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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조감독을 붙잡고 뭐라고 하소연하는 이윤정을 뒤로 하고 예인은 맥이 풀린 채 촬영장을 나왔다.

하얗게 새로 지은 건물, 건물 중앙에 전망용 엘리베이터를로 만들고 로비를 이층까지 높였다. 외장에 씨블랙을 입히겠다는 예인의 말에 설계사무소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았었다. 수지타산 안 맞춰도 되면 맘대로 하라면서. 안그래도 주상복합으로 빼면서 타산이 안 맞고 있는데 부채비율이 위험수윈데 하고싶은 거 다 하려다가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다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지라 예인은 더 주장할 수가 없었다.

모 아니면 도라구...예인은 블랙을 포기할테니 크리스탈로 바꿔달라고 해서 겨우 확보한 것이 지상 2층까지의 전면유리창이었다. 투명한 큐브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 예인은 이층에 내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칠 것없이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차들, 인도의 행상들...그 어디 쯤에 선배와 그녀가 걷고 있을 것 같았다.

훌쩍 큰 선배의 팔꿈치에 어깨를 스치며 종종 거릴 것 같은 그녀. 무릅을 덮는 폭넓은 치마를 입고 앵글부츠로 한껏 키를 늘이곤 갈색머리칼을 삐죽이 내민 채 회색 베레모를 쓰고 물방울무늬의 쉬폰 목도리를 여왕의 러플칼라처럼 칭칭 감고 나타나곤 했었다. 예인엔터빌딩의 준공식 이후 바로 입주한 선배의 오피스텔을 찾아서. 12월 초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땐가 예인은 이층의 지금 이자리에서 거리 쪽이 아닌 로비 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익숙한 그림자의 선배가 코데즈컴바인의 야상을 반쯤 어깨에서 흘러내린 채 그녀의 팔꿈치를 부축하느라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러게, 굽 높은 거 신지 마라니깐. "

" 그럼 마중 나오지 마 ! 너랑 길 가는 거 힘들단 말야. "

" 누가 쳐다 본다구 그래? "

" 힘들다구...쪽 팔린게 아니라... "

엘레베이터를 타도 될텐데 그들은 굳이 이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한 계단, 아니 두 계단 쯤 올라갔나보다. 180을 육박하는 선배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해사하게.

" 내가 더 올라가면 너두 목 아플 껄. "

" 앞이나 봐..."

선배는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생생한 표정으로.

예인을 알아보지 못 한채 선배는 시종일관 그녀의 옆구리를 낀 채, 발끝이나 손끝 아니면 그녀의 이마 쪽을 쳐다보면서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피스텔이 있는 탑층까지.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그녀를 위해 한쪽 팔을 뻗어 가드를 해 주는게 보였다.

예인은 선배의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보다 주로 캠퍼스의 어느 나무 그늘이나 벤치 근처, 혹은 정문을 빠져나가 직선거리 100미터면 도달하는 타 대학교로 가는 은행나무 많은 인도의 어디쯤에서. 선배는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그럴꺼면 뭐하러 이쪽 학교에 입학했담. 예인은 선배를 몰라도 되었을 것이라며 그녀의 대학에 음대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무슨 학과인지 그 학과가 자신과 선배가 다니는 우리 학교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배는 예인의 존재 조차 모르고 있는데. 선배는 다른 사람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는 듯 했다. 학과의 동기들이나 동문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창문에 물이 흐르도록 장치해 놓은 호프집 안쪽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을 예인은 어쩌지 못했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었고 피아노를 칠 때도 치지 않을 때도 음악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우쭐해 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의 곁에서 지나가는 길이 아닌 동행으로 함께 걷거나 말 나누거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물론. 언제나 그 녀 뿐이었다. 어느 여름엔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시한 셔츠에 발목이 넓은 카고 팬츠를 입어 더욱 작아보이는 그녀와 마주쳤었다. 혼자 서 있는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예인은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피부가 어린애처럼 말갛고 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한창 화장에 열을 올리던 대학 신입생들 속의  예인으로선 뭐 저런 촌스런...하는 말을 속으로 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대학생이란 걸 알고 있지 않았다면 중학생으로 오해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낮의 캠퍼스 앞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중고생들은 모다 날라리일 것인데...

" 혜정아 ! "

뒤에서 휙 앞으로 내달리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역시 선배였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든 채로 뒷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쑥스러운듯 미소를 흘렸다.

" 머리 잘랐어? 왜 이케 짧게 ! 시원하긴 하겠네? "

" 어려 보여서 완전 망했어. "

" 그럴 줄 몰랐어? "

" 멋일어 보일라 그랬는데. "

예인은 선배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도, 시종 웃음을 흘리면서 농담처럼 떠드는 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정하니 흔들면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는 신발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키높이구두나 운동화, 힐이나 샌들 뭐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뭐였지. 암튼 굽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유난히 하체가 짧아 보였으니까. 키가 큰 선배와 같이 있어서 더 그래 보였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시선을 아래로 까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가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는 사람은 불편하다. 저렇게 키 차이 나는 커플..

그 때도, 그 이후에도 또 지금도 선배는 변함없이 그녀를 가드하듯 몸을 기울인 채 옆에서 걷곤 한다. 마치 그녀의 호위기사라도 된 듯. 왜...선배는 그 자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직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길러 찰랑거리게 하지 않는 걸까. 넓은 어깨 만큼 풍부한 바스트와 쭉 뻗은 허리, 8등신의 몸매에서 월등히 높은 하체 비중을 가졌음에도 항상 루즈하게 걸치고 다니는 사파리, 점퍼, 롱셔츠 뭐 그런것들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질 않곤 했다. 그녀를 신경쓰는지 신발은 늘 굽낮은 플랫슈즈 아니면 스니커즈, 어떨땐 슬리퍼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뭐...그런...

그렇게 멋있는 선배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녀는, 그녀도 옆사람이 자랑스러운 듯 흘낏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곤 했다. 마주친 시선에서 부러움을 발견했을까? 얼른 시선을 비키는 그녀. 예인보다 그녀가 더 무안해하는 듯 표정이 긴장했다.

" 왜? "

" 응, 아니. "

" 뭐 불편해? 어디 들어갈까? "

" 아냐, 더운데. "

" 그러니까 시원한데 들어가면 되지. "

" 추워, 에어컨은. 저 위에 가서 떡볶이 먹을까... "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팔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끼고 있다. 표지의 제목이 잘 안 보이는 양장본의 홑껍데기 책. 중간에 책갈피가 끼어 있다. 그녀는 항상 촌스러운 고시생같은 분위기다. 그녀의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선배는.

예인은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용인 값을 하느라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게 해 준다. 탑층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끝까지 갔다. 선배의 오피스텔은 중간 쯤에 있다. 골라도 된다구 했는데 번잡스럽게 엘레베이터 가까운 쪽을 선택했다. 왠지 그것도 이제는 나이 들어 산책하기 보다 한 곳에 자리잡아 앉아있기를 더 선호하는 그녀를 위해서인 것 같이 느껴졌다. 장엔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주거용 오피를 구입해 들어온 것도 그녀가 입사한다는 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서였으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예인은 선배를 설득하기 위해 떠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무엇이 주효했는지를 또한 전혀 객관성없는 이유로써 알고 있다. 방송국보다 영화가 낫다, 월급감독보다 자기꺼만들면서도 더 많은 연수익을 보장하겠다. 홍보나 흥행 모든 것은 회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작가 선택권도 주겠다 등등...예인은 소속 작가들을 나열하다가 결국 덧붙였다.

" 드라마작가하시다가 오신 분들도 많아요. 이윤정 작가 뿐 아니라 아직 신인이지만 이혜정 작가, 그리고 또... "

" 이혜정 작가가 왜? "

형식적으로 문답만 하고 있던 선배가 먼저 물어오는 순간이었다.

" 왜라뇨? 당연히 데뷰했으니 차기작을 내야죠. 드라마국에서 그 경력, 그 스펙으론 힘들어요. 나이도 있고. 이윤정 작가랑 팀 짜기로 했어요. 베테랑들은 대본 작업 혼자 안 하는 거 알쟎아요. 이혜정 작가도 혼자 작업해서 완성도 맞추기는 힘드니까. "

그리고 또 뭐라고 예인은 설명을 덧붙였었다. 이어서 감독대우의 세세한 프로모션까지.

" 들어갈께. "

" 정말 ! 선배, 그럼 계약하는 거에요!! "

예인은 계획대로 되는 것에 기뻐해야 할 것인데 꼭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젠 이혜정 작가를 섭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알바라니깐 ! 하고 황당해하는 이윤정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붙였다. 울 회사에 하청, 비정규직 이런 건 없다. 작가팀 소속으로 일단 이름 올려라.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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