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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1

그녀는 열 아홉살이었다.

입시를 칼처럼 목에 걸고 듣느니 네가 몇 점이냐, 보느니 재가 몇 등인가 하는 폴 인 스트레스의 상황이었으나 욕구를 유예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춘향이가 몇 이었고 길동이는 몇 이었으며 또 죽음을 결심한 쥴리엣은 몇 이었나. 고등학교를 이리 규방처럼 옥죄이고 머리로만 공부하라 할 양이었으면 여자들은 좀더 일찌기 취학하여야 했을 것이다. 대학이 길이 아닌 빈궁의 여식들은 상고를 다니며 화장하는 법조차 배운다 하고 음악시간엔 음악을, 미술시간엔 미술을, 그리고 무용을 안 해도 체육복을 터질 듯이 입고 햇살 아래 허벅지를 드러내며 신체활동을 즐긴다는데. 여대생이 되어보지 못 한 박탈감과 소외감을 후일 결혼하고 애 낳고 그 애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가슴 저변에 깔고 살다가 방통대를 기웃거리는 2프로 부족한 현모양처가 될 지 언정, 지금 그네들의 청춘은 자유롭다.

자유를 갈구하는 맘이 그녀를 밤에 나가게 한다.

경제력이 없고 용돈을 받아 늘 주머니가 풍족한 부잣집 딸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밤에 갈 데가 없다. 낮에도 교실에만 있었고. 집에 와서는 제 자그마한 방에 처박히고 싶으나 깔끔하니 치운 책상 위, 빨간 라디오 하나 구석에 놓고 93.1 메가헤르쯔의 에프엠 음악방송을 듣고 싶으나 지 선상의 아리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고함소리에 떠밀려 집을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는 매사에 성난 고함소리와 욕지기로 제 속의 화를 쏟아내었으나 그걸 쓰레기처럼 뒤집어쓰는 엄마는 속으로 골병이 들고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오늘의 스트레스 지수는 보통에서 약간 상위이긴 하나 폭력이 난무하는 고수위는 아닌 듯 하니, 그녀는 엄마가 매 맞지는 않으리. 허나 저리 정신적 고통과 괴롭힘 당하는 것에서 구해 나올 수 없고 그렇다고 함께 당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하며 도망치듯 나온 것이다.

- 내가 무어라 했는가. 진즉부터 저런 남편을 버리고 이혼해서 살아도 굶어죽지는 않을테니. 함께 나가자. 하지 않았던가. 그리 하지 않은 것은 엄마이니, 저리 당하고 사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허나, 나는 필히 나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말을 열 서넛 먹은 나이부터 엄마에게 해왔었다. 진지하게, 사정하며, 나중엔 비아냥거리며. 아빠의 손찌검을 피해 올라가 숨은 옥상에서. 쫓아오는 그림자를 피해 타넘은 남의 집 지붕 위에서. 깨어진 유리창 조각들 너머 움추렸던 어느 구석지에서.

울고 울면서 그녀의 눈물은 샘의 바닥을 끌어올리듯 항상 차 넘쳤고 조그마한 슬픔이나 마음의 상처에도 예민하게 연동했으며 그럴 수록 소리 없이 감정을 퇴적시켰다.

 

- 저 애가 낮에도 혼자 산책을 일삼더니.

진은 제과점 안에서 거스름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 창을 곁눈으로 보면서 행인들은 진열대의 케잌을 보기도 하고 유리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바쁘게 홱 지나고는 했다. 하기야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가니, 귀가길이 아니어도 얼른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 쉬고 싶어할 만한 때가 아닌가. 집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집이란 그런 곳이니.

쉬고. 쉬면서 먹고. 먹을꺼리를 내 입에 넣는 것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입에 들어가는 걸 보는 것이 더 기꺼운.

- 저 애가 이 밤에 집에 안 있고 뭘 하러?

진열장 안의 케잌을 눈여겨 보는 듯 하나 먹고 싶어 그런 건 아니라는 듯, 금방 고개를 돌리고 휘익 지나가는 그 애의 발걸음은 그러나 별로 빠르지 않았다. 진은 거스름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손을 찌르고 다른 한 손에는 식빵 봉지를 들고 제과점 문을 밀고 나와 섰다. 폭좁은 인도를 따라 죽 늘어진 가게들의 조명발에 늦은 밤거리는 어느 때든 상관없이 밝기만 하였다.  길 아래쪽 횡단보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애가 보였다. 방금 지나온 제과점 위쪽의 횡단보도가 더 가까웠을 텐데. 진은 그 쪽으로 건너 저의 동네로 돌아갈 것이었으나 동시에 신호를 받는 짧은 두 개의 횡단보도 사이의 거리를 사람들은 곧잘 사선으로 건너기도 하였기에 잠시 그냥 서 있었다.

저 애에게 아는 척을 하기에는 좀. 시간도 장소도 아닌 것 같았으나 무엇보다 그 표정이 아니었다.

- 대체 저 침울함의 정체는 뭐냐...

진은 고고학자의 수수께끼를 감춘 추리소설을 읽을 때처럼 시선을 떼지 않고 주의를 집중했다.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 같았다. 저 애의 실루엣, 저 표정에서 흐르는 슬픔? 냉소? 허탈감? 산산히 부는 바람 속에서 그냥 스러져 희미해지고 있는 듯한 느낌.

- 왜 저 애는 항상 혼자 걷고 있는 걸까.

진이 그 애를 눈에 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의 넓은 교정을 가로 돌며 고등학교의 교사까지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키작은 꽃나무들 속으로 몸을 숨길 듯 걸어가는 모습에서부터였을까. 안 보이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무심히 지나쳐 붉은 벽돌담의 여고 쪽으로 걷는 그 애는 저는 그 쪽에 볼일이 있어 간다는 듯 하였으나 짧은 점심시간, 걸음은 빠르지 않았었다. 해가 중천에 있던 어느 이른 하교길에서도 그 애는 홀로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진이 방금 헤어져온 아이들과 수다하던 가수의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서 있던 횡단보도를 멀리 두고 차도를 만드느라 쌓아올려진 뚝방길 위쪽으로 발꿈치를 숨기며 멀어지곤 했다. 가방을 멘 어깨가 무겁다는 듯 땅바닥에 붙은 민들레의 그늘 아래로 묻힐 듯 낮고 느리게 사라지는 그애의 혼자 가는 뒷모습이 눈에 남기도 하였다.

사실 남았을 뿐, 기억의 저장창고에서 어느 구석으로 밀려갔는 지 다시 생각하지도 깊이 숙고하지도 않았었다. 중학교를 미련없이 졸업하고 다가오는 여고생활이 기대 반, 짜증 반으로 귀찮게만 느껴지던 겨울, 2월의 그날에도 쵸컬릿만 빼어 식탁 위에 던져 놓은 채 진은 메모하는 걸 잊은 스냅사진들이 아랫 서랍 어딘가에 있다는 걸 가끔 떠올렸을 뿐, 그애의 혼자 걷던 실루엣도 선물상자 속의 편지도 차가웠던 손가락의 감촉도 하나로 꿰어 인식하지 못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에 뭐가 걸려있는 듯 답답증을 느끼기는 하였는데, 그게 뭔지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기도 했으니, 그건 엄마가 혼자 있는 뒷모습을 발견하는게 잦아지면서 자꾸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식사준비에만 소흘해 진 것이 아니라 엄마는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진은 식탁 위에 놓여진 잼이 조금씩 주는 것을 보며 식빵을 사 오겠다고 밤 늦었는데 뭐하러. 하는 엄마의 끊어지는 목소리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길 건너 제과점까지 부러 길게 걸어 나왔다.  행인도 많이 줄어든 골목길을 지나 혼자 걸으며 생각이 많아지고 있던 열 여섯의 여고 1년생. 진이 가진 레테르였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왜 사람들은 혼자 걸으며 혹은 혼자 오도카니 식탁 앞에 앉아 혼자 만의 생각에 골몰하게 되는 걸까. 진은 저 자신이 그러고 있는 적이 많아지는 걸 미처 인식하지 못 한 채, 엄마를 생각하다가 또 그애를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저는 항상 친구들과 함께 있었는데. 둘러싸이듯 교실에서 거리에서 집에서도 늘 전화를 받으며 친구들 속에 있느라 그 무리들 너머에 또 다른 아이들이 있으나 역시 그네들도 누군가과 함께 웃거나 떠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춘기라 그런가 보다. 하고 진은 선생님들이 소녀시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 애를 휙 밀어놓았다. 동생도 사춘기고 여고의 동급생들도. 색기를 더해가는 정원도. 사춘기의 소녀들이려니. 하고 넘어가려 했다.

- 근데 저 애는 왜 맨날 혼자 저러구 다니냐구.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어깨 무거운 듯, 엄마의 등 돌린 모습에서 처음엔 화가 나고 속이 상하다가 나중엔 그 어깨가 미동도 없이 결연히 굳어지는 것을 보며 함께 마음이 다져지고 있던 진이었다. 엄마는 이혼을 할 것이고 또 취직을 할 것이었다. 그리고 어쪄면 처음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게 될 것이었다. 결혼하고 거의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마흔의 나이에.

그 불혹의 나이에 세상을 처음 맞닥뜨리는 소녀처럼 결의를 다지고 있는 엄마는 안쓰럽기도 하고 또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진은 가족이 있던 없던, 그 가족이 남편이던 자식이던 자신의 생은 결국 혼자 만들어가는 것인가보다. 싶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왜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 하는 걸까. 하고 진은 오래 고뇌하게 되었다.

- 저 애가 저렇게 혼자 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지 않을까.

진은 그애가 주고 간 선물 상자를 서랍 어디에 두었더라. 하는 생각을 하며 횡단보도와 횡단보도 사이의 거리를 사선으로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그애가 어둠 속을 가르며 네거리의 어느 쪽인가로 사라지는 것을 먼 눈으로 보고 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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