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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가 품에 안겼다.

진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듯이 포근하다, 피아노의 음율이 천사의 날개처럼 감싸는 듯 그애와, 그애를. 안은 진을 안온하게 한다. 음악은, 노래는, 가슴을 저미고 마음을 띄우는 천상의 가락은 그들을 위해 있는 듯하다. 원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 너도 음대 지망이니? "

차랑하고 새로 한 매직스트레이트의 단발을 흔들며 정원은 최대한 순수한 낯빛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애는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 응, 그래? 그럼 피아노를 같이 배우는가 보구나? 윤진이랑은 친한가 봐? "

지나가는 말처럼, 의례히 묻고 받는 대화처럼 정원은 콕콕 집어 물었다. 그애는 아니. 아닌데. 별로. 하고 또 짧게 대답했다.

" 어머? 그럼, 어떻게 아는 사인데? 그냥 울 학교 아니라니깐 궁금해서? 중학 동창이야? 초등 동창에 같은 동네? 난 지금 같은 반이거든, 근데... "

" 같은 중학교 나왔어. "

목소리도 곱다. 정원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갔다. 여인천하의 중전이 희빈을 보듯? 아님 억울하게 무수리를 잡다가 헛다리인 걸 알고 놀라는? 지금은 상감도 잘 모르나 이 여인의 매력을 알게되면...하고 속을 태우는.

" 정말이야? 나도 윤진이랑 같은 중학 나왔는데 ! "

" 응. 알어... "

넌 나를 몰라도 괜찮아. 하는 평범한 상민의 얼굴로 그애는 잠깐 건너다 보았다. 미소를 띄며, 미워하지 말라는 듯이.

" 너, 나를 알아? "

" 피아노 치쟎아. 반주 하느라고 우리반에도 왔었으니까. 중학교 합창대회, 해마다 달반을 두고 연습했으니까..."

" 아, 그렇지, 윤진도 너네반에 반주하러 갔었구나, 나처럼. "

정원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애와 선약이 있다던 윤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토요일 두 시 이후 브레이크타임의 패스트푸드점에서 고등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예대지망의 한갓진 놀이. 그애는 피아노도 못 치면서 왜 윤진을 만나러 왔을까.

 

" 왜? "

정원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목과 함께 눈물도 터지고 있었다.

" 왜 그애를 좋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는데! "

정원이 울고 어깨를 떨며 무너지듯 무릎을 껴안고 주저 앉았다. 그 앞에 선 채 까딱도 않는 윤진은 참...어쩌지. 하는 표정이었으나 동정의 빛은 전혀 없다, 공감의 얼굴도 연민의 느낌도 미안함조차 없는 그저 낭패한 표정.

" 정원아, 그만 해. 이러다 소문나겠다. "

" 무슨 소문! "

정원은 한 쾌 걸렸다는 듯 물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그 한 마디를 가지고 너를 옭아 나의 사랑을 온천하에 알리고 함께 죽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를 품으며, 눈빛 매섭게 윤진을 쏘아보았다.

" 내가 너 좋아하는게 뭐 잘못 되었는데? 난 그딴 거 하나도 겁 안나. 넌 그런 기만과 허식이 좋아? 그딴게 뭐가 중요해? 남의 시선이나 뒷담화가 두려워? 자신이 당당하면 되는거 아냐? 사랑하는게 뭐... "

감흥없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화를 내고 성난 목소리를 높이고 속엣말을 끄집어 감정 실어 소리치나 정원, 그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진은 한숨 한번 쉬면서 속말을 감추고 이어 말했다.

" 동성연애하는 거 말구, 너...바람 맞았다구 소문난다구. 이 정원, 이제 그만 목소리 좀 낮춰. "

내가 네 맘 모르는 거 아니니. 하고 윤진은 사려깊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부드럽게, 포근히, 반쯤 눈꺼플을 내리고 말하는 걸 정원은 목격하고 말았다. 그애와 있을때, 그애를 향해서, 그애가 어찌 하는지를 조바심치며 그리도 조심스럽게 윤진은 대하는 것이었다. 왜, 그애에게?

" 내가 왜 바람맞아야 해? 너, 나랑 입학하고부터 계속 친했쟎아. 우리 중학시절부터도 인연 있었고 그래서 서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쟎아. 우리가 어떤 사이야? "

" 친구 사이지. 중학동창이고, 같이 피아노치고 그러다 보니 친해진. "

윤진은 아까부터 울고 눈물 범벅이 되어 속쌍까플 아래 칠한 속심 두꺼운 아이펜슬 자욱으로 까매진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 한 뼘 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허벅지를 짚고 일어나는 정원은 새빨개진 콧잔등 아래 더욱 붉게 부푼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그럼! 그애는?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도 아니고 피아노를 친 것도 아니고 말 한 마디 나눈 적도 없는 그애가 왜 지금 너한테 ! "

정원은 무릎  위에서 한참 올라오는 스커트 끝단을 잡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윤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따져, 논쟁하여 할 말 없게 만들고, 그도 안되면 추궁하고 비난하고 따를 시키고 싶었으나 그러면 내 사랑이 될 것인가? 싶어 감히 어깨가 들어올려지진 않았다. 키가 큰 윤진은 그래도 정원에게 마음을 주겠다 거짓표정 만들지 않을 것이며 누가 뭐라 하든 제 사랑을 숨겨 쉬쉬하며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자였던가, 윤 진이? 사춘기 소녀들의 히어로였고 속내 동쳐 맨 처녀들의 선망이었고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신사였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응대하던 아이돌이었다. 결코 한사람을 위해 시선 고정하는 이가 아니었다. 스타라면 당연히, 매니저 외에 어느 한 개인을 곁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난 너를 위해 피아노를 버릴 각오도 되어 있어. 네가 치는 연주곡을 위해 모든 걸 다할 꺼야. 내가 너의 발판이 되어도 좋다구, 나야말로 널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어! "

정원은 말했다. 말이 안 되어도 문장을 만들었다. 비문이 되더라도 마음은 내비쳐질 것이다. 열정을 갖고 노력하고 간절히, 간절히 소망하는 자에게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현실에서 성취하게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추구해 온 자에게, 열과 성을 다 한자에게 선택권을 쥔 자가 무어라 말하는가? 뭐라고 하는 건가?

 

" 네가 사랑한 나를 가져가? 그리고 남은 나는 내 사랑을 만나러 갈테니. "

" 야! 윤진! "

많이 기다리지도 더 보아주지도 않고 윤진은 가 버렸다. 정원을 학교 뒷뜰의 우거진 잡목 사이에 남겨두고. 바람난 애인을 불러 훈계하여 계도하려던 건 실패했고 뼈저린 후회, 낙담, 분노와 탄식만이 남아 정원을 괴롭혔다.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어째서 노력하고 원하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는가, 사랑은 또한 사람의 심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던가? 한눈에 보아도 그애가 무얼 말하는지, 바라는지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게 숨은 계략 위에 떳씌워진 아마포라면 더욱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무릇 자연의 섭리가 아닐 것이다. 그애가 그리 내숭을 떠는데 어찌 사랑은 그리로 기우는가. 내가!

정원은 홀로 엎디어 울었다. 누가 허리 아래 숨은 상처가 없으랴, 심장의 이면에 눌린 자욱이 없겠는가, 이 땅에서 어린아이로 천대받고 어깨 위 견장으로 가린 청춘의 숨소리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법이다, 그것도 사랑한다 점찍은 자에게서.

봐라, 저 애가 어떻게 가녀린 손목을 들어 입과 턱을 가리고 아니다, 싫다. 하면서 품에 안기는 지를. 저런 내숭과 저런 안일과 한번 알은 체를 하지 않고 표표히 군중 속을 뚫고 나가는 저 애의 기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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