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연애소설

나는 과거를 쓰고 있다.

불러내어 오늘을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쓰고 싶다.

그건 아마도.

묻지 못 한 한 마디를 가슴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왜  내 사랑은 실패했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랑의 서사를 재현하고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 각각의 진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사실, 그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한번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에겐 자신이 목도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알아낸 진리를 실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정 같은 거 말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얼굴로는 이미 결별을 선언하는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자기는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녀를 버린 자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누구를? 두고 갔는가. 떠난 것은 항상 그녀 쪽이었고 우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현성도 말했다. 나를 비난한다 한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 못 한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교직사회의 퇴임자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생들이라고 달랐겠는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던 동시대의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에서 정직했다. 그래서 비난한다 해도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도 그녀의 주변에서 대작을 해 주고 있다. 외로워진 그녀는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표정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비난이라는 것도 뭔가 대안을 갖고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판이란 힘이 없는 것이 - 그녀가 전투적?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현장을 버티고 있을 때에도 - 그녀에게 동조한다는 것은 곧, 그녀를 껴안고 고난의 연대를 건너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공감을 구하면서 의존하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자들은 노심초사한다. 그녀가 이제 펜을 놓겠다 하면 그 때에는 현실을 살고있는 자신의 도우너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때, 왜 나를 두고 갔어? "

" 누가 두고 가?"

" 나를 떠났쟎아, 공장거리에 혼자 두고."

" 누구나 그들 각자의 생이 있는 거야. 너는 너의 생을, 나는 나의 생을."

" 너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

" 그래,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지. "

" 너는 레즈비언도 아니지. "

" 맞아, 나는 그렇게 위험한 소수가 될 생각은 없어. "

"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무엇이지? "

" 친구쟎아, 바보, 그때 그런 것처럼 지금도. 우린 향후 오십년을 함께 지내기로 했쟎아. "

 

그녀는 뭐 어차피. 하면서 정리했다.

 

- 향후 오십년은 맑시스트가 탁상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을 꺼야.

- 레즈라는 것도 뭐, 성관계를 안 하면 친구나 다름 없지. 어차피 그는 프리지디티(frigidity)이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