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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과 데믈랭

" 뭐라고? "

 

팀장은 일시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흡사 바베큐 통구이를 하는 화로통의 뚫린 창으로 보여지던 붉은 고깃덩이와 같다.  데믈랭은 속으로 젠장.하면서 45도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빠르고 정중하게 나름 정당성을 갖춘 설명을 시도했다.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맡은 쟝이 결근한 것은 무단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얼마전부터 휴가신청을 했음에도 직속상관인 자신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처리를 못 한 것으로...

 

" 프리젠테이션 발표자가 휴가라니? 지금 이번 창립총회에서 우리 과의 발표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몰라서 그러나! 쟝, 그 친구는 그만한 분별력과 판단력도 없는 자인가? 그래갖구 내가 자네를 믿고 TFT 팀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나? 아니,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 줄 몰라! "

 

오십에 막 들어섰을 뿐인데 유난히 배가 나오고 목에서 턱에 이르는 겹살의 수조차 헤아리기 어렵게 뚱뚱한 팀장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데믈랭은 사선으로 내리깔은 눈 바로 앞으로 유성처럼 날아드는 침의 꼬리를 보면서 귓전에도 머리카락 속으로도 어깨 위로도 화학전에나 나올듯 싶은 악취의 발생원이 투척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 끝이 하얗게 떠가는 것 같았다.

 

" 죄송합니다. "

 

팀장을 진정시켜 내 보내기까지 족히 한시간은 걸린 것 같다. 데믈랭은 과연 창립총회에서의 발표를 팀장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제 겨우 삼십분이 남았을 뿐이다.

 

" 자네가 발표를 맡겠다니까 말이야... 좀 안심이 되네만 정말 사회를 보면서 괜찮겠나? 팀에서 다른 사람이 사회를 보거나 도와줄 수 있을꺼라곤 기대하지 말게, 우린 우리대로 따로 할 일이 있단 말일세,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우리 팀의 생사가 걸린 일이지... "

 

데믈랭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 걱정마십시오. TFT 팀의 사소로운 일은 제가 다 소화하겠습니다. 팀장님이 준비하신 코드네임 "열월"에는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데믈랭은 팀장의 불타는 듯한 눈을 마주 보면서 바로 이어 말했다.

 

" 형식적인 위선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창립총회에서 신임이사들이 TFT 팀의 기획력에 주목할 때 팀장님은 바로 그들의 지척에서 뉴리더의 얼굴을 확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정하신대로 2차 회동의 일정을 확인하실 때쯤 총회의 마무리잔치는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 

 

팀장은 크고 두터운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데믈랭을 향해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더이상 그는 쟝의 무단결근을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것 때문에 데믈랭은 본의아니게 과장된 충성과 우정어린 태도를 저 뚱보에게 보인 것이다. 데믈랭은 팀원들을 돌아보며 자, 빠르게! 확실하게! 보여주자구, 팀의 1년 예산이 걸려있다구! 설마 취업시즌도 다 지난 춘삼월에 새로운 이력서를 만들고 싶진 않겠지? 데믈랭은 인턴을 갓 벗어난 팀원들에게 뭐가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기획? 그건 새로 구성될 이사진들 중 어디에 선을 댈 것인가와 관련된 팀장의 기획에 비하면 사소한 각론에 불과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데믈랭에게 중요한 건 지금 쟝이 없다는 걸 무화시키는 것이다.

 

 

쟝은 전에 없이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해 왔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데물랭은 입었던 침실 가운을 벗고 다시 와이셔츠와 통바지를 입었다. 단추는 두 개 이상 풀지 않았다. 피아노 위의 시계는 큐빅이 박힌 시침을 10과 11 사이에 놓고 있었다.

 

" 어서 와. "

" 미안해. "

" 아니, 괜찮아. 잠이 안 와서 와인이라도 한 잔 할까 하던 참이었어. "

" ... "

 

데믈랭은 그가 내일 총회 준비 때문에? 하고 되물을 줄 알고 쳐다보았으나 쟝은 그럴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한 뭐라고! 내가 그깟 사소한 일에 흥분이라도 할 줄 알았어? 라는 대답은 필요가 없어졌다. 데믈랭은 흠흠.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피스텔 주방 쪽의 식탁을 겸한 바의 뒤로 돌아갔다. 미리 내어놓은 와인잔 옆으로 쟝 쟝 카베르네 쇼비뇽을  올렸다. 왕의 와인이자 와인의 왕이라는...비싼 술에 전혀 주의가 안 가는 쟝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라고 차분하고도 살갑게 질문을 내리까는 데믈랭은 역시 신입사원 연수시절로부터의 오랜 벗이었다. 그의 굴참나무같이 폭신하고 부드러운 두께감에 의지하며 쟝은 붉은 좌판의 바의자를 당겨앉았다.

 

" 휴가를 써야겠어. "

" 어제 끝난 얘기쟎아. 내일 총회를 마치고 쓰라구...근데 대체 뭣 때문에 그래?"

 

데믈랭은 어제와 오늘 낮 그리고 다시 오늘밤으로 이어지는 쟝의 휴가 타령에 결국 불길함을 느꼈다. 쟝 쟝 카베르네 쇼비뇽은 이런 맛이 아니다. 본시 스위트한 주종으로 새콤달콤하니...근데 신 맛만 나고 있다.

 

" 마리가 결혼한대. "

" 아...그래? "

 

그렇군. 하고 담담히 말끝을 더 길게 늘이고 싶었다. 하지만 쟝은 들을 생각도 짬을 가질 여유도 없어 보였다.

 

"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

" ... "

 

데믈랭은 우리가 아무리 사회초년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절친이지만 그렇게 사적으로만 중요한 문제에 의문형 질문을 던지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어떻게? 뭘 어떻게? 왜 내가 그렇게 추상적인 거대담론에 멘토의 역할을 해야 하냐구, 좀더 미시적으로 구체적으로 물어주면 안되겠나? 그녀를 잊어야겠지? 하면 예스노로 대답해 줄텐데, 가볍게 더욱 가볍게.

 

" 어떻게 하고 싶은데? "

" 넌 어떻게 생각해? "

 

what? 정말로 내게 A부터 Z까지의 설명을 기대하는거야? 내가 해석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면 너는 납득할꺼야? 인정하고 그걸 규준으로 행동할꺼야? 맙소사, 이런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데믈랭은 머릿속의 방백은 상대역의 배우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헷갈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화의 맥락을 바로 잡았다.

 

" 네가 사랑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거지. "

" 사랑해. "

 

저런! 짤없는 답변하고는! 하지만 쟝은 바로 덧붙였다.

그것만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어. 하고 말이다. 옛쓰!!

 

" 네가 뭘 고민하는지는 알아. "

" 결혼이 우리들의 일정에 올라온 적은 없었어. "

 

잠깐, 여기서 "우리들"이란 적어도 다섯명은 넘는 신입사원 연수시절의 동기동창생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린 서른을 코 앞에 두고 있으나 아무도 결혼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심지어 가족으로부터의 압박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앞서 왜 결혼해야 하지?하는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이 한 가지도 나오지 않고 있는 모태싱글, 출산율의 국가주의적 계산법에 전혀 맘이 흔들리지 않는 코스모폴리탄, 새로움을 더해가는 미래에 생물학적 가족은 오년 마다 바꾸는 자동차가 메이드 인 코리아인지를 살피는 수준의 주의도 끌지 못 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신인류가 바로 우리였다. 우리, 독신자클럽의 맹원들. 하지만 데믈랭은 다정다감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연설보다 시를 좋아하는...주장을 펴서 설득하기보다 밀담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게다가 무엇보다 쟝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  마리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깊은 감정인지, 놓칠 수 없는 여자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연애는 스물에도 서른에도 진하게 한 번씩 왔다가 또 갈 수 있지만 결국 생애의 끝에 가서 함께 하지 못 한 것을 통탄해 할 것 같으면 말야, 친구들을 걱정할 필욘 없어. 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

 

데믈랭은 진지한 얼굴로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다고 생각하면서 낮게 조용히 그리고 정말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쟝은 와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가 전날밤 얼마동안이나 있다가 갔는지는 모르겠다. 데믈랭은 새로 두시를 넘어가는 시침을 보면서 침대 속에 있었으나 와이셔츠에 통바지를 입은 채 그저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쟝은 중요한 총회가 있는날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의 발표를 맡고 있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데믈랭은 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쟝에 대해선 그 이상을 알고 있었다. 쟝이 준비한 자료를 페이지수만 보고도 발표자의 단상에 바로 오를 수 있었다. 다음 순서는 이번 연도의 사업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밑그림이 될만한 프리젠테이션입니다.  TFT 팀의 야심찬 기획! 바로 제가 준비했습니다. 하고 명랑하게 말끝을 늘이자 관중들의 환호가 터졌다. 데믈랭은 무대의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재빨리 이동하면서 모노드라마의 유일한 화자역할을 능숙하게 해냈다. 총회는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태스크 포스 팀(특별기동대)의 프리젠테이션은  이사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총회에 참석한 투자가들의 신뢰를 굳건히 하는데도 일조했다. 팀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이사들의 테이블에 동석하고있었다. 이젠 마무리할 시간이다. 저들이 2차를 가는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더욱 흥취를 돋우어 3차를 가고 또 밀담의 공간을 찾게 하기 위해서 데믈랭은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누가 쟝의 부재를 떠올리겠는가? 팀의 예산은 확보되었고 이것으로 인턴딱지를 떼고 정규직 월급을 받기 시작했으나 대학시절부터 누적되어오기만 한 부채를 갚기엔 실로 인생이 암담하기만 한, 우리들의 88만원은 적어도 세자리수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데믈랭은 러닝타임 두시간의 막판에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나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관객을 보면서 임계점을 넘어섰다. 파이널무대의 제목을 쓴 무대 휘장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우아한 자주색 비로도의 휘장에 형광색종이로 너덜너덜 붙인 낱자들의 게슈탈트를 관객들이 눈치채기 시작하자, 너무나 익숙하고 애절한 트로트 가요의 반주가 홀의 모든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죽도록 사랑하면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해~

그날 데믈랭의 와이셔츠 단추는 세 개 이상 풀어졌다.

 

십년 전 신입사원 연수시절 데믈랭의 별명은 독고다이였다. 그건 나름대로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며 동고동락해온 친구들, 즉 독신자클럽의 맹원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지금 다시 그와  동고동락하고 있는 TFT 팀의 성원들은 불안한 회사생활 중에 빠릿한 선배로서, 능글한 아첨꾼으로서 그리고 또 망가지는 춤꾼으로서 1인다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데믈랭에게 이런 별명을 붙였다. 가증의 꽃다발! 대체 당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쟝은 모든 일이 끝난 후 돌아왔다. 옆에는 마리가 있었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1년 후 TFT 팀이 해체될 때쯤엔 쟝은 회사를 떠났다. 새로운 기획은 실패했고 회사는 인수합병되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데블랭은 독신자 클럽의 맹원이었지만 결국 외로움을 버티지 못 하고 결혼했다. 합병된 회사에서 만난 쥴리와의 결혼이 과연 데믈랭에게 생애의 마지막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한 사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질문 따위 아무에게도 데믈랭에게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데믈랭은 쥴리와 결혼한 다음해에 쟝이 마리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머릿속의 누군가가 방백을 하는 것을 들었다. 대체, 넌 왜 결혼이라는 무덤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거야? 봐, 쟝은 다시 나갔쟎아! 데믈랭은 자신의 귀로 직접 듣기 위해서 혼자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 우리들의 일정에 이혼은 있었던가? "

 

 

 

 

카미유 데믈랭 (1762-
카미유 데믈랭 (1762-1794)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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