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창작중-남자, 그리고 1

혜정은 얼른 보기에 귀엽고 예쁜 여자애였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론 컸고 피곤할 수록 가는 쌍꺼풀이 겹으로 지곤 했다. 서양인처럼 높지 않지만 동양인처럼 낮지도 않은 코보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작은 입술, 세필로 그린 듯 정교한 입술이 참 예뻤다. 그 애의 대학교는 여느 대학들처럼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많았고 다른 단대보다 문과대에는 그보다 좀더 많은 여자애들이 있었지만 그 애가 택한 독어독문학과에 여자들은 압도적으로 귀한 편이었다. 그 애가 학과의 남학생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건 기우였다. 오리엔테이션과 신입생 엠티, 그리고 학기초의 강의실에서 그 애는 말수가 적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슴에도. 그 애의 학과에는 독어나 혹은 문학에는 더욱이나 관심이 없는 남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그들은 손가락에 꼽을 만할 과의 여학생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집적대고 있었다.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가능한 안정적인 커트라인을 염두에 두고 지원해서 합격의 영광을 얻은 남학생들이 태반인데 비해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되었다. 그 녀들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 싶은 학력을 소지하게 되었고 언어와 문학에 강하다고 생각되는 여성들의 특성에 따라 졸업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예상되었다. 이제 그 녀들에게 남은 것은 좋은 신랑감을 같은 학과나 문과대 근처가 아닌, 가능한 좀 더 레벨이 높은 대학의 남학생들과의 인연을 구축하는 것을 통해 건져내는 것이 과제인 것처럼 보였다. 혜정은 소수의 여학생 동기들 중 재수를 하고 들어온 한 명과 친해질 듯 싶었다. 아마도 나이가 같아서 친근감을 가졌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재수생의 전력을 가지고 있어선지 다소 우울하고 어딘지 과의 여학생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가 어느 전문대학의 유아교육과를 다니다가 예의 " 그 물에서는 그 정도의 남자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는 식으로 전과를 했다는 동기를 말하는 그 동기에게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정은  한, 두번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고는 코드가 안 맞는다고 치부하기를 곧잘 했다. 그렇게 친하고 싶지 않은 동기들의 명단을 확장해갈수록 그 애는 사귈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점심식사, 그것이 또 혜정의 커다란 난관이었다. 끼리끼리 혹은 비슷한 부류의 삼삼오오 식사를 하는 학생식당에서 혼자 줄을 서는 것이 처량해보였지만,  학교 바깥으로 혼자 점심을 때울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애가 혼자 있지 않을 때는 과학생회일을 보고 있는 선배들과 얘기를 할 때, 아니면 동아실에 있을 때였다. 동아리실엔 거의 항상 누군가가 있었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갖는 동질감으로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혜정을 빼놓지 않았고 그냥 사회과학 써클보다 자체의 업무를 갖고 있는 ***였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할 일꺼리도 많았다. 다른 1학년들에 비해 더 자주 동아리실을 들르는 혜정에게 선배들은 심부름을 시켰고 운동적으로 연관된 타대학이나 사회단체를 방문하는데 자주 혜정을 데리고다녔다. 덕분에 혜정이 운동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속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그 애는 2학년 선배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들에게 지지 않는 데모참가와 연대투쟁을 비롯한 활동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써클이나 학생회를 외곽으로 하고 있던 물밑조직에서의 접근도 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애가 지하조직의 조직원이 되었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 애는 **의 소리를 청취하는 선배를 이해할 수 없어했고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끝내 철회하지 않는 자신의 알피와의 논쟁에서 합리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다. 인식의 왜곡 혹은 몰이해를 감수하고 그 애가 선배들의 노선에 동의하는 말도, 행동도 하지 않자 87년의 후폭풍 속에서 잘 조직화되지 않는 후배들 속에서 유독 돋보였던  그애를 인입하고자 했던 선배들은 혜정을 준조직원 정도에서 대기시켜두기로 했다. 대세화되고 주류화되어있는 대학의 운동권분위기에서 골수우익이 아닌 한 과학생회의 임원들이 격려하는 학내집회를 경원시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혜정은 대부분의 87학번 선배들로부터 운동에 대한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읽어냈고 과학생회의 주도세력이고 동아리의 핵심멤버였던 선배들 중 가까웠던 몇 명에게서 조직원이 되었던 과정, 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렇게 과에는 즉 강의실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혜정은 동아리실에서도 소외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서 그 애가 왜 남자선배와 썸싱이 일어났는지,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실연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혜정의 써클에서 후배들의 학습을 담당하던 알피는 남자, 여자 각각 한 명씩이었다. 무척 친해진 듯 여자알피의 자취방을 드나들던 어느날 대판 싸웠다는 얘기를 흘리더니 입을 싹 닫았다. 그리고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기타 이야기를 했다. 노래, 남 앞에서 부르는 걸 꺼렸다 뿐이지 노래를 좋아했다, 혜정은. 그리고 기타를 치며 감미롭게 노래를 부르는 선배가 써클에 있다고. 알피이고 세미나할 때 후배들의 질문에 대답도 잘 한다고. 이 승만의 ....중략..... 조직원이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고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2학기에 그 선배가 휴학을 하고 나오지 않는다며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점점 차가워지는 가을 바람 속에서 슬프고 초조한 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시월 어느날부터인가 입을 꼭 다물고 교정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혜정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다. 너무 많이.

 

고즈넉한 옥탑방, 새로 두시가 넘어간 시각, 주위는 길고양이도 잠든 듯 조용했다. 진은 주방쪽 씽크대에서부터 출입구로 꺽어지기 전까지의 벽면의 이분의 일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느 살림집이었으면 가스대를 포함한 씽크대 옆으로 냉장고와 잡다한 주방살림을  놓느라 남는 공간이 없겠지만, 200미리의 작고 아담한 냉장고만 놓고 대신 출입구 앞까지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라탄의자와 테이블이었다.  손으로 슬쩍 밀어도 쉽게 제 자리를 바꾸는 가볍디 가벼운 이 가구들을 혜정은 좋아해서 침대 옆으로 난 반대편 창문 쪽으로 번쩍 라탄의자를 들고가 안락한 사색을 즐기기도 했다. 조금 전에는 그 라탄의자에 중상을 입은 병사처럼 걸쳐져 있던 혜정, 뭐라고 주절거렸지만  만취를 못 이겨 꼬부라지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 한 잔을 간신히 먹여 침대에 뉘일랬더니 까탈스럽게 예민한 부잣집 외동딸의 입덧처럼 욱 ! 하고 올린다. 몸을 가누지 못 하는 그 애을 부축해 욕실을 왔다갔다 하기를 서너번 하고나니 흐느적거리며 머리가 아프다고 울먹거리는 혜정, 침대에 쓰러져 시체처럼 널부러진다.  

혜정을 데리고 온 두 명의 남자들은 같은 동아리 선배라며 혜정이 1차에서 너무 들이붓더니 정신을 못 차린다고, 가까운 친구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바래다주러 왔다고 한다. 그들은 한명은 퉁퉁한 고수머리였고 다른 한명은 대조적으로 뻣뻣한 짧은 머리가 스포츠형 머리에서부터 자라고 있는 중인듯한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중년의 뻔뻔한 매춘남를 연상시키는 퉁퉁이는 재수하고 들어왔다는 그 말끝마다 " 이 형은 말이야 , " 하고 자신을 상대보다 연장자라는 위치를 부각시키며 지칭한다는 작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체질적으로 빼빼마른 길쭉한 얼굴은 조기입학한 초등학교 저학년시절부터 동급생들에 치여 자라 누나같은 여자들만 좋아할 것 같은 또 볼 때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는 그 공대생이 틀림없어보인다. 뭐, 맞을 것이다. 혜정의 동아리에 남자선배는 3명 밖에 없었고 그 중 한 명이 군대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지라. 그들이 혜정을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겠다는 화양리의 술집 골목, 그 < 밤 10시 이후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합니다 > 라는 표지판을 전신주에 매달고 있는 그 골목을 혜정은 싫어했다. 선배들이 그 거리의  5000씨씨 혹은 일만씨씨하는 한잔을  빙 둘러앉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마신다는 호프집으로 2차를 가는 것도, 그 길 안쪽의 감자탕집으로 3차를 가는 것도 혜정은 그 쯤에서 어김없이 눈에 넣을 수 밖에 없는 집창촌의 쇼윈도우를 보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문 앞에 나와있는 닳아보이는 여자들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두려웠고, 웨딩숖의 마네킹처럼 무심한 얼굴로 가슴까지 푹 파인 붉은 드레스를 걸치고 애견가게의 전면유리안 작은 칸막이 안에서 움직이는 상품처럼 진열되어있는 소녀들을 훔쳐볼 때마다 자신이 성을 사러온 남자들과 진배없이 뻔뻔스럽게 느껴진다는 혜정은 선배들의 못 본 척 하는 그 얼굴에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물론 혜정의 선배들이 그 거리에서의 3차를 끝내고 여관을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늘 패거리의 잔당들과 함께 널부러질 곳을 찾아서였고 그럼에도 혼숙단속을 귀찮아하는 주인들의 거절에 방황하다가 후미진 여인숙에 겨우 구겨질 뿐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가기 전 딱지떼기를 숨기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그 남자 대학생들 속에서 혜정이 이질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정이 이토록 야위어 그 작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만큼 초췌해 진것이 그 군대간 선배 때문임을 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딱지 떼러 다녀왔다는 사실을 줏어듣기라도 했을까? 진의 순진한 짐작은 그러나 대학가에서 학년초에 눈 맞아 씨씨커플의 염문을 뿌리는 남녀대학생들이 학년말에 이르기전에 이미 숱하게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평범한 예측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는 것에 당황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울부짖는 고딩시절의 촌스런 보이프렌드의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