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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학시절부터 이감독을 알고 있었다. 이감독은 몰랐지만.

의상학과를 때려치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기 위해 중퇴를 결심했을 때, 미련이 없었던 것도 순전히 그가 졸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가, 같은 단대에서 부지런히 강의실을 중복시키고 매점이며 식당을 찾아다니고 피아노과의 연주회란 연주회는 모다 참석하며 얼굴 부딪히기를 시도하던 예인을 알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예인은 촬영장의 한 쪽 구석에 서서 노려보듯 이감독과 이감독의 시선을 쫒았다.

지금도 이감독은 시선을 멀리 두고 있다. 곁을 더우기나 뒤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 감독의 시선.

그는 왜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까.

이 감독 외에 누구나, 누구나 ! 알고 있었다.

예인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가 있는 모든 곳에 예인은 다가갔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예인을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가 말 거는 사람들에게 예인도 인사를 했고 관계를 가졌으며 지속적인 우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예인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다.

피아노과의 정기연주회에 불참하기 시작했고 학점을 이수하지 못 해 5년째 대학에 머물렀다. 학적부상으로만. 그는 항상 캠퍼스를 빠져나가 점심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언젠가부터 인근의 거리에서도 술을 마시거나 까페를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그를 잃어버리고 예인은 학교를 떠났다. 의상학과에서 더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대학로의 연극단을 쫓아다녔던 오년 동안 예인은 그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이미 드라마의 엔딩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예인은 연상시킬 수 없었다.

" 말도 안돼 !! "

 극단의 스탭이었던 옛날 대학동기한테서 정말 몰랐냐고 재차 질문받으면서도 예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 어떻게 이 진 선배가 드라마 연출을 한단 말야? 전혀 관계없쟎아. 선배는 피아니스트라고 ! "

" 졸업연주회 간신히 통과했쟎아. 난 그 선배, 피아노 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2학년 땐가 이후로는. "

동기는 잠깐 예인과 함께 들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의 피아노 & 락밴드의 공연을 떠 올렸다. 중간 이후 난장판이 되기 전까지 울려퍼졌던 선배의 피아노 독주. 거기서 뻑 간 이후 몇 년을 쫓아다녔던가.

" 선배가 감독이 되나니! "

예인은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당연히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정확히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자신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 예인은 충무로에서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배우생활을 때려쳤지만 별로 미련 없었다. 원래 그렇게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정할 수 있었다. 괜찮다. 중요한 건 감독을 영입할 수 있는 기획사를 차렸다는 것이다. 물론 예인의 아버지가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에 크게 힘입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다 좋은 일이었다. 아들들을 믿을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후계자 인정을 받은 것도, 비위 맞추기 힘든 아버지와 함께 집안을 다 내어맡기는 것에 큰 올케는 좀 서운해했지만 워낙 통크게 경제적 지원을 해 주는 시누이에게 어깃장을 놓을 수는 없는 일. 예인은 영화관을 소유한 프로덕션의 오너가 되었다.

왜? 당연히 드라마국에서 월급감독으로 찌들리고 있는 선배를 스카웃해 오기 위해서였다.

한참 걸렸다. 방송국에 진출해 있던 대학로 시절의 선배들에게 욕도 어지간히 먹었다. 뭐 어떠랴. 예인은 중요하지 않은 타인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엔 쉽게 대범해졌다. 처음 방송국 미팅룸에서 이감독을 만났을 때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다. 드라마 외주 제작을 협의하려던 국장도, 대외협상팀의 부장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 했다. 기획부터 광고수주에 이르는 드라마제작의 전과정을 혼자 프리젠테이션 하는 예인을 이감독은 흥미롭다는 듯 주시했다. 그 후 작가와 공동작업을 주선하고 캐스팅, 오디션, 셋트제작, 협찬물 계약 등 모든 장면에서 예인은 적극 개입했고 수시로 감독과 의견을 조율했다. 방송국 드라마에선 최고의 자율성과 재량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얘기해요. "

예인은 이감독과의 모든 대화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 네. "

이감독이 그리고 나서 한마디만 더 하면 스카운제의를 할 참이었다.  방송국에선 한계가 있으니 충무로로 나오라고. 곧 그렇게 될 판이었다. 예인은 낙관하고 있었다. 촬영을 시작한 이번 드라마의 시청률이 어떻게 나오던 그걸 빌미로 이 감독을 빼낼 것이었다. 잘 나오면 후한 계약금을 걸고 보다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권유하면서. 못 나오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매니악의 작품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큰 소리치면서.

" 같은 대학이었구나. "

 하면서 이감독이 말을 낮췄을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터 바래왔던 관계인가. 선후배 사이.

그런데 이게 뭐람 !

예인은 소리질렀다. 촬영 중인 셋트와 배우들과 모형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는 스텝들, 그 모두를 한 눈에 넣고 있는 이 감독의 시선을 쳐다보면서 조용히 속으로, 이를 악 물었다. 여전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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