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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아홉의 그녀 4

" 본관 출입문이 커다랗고 두터운 유리로 되어있는데..."

하면서 그녀는 웃음을 흘린다. 점심시간에 부러 나가서 보니 정말 깨지고 없더라며. 또 쿡쿡 웃는다. 웃겨서라기엔 그 얼굴이 너무나 정에 겨웁다. 딸아이가 사고 친게 너무 귀엽다는 듯? 아니면 좋아하는 아이돌이 개그를 하는게 너무 사랑스러웠다는 듯.

" 얼마나 빨리 뛰어갔는지 유리창을 그냥 통과하고도 하나도 다치지 않았대. "

그 말을 하면서는 조금 걱정도 되었다는 듯 살짝 미간을 굳힌다.

" 믿기 어려운데. 그 두꺼운 유리문을 통과했다고? "

진은 지금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티비 프로그램 얘기를 하는 거냐는 듯, 중국 오지의 어느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건을 오래 된 신문기사를 증거로 들이댄들 그걸 어찌 다 믿겠냐는 투로 말했다. 사건에 중심을 두면서.

" 그래? 그런가? "

하는 그녀, 사건의 진실 유무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는 옆반의 여자애가 더 중요한 듯한 그녀의 표정. 짧은 고수머리에 마른 체형, 역시나 키가 크고  그늘 없이 밝고 쾌활한 성격이라는 옆반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그녀.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에서 그녀는 같은 써클의 남자애도, 잘 생긴 상급생 오빠도 아닌 옆반 여자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한 번도 말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냥 지나치며 봤겠지. 복도에서나 운동장에서.

진은 또렷하게 의식하지는 못 했지만 이건 일종의 데자뷰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훔쳐보기를 하듯 눈길 꽂고 있다. 중학시절, 한 번도 같은 반인 적이 없었던  키가 크고 성격 활달한 어느 여자애를 줄곧 쳐다봤던 것처럼. 자신이 아닌 주변의 친구들과 큰 목소리로 말 주고 받으며 휘적휘적 내어달리던, 항상 미소를 흘리고 다니던. 적당히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왜냐하면 가끔 운동장에서 체육시간에 피구나 발야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늘 가볍고도 우아하게 콤파스를 놀리며 뛰어다니고 있으니. 던져오는 공을 받아 자연스럽게 튕기기도 하면서 제비처럼 허리를 쭉 펴고 던져 올리기도 하는 것을 운동장의 다른 구석지에서, 아이들의 등 뒤에서 어색하니 성겨 선 채로 바라보고는 했을 테니.

" 다 먹었으면 이제 뭐할까? "

진은 속이 틀어지는 걸 느끼며 그녀의 수다를 끊고 나섰다. 잠시 좋아하는 팥빙수를 느긋하게 먹으며 긴장을 풀고 있었던 그녀는 상념이 끊어지는 것에 채 적응을 못 하고 시선을 잃었다. 금방 이제 뭘 해야 하나하는 고민에 빠지기에 쉽지 않은 듯. 얼굴 굳어지는 그녀를 보며 진은 자신이 사실은 냉정한 성격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얘들이 친구 만나서 다들 뭘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지. 하는 생각을 그녀는 하고 있는 듯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고 수다 떨다가 아쉬운듯 시계를 쳐다보며 교정의 벤치에서 일어나거나 친구네 집 거실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는 경험이 없었던 그녀는. 뭔가 볼일이나 할 일이 있어야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편했기에 기껏해야 숙제나 가사 준비물을 사러 가거나 아니면 같이 시험공부를 한다라고나 해야 친구와의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집에서 혹은 거리에서 보내곤 했었다.

" 오늘 피아노 렛슨 취소되었는데, 넌 뭐해? 집에 있으면 나올래? 너네 집이랑 우리 집 중간에 분식점 있지? 거기 팥빙수 시작했더라. "

불쑥 전화를 해 온 진에게 응. 그래. 하고 간단한 답변으로 약속을 잡은 그녀는 분식점으로 넘어오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만 해도 얼떠름한 표정이었다. 통화하고 30분도 안 되어 나온 그녀. 학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듯, 하얀 블라우스에 플리이츠 스커트와 그와 같은 패턴의 조끼, 갈색 단화 위의 발목 위로 반접혀진 가로선이 참 단정하다. 벌써 초여름, 반팔에 짧은 스커트의 여자들은 학교 근처에서도 쉬이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은 멋을 안 부려도 편안한 티셔츠나 청바지를 즐겨 입고 있었다. 마치 중세 수도원의 견습수녀를 보고 있는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하며 진은 자신이 입고 있는 청색의 체크 남방과 블랙 진을 잠깐 내려다 봤다. 운동화, 나이키를 신고 있었다. 흠...동생 이수와 같이 골라왔던 쇼핑품목이었지만 저 애는 횡단 보도 맞은 편에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한 손을 들어 귀엽게 웃어보이긴 했으나 어색한 품이. 촛점없는 시선으로 그냥 건너다 보는 듯 하지만  아. 폼 나네.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학교에서 수다하는 여자애들의  오늘의 가장 큰 화제꺼리였던 사건을 옮기면서 시종 옆에서 줏어들은 이야기인 듯, 간접화법으로 두리뭉실 얘기하면서 정작 주인공이었던 여자애를 묘사하는 데서는 구체적인 걸 보니. 그 외모며 스타일이며 행동거지가 기실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보이쉬하며 멀대같고 덜렁덜렁 대는 것이.

" 아직 한낮인데 집에 가서 영화 볼까? 비디오 빌려서. "

"  응? 그. 글쎄. "

완전 당황하는 그녀.

" 집에 누구 있는데? "

비디오 보자 해서? 집에 가는게?

" 없어. 엄마는 일 나가셨고. 동생은 맨날 늦게 들어오는데. "

미간 굳히고 있는 그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무도 없는 집에. 친구네 집인데. 좋다고 벌떡 일어나 놀러가자 해야 하는게 여자친구들 사이의 정석인데.

" 응. 그래. 비디오 가게 어디 있는데? "

말을 하고 있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표정이다.

" 여기서 가다 보면 있어. 시장 끄트머리 쯤에. "

안다는 듯한 표정. 흠. 진은 조금...재미가 동한다.

조금 뒤미처 따라오는 것이 처음 가는 친구집이니 그러하다는 듯의 제스츄어지만 그녀는 모퉁이를 꺽을 지점에서 전혀 망설임이 없다. 저의 집 앞이 시장인데, 옆 동네 시장길을 어찌 이리 잘 아누. 하는 생각이 드는 진. 혼자 재미지고 있다.

" 과자랑 음료수 좀 사 갈까? "

" 별로 괜찮은데. "

" 집에 식빵 밖에 없는데. "

" 식빵? 잼도? "

" 응. "

" 맛있겠다. 식빵에 잼 발라 먹자. "

흐음. 토스트 같은 걸 좋아하시는 군. 맨 달기만 하고 맛도 없구만. 서양사람들의 패스트푸드 같은 걸. 하고 진은 생각했지만 식탁 위에 놓인 2단 짜리 토스트기를 보자 그녀는 어머, 예쁘다. 한다. 아, 그래. 모양새로 먹는 구나. 하고 눈치 채는 진이었다. 엄마가 상차림을 귀찮아 하며 아침, 저녁으로 때우는 걸 보면서는 안쓰러웠는데.

마당의 작은 화단을 보면서도 손질 안된 장미목 몇 그루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함박 웃음을 짓던 그녀. 낮은 계단을 몇 개 올라 현관을 들어서면서도 옆으로 이어진 베란다의 빈 공간에 눈길을 준다. 전형적인 단층의 단독주택. 그녀는 지붕이 세모꼴이니 그렇게 경사진 천정이 있는 다락이 있을게 아니냐며 벽면을 휘이 둘러본다.

" 없는데? 다락. "

" 그래? 이상하네. 단독주택들은 모두 있는데. "

초록색 지붕 아래 동그란 창도 있던데. 하는 그녀. 진은 자기도 그걸 밖에서 봐서 알지만 본래 천정 높았던 거실에 빛이 너무 드는게 싫었다던가, 낮게 천정을 다시 치면서 안으로 숨었을 꺼라고 말해 주었다. 한번도 거실의 천정에 대해 생각해 본적 없었지만 지금 지붕과 집의 모양새를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하, 완전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구만. 하는 생각을 하며 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집 앞까진 뻘쭘하게 따라오던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놀라움과 미세한 흥분까지 나타내자 진은 저도 따라서 기분이 흔들흔들 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단화를 벗고 얌전히 마루로 올라서며 흘낏 뒤돌아 현관 바닥에 신발들이 가지런한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도 가슴이 꾸욱 눌러지는 듯 했다. 흰색, 반접은 양말, 자그만한 발이 사뿐히 마룻장을 밟는다. 아, 발...진짜 작다.

운동화보다 단화가 더 작아보이기는 했으나 벗고 보아도 제 발은 발가락도 길어 여자치곤 왕발이라 할 만한데, 이 애는 거의 전족의 중국 여인들 수준이군. 몸이 가벼워 달리기를 잘 했나. 하고 생각하는 진. 중학시절, 400계주를 할 때 제 앞에서 뛰던 그 애가 훌쩍 거리를 띄우고 멀어지던 것을 떠올렸다. 순 악바리라니깐. 그런 생각을 그때에도 했었는데. 지금도 체력장에서는 1등급이라던가. 몹시 뚱뚱했던 학년톱이 시기의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기에 함께 시선을 주었었는데 그런 식이니 공부를 잘 하는 애들도, 못 하는 애들도 그녀를 가까이 하기를 꺼렸던 것 같다. 뭐, 말수라도 많고 좀 편한 표정을 지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진은 그러나 혼자 있던 그녀가 왠지 더 기껍게 느껴진다. 지금, 자신이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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