 놓아 이 흥을 깨고 싶지 않다.
- 네게 말 붙이고 답을 들으려니 자연 목청이 커지는 구나.
혜정은 몇 마디를 소리 높여 말하여 보고 가는 귀가 먹었는 지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 하는 귀로 대답을 알아먹지 못 하는 몇 번의 텀을 놓치고 나서는 더 말 나누기를 포기하였다.
- 제가 둘레길을 걷자 하여 이리 나섰건만...
혜정은 서운함이 가슴 안쪽으로 슬며시 자리잡고 있었으나 채 자각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위안하였다.
- 네가 곁에 없어도 이 산이 내게 말을 거는 구나.
들과 차고 마른 흙이 발바닥 아래에서 반갑다 하고 있으니.
하늘과 처연히 낮게 내려앉은 구름들이 점점 잿빛을 띠어가니.
- 내 마음을 닮았구나. 아니, 내 마음을 담았구나.
혜정은 초봄의 물색으로는 너무나 채도가 낮은 암벽들의 솟을문을 바라보며 북한산 자락을 둘레둘레 따라 걸었다.
- 저 이가 내 걸음 늦은 것을 알던가 모르던가 아예 생각조차 놓았는가.
원망의 념이 꾸물거리나 동하지는 않는다. 감정을 만드는 것은 피곤한 일이려니.
미리 걱정했던 것보다 코스는 짧았고 한 구간을 다 가지 않고 중간치기로 내려오자 하는 대로 따라보니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들이 텃밭 농사를 했던 곳이 아닌가.
" 여기서 분양을 받아 1년 농사를 지어 보게. "
익숙한 표정과 이미 어깨 디밀어 고랑이라도 패어볼 품새인 쟝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다.
금방 다시 고개 돌리고 저만치 밭 두덕과 두덕 사이에 앉혀진 작은 오막집을 살피는 쟝이 중얼거린다.
" 작년에 비해 밭을 넓혔네.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값은 안 올렸나 이거..."
팻말 꽂힌 웃자락에서 한길 가의 공터까지 텃밭의 경계를 물려놓은 것을 보면서 빈 자리가 별로 없다. 하는 쟝.
서둘러 오막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간에 손님을 세워 둔 채 장부를 뒤적이는 여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고는 돌아나온다. 한 손에 팻말 하나와 매직을 들고.
" 자리 좀 찾아 봐. 이 쪽으로 들어 와서. "
앞장 서서 텃밭의 큰 울타리를 돌아 문으로 터 놓은 곳으로 찾아들어가는 쟝의 뒤를 시원스럽게는 아니나 짜증내지도 않고 곧장 따라들어갔다, 혜정은.
- 음...내겐 힘든 일인데.
혜정은 텃밭 농사가 아니라 이 비탈지고 울퉁불퉁한 밭둑길을 걷는 것에 대해 그리 생각하며 그래도 테 안내고 어정어정 따라들어갔다. 길고 좁다란 밭두덕을 지나 굳이 언덕배기 아래까지 쑤욱 들어가는 쟝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 나는 문외한이나 저이는 베테랑이니 무슨 이유가...
" 여기 어때? "
쟝이 가리키는 곳은 언덕배기 바로 앞의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텃밭을 만든 이 곳의 지형 자체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기는 하였으나...
" 이 앞에 평상도 넓게 있으니 쉬기도 좋지 않아? "
그러고 보니 텃밭이 끝나는 언덕배기 밑으로 채 한 평의 경계를 지우지 못 한 세모꼴의 땅이 남아있었고 거기에 외부수도 하나와 함께 평상 두개가 나란히 앉혀져 있었다.
" 어, 그래. 그러네. "
혜정은 비탈진 곳이라도 햇볕이 잘 들어서 안쪽까지 들어왔냐고 묻다가 말고 금방 희색을 보였다. 보아하니 새로 텃밭을 넓히느라 주인장이 경계만 지웠을 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비죽비죽 내밀어진 밭뙈기들에 당장 가래질부터 해야할 판이나, 혜정은 손에 흙 묻힐 생각은 전혀 해 보지도 않은 채, 평상에 앉아 언덕의 그늘이 있는 동안 시원한 참외를 깍아먹을 생각을 먼저 떠올리며 반색을 하였다.
" 아니, 햇볕은 뭐 저 아래 쪽도 충분히 들어오는데. 이 밭둑길 걸어들어오기도 만만챦네. 저 한길 가까운 쪽으로 해야 할까? "
쟝의 농사인데, 제가 이리 두던 저리 두던 내가 뭔 상관이냐. 하는 맘이 들었으나 친구된 도리로 함께 고민을 해 주었다, 혜정은.
" 아, 그래? 글쎄, 일하다가 평상에 앉아 쉬기도 하고 그럼 좋을 것 같은데. "
" 음, 그렇긴 한데, 쉬는 거야 뭐 이쪽에서 일하다가 저쪽으로 모이자 해서 가 쉬면 되는 거고. 그 정도 쉬어가며 할 것도 없는데, 길에서 쉬이 들어와 얼른 풀 좀 뽑고 하다가 금방 내려가곤 할 것 같아서. "
쟝은 다시 길을 돌아 내려가 아랫쪽 밭을 살피더니 팻말을 꽂아 넣고 아이들 이름을 적어 둔다.
" 주인한테 정했다고 해야지. 또 다른 사람들이 자꾸 팻말 꽂으려 든다구 얼른 찍어두라 하더라구. "
결국 농사지을 땅을 결정하면서는 혜정에게 의견은 구하지도, 다 듣지도 않고 쟝은 또 앞장 서서 달려 나갔다.
- 그래, 저의 아이들과 함께 지을 텃밭 농사이니.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혜정에게도 한 평 임차하여 애들 데리고 와서 텃밭 가꾸기를 하라고 재차 권하는 쟝을 바라보면서 혜정은 글쎄. 하면서 자꾸 말끝을 흐렸다.
" 자신 없어. 집에서 화초 하나도 못 가꾸는데, 언제 여기까지 애들 끌고 와서 농사를 짓겠어. 내가..."
" 내가 왔을 때 같이 물도 주고 다 할께. 이런 게 있어야 자꾸 오게 된다니까. "
쟝은 얼마 전부터 자꾸 말하고 있다.
- 이 동네로 다시 돌아 와. 지척에 있어야 오가며 들여다 볼게 아니야. 너 하나 보러 매일 택시 타고 오락가락 할 수도, 할 시간도 없다구.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말한다.
- 네가 하지 못 한다는 것을 알아.
옆얼굴을 보인 채, 괜찮아. 하고 말하는 듯 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 쟝, 네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 싱글맘이고 연계가 많은 친족들이 주변에 있고 네가 할 수 만 있다면 돌봐드리고 싶은 홀어머니들도 있지. 네가 생계지책이자 의미를 갖고 있는 낮의 직업도 있는데, 주변을 챙기고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애착할 만한 여가를 내기는 어렵고 또 가능하지도 않지.
" 오히려 내가 그애를 챙겨주어야 해. "
그녀가 그렇게 지칭하는 것을 보자, 이제 거의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진의 머리를 스쳐갔다.
" 근 열흘을 아이들을 챙길 시간이 없어 '방치'하고 있다고 말하기에 내가 봐줄까? 했지만... "
그녀는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한 번 말해봤다고. 역시나 지척에 사는 친지들이 있으니. 하는 대답을 들었다고.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가족들을 질투의 감정으로 표상하게 된 것은.
"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왕래하고 싶었지만 역시 같은 동네에 사는 친족들이 있어서. "
한때는 같은 건물의 아래위층으로 살면 누구보다 더 자주 내왕하며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 나아가 한 집에서 살고 싶어하기까지 했었지. 혜정, 너는.
진은 그녀가 마저 하지 않은 말을 혼자 들은 듯이 생각을 이어갔다.
- 네가 그런 순진한 꿈을 꿀 때에 쟝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 그애는 자신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다 잡아주느라고, 특별히 나한테만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 왜 그러겠어. 내가 그에게 무어라고. "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그가 자신을 만나 좋았던 것이 무엇이었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지만.
" 게다가 그애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야. 그 자신도 말했지만. 타인에게 자기를 투영하거나 혹은 의존하지 않으니까. 상대방을 인정하고 적절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선린우호적으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지. "
" 적절하다는 표현은 모호한데? "
진은 마치 상담자라도 되는 양, 내담자에게 생각을 명료화시켜보라고 주문했다.
" 예를들면, 현성은 짤렸어. "
" 뭐라고? "
" 현성이 지지부진하게 하소연만 계속하면서 제 이기심을 숨기는 것을 눈치챘을꺼야. 그애는 현성에게 자신으로서는 해 줄 말이 없다고 말했대. 그래서 현성은 더 이상 그애에게 상담하는 걸 포기했고. "
혜정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꾸밈없이. 솔직하게.
" 현성은 어째서 그 애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고 객관적인 조언을 잘 해 주는가고 내게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건 그애의 탓이 아니라 현성이 잘못된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뭐...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거지. 좀 비겁하기도 하고, 부르조아적 이데올로기에...속물적이라서. "
그녀는 하하. 하고 웃는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경멸한다는 표현을 할 때에는 늘 그렇듯이.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 적어도, 물론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애에게 있어 현성보다 내가 더 호감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지. 뭐..."
금방 다시 풀이 죽는 그녀.
" 주변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더 그런 건 아니지만. "
진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 특별해. 특별히 더 자주 연락하고 다른 친구들을 거의 못 보고 있어도 너만을 달을 넘기지 않고 만나려고 애쓰쟎아. "
위로가 되진 않았을 것 같다.
" 달을 넘기지 않고. "
그래...하고 그녀는 지난 몇 개월 간의 줄다리기를 끝내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은 그저 줄을 놓아 버린 것 뿐이었으며, 그 결과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히 했다.
" 나는 그애의 친족들보다 더 가깝지 않아. 물적 거리로나, 감정적 유대로나, 때론 관념적 의식으로도. "
그녀는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더 구부린다는 듯이 덧붙였다.
" 그애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어쩌면..."
- 천막에서의 나는 그애가 투쟁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틈틈이 가족들과 주변을 챙기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정세를 분석하고 판단할 수 없어 고뇌하는 내 앞에서 다른 이야기, 어머니의 생신이라던가 누구가 어때서 무슨 일이 있어서...뭐라고 말하고 있는 그애의 얼굴을 보면서 그래서, 그래서 넌 안되겠다는 거구나. 넌 할 말이 없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애에게 그래, 그렇구나. 하고 대답은 해 주었지만 그건 다 너의 사생활이다. 왜 너는 이 투쟁의 와중에서 동지인 내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거니. 하는 속말을 했었다.
" 어쩌면 처음 그애에게 호감을 느꼈던 투쟁의 시기에서부터 나는 그애의 가족들을 질투했었는 지 모르지만. 그 때부터 항상 그애가 맑시스트가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작업을 했지만 그애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 마치, 언어를 배우는 아이들의 시기가 있는 것처럼, 이십대가 지난 사람들에겐 의식화가 안되는 것 같아. "
물론 시대의 영향도 있지.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고 뭐 이 나이가 되어선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표정으로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단언했다.
" 그애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아. "
그애가 곁을 주지 않고 자주 만나 함께 하지 않고 일상의 동행이 되지 못 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있으랴. 진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 그애가 애착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내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은 할 필요 없어.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 하고, 받지 못 하기 때문에 나 또한 주지 않겠다 해서 뭐가 잘못이야. 그애에게나, 남편에게나. "
사랑받는다는 느낌없이 상대를 계속 생각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건 그저 생각의 테 안에 있을 뿐, 교환을 통해 실재하는 사랑이 될 수 없으므로.
- 나는 슬프고 그리하여 불행하다. 하는 생각을 갖고는 일상이 너무 힘들다. 하는 그녀.
" 괜찮아. 그애는 바쁘고, 바쁜 와중에 내게 전화를 하고 언제쯤 만나자 하고 기약을 해 주니. 내가 그만큼의 의미로 그애에게 있으니. 남편이 그렇듯, 그애가 내 일상의 동행이 되어 늘 재미진 말만 곁에서 해 주겠다 하지 않는다 해서 버려버릴 순 없쟎아. "
- 그정도의 거리와 관계를 두고 그네들과 소통하겠다. 하는 그녀.
" 너를 사랑한다고 할꺼야. 그...는. 말로나...행동으로나. "
그녀는 한 번 치어다 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린다. 무심하고도 냉정한 낯빛으로.
" 나는 사랑하지 않아. 그애도, 남편도. "
- 내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 나면 하고 마는. 여유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나를 내처두고 내게 보답받기를 바랬더냐. 내가 서운타. 하고 몇 수 십번을 호소했건만 응분의 행위를 보여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걸 덮고 여전히 연인으로, 아내로 있을 줄 알았더냐. 네가 그리 자신만만하더냐. 내가 그리 얕보이더냐...
" 내가 다시 그애와 자는 일은 없을꺼야. "
남편에게 그랬듯, 그녀는 정서가 없으므로 몸을 함께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쟝은 이런 그녀의 변화를 알까. 알아챘을까? 아마도.
맑게 웃고 있는 혜정을 보며 쟝은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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