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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
현지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돼지에게 걸어준 진주 목걸이?'
그에게 나는 그 '정도'의 존재일 것 같다. 그는 먹을 수도 없는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 한다. 더구나 목걸이라니, 자칫 비아냥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 당신이 해고될 줄 알고 내가 미리 취업했어. "
예년처럼 4박5일의 시골행을 다녀온 남편에게 자못 자랑스럽게 뇌까렸다. 결혼 7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가는 시골행에서 빠진 구정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삿짐을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실제로 혼자 짐정리를 하다보니 힘들기가 여간 아니었다. 너무 많은 옷가지들, 그 절반은 남편의 오래된 겨울코트들이었고 나머지는 시골형님이 보내준 아이들옷이었다. 아직 유치원을 다니는 딸들에겐 너무 크고 종류도 다양한, 친정엄마의 말에 의하면 쓰레기같은 헌옷들이었지만 버릴 순 없었다. 현지는 향후 오년내엔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형님네 4남매가 돌려입다 물린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세탁,건조,정리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커다란 리빙박스를 열 개나 구입하여 크기별, 계절별로 차곡차곡 넣어 새로 이사한 집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힘겨운 적재를 마쳤다. 그리고 남은 거대한 책더미. '더미'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열 개의 이사박스와 또 바구니 몇 개에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는 잡지와 서류뭉치들. 인근의 이삿짐센터에선 포장이사가 아니니 정리해 줄 순 없지만 박스와 이사용바구니는 나중에 따로 가지러 오겠다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고마운 사람들, 남편보다 현지에게 힘이 되는 써비스맨들이었다.
방 세 개를 합친 크기는 됨직한 넓은 거실에 가득 찬 박스와 박스 사이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현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새로 두시. 밤은 고즈넉하고 겨울 한기와 먼지가 함께 감도는 집 안엔 오직 현지와 널러진 짐더미 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는게 힘들지 않았다. 아니 힘든걸 몰랐던 것 같다. 몸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던 아직, 삼십대였다.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남편은 시골에 있는 연휴 중에 해고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재계약이었고 가끔 조건이 안 맞으면 다른 지점으로 옮겨가느라 보름씩 쉬게 되기도 했다. 남편은 비정규직이었다. 현지는 그가 좀더 나은 직장을 혹은 다른 직업을 갖기를 원하면서 맞벌이를 시작했다. 커가는 두 아이들을 위해 적어도 방 두 개는 있는 거실 넓은 집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현지는 벌써 오년 이상 육아를 위해 집에 들어앉아있는 생활을 더 유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학습지 교사생활은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자신의 빈한한 스펙에 비추어 가능한 몇 안 되는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남편은 처음엔 맘대로 하라 하였고 나중엔 그거, 힘들다던데...하면서 걱정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직업을 가진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은 그에게 집안일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왜 이렇게 집이 계속 어지러운 거지? 우린 쓸데없는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애. 그는 치운다고 치웠으며 매번 청소기를 들고 움직였지만 한번도 허리 굽혀 방을 닦지는 않았다. 현지는 바닥에 널려진 옷가지며 놀잇감이며 책들을 주워 제 자리를 찾아 한 시간에 수십번도 더 이 방 저 방, 이곳 저곳을 오락가락했다. 64제곱미터의 주택 내부에서 한 사람이 하룻동안에 걸을 수 있는 보행거리는 얼마큼일까? 1킬로미터? 2킬로미터? 현지는 발바닥이 뜨겁다. 이미 자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학습지교사로서 현지는 자신이 맡은 2 개 동의 구역을 넘어 다른 동료들이 선호하지 않는 산아랫동네의 몇 집까지 떠안게 되어 낮에도 십여키로미터의 도보행군을 하고 있었다. 방문한 집에서 학습지를 사이에 두고 아이와 마주 앉을 때가 바로 쉬는 시간이었다. 실제론 그게 업무의 주요한 부분이었는데도 말이다. 현지는 숨을 고르며 간절히 물 한 잔 줬으면 하고 아이엄마가 있는 방문 뒤나 부엌 쪽을 흘끔거렸다.
현지는 흘끔거렸다. 남편이 청소기를 끌고 지나간 씽크대 앞에는 과일 껍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있던 놀잇감들은 벽 쪽으로 밀어붙여져 있었고 널려있던 옷가지들은 빨래감들과 섞여 장롱 안에 처박여져 있었다. 그가 하는 집안일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현지는 건조대에 널어진 바지며 셔츠들이 구겨진 그대로 어깨선도 비뚤어진 채 말라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걸 다시 잘 펴서 각잡아 걸어야 하는데...다 마른 후엔 반듯하게 펴기가 더 힘들었다. 다림질을 하거나 아예 다시 세탁기에 넣는게 빠른 길이었다. 하얗게 더께 입은 검정색 옷가지들을 볼 때마다 현지는 화가 치받았다. 남편이 손 대는 모든 것이 제게 의미가 없었다. 상을 치운 것도 자기라고 주장하나 현지는 밥상 위에 말라붙은 김칫국물이며 개수대 안에서 기름기를 둥둥 띄운 채 그릇들을 섞어 담가놓은 것이며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진 접시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대체 뭘 했다는 거야? 하고 울화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나중에 우리가 살아온 십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한 해가 바로 당신이 맞벌이했을 때였어. 하고 말했다. 하지만 현지는 하고 싶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대출을 잇바이 끼고 마련한 집을 지키고 싶었다. 햇살 드는 넓은 방과 바람이 들고 나는 베란다, 현지가 굳이 요구해서 설치한 에코카라트의 아트월이 있는 거실, 시장도 가까웠지만 특히 아이들을 위해 학교 정문 앞에 새로 지은 이 집을 사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 하지만 남편은 지하철역이 멀어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집에 있는 식구들을 위해 출퇴근하는 자신이 희생한 것이라고 은근 강조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희생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맞벌이하는 동안 현지는 집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어린이집으로 늘 동동거리고 다녔으며 늦은 저녁의 바쁜 끼니를 챙겨내느라 힘에 부쳤다.
일 년 전의 메일을 확인하면서 현지는 전업주부로 돌아온 자신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 한 채 새집은 전세로 내주고 더 싼 집으로 다시 옮겼다. 남편은 좁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마땅해. 우리같은 처지에, 당신이 기백만원씩 버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다녀봤자 남는 것도 없쟎아. 하고 말했다. 현지는 그건...당신이 가사분담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야...그래서 매일 저녁을 사 먹으러 다니니깐...하고 중얼거렸지만 더이상 싸우기도 싫었다.
다시 이사한 좁은 집에는 그 많은 짐들을 둘 곳이 없었다. 현지는 아직 대체할 선생을 구하지 못 해 산동네의 집들을 미처 다 인계하지 못 한 상태였다. 이사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 데도 창고에는 정리되지 못 한 옷가지들과 그리고 책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남편이 말했다. 저거 다 버려도 되는 거 아냐? 내가 봤는데 당신, 그 책들 읽지도 않쟎아. 그냥 보관용이면 이제 그만 좀 치우지?
현지는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말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라 말한 사람에 대해서였다. 왜 우리는 결혼한 후 8년 동안 친해지지 못 했을까? 하긴 연애기간이 8년이었어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된다니까...현지는 남편과 성향이 맞지 않다는 것을 재차 재차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다. 창고의 쌓인 짐들 중 그가 우리 집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별로 없었던 듯 하다. 모든 걸 고물상으로 넘겼다고 했다. 나중에 현지는 그 속에 이태전에 짐을 쌌던 그대로, 십대 이후 계속 써 왔던 일기장들의 박스가 섞여 있었다는게 생각났다. 이십대의 장서들과 함께 노트들과 이런저런 페이퍼들의 뭉치가 모두 쓰레기로 간주되어 버려졌다. 그건 현지가 살아낸 삼십대까지의 기록들이었다. 현지 자신도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 하고 실제의 관계들은 다 연이 끊겼으나 그럼에도 늘 집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과거의 유물들이었다. 하지만 현지는 비난할 수 없었다. 읽지도 않는 책들보다 그 시절에 했던 회의들, 메모들, 편지들...그것들의 일부는 남편이 파업투쟁을 하던 시기의 자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둘다 그것들을 짐처럼 여겼고 나아가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는 버렸고 현지는 침묵했다.
" 어떻게 그 책들을 다 버릴 수가 있어? 그게 얼마나 비싼 책들인데, 연구소같은데 기증이라도 할 껄. "
" 지금 누가 그딴 걸 본다구? 사회과학 출판사나 서점들도 다 망하거나 아니면 방향을 전환했다구, 안 봐! "
안 봐!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에게 먹물들의 이념같은 건 쓰레기보다 더 가증스럽게 여겨진다. 그래, 대의를 얘기했던 사람들이 대공장의 배신을 오히려 조장했었지. 그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는게 중요했던 시대는 갔어. 현지는 눈물이 났지만 그의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대신 뱉듯이 쏘아주었다.
" 평생 책이라곤 볼 줄 모르니, 집에 서재가 필요하지도 소장하고 싶은 책이라는 걸 느껴본 적도 없지? 돼지에게 진주목걸이가 가당키나 하겠어? "
그는 뻘쭘하게 쳐다보더니 맞대거리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듯 팽하고 돌아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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